중아함경 : 12연기법은 매우 기이하고 깊으며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루수(拘樓瘦)를 유행하실 적에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에 머무셨다.
그 때 존자 아난은 한가히 홀로 지내면서 연좌(宴座)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 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연기(緣起)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이에 존자 아난은 저녁때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연좌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 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이 연기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느니라.
아난아, 이 연기를 참답게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중생들은 베틀이 서로 얽매는 것 같고 넝쿨풀이 어지러운 것 같으며,
바쁘고 부산하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며,
왔다 갔다 하면서 생사(生死)를 뛰어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라.
아난아, 그러므로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 또한 매우 어려운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 연(緣)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어떤 연(緣)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생(生)에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생에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생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유(有)에 인연한다'라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유에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유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유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취(取)에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취에 연이 있는가'고 묻거든,
마땅히 '취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취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애(愛)에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이것을 '애(愛)를 인연하여 취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노(老) 사(死)가 있으며, 노 사를 인연하여 걱정[愁]과 슬픔[]이 있고, 울음[啼哭] 과 걱정[憂] 괴로움[苦] 번민[懊惱]은 다 노 사를 인연하여 있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苦陰)만 생기느니라.
아난아, 생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으면 이것을 '생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생을 인연하여 노 사가 있다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생이 없다면, 고기[魚]면 고기 종자[魚種], 새[鳥]면 새 종자[鳥種], 모기[蚊]면 모기 종자[蚊種], 용(龍)이면 용 종자[龍種], 신(神)이면 신 종자[神種], 귀신[鬼]이면 귀신 종자[鬼種], 하늘[天]이면 하늘 종자[天種], 사람[人]이면 사람 종자[人種]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곳[處]을 따라 생이 없을 것이다.
제각기 생이 없다면, 가령 생을 떠나더라도 노 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노 사의 원인[因], 노 사의 성취[習], 노 사의 근본[本], 노 사의 인연[緣]은 곧 이 생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생을 인연하여 곧 노 사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유(有)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면 이것을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유가 없으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곳[處]을 따라 유가 없을 것이다. 제각기 유가 없다면, 가령 유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생의 원인, 생의 성취, 생의 근본, 생의 인연은 곧 이 유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유를 인연하여 곧 생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면 이것을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취가 없어 제각기 수가 없다면,
가령 취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다시 유가 있거나 유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유의 원인, 유의 성취, 유의 근본, 유의 인연은 곧 이 취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취를 인연하여 곧 유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애(愛)를 인연하여 취가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다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다시 취가 있거나 취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취의 원인, 취의 성취, 취의 근본, 취의 인연은 곧 이 애(愛)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여 곧 취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구함[求]이 있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利]이 있으며,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分]이 있고,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染欲]이 있으며,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著]이 있고,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며,
아낌을 인연하여 집[家]이 있고,
집을 인연하여 지킴[守]이 있다고 말한다.
아난아,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으며,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苦陰)만 생기느니라.
아난아, 만일 지킴이 없어 제각기 지킴이 없다면, 가령 지킴을 떠나더라도 마땅히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과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는 원인[因], 성취[習], 근본[本], 인연[緣]은
곧 이 지킴[守]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만 생기느니라.
아난아, 집[家]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으면 이것을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집이 없어 제각기 집이 없다면,
가령 집을 떠나더라도 마땅히 지킴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지킴의 원인, 지킴의 성취, 지킴의 근본, 지킴의 인연은 곧 이 집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집을 인연하여 곧 지킴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으면 이것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아낌이 없어 제각기 아낌이 없다면,
가령 아낌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집[家]의 원인, 집의 성취, 집의 근본, 집의 인연은 곧 이 아낌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아낌을 인연하여 곧 집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집착[著]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면
이것을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고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집착이 없어 제각기 집착이 없다면,
가령 집착을 떠나더라도 아낌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아낌의 원인, 아낌의 성취, 아낌의 근본, 아낌의 인연은 곧 이 집착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집착을 인연하여 곧 아낌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욕심[欲]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욕심이 없어 제각기 욕심이 없다면,
가령 욕심을 떠나더라도 집착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집착의 원인, 집착의 성취, 집착의 근본, 집착의 인연은 곧 이 욕심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분별[分]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면
이것을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느니라.
아난아, 만일 분별이 없어 제각기 분별이 없다면,
가령 분별을 떠나더라도 욕심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욕심의 원인, 욕심의 성취, 욕심의 근본, 욕심의 인연은 곧 이 분별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분별을 인연하여 곧 욕심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分]이 있으면
이것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이익이 없어 제각기 이익이 없다면,
가령 이익을 떠나더라도 분별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분별의 원인, 분별의 성취, 분별의 근본, 분별의 인연은 곧 이 이익[利]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익을 인연하여 곧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구함[求]을 인연하여 이익[利]이 있으면
이것을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구함이 없어 제각기 구함이 없다면,
가령 구함을 떠나더라도 이익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이익의 원인, 이익의 성취, 이익의 근본, 이익의 인연은 곧 이 구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구함을 인연하여 곧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애(愛)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고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다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구함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구함의 원인, 구함의 성취, 구함의 근본, 구함의 인연은 곧 이 애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애를 인연하여 곧 구함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욕애(欲愛)와 유애(有愛) 이 두 법은 수를 인(因)하고 각을 연(緣)하여 오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수에 연(緣)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수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수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갱락(更樂:촉)을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갱락을 인연하여 수가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눈[眼]의 갱락이 없어 제각기 눈의 갱락이 없다면,
가령 눈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눈의 갱락을 인연하여 생기는 낙각(樂覺) 고각(苦覺)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귀 코 혀 몸도 또한 그러하며, 만일 뜻의 갱락이 없어 제각기 뜻[意]의 갱락이 없다면, 가령 뜻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뜻의 갱락을 인연하여 생기는 낙각 고각 불고불락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수의 원인, 수의 성취, 수의 근본, 수의 인연은 곧 이 갱락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갱락을 인연하여 곧 수가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도 연(緣)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갱락에도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名色)을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갱락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명신(名身)이 있나니,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상대가 있는 갱락[有對更樂]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색신(色身)이 있나니,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증어갱락(增語更樂)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가령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을 떠나더라도
마땅히 갱락이 있어 갱락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갱락의 원인, 갱락의 성취, 갱락의 근본, 갱락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여 곧 갱락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도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에도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식(識)을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 몸을 이루는 명색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식이 태에 들어갔다가 곧 나온다면 명색이 정(精)을 만나겠는가?"
"만나지 못합니다."
"아난아, 만일 어린 소년과 소녀의 식(識)이 처음부터 끊어지고 부서져서 없다면 명색이 더 자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명색의 원인, 명색의 성취, 명색의 근본, 명색의 인연은 곧 이 식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식을 인연하여 곧 명색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도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식에도 또한 연이 있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을 인연한다'고 이렇게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는 것이니라.
아난아, 만일 식이 명색을 얻지 못하고, 만일 식이 명색에 서지도[立]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식은 과연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괴로움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식의 원인, 식의 성취, 식의 근본, 식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여 곧 식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이것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또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고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게 되니,
그것은 곧 '식과 명색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神)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해설하여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 보고,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으면서 신(神)은 능히 깨닫고 또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3각(覺) 곧 낙각(樂覺) 고각(苦覺)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는데,
너는 이 3각에서 어느 각을 신이라고 보는가?'라고 물어야 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다시 그에게 말해야 한다.
만일 낙각을 깨닫는다면
그 때 그는 2각 곧 고각 불고불락각이 멸하고 오직 낙각만을 깨닫을 것이다.
낙각은 무상(無常)의 법이요 괴로움[苦]의 법이며 멸하는[滅] 법이니,
만일 낙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만일 다시 1각 곧 고각이 있으면,
그는 그 때에는 2각 곧 낙각 불고불락각이 멸하고 다만 고각만을 깨닫는다.
고각은 무상의 법이요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니,
만일 고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만일 다시 1각 곧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으면,
그 때 그는 2각 곧 낙각 고각이 멸하고 다만 불고불락각만을 깨닫는다.
불고불락각은 무상의 법이요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니,
만일 불고불락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도 마땅히 다시 각을 신이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못할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으면서, 신(神)은 능히 깨닫고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각이 없다면 깨달을 수가 없어 응당 이것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아난아, 그가 다시 이렇게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각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신이 각을 떠나면 응당 신은 청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하는니라.
아난아, 그가 다시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응당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해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지 않은 뒤에는 곧 이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는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피로해하지 않으며, 피로해하지 않은 뒤에는 곧 열반에 든다. 그래서 '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아난아, 이것이 거듭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곧 받아들임[所受]이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면, 그는 다시 여래는 마침이 있다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없다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으면서 마침이 없다라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는 것도 마침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옵건대 그것을 해설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소색(少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무량색(無量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少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소무색(少無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만일 소색(少色)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만일 무량색(無量色)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소무색(少無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만일 소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요, 만일 무량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느니라.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하느니라.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그것을 해설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이 분부를 받아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느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만일 소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만일 무량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만일 소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요, 만일 무량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난아, 7식주(識住)와 2처(處)가 있다. 어떤 것을 7식주라 하는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有色衆生]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欲界天)이다. 이것을 제1식주(識住)라 한다.
다시 또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사는 범천(梵天)을 말한다. 이것을 제2식주라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晃昱天)이다. 이것을 제3식주라 한다. 또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遍淨天)이다. 이것을 제4식주라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어, 무량공처(無量空處)인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이것을 제5식주라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나 무량식처(無量識處)인 이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이것을 제6식주라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량식처를 벗어나 무소유처(無所有處)인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이것을 제7식주라 한다.
아난아, 어떤 것을 2처(處)라 하는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생각[想]도 없고 감각[覺]도 없으니, 무상천(無想天)이다. 이것을 제1처라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인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곧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을 제2처라 하느니라.
아난아, 제1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識住)를 알고, 식주의 성취[習]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2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사는 범천(梵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3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晃昱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4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遍淨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5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색(色)이란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으면 무량공처(無量空處)인데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6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나면 무량식처(無量識處)인데, 이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7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량식처(無量識處)를 벗어나면 무소유처(無所有處)인데,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1처라는 것은 색이 있는 중생으로서 생각[想]도 없고 감각[覺]도 없는 것이니, 곧 무상천(無想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처(處)를 알고, 그 처의 성취를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2처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벗어나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인데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곳을 알고, 그 곳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저 7식주(識住)와 2처(處)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으면, 그를 비구 아라하(阿羅訶)라 하고 혜해탈(慧解脫)이라 부르느니라.
아난아, 8해탈(解脫)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색(色)을 색(色)으로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1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안으로 색상(色想)이 없이 밖으로 색을 관찰하나니, 이것을 제2해탈이라 한다. 다시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3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색상(色想)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는 무량공처,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4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난 무량식처(無量識處), 이 무량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5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무량식처를 벗어난 무소유처(無所有處),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6해탈이라 한다. 다시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것을 제7해탈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는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벗어나 상(想)과 지(知)가 멸한 해탈(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고, 지혜로 모든 누진지(漏盡知)를 관하여 아나니, 이것을 제8해탈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저 7식주와 2처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증득하고, 또 이 8해탈을 순역(順逆)으로 해서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또한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번뇌를 다한다면 그를 비구 아라하라 하고 구해탈(俱解脫)이라 부르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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