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2칙 趙州至道無難 - 지극한 불도는 어려움이 없다

수선님 2018. 6. 10. 12:56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제2칙은 조주화상의 법문은 <신심명(信心銘)>의 일절을 인용하여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至道無難)’는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싣고 있다.


조주화상이 대중스님들에게 법문 하였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

그 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不知)”

그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擧, 趙州示衆云,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 是明白, 老僧不在明白裏, 是汝還護借也無, 時有僧問, 旣不在明白裏, 護借箇什, 州云, 我亦不知, 僧云, 和尙旣不知, 爲什, 却道不在明白裏, 州云, 問事旣得, 禮拜了退


2칙에 인용된 〈신심명〉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오직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들어나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도(至道)는 차별 분별심과 시기 질투의 미혹한 중생심을 벗어나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조사선에서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 도(無心是道)’라고 했고, 마조도 평상심(본래심)이 도(道)라고 설했다. 혜능도 ‘도(道)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나 불도(佛道)는 불심을 깨닫는 그 마음이며 부처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어떤 고정된 불도(佛道)나 지도(至道)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불도를 마음 밖에서 찾아 해매는 사람은 영원히 불도를 깨달을 수가 없다.


〈신심명〉은 이러한 조사선의 선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도를 깨닫는 법문과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로 읊은 선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인데, 특히 조주화상은 신심명을 많이 인용하여 독자적인 법문을 펼치며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불도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佛性)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번뇌 망념이 없는 청정한 불성(佛心)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요약한 말인데, 화엄교학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데,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깨달음을 체득하는 불법이다.


〈신심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불도를 체득하기란 지극히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자 자기 마음으로 자각하고 체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도나 불법을 자신의 마음 밖에서 얻고, 남에게서 받아내야 한다면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마치 자신의 몸과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과 같이 지극히 쉬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번뇌 망념의 분별심(중생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지도’의 경지를 이루게 되며, 또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기만 하면 불심을 깨닫고 불도를 이루게 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구절을 약간 바꾸어서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다.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의식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조주 화상은 “나는 분별심의 중생세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또한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데, 그대들은 중생심의 경지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를 목적으로 수행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하느냐?”라고 설하고 있다. 즉 ‘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은 물론,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의 경지까지도 초월하여 살고 있는데 그대들은 깨달음을 구경의 목적으로 삼고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학인들을 경책하는 법문이다.


선수행은 미혹함과 깨달음을 모두 함께 초월해야 올바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미혹함에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고 그 곳에 안주하게 되면 깨달음의 경계가 결국 집착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은 올바른 수행이 될 수가 없고 불도를 장애하는 수행이 되기 때문에 가장 고치기 어려운 수행자의 선병(禪病)이 된다.


또한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선병이다. 깨달음을 기대하거나 그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그대로 중생심이며 집착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집착심을 가지고는 영원히 불심을 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수행자가 조주화상에게 “깨달음(明白)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껴야 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다면 아끼고 보호하고 수행의 목적과 대상으로 삼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나도 모른다(不知)” 라고 대답했다. 조주가 말한 ‘부지(不知)’는 지혜가 없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아니다. 선어록에서 지(知)나 식(識)은 알음알이(知解)나 분별의식을 말한다. 조주가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는데’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의 차별과 불심의 깨달음(明白)의 경지까지도 모두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심(佛心)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제1칙에서 언급한 달마의 ‘불식(不識)’과 마찬가지로 중생심의 차별과 분별의식이 없는 조주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수행자가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깨달음(明白)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십니까?” 라고 다구치며 조주화상이 달아나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은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주화상은 훌륭한 선지식(作家)이기 때문에 그 스님에게 “나에게 질문하는 일이 끝났으면 인사나 하고 물러가게!” 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고 조주화상의 기지(機智)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질문한 스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설두는 “불법을 체득하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취사선택하는 중생심과 깨달음의 불심을 그대의 마음에서 잘 살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 라고 수행자들에게 각성시키는 게송을 남겼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