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묵스님

[스크랩] 무아설과 윤회설은 상호모순인가?

수선님 2018. 6. 24. 12:34

Q: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고 부릅니다.

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입니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입니다.

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법구경 153-154)는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vikaa)’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합니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습니다.

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출처 : 대전 위빠사나 명상센터
글쓴이 : panasat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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