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탐에서 벗어난 해탈, 무명에서 벗어난 해탈
심해탈과 혜해탈
지난 시간에는 원을 통해 무아가 실현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서 해탈하면 마음에 원이 충만하여 무아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 원으로 충만한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에는 이렇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는 심해탈과 무명에서 벗어나는 혜해탈(慧解脫)이 있습니다. 오늘은 심해탈과 혜해탈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십이입처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을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나의 존재로 생각하고,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을 외부의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이입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연기하고 있는 법입니다. 눈은 보는 존재가 아니고, 빛깔은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내입처를 나의 존재로 생각하고, 육외입처를 외부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라는 진리에 의하면 작자(作者)는 없으나 업보(業報)는 있습니다. 즉 보는 눈, 듣는 귀, 냄새 맡는 코, 맛보는 혀, 감촉을 느끼는 몸, 생각하는 마음은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삶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는 이러한 삶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보는 삶 속에는 보는 눈과 보이는 빛깔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무분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는 존재와 보이는 존재를 분별합니다. 이것이 식(識)입니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식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이 생기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의식들이 모두 존재화됩니다 그것이 오온입니다. 이러한 오온도 그 본질은 우리의 삶입니다. 오온도 우리의 삶의 구조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삶이 존재화된 것이 물질적 존재입니다. 오온의 색(色)은 이러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존재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고락의 감정을 느끼고, 사유하게 되고, 의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살의 그림자가 모여서 존재화된 것이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 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존재가 조작되는데 존재를 조작하는 것이 행(行)입니다. 삶을 통해 나타난 의식은 욕탐에 묶인 마음에서 생긴 의도에 의해 존재화됩니다. 이렇게 존재화된 것을 인식하는 당체가 오온의 식입니다. 그러니까 오온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이 존재화된 것입니다.
해탈은 이렇게 존재화된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심해탈과 혜해탈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해탈이 있습니다. 먼저 마음에서 욕탐을 제거하여 존재화를 그쳐야 합니다. 즉 유위를 조작하는 행을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해탈입니다. 행을 멸하여 유위가 조작하지 않으면 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즉 무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오분법신 가운데 계 정 혜 삼학은 수행하여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구차제정은 행을 멸하여 이러한 심해탈과 혜해탈을 얻는 수행입니다. <잡아함 474경>에 의하면 구차제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적멸한다고 합니다.
초선(初禪)에서는 언어가 적멸한다.
제이선에서는 각관(覺觀, 사유와 성찰)이 적멸한다.
제삼선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한다.
제사선에서는 출입식(出入息)이 적멸한다.
공처(空處)에서는 색상(色想)이 적멸한다.
식처에서는 공처상(空處想)이 적멸한다.
무소유처에서는 식처상(識處想)이 적멸한다.
비유상비무상처에서는 무소유처상(無所有處想)이 적멸한다.
상수멸(想受, 滅盡定)에서는 상수(想受)가 적멸한다.
구차제정은 행을 차례로 멸하는 과정입니다. 행에는 신, 구, 의 삼행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 구, 의 삼행을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행은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잡아함 568경>에서는 이러한 삼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각유관(有覺有觀, 사유와 성찰)을 구행(口行)이라고 부른다.
출식입식(出息入息)을 신행(身行)이라고 부른다.
상(想)과 수(受)를 의행(意行)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이와 같이 삼행을 설명하고서 행은 구행, 신행, 의행의 순서로 적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각관(覺觀, 사유와 성찰)이 멸하고, 다음에 출입식(出入息)이 멸하며, 마지막으로 상(想)과 수(受)가 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차제정과 비교해 보면 초선에서는 언어가 적멸하고, 제이선에서는 각관이 적멸하므로 초선과 제이선에서 구행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삼선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하고 제사선에서는 출입식이 적멸하므로 제사선에서 신행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수멸(滅盡定)에서 상수(想受)가 적멸하므로 의행은 멸진정에서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관(사유와 성찰)을 왜 구행이라고 부르며, 구행이 맨 먼저 멸하는 것일까요? 구행이란 언어를 만드는 일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욕계는 언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욕구를 존재화시켜 이름을 붙힙니다. 초선을 욕탐을 떠나 욕계에서 해탈한 경지이기 때문에 대상을 언어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선에서는 언어가 멸합니다. 그러나 언어를 조작하는 작용, 즉 구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조작하는 작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까요?
언어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구행은 개념을 구성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면 그 사물의 모양과 그 사물에서 느낀 감정이 우리의 마음에 생깁니다. 이것을 표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을 본다면 책상의 모양이 우리의 마음에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책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길 것입니다. 마음에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기면 이 표상들을 먼저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면 책상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공통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모습을 버립니다. 이것을 추상(抽象)이라고 합니다.
책상은 각기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릅니다. 이렇게 표상들을 비교하여 다른 점은 모두 추상하면 같은 점만 남을 것입니다. 다리가 달려 있고 상판이 평평하여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점이 동일하다면 이렇게 동일한 점만을 모으게 되는데, 이것을 총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생긴 많은 표상을 이렇게 비교하고 추상하여 총괄하면 하나의 표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이렇게 총괄된 것에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힙니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이것이 언어입니다.
구행은 이렇게 언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각관(覺觀)이란 사물을 지각하여 생긴 표상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념을 형성하는 구행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하여 사유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이선에서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되므로 각관이 사라져 구행이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입식(出入息)이란 호흡을 의미합니다. 왜 호흡을 신행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몸이 숨을 쉬고 있을 때 나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그대로 있어도 호흡이 멈추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이 유지되는 동안을 자신의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호흡이 우리의 몸을 존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입식을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제사선의 경지는 마음이 청정한 무관심으로 통일되어 몸을 통해 생기는 모든 감정에서 벗어난 경지입니다. 따라서 제사선에서 신행이 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想)과 수(受)는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유하고 느낄 때 나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이 존재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과 수를 의행(意行)이라고 합니다. 멸진정을 모든 존재가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허망한 생각에서 떠난 경지입니다. 따라서 멸진정을 성취하면 의행이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입니다. 이러한 유위는 구차제정의 수행을 통해 신, 구, 의 삼행을 멸함으로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유위가 조작되는 순서를 본다면 그 출발점은 의행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하는 것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느끼고 사유하는 것이 의행입니다. 느끼고 사유함으로써 느끼고 사유하는 나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행에 의해서 마음이라는 유위가 조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존재화되면 마음이 깃들어 있는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몸을 통해 지각되는 것에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외부의 존재로 인식합니다. 유위가 조작되는 순서는 의행이 맨 먼저 생기고, 다음에 신행이 생기며 마지막으로 구행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형성된 유위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미 형성된 유위를 멸하는 과정은 생기는 과정과는 반대의 순서가 됩니다. 그래서 <잡아함 568경>에서는 멸하는 순서는 구행, 신행, 의행의 순서이지만 생기는 순서는 의행, 신행, 구행의 순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대상을 존재로 생각하는 망념은 먼저 없애면, 대상을 상대하여 존재하고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한 망념이 사라지고, 그 결과 이와 같은 존재를 허구적으로 조작하는 마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차제정을 통해 삼행이 멸하는 과정에서 구행과 신행이 멸하여 얻게 되는 것이 심해탈이고, 의행이 멸하여 얻게 되는 해탈이 혜해탈입니다. 구행은 외부의 존재에 대한 욕탐이 없을 때 멸하고 신행은 자기 존재에 대한 욕탐이 없을 때 멸합니다. 이렇게 내외의 존재에 대한 욕탐이 멸할 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탐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구차제정 가운데 색계 사선(色界 四禪)입니다.
색계 사선의 수행을 통해 욕탐은 사라져도 여전히 존재에 대한 망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게 되는 것이 사무색정입니다. 먼저 물질적 존재에 대한 망념은 공처를 성취함으로써 사라집니다. 공간의 존재에 대한 망념은 무소유처의 성취를 통해서 사라지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망념은 비유상비무상처의 성취를 통해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비유상비무상처에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어떤 존재가 있다는 생각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다는 중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상비무상처는 무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은 멸진정을 통해 연기의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사라집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열반은 이렇게 혜해탈을 성취함으로써 얻게 됩니다. 이러한 열반의 세계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의 세계와는 별개인 채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세계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 이변을 떠난 진실된 중도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계에서 우리는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현존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그치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 성취한 삶입니다.
심해탈과 혜해탈
지난 시간에는 원을 통해 무아가 실현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서 해탈하면 마음에 원이 충만하여 무아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 원으로 충만한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에는 이렇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는 심해탈과 무명에서 벗어나는 혜해탈(慧解脫)이 있습니다. 오늘은 심해탈과 혜해탈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십이입처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을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나의 존재로 생각하고,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을 외부의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이입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연기하고 있는 법입니다. 눈은 보는 존재가 아니고, 빛깔은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내입처를 나의 존재로 생각하고, 육외입처를 외부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라는 진리에 의하면 작자(作者)는 없으나 업보(業報)는 있습니다. 즉 보는 눈, 듣는 귀, 냄새 맡는 코, 맛보는 혀, 감촉을 느끼는 몸, 생각하는 마음은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삶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는 이러한 삶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보는 삶 속에는 보는 눈과 보이는 빛깔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무분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는 존재와 보이는 존재를 분별합니다. 이것이 식(識)입니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식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이 생기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의식들이 모두 존재화됩니다 그것이 오온입니다. 이러한 오온도 그 본질은 우리의 삶입니다. 오온도 우리의 삶의 구조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은 삶이 존재화된 것이 물질적 존재입니다. 오온의 색(色)은 이러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존재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고락의 감정을 느끼고, 사유하게 되고, 의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살의 그림자가 모여서 존재화된 것이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 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존재가 조작되는데 존재를 조작하는 것이 행(行)입니다. 삶을 통해 나타난 의식은 욕탐에 묶인 마음에서 생긴 의도에 의해 존재화됩니다. 이렇게 존재화된 것을 인식하는 당체가 오온의 식입니다. 그러니까 오온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이 존재화된 것입니다.
해탈은 이렇게 존재화된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심해탈과 혜해탈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해탈이 있습니다. 먼저 마음에서 욕탐을 제거하여 존재화를 그쳐야 합니다. 즉 유위를 조작하는 행을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해탈입니다. 행을 멸하여 유위가 조작하지 않으면 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즉 무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오분법신 가운데 계 정 혜 삼학은 수행하여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구차제정은 행을 멸하여 이러한 심해탈과 혜해탈을 얻는 수행입니다. <잡아함 474경>에 의하면 구차제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적멸한다고 합니다.
초선(初禪)에서는 언어가 적멸한다.
제이선에서는 각관(覺觀, 사유와 성찰)이 적멸한다.
제삼선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한다.
제사선에서는 출입식(出入息)이 적멸한다.
공처(空處)에서는 색상(色想)이 적멸한다.
식처에서는 공처상(空處想)이 적멸한다.
무소유처에서는 식처상(識處想)이 적멸한다.
비유상비무상처에서는 무소유처상(無所有處想)이 적멸한다.
상수멸(想受, 滅盡定)에서는 상수(想受)가 적멸한다.
구차제정은 행을 차례로 멸하는 과정입니다. 행에는 신, 구, 의 삼행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 구, 의 삼행을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행은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有爲)를 조작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잡아함 568경>에서는 이러한 삼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각유관(有覺有觀, 사유와 성찰)을 구행(口行)이라고 부른다.
출식입식(出息入息)을 신행(身行)이라고 부른다.
상(想)과 수(受)를 의행(意行)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이와 같이 삼행을 설명하고서 행은 구행, 신행, 의행의 순서로 적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각관(覺觀, 사유와 성찰)이 멸하고, 다음에 출입식(出入息)이 멸하며, 마지막으로 상(想)과 수(受)가 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차제정과 비교해 보면 초선에서는 언어가 적멸하고, 제이선에서는 각관이 적멸하므로 초선과 제이선에서 구행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삼선에서는 희심(喜心)이 적멸하고 제사선에서는 출입식이 적멸하므로 제사선에서 신행이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수멸(滅盡定)에서 상수(想受)가 적멸하므로 의행은 멸진정에서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관(사유와 성찰)을 왜 구행이라고 부르며, 구행이 맨 먼저 멸하는 것일까요? 구행이란 언어를 만드는 일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욕계는 언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욕구를 존재화시켜 이름을 붙힙니다. 초선을 욕탐을 떠나 욕계에서 해탈한 경지이기 때문에 대상을 언어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선에서는 언어가 멸합니다. 그러나 언어를 조작하는 작용, 즉 구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조작하는 작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까요?
언어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구행은 개념을 구성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면 그 사물의 모양과 그 사물에서 느낀 감정이 우리의 마음에 생깁니다. 이것을 표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을 본다면 책상의 모양이 우리의 마음에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책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길 것입니다. 마음에 여러 개의 표상이 생기면 이 표상들을 먼저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면 책상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공통된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모습을 버립니다. 이것을 추상(抽象)이라고 합니다.
책상은 각기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릅니다. 이렇게 표상들을 비교하여 다른 점은 모두 추상하면 같은 점만 남을 것입니다. 다리가 달려 있고 상판이 평평하여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점이 동일하다면 이렇게 동일한 점만을 모으게 되는데, 이것을 총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생긴 많은 표상을 이렇게 비교하고 추상하여 총괄하면 하나의 표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이렇게 총괄된 것에 책상이라는 이름을 붙힙니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이것이 언어입니다.
구행은 이렇게 언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각관(覺觀)이란 사물을 지각하여 생긴 표상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념을 형성하는 구행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하여 사유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이선에서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가 외부의 사물을 지각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되므로 각관이 사라져 구행이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입식(出入息)이란 호흡을 의미합니다. 왜 호흡을 신행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몸이 숨을 쉬고 있을 때 나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그대로 있어도 호흡이 멈추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이 유지되는 동안을 자신의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호흡이 우리의 몸을 존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입식을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제사선의 경지는 마음이 청정한 무관심으로 통일되어 몸을 통해 생기는 모든 감정에서 벗어난 경지입니다. 따라서 제사선에서 신행이 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想)과 수(受)는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유하고 느낄 때 나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이 존재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과 수를 의행(意行)이라고 합니다. 멸진정을 모든 존재가 사유 작용과 감수 작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허망한 생각에서 떠난 경지입니다. 따라서 멸진정을 성취하면 의행이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입니다. 이러한 유위는 구차제정의 수행을 통해 신, 구, 의 삼행을 멸함으로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유위가 조작되는 순서를 본다면 그 출발점은 의행입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하는 것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느끼고 사유하는 것이 의행입니다. 느끼고 사유함으로써 느끼고 사유하는 나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행에 의해서 마음이라는 유위가 조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존재화되면 마음이 깃들어 있는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몸을 통해 지각되는 것에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외부의 존재로 인식합니다. 유위가 조작되는 순서는 의행이 맨 먼저 생기고, 다음에 신행이 생기며 마지막으로 구행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형성된 유위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미 형성된 유위를 멸하는 과정은 생기는 과정과는 반대의 순서가 됩니다. 그래서 <잡아함 568경>에서는 멸하는 순서는 구행, 신행, 의행의 순서이지만 생기는 순서는 의행, 신행, 구행의 순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대상을 존재로 생각하는 망념은 먼저 없애면, 대상을 상대하여 존재하고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한 망념이 사라지고, 그 결과 이와 같은 존재를 허구적으로 조작하는 마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차제정을 통해 삼행이 멸하는 과정에서 구행과 신행이 멸하여 얻게 되는 것이 심해탈이고, 의행이 멸하여 얻게 되는 해탈이 혜해탈입니다. 구행은 외부의 존재에 대한 욕탐이 없을 때 멸하고 신행은 자기 존재에 대한 욕탐이 없을 때 멸합니다. 이렇게 내외의 존재에 대한 욕탐이 멸할 때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됩니다. 이렇게 욕탐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구차제정 가운데 색계 사선(色界 四禪)입니다.
색계 사선의 수행을 통해 욕탐은 사라져도 여전히 존재에 대한 망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게 되는 것이 사무색정입니다. 먼저 물질적 존재에 대한 망념은 공처를 성취함으로써 사라집니다. 공간의 존재에 대한 망념은 무소유처의 성취를 통해서 사라지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망념은 비유상비무상처의 성취를 통해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비유상비무상처에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어떤 존재가 있다는 생각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다는 중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상비무상처는 무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은 멸진정을 통해 연기의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사라집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열반은 이렇게 혜해탈을 성취함으로써 얻게 됩니다. 이러한 열반의 세계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의 세계와는 별개인 채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세계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 이변을 떠난 진실된 중도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계에서 우리는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현존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그치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 성취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