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도경
미얀마의 쉐우민 수행센터에서 지도하시는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서는 제자들을 자세하게 가르치는 스타일이 아니십니다. 기본적인 것들만 가르쳐 주시고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서 수행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를 넓히는 수행자가 있는 반면 오래 수행을 했어도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수행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은 쉐우민의 심념처 수행법을 정리하겠다고 생각을 했고 때마침 호두마을에 있으면서 시간이 허락해서 정리를 해 봅니다.
바른 견해란?
심념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견해입니다. 사야도께서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손바닥을 바닥에 대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낌을 일으키려고 해서 느낌이 일어났습니까? 안 일으키려고 하면 안 일으킬 수 있습니까? 안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일으키려고 하지 않아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일어나는 느낌을 자연의 이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 화가 나 있을 때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마음이 알아서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생각을 자연의 이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모두 자연의 이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조건이 되어서 그 성질대로 일어났다고 알아야 합니다.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대상에 반응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대상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상이란?
대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상은 알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소리를 알 수 있고 느낌을 알 수 있고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대상입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란 말은 무슨 뜻인가요? 대상은 단지 알아지는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대상은 알아지는 것으로써의 가치를 가질 뿐 대상 자체의 가치는 없다는 뜻입니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대상 자체의 가치는 우리가 마음으로 만들어 낸 가치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할 때 항상 이런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대상을 알 때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는 지혜에 속하고 여러분이 수행을 해 감에 따라서 조금씩 더 깊이 이해해 갈 것입니다. 처음 수행을 할 때에는 대상을 알 때 ‘이것은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라고 상기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대상이 떨어져 있는 것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라는 말을 이해했을 때 생긴 지혜가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왜 수행을 하는가?
여러분은 수행을 왜 하십니까? 수행을 잘 모르는 사람은 수행을 통해서 특별한 어떤 것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특별한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바르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 어느 시간에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으로 만들어낸 관념일 뿐입니다.
그럼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보임이 일어나고 들림이 일어나고 느낌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먹을 때는 맛봄이 일어나고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 맡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일어남의 연속이 여러분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속된 일어남을 나라고 정의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찰해야 하는 것은 이 6가지뿐 입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이 6가지를 관찰해야 할까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이 6가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위빠사나는 특별한 시각으로 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다, 너다란 생각 없이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 라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앉아서 고요히 자기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부분의 몸의 느낌이 알아지지 않습니까? 엉덩이의 느낌이 알아지지 않습니까? 손이 닿아있는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알고 있다면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앎에 ‘나의 느낌이다’, ‘내가 소리를 듣는다.’라는 생각 없이 소리를 단지 소리로 이해하고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이해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수행을 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알아지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무엇을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자세하게 알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대상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상을 자세하게 알려고 하는 마음은 욕심의 마음입니다. 수행은 좋은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의 힘이 좋아지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목표를 정하고 힘껏 노력해서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수행센터에 와서도 목표를 정하고 힘껏 노력하려고 합니다. 애써하는 노력은 수행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속적으로 해나가기만 하십시오. 여러분은 수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것에 우리가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는 것은 단지 일어날 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고 단지 지켜보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고 법의 이치대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알아지는 대상은 단지 알아지고 아는 마음은 단지 알고 있습니다. 각자의 성질에 따라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힘을 써서 특별한 무엇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무엇을 보아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는 대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을 때, 조건이 완전해 졌을 때 지혜가 생깁니다. 그 때 지혜를 생기게 하는 대상이 특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면 손에 따뜻한 느낌이 생깁니다. 손을 빼면 따뜻한 느낌이 사라집니다.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그 변화가 분명합니까? 이런 변화를 경험하고 그것을 알면 무상의 지혜가 생깁니까? 생기지 않습니다. 경험하는 것과 지혜가 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변화하는 대상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만 무상의 지혜가 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대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수행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사야도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샤워를 하기 위해서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물을 묻히고 비누칠을 하려고 비누를 집었습니다. 그 때 비누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왜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냄새를 관찰했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는 것이고 눈과 귀로는 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기관은 각자의 기능이 있어서 각자의 역할을 할 뿐이지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새롭게 생긴 지혜에 너무나 기뻐서 다른 이에게 ‘냄새를 코로만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사야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앎은 사야도가 그 때 안 앎에 비해서 너무나 얕은 앎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얼마나 많은 냄새를 맡습니까? 그런 냄새를 맡을 때 지혜가 생깁니까? 지혜는 대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수행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대상을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알아지는 것을 알면 됩니다. 그것이 법의 이치에 따라서 아는 것입니다.
수행에 자신이 개입하면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에는 2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 부분이고 하나는 마음 부분입니다. 대상은 알아지는 역할을 하고 마음은 아는 역할을 합니다. 대상은 아주 분명하고 마음은 미세해서 처음에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우선 대상에 알아차림을 두십시오. 눈으로 볼 때에 보이는 대상을 알고 소리가 있으면 소리를 알고 느낌이 있으면 느낌을 알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알면 됩니다. 마음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마음이 아주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자연스런 성품입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어느 것 하나를 자세하게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지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분명하던 분명하지 않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대상을 아는 것이 안정적이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알고 있는가?’라고 물어보십시오.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지금 알고 있는가?’ 라고 물으면 알고 있다는 것이 알아질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떤 장소에 항상 머물러 있어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일어나고 있어서 있다고 하는 것이고 작용을 하고 있어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것이 곧 마음입니다. 아는 것이 마음이고 보는 것이 마음이고 듣는 것이 마음이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아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고 보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고 듣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하는 법은 모양도, 위치도, 크기도 없습니다. 다만 작용과 성질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의 중심이 점차 대상에서 마음 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심념처에서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무엇을 알 때 이 아는 마음의 작용은 언제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여러 마음의 작용이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한 가지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다른 마음의 작용도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상을 아는 것이 안정적이 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알고 있나?’ 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아십시오. 수행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서 마음의 힘이 좋아지면 좀 더 분명하게 아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볼 때에는 보고 있다고 알고 들을 때에는 듣고 있다고 알면 됩니다. 보는 것이 마음이고 듣는 것이 마음입니다.
왜 이렇게 수행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수행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대상을 알 때에는 항상 관념적으로 대상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는 오온(다섯 무더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색은 물질이고 수는 느낌, 상은 인식, 행은 다양한 마음의 의지 작용, 식은 마음의 아는 작용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항상 함께 일어납니다. 이 가운데 상의 마음작용은 기억을 하게하고 무엇을 무엇이라고 알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무엇을 알 때 마다 이 상이 작용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고 하면 이미 관념입니다. 지금 내 앞에 노트북이 있습니다. 내 밖에 있는 노트북이 더 실재입니까? 아니면 내 눈에 들어온 정보를 마음이 해석해서 내 마음에 형상화된 노트북이 더 실재입니까?
인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 마음에 형상화된 노트북이 더 실재입니다. 내 밖의 노트북(물질)은 내가 실재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실재하는 물질이 안근에 부딪히더라도 상의 마음작용이 이를 바로 관념화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경험적으로 있다고 확실히 믿을 뿐입니다.
삼매 수행을 오래해서 집중력이 아주 강한 사람들은 간혹 텔레비전에서 누군가가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음식냄새를 맡습니다. 그 사람은 그 냄새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진짜 음식냄새와 텔레비전 속 음식을 보고 우리가 생각하는 냄새에 대해서 뇌는 동일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냄새는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분명하게 가짜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짜라고 하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무엇에 손이 닿으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손의 물질과 대상의 물질이 직접적으로 부딪혔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각각의 전자들이 서로를 밀어내기 때문에 직접적 부딪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느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 것인가요?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하고 세상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관념적인 세상을 실제라고 믿고 살아가면서 대상을 알 때마다 항상 좋다, 싫다는 잣대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좋다고 생각하면 집착하고 싫다는 생각을 하면 내 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가 받는 이러한 고통은 세상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는 관념적 세상 뒤에서 작용하고 있는 실재하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이해할 때 이러한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믿는가?
나는 심념처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믿고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의 마음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마음을 강하게 동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건강상의 이유나 다른 다양한 이유에서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마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어제 많이 굶었으니까 오늘은 좀 먹어도 돼. (큰 케이크를 보면서) 쪼금 먹는 건 괜찮아. 이렇게 말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입니까? 이런 생각을 내가 일으킵니까? 이 마음이 나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이런 마음을 믿고 따라서 행동하고 난 뒤에 내 마음이 행복합니까?
다른 이에게 화가 났을 때 마음이 항상 말을 합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괴롭힐까? 어떻게 때려줄까? 어떻게 해야 그 사람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 될까? 이런 마음이 나의 마음입니까? 이 마음이 나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이 마음들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은 마음일 뿐입니다.
각자의 마음은 각자의 성질을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욕심의 마음은 그 마음의 역할을 하고 화의 마음은 그 마음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을 때는 그 마음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고통을 받지만 그 마음들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이해를 하게 되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수행의 목적은 지혜가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혜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문혜, 사혜, 수혜가 그것입니다. 문혜는 들어서 아는 지혜, 읽어서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바른 정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에 있어서 바른 정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바른 정보는 우리가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뒤에서 계속 작용을 합니다.
다음은 사혜입니다. 생각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수행에 있어서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른 정보에 대해서 ‘그렇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자기가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서 왜 그것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이러한 것을 조사하는 것도 사혜입니다. 지혜가 나기위해서는 지혜를 써야 합니다. 마지막은 수혜입니다.
수혜는 수행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는 지혜입니다. 통찰지라고 합니다. 이러한 통찰지는 무언가 대단한, 모르는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어느 순간 생각을 관찰하면서 ‘아! 생각이 단지 마음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자신이 그 깨달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마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한 점 의심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주 깨끗하게 됩니다. 이것이 통찰지입니다. 이러한 통찰지가 생기면 실재적으로 힘이 생깁니다.
내가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나 ‘생각이 단지 마음이다,’ 란 지혜가 그 알아차림과 함께 있습니다. 사띠와 지혜가 함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각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지혜는 어떻게 생기는가?
그러면 실재 수행에서 지혜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지혜가 나기위해서는 바른 정보를 많이 알아두어야 합니다. 사야도의 법문집을 꾸준히 읽고 음성법문을 꾸준히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그런가하고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계속 이어져야 하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나기위해서는 대상과 밀착해서 대상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대상과 떨어져서 단지 관찰해야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대상을 따라가면서 압니다. 수행에 조금 능숙해지게 되면 대상을 쫓아가지 않아도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능숙해지면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대상들이 알아집니다. 좀 더 능숙해지면 아는 마음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상들은 아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점점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커집니다. 수행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르게 되면 수행에 내가 개입하지 않지만 대상은 분명하게 알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차츰 마음에 지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새로운 의문들이 생깁니다.
소리는 어떻게 들리는 것이지? 저게 어떻게 보이지? 내가 어떻게 알지? 안다는 것이 무엇이지? 이러한 의문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념적 세계 너머에 있는 본질적 세계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음에 지혜가 자라고 있는 것이고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마음에서 어느 순간 깊은 깨달음이 생깁니다. 특별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고 깊이 아는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어느 순간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구나! 이제 조금 알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어느 순간 ‘전에 안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제 조금 알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전에 알던 것과 지금 안 것을 종이에 적으라고 하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지혜의 깊이가 다를 뿐입니다.
미얀마에서 수행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센터에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마음에서 화가 나고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서 화가 일어났습니다. 한 번은 좌선을 하는데 그 사람 생각이 났고 마음에서 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일어난 화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힘이 아주 좋은 상태여서 화를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볼 수 있었습니다. 계속 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마음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화 이게 뭐야? 마음 아니야?” 그 말을 한 마음은 그 말을 확실히 이해한 지혜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었던 마음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화가 단지 마음이라는 것을 마음이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가 바로 사라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이 느껴지고 편해지면서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그 좌선이후 알아지는 모든 것의 좋은 점만을 보는 마음상태가 이어졌습니다. 내가 화를 내던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에도 화의 마음이 아니라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사의 마음이 없으면 메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사야도의 말씀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지혜가 있어서 깨끗하다면 외부의 어떠한 것도 내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마음은 영원하지 않고 지혜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는 얼마 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화에 대해서 이해한 지혜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화를 알 때마나 이 지혜가 함께 해서 화를 편안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르게 하고 계속하게 되면 반드시 수행의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자신을 알고 삶을 이해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수행합시다.
'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자비관 (0) | 2018.06.03 |
---|---|
[스크랩] 수행 중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 - 우 떼자니아 사야도 (0) | 2018.06.03 |
[스크랩] 혜해탈과 심해탈 (0) | 2018.06.03 |
[스크랩] 심해탈과 혜해탈 (0) | 2018.06.03 |
[스크랩] 새겨둘만한 글 -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0) | 2018.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