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5칙 雪峰盡大地 - 설봉의 온 대지

수선님 2018. 6. 10. 12:57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5칙은 설봉의존(雪峰義存 : 832~908)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 크기만 하네. 이것을 눈앞에 내던졌지만 새까만 칠통같이 (대중은) 전혀 알지 못하네. 북을 쳐서 전 대중이 노동(普請)이나 참여 하도록 하라.”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운문광록〉과 〈조당집〉을 보면 “북쪽에는 조주가 있다. 남쪽에는 설봉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설봉이 문하에 1,700명이 넘는 많은 대중을 거느릴 만큼 위대한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음을 말해준다.

 

〈벽암록〉에 원오선사는 설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들에게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크기만 하네.’라고 법문 하였다. 옛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행화는 뛰어난 지혜와 방편이 있었으니 참으로 고생하였다. 설봉화상은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오르고, 동산(洞山良价)화상을 아홉 차례나 찾아뵙는 수행을 하였다. 그는 물통과 주걱을 들고 가는 곳마다 밥 짓는 소임을 맡아서 수행한 것도 이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만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심명〉에서 말하고 있는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경지(萬法一如)”를 말한다. 즉 일체의 만법을 자기와 상대하는 존재로 두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보장록〉에도 〈불설법구경〉의 일절을 인용하여 “삼라만상은 일법(一法)의 도장 찍힌(所印) 것이다.”라고 하며 “도장 찍힌 것(印)은 근본(本際)이다”라고 설한다. 또한 일법(一法)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처럼, 온 대지를 움켜쥐어 하나의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일체 만법의 근본을 체득하여 자기와 하나가 되고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과 온 대지나 만법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한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 대지나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화엄경〉의 설법으로 정리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논리이다. 온 대지와 만법은 많음(多)이지만 하나(一)이다. 〈법성게〉에서도 “법성은 서로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만법을 근본인 일심(一心)에서 깨달으면 만법(萬法)이 하나가 된 일여(一如)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一), 혹은 제일의(第一義), 제일월(第一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一) 은 근본이며 본래의 입장을 의미한다. 불법의 근본으로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불이(不二)나 불이(不異) 역시 하나(第一)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이(二)나 이월(二月)은 차별과 분별을 상징하는 중생심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조주화상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고 설한 말도 설봉의 법문과 마찬가지 입장이다.

 

온대지를 움켜쥐고 좁쌀만한 크기라고 말했다는 것은 실제로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현상법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하는 것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텅 비우는 것이 공(空)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물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차별심과 번뇌 망념과 착각된 마음을 텅 비워서 일체의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도록 공(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온 대지를 움켜서 하나의 좁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존재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과 집착을 텅 비워 버린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없애고 비우려고 하면 더욱 비울 수가 없다. 비우려고 하는 마음이 번뇌 망념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번뇌 망념의 함정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번뇌 망념을 비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자신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견성(見性)은 번뇌 망념이 없는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자각이란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을 말하는데, 차별의 세계(만법)에서 본래의 세계(불성)으로 되돌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마치 번뇌 망념의 숲(중생심)에서 벗어나 편안한 자기 자신의 집(불성)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와 같다.

 

견성의 체험은 한 생각 한 생각(念念)의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좌선의〉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텅 비워(空)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일이 불성의 지혜작용이며, 중생심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성의 집으로 되돌아 간 깨달음의 체험이다.

 

설봉의 설법은 일체의 모든 사물이나 만법을, 자신과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온 대지를 움켜쥐니 좁쌀만 하네.”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사물과 만법을 설봉이 마음대로 활용 할 수가 있게 된 경지를 설하고 있다.

 

그래서 설봉은 온 대지를 좁쌀만한 크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내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설봉의 법문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설봉이 대중에게 던진 행위는 일체의 만법을 대중에게 펼친 방편법문을 말한다. 설봉이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뭉친 것은 만법을 근본의 일심(一心)에서 깨달아 자기자신의 지혜로 만든 것이며, 대중에게 던진 것은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에게 펼쳐 보인 자비심인 것이다. 설봉이 이렇게 온 대지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구족했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봉의 법문 내용과 보살행의 자비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봉화상은 북을 쳐서 대중들에게 모두 노동(普請)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은 당대 선원의 독창적인 종교운동의 하나다. 전 대중이 의무적으로 공동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을 〈선원청규〉에 두고 있다. 선원의 노동은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력을 생산에 참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보살행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선원의 보청(普請)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신심을 하나(萬法一如)로 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일이다.

 

설봉화상은 대중들을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설봉이 설법한 내용을 본인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즉 땅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온 대지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직접 활용하는 체험을 하도록 한 것이다. 불법은 법당에서 제시한 이론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와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전개해야 하는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글쓴이 : 느린 걸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