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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성제와 팔정도

수선님 2018. 6. 17. 12:30

사성제와 팔정도 

 

 

팔정도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한 첫 설법[初轉法輪]에서 감각적인 즐거움과 고행 수행을 떠난 중도(中道)로서 가장 먼저 설해졌다. 그리고 입멸하시기 직전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다와의 대화에서는 이 팔정도가 있는 수행체계에서만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초기불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수행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마지막 지분인 도성제(道聖諦)에 속하는데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 또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여덟 가지 지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올바른 견해[正見]

 

이것은 사성제인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涅槃],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확실히 꿰뚫어 아는 것이다. 사성제를 통해 인생의 괴로움 전반에 대한 확실한 통찰이 있어야 진정한 수행이 시작되고 괴로움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견해가 팔정도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머지 일곱 지분은 이 올바른 견해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

 

달리 설명하면 올바른 견해는 올바른 알아차림[正念]과 올바른 노력[正精進]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몸과 마음[五蘊]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무상(無常)하고 괴로움[]이고 무아(無我)이다'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 통찰이 있어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미혹하지 않게 되어 해탈할 수 있게 된다.

 

 

2. 올바른 생각[正思惟]

 

이것은 탐욕스러운 생각, 노여워하는 생각, 생명체를 해치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인생의 괴로움을 통찰해서 '올바른 견해'가 생긴 사람에게는 자신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意業]은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에 의해 말[口業]과 행동[身業]이 나오기 때문이다.

 

3. 올바른 말[正語]

 

생각이 바르면 거짓말, 이간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잡담]을 삼가게 된다.

수행자로는 법담(法談)이 아니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

 

4. 올바른 행위[正業]

 

생각이 바르면 행위도 바르게 된다.

살생, 도둑질, 삿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이 올바른 행위이다.

수행자는 몸으로 짓는 모든 나쁜 행위를 삼가야 한다.

 

5. 올바른 생활[正命]

 

이것은 생활의 수단인 옷[가사], 음식, 침구, 탕약 등을 구하되 법답게 하는 것이다.

세속인으로서는 직업을 갖되 남에게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비난받을 만한 직업을 피하는 것이고,

수행자로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가지고 거짓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6. 올바른 노력[正精進]

 

이것은

① 이미 일어난 마음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사라지도록 꾸준히 힘써 노력하는 것,

②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꾸준히 힘써 노력하는 것,

③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음의 선하고 건전한 상태가 일어나도록 꾸준히 힘써 노력하는 것,

④ 이미 일어난 마음의 선하고 건전한 상태를 더욱 닦아 익히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참선을 할 때 게을러지거나 무기력하고 졸음이 올 때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려

수행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올바른 노력'에 해당한다.

 

7. 올바른 알아차림[正念]

 

이것은 남방 불교권에서 널리 수행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에 해당하여 사념처(四念處)를 닦는 것이다.

사념처란 ① 몸, ② 느낌, ③ 마음의 상태, ④ 법(: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 오취온 등)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여기서 '알아차림'이란 위의 네 가지 수행 주제에 대해 아무 판단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주시함[]과 동시에 분명하게 알아차리는[正知] 것이다.

 

 

첫째, 안반념(安般念)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먼저 조용한 곳에서 고요히 앉아 허리를 똑바로 펴고 코 끝 호흡이 스치는 지점에다 의식을 둔 채 호흡이 들고나는 것을 주시한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들숨이 길면 길다고 알아차리고, 날숨이 길면 길다고 알아차린다. 들숨이 짧으면 짧다고 알아차리고 날숨이 짧으면 짧다고 알아차린다.

 

다시 말하면, 코 끝에다 의식을 둔 채 들고나는 호흡을 주시하되, 아무 판단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호흡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는데 무릎이 아프다던가 하는 어떤 느낌[감각]이 일어나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중단하고 그 느낌으로 의식을 가져가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림을 계속하다가 그 느낌이 사라지면 다시 코 끝으로 의식을 가져와서 호흡 알아차리기를 계속한다. 어떤 생각이 수행 도중에 일어나면 마찬가지로 의식을 코 끝에서 거두어 그 생각으로 가져가서 그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코 끝으로 의식을 가져와서 호흡 알아차리기를 계속한다.

 

수행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싶다는 그 마음[의도]를 알아차려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고 먼저 일어서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일어서되 일어나는 몸의 전 과정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일어나야 한다.

 

첫 번째 '호흡의 대한 알아차림'이 정적이라면, 두 번째는 동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 우리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앞을 볼 때나 뒤를 볼 때도 이것을 분명히 알아차린다. 팔, 다리, 몸을 구부릴 때나 펼 때 이것을 분명히 알아차린다.

 

가사[옷]를 입거나 발우[그릇]를 들 때도,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대소변이 마려울 때도 이것을 분명히 알아차린다. 걷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을 지킬 때 등 모든 상황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아차린다. 이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모든 행위를 빠짐없이 '지금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올바른 알아차림' 수행은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수행법이며, 이 수행을 해야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깨닫는 '올바른 견해'가 생겨 해탈하게 된다.

 

8. 올바른 집중[正定]

 

호흡과 같은 어떤 특별한 주제[<청정도론>에는 40가지 주제가 언급됨]에 마음을 일심으로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수행으로 사선(四禪)을 성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니 무아지경(無我之境),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하는 것은 이 수행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 수행을 하면 번뇌가 그치게 되고 마음이 고요해지기는 하지만 완전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다.

 

 

 

 

 

팔정도는 삼학(三學)으로 분류될 수 있다.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은 계학(戒學)에,

'올바른 노력', '올바른 알아차림', '올바른 집중'은 정학(定學)에,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생각'은 혜학(慧學)에 속한다.

 

삼학은 서로 돋고 도움을 받는다.

삼각대에 다리 하나가 없으면 넘어지듯이 삼학에서도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올바른 수행이 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sati. 사띠) 시작해서 알아차림으로 끝이 난다고 할 만큼 알아차림은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사띠라는 말은 빨리어다. 이 단어가 의미 하는 여러 가지 뜻 중에서 기억과 알아차림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불경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sati. 사띠를 념()자로 번역하고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올 때  기억()으로만 넘어왔다. 보통 기억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사띠의 기억은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빨리어 사띠. sati는 기억과 동시에 알아차림이란 뜻이 함께 포함된 단어로 넘어 왔어야 본래의 뜻을 바르게 전달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지금 우리나라의 위빠사나 책에서는 사띠를 기억.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하다 등으로 여러 가지로 혼용하고 있지만 우리 선원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통일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84000법문은 좀 크게 축약하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다시 계. . 혜 삼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삼학은 다시 알아차림(사띠, sati)하나로 귀결 된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알아차림(사띠)이다.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 번뇌가 될 원인을 행하지 말고 그 순간 알아차려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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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첫 설법의 내용이기도하다.

사성제는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처님께서 연기법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 진리인가? 이른바

 

- 괴로움의 진리,

-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진리,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사성제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 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서 고. 집. 멸. 도, 상성제라고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설명하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 인간은 생로병사의곹오 속에 있다. 인간에게는 이 네 가지고통 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본래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있다면 ,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멸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 열반의경지가 있음르 가르치느것이 바로멸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무엇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은 여덟가지 가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가 그것이다.

팔정도란 여덟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1) 정견 :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여실지견이라고 부른다. 사물을 바로 보는 것 이바른 삶의 시작이다. 바른 가치관이 확립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2) 정사유 : 바른 생각이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3) 정어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이나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뜰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낸다. 항상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을 해야 한다.

 

4) 정업 : 바른 행동이다. 모든 행동을 바르게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5) 정명 : 바른 생활이다, 즉 바른 직업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 즉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정정진 :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쉼 없는 노력을 말한다. 아울러 옳은 일에 대해서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7) 정념 : 바른 마음 챙김이요, 바른 마음 집중이다. 마음의 움직임과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챙겨 바로 깨어 있는 것이다.

 

8) 정정 : 바른 선정이다. 마음 챙김과 마음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바른 삼매의 상태에 들어가 고요한 평정에 머무는 것이다. 정정의 상태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팔정도는 도성제의 내용이다. 괴로움과 집착의 상태를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팔정도의 첫째 방법이 ‘올바르게 보는 것’ 이라는 점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의이치를 올바로 보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도 올바른 행동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견해로 바라 보면 극단적인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모든 행동이 좌우된다. 즉 정견이 없으면 팔정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정견은 팔정도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면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서로 의지 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과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잇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지견‘,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버리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정견을 성립된다. 즉 연기의 관점에서 볼 때만이 잘 못된 양 극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적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보는, 올바른 가치관이 정견이다.

 

불자들은 중도적 사고와 실천을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중도의 가르침은 부처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지정한 불자라면 중도, 즉 정도를 걷는 사유와 실천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생활에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정견, 즉 연기적 관점을 갖는 것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자들 스스로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잊지 않고 잘 익혀 생활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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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신
부처님 최초의 법문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을 들고 있다.
생노병사와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괴로움,원하는일이 이루어지지않는
괴로움 오온(안,이,비,설,신)에 집착하는 괴로움) 등 8가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 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
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등의 집기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가지 진리이다.
고는 집의 결과 즉 현실 이며 집은 고의 원인이다
멸은 도의 결과 즉 현실 이며 도는 멸의 원인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팔정도

(1) 정견 (正見)
정견은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이 정견은 유무(有無)의 편견을 벗어난 정중(正中)의 견해이다.
곧 사(사)와 정(正)을 분별하는 견해이고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이다

(3) 정어 (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고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짖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 정업 (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 정명 (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이다.

(6) 정정진 (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속에 정견 (正見)이 가득차고
항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 (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 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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