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혜해탈과 심해탈

수선님 2018. 6. 3. 11:56

앞의 장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법칙을 바로 보게 되면 법칙에 대해서 수행을 하게 되고 수행 끝에 해탈이 온다고 했습니다.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이 있습니다.

해탈이란 무엇이냐 하면 오온이나 12연기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직관하는 것,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오온이나 12연기의 지분들이 있습니다. 오온의 지분은 색수상행식이며 12연기의 지분은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입니다.

이러한 것들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혜해탈입니다.

예를 들어 육근을 살펴 볼까요. 육근은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되어 있다고 했을 때에 눈이든 뜻이든 그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란 영원한 것을 실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실체가 없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눈으로부터 뜻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꿰뚫어 보았을 때 그것을 혜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혜해탈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육근과 오온과 12연기의 지분들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지적으로 이해만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른 삼매를 통해서 마음의 번뇌를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지금 눈으로부터 뜻에 이르는 육근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등에 대해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나’라는 집착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인 판단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습(習)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그 집착심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육근은 ‘나’가 아니라고 지적으로 같이 이해한다고 해도 나의 마음은 곧 육근에 대해서 ‘나’라고 불러버리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육근이 ‘나’가 아니라고 지적으로 해탈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그것에 대한 집착심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직관(혜해탈)했다 하면 그 다음에는 그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집착심을 없애야 된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집착심을 없애느냐 하면 바로 삼매, 즉 바른 선정(禪定)을 통해서 없앤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바른 선정을 통해서 집착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면 그 때의 상태가 심해탈(心解脫)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들어가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나’가 아니라고 본 다음에 그 집착심을 없앨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또한 어떻게 바른 삼매가 내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집착심을 없애는 데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삼매란 무엇이며 바른 삼매란 또 무엇인가 하는 것을 따져봐야 됩니다.

‘나’에 대한 집착심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없애려면 첫째 참나〔眞我〕를 전제해야 합니다.

육근을 무아(無我)라고 부처님께서 주장하시고 육근이 무아임을 꿰뚫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에 그 육근에 대한 아집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진짜 나는 이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 아니냐. 따라서 거기서 떠나라’는 겁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난다라는 이가 있습니다. 난다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는데 출가를 해서도 늘 부인을 잊지 못해 애를 태웠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난다를 데리고 원숭이들이 사는 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석천으로 가서 천녀들을 보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 “난다야, 네가 세속에 두고 온 부인과 이 천녀들의 얼굴을 무엇에 비교할 만하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난다가 “예, 사람과 원숭이에 비교할 만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 이후로 애착을 여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뭔가를 버려라’라고 했을 때, 그것보다 더 나은 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육근에 대한 아집을 버리라고 했을 때, 육근보다 더 나은 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진아(眞我)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육근에 대치될 만한 것이 무엇이 될까요. 진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어쨌든 그러한 진아가 제시되어야 그 진아를 보고 바른 삼매에 들 수 있는 겁니다.

삼매란 집중이에요.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해서 집중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바로 집중상태에 들어 지금 내가 ‘나’라고 열심히 집착하려고 했던 눈, 귀, 코, 혀, 몸, 뜻에 대한 애착을 벗을 수가 있게 하는 그 진아를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진아를 우리는 법칙이라는 말로 표현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법칙이라는 것은 단순히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무엇인가였습니다. 그것이 진짜 ‘나’이니까 그것을 집중해서 가짜 ‘나’에 현혹되어서 오랫동안 익혀왔던 아집의 버릇을 제거하게 됩니다.

삼매에 드는데 왜 집중의 대상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그것이 우리 마음의 특징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늘 무엇인가와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 제가 늘 해온 이야기입니다.

마음은 마음 혼자 있지 못합니다. 독존하지 못합니다. 단적인 표현으로 무심(無心)하다는 말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가의 테크닉이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큰일나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어요.

마음은 화합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와 화합하고 있어야 됩니다.

가짜 나와 화합하고 있든 진짜 나와 화합하고 있든 무엇인가와 화합해야 된다는 겁니다.

보통의 우리 상태는 가짜 나와 늘 화합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가짜 나를 ‘나’라고 집착하는 버릇이 마음에 계속 잠재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진짜 나와 화합하라는 겁니다. 진짜 나와 화합하는 것이 바로 바른 삼매에 드는 겁니다.

진짜 나를 대상으로 집중하는 것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러한 진짜 나를 대상으로 집중하는 상태가 깊어지고, 깊어지면 결국에는 진짜 나와 마음이 완전하게 하나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짜 나에 대한 번뇌는 사라져 버렸다는 말과 통하게 됩니다. 그 상태가 되었을 때에 그것을 심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진짜 ‘나’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육근에 대한 집착을 대치할 만한, 그래서 바른 삼매를 통해서 집중해 볼 만한 그러한 진아로서의 대상을 제시해야 하겠죠.

그래서 초기불교 시대나 현대에 와서도 참선, 명상을 하는 곳에서는

이와같이 수행하는데 그 내용은 처음에 말했듯이 우리는 인연화합의 법칙을 바탕으로하여 18계의 구체적인 실상의 모습에 접근했습니다. 18계의 모습이 말하자면 일종의 진아의 모습입니다.

이것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거예요. 18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위 아래로 육식과 육근, 육경이 존재하는 모습이었죠. 이것들이 위 아래로 잠복현현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참된 모습이구나 하면서 집중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집중하는 것이 원시불교 및 현대의 참선에서 말하는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집중상태를 계속이어지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랬을 때 심해탈의 해탈이 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부처님께서 언제 하셨을까요. 사념처를 설하시면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리합시다. 18계가 바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얘기되어질 수 있는 진아(眞我)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른 삼매는 일단 바른 대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대상입니까? 육근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는 치명적인 결함은 18계라는 구조 속에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따라서 18계라는 구조가 바른 대상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이것을 집중하고 대상으로 함으로써 육근을 나라고 집착했던 집착심마저 여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다시 말해 인연화합의 법칙이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던 18계라는 구조에 바른 집중을 함으로써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고 정리할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아집이나 집착이 눈, 귀, 코, 혀, 몸, 뜻에 대한 집착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만 갖고 ‘나’라고 집착하지 않아요. 인간의 아집을 좀 더 분석해 들어가면 보다 깊은 것에 대하여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러요.

기본적으로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색수상행식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어요. 육근이라는 것이 겉에 드러난 표층이라고 한다면 색수상행식은 육근에 대한 심층의 세계라고 부를 수가 있어요.

색수상행식은 온(蘊)이라고 부르지요. 온은 뿌리라는 말입니다. 색수상행식은 드러난 것이 아니라 들어가 있는 뿌리입니다. 들어간 뿌리가 있다면 드러난 껍데기도 있어야 하겠지요. 그 껍데기를 몸이라고 불러요. 그것을 육근, 육경, 육식신이라 합니다. 몸이 밖에 있고 안에 몸을 지탱해 주는 뿌리가 있으니 그것이 온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집착을 할 때는 이 껍데기인 몸에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좀더 분석해 들어가게 되면 집착의 뿌리는 오온을 ‘나’라고 하는 데 있다는 걸 우리는 곧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집착의 뿌리는 ‘오온을 나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걸 전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릴 때도 나라고 하고 어른이 되어도 나라고 하고 늙어도 나라고 합니다. 육근의 모습은 부단히 변해갔었거든요.

그렇지만 계속 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육근과는 차원이 다른 좀 더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오온에 대한 ‘나’라는 집착과 통한다고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땐 육근에 대한 ‘나’의 집착을 끊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오온에 대한 특징을 강조했습니다.

“오온은 무상하냐, 무상하지 않느냐?”

“무상합니다.”

“그러면 괴로운 것이냐, 괴로운 것이 아니냐?”

“괴로운 것입니다.”

“괴롭고 무상한 것이면 나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오온에 대해 삼법인을 설해나가셨던 것입니다. 오온을 실체가 없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변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나라고 집착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온에는 실체가 없음을 봐야 된다고 합니다.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지적으로 깨닫는 것을 혜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혜해탈이 되었다고 해도 오온에 대한 집착심은 여전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오온이 ‘나’라는 집착심을 없애야 마무리가 됩니다.

번뇌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집착심, 특히 ‘아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단순히 오온 또는 오취온이 무아라고 외우고만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오(취)온이라는 것을 대치할 만한, 오온보다 훨씬 뛰어난 새로운 경지를 제공해 주고 그것에 바른 집중을 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집착심을 제거하라고 해야 올바른 수행법의 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온을 대치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진리구조 또는 실상이어야 합니다. 육근을 대치할 만한 진리구조로 18계라는 것을 가져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온이라는 허상을 대치할 만한 진리구조가 있어야 오온에 대한 집착심을 버려라 했을 때 부처님 말씀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존재에는 상의상관의 법칙이 있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나오게 되는 진리구조를 6계라고 합니다. 바로 이 6계가 오온에 대한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실상의 모습입니다. 육식, 육근, 육경이 모두 사대로 분석될 때 이 세상의 실상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은 것입니다.

지·수·화·풍·공·식계. 6계는 18계에도 남아 있는 자타의 구별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육계라는 것이 바로 집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6계에 집중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냥 무턱대고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는 것으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기만하는 말이에요. 그 오온을 대치할 만하고, 오온보다 훨씬 더 낫게 ‘나’라고 부를 만하고, 진리로 모습이 제시되어진 실상을 전제하여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해야 온당한 부처님 말씀이겠죠. 그것이 바로 6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상의상관이라는 법칙을 음미함으로써 이와 같은 6계의 구조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12연기의 지분에 대한 아집을 어떻게 제거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12연기 중에서도 생과 노사까지는 포함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첫 번째 10가지 지분, 즉 무명부터 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에 이르는 10가지 지분이 집착의 대상입니다.

이것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12연기의 각 지분을 전제로 부처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무명 내지 유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냐?”

“괴로운 것이냐?”

“그러면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

“나라고 할 수 없다면 버려라.”라고 하십니다.

또한 “나라고 할 수 없으면 내 것도 아니다. 그러면 버려라.”라고 하십니다.

이것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붙들어서 영원히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착이 아니라 계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체가 없는 것을 봤다고 한다면 버려야 되는데 그것이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바른 집중을 통해서 끊을 수 있습니다. 곧 무명에서 유에 이르는 10지분에 대해 이것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나’라고 집착할 것이 없으므로 집착심을 끊어야 하는데, 바른 집중으로 끊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집중으로 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육근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18계였고, 오온에 대한 집착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6계입니다. 그러면 12연기 전 10지분에 대한 집착을 전격적으로 대치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것은 관념으로 그쳐선 안 되고 우리가 ‘아하, 그렇겠구나’ 하고 탄성을 지를 만한 실질적인 모습, 곧 실상을 역시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육근도 오온도 진짜는 아니었는데 ‘나’라고 집착해 왔고, 지금도 집착하고 있습니다. 12연기의 전 10지분도 거짓 나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나’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나를 대치하려면 ‘진짜 나’를 제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육근에 대해서는 18계, 오온에 대해서는 6계로 대치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제는 육근에 대한 집착 또는 오온에 대한 집착보다 더 궁극적인 그래서 가장 근원적인 집착의 대상이라고 불러볼 만한 것을 찾아야 됩니다. 집착한다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서 집착한다는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무언가’가 분명해야 돼요. 그것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표현해 본다면 12연기의 전 10지분 정도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12연기의 전 10지분을 표적으로 삼아서 전격적으로 대치해 낼 수 있는 그런 진리 구조라면 그것은 어떠한 구조일까요? 이것은 복잡하고, 쉬운 구조가 아니며 아울러 그 설명도 쉽지 않습니다.

18계나 6계도 모두 깨달음의 대상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12연기의 열 가지 지분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지는 못합니다. 18계나 6계만으로는 왜 열 가지 지분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살피다 보면 새로운 실상 또는 진리 구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쉬워질 것입니다.

18계라는 것은 자기와 남의 구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생멸이 사라진 것이라고 했지요. 완전한 무(無)로 변하거나 완전한 무에서 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잠복해 들어가고 현현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6계라는 것에 들어가면 자 타가 모두 사라집니다.

자타(自他)의 구별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역시 생멸(生滅)이라는 것도 사라진 경계라는 것을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18계와 6계는 위 아래로 두 법이 존재하면서 잠복현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식의 구조가 타당한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세계는 감추어진 세계가 있다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선 6계나 18계와 같은 계의 구조가 성립되는 논리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A라는 법이 B라는 법으로 질적인 변화를 했다는 것을 주의하셔야 됩니다. 질적인 변화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뀌었을 때, 우리는 첫 번째 어떤 판단을 한다고 했습니까?

B는 A와 완전히 다르다는 판단을 한다고 했지요. 이러한 완전히 다르다는 판단을 식(識)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식 판단을 하게 되면 B법은 생하고 A법은 멸하였다는 판단이 반드시 이어서 나옵니다.

이때 우리가 생했다 멸했다는 판단을 분석하면 생이라는 것은 없다가 생긴 것이요, 멸이라는 것은 있다가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하고 멸하는 두 존재 사이에는 그들 나름대로가 갖는 특별한 관계가 발견이 되더라는 겁니다.

B는 반드시 A에서 나오는 것이지 C나 D에서는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상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B는 A에 의존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시길 좋아하셨습니다.

그 의존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부릅니다. 기댄다는 겁니다.

기댄다는 말은 기대는 존재와 기댐을 받는 존재가 같이 있을 때 기댄다는 동작이 형성이 되는데, 그 말은 A법과 B법이 함께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멸이란 판단은 두 법이 함께 존재한 적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A와 B는 함께 존재한 적이 있다고 봐야 될 것인가, 없다고 봐야 될 것인가 하는 딜레마 속에서 우리가 택하였던 것이, 사실에 입각해 함께 존재한다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있다는 의미의 의존을 택하고 나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같이 있다면 왜 하나만 보였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보이지 않고 하나씩만 보였던 이유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로 들어갔고, 또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상황으로 해석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보는 세계인 현법의 세계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인 비현법의 세계로 나누게 되고, 존재라는 것은 현법의 세계와 비현법의 세계에서 잠복현현하는 구조를 갖게 되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두 존재는 같이 존재함으로써 상호가 의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논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진리
글쓴이 : 청아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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