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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각묵스님의 "초기불교가 대세이다!"

수선님 2018. 6. 24. 12:36

 

각묵스님의 "초기불교가 대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안티는 권위에 대한 부정이다.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였을 때 안티의 대상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가 안티의 대상이 된 것 역시 사회적 영향력이 큼에도 불구 하고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겹쳐서 일 것이다. 주로 교리문제이지만 목회자의 비리나 교회의 제도와 시스템등 다양하게 지적 당하고 있다. 그런데 안티를 하는 사람들은 그 조직의 내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폭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 할까. 지금까지 기독교같이 전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지 않지만 안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활동은 매우 미미해서 무시할 정도이다. 불교가 기독교 보다 상대적으로 더 교리가 과학적이고, 덜 타락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이 지적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근본불교를 접한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이런 사람들을 '안티'라고 부르기 보다는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독교와 같은 경우는 교리를 문제 삼았을 때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오로지 믿어야 한다고 밖에 주장 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하여 불교는 매우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 교리가 너무도 정교하고 정확 하여 현대과학과 매우 유사한 점도 많이 발견 된다. 그러나 선불교와 같은 경우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과 한참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초기불교를 공부 할 수 있는 곳

 

불교공부를 하기 위하여 인터넷을 주로 활용한다. 인터넷으로 왠만한 정보는 검색이 가능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다. 또 친절하게도 공유 할 수 있도록 배려 해 놓은 사이트도 볼 수 있다. 그런 사이트 중에 초기불교에 관한 동영상 강의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 사이트는 불광사이다. 불광사 사이트( http://www.bulkwangsa.org/) 에 보면 '각묵스님' '초기불경강독' 동영상이 있다. 초기경전인 니까야 중에서 '앙굿따라니까야'에관한 강의 내용이다. 한회에 보통 2시간 강의 하는데 매우 열정적이다. 이러한 열정은 초기불교를 강의 하는 사람들의 특색인 듯 하다.

 

이제 까지 접해본 초기불교 강사들은 예외 없이 시간을 넘겨 가면서 까지 하나라도 알려 주려고 열심이었는데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현재 처한 선불교에 대한 문제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부처님의 가르침과 한참 비켜 나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이 개탄스러워서 인지도 모른다. 초기불교를 알면 알 수록 지금의 한국불교가 크게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바로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못 해석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부분은 정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음'에 관한 것일 것이다.

 

'마음공부' 한다고들 하는데

 

보통 "마음을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물었을 때 불자들은 잘 대답 하지 못한다. '선문답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그런 분위기를 접해 서 일 것이다. 실제로 큰스님 들은 법문할 때 알 듯 모를 듯한 게송을 읊으면서 선문답 하듯이 법문 하기 때문에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래서 마음은 어려운 것, 모르는 것 정도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니까야' '아비담마'에 마음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 있다. 부처님이 마음에 대하여 명확히 정의 하여 놓은 것이다.

 

불자들이 불교를 보통 '마음공부' 한다고들 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마음의 대상'으로 안다고 하였다.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서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아는 과정이 니까야에 매우 상세히 기록 되어 있고 이에 대한 후대의 주석서도 매우 상세 하게 나와 있다는 것이다. 보통 니까야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을 '론장'이라 한다. 주로 법에 대해서 논했므로' 아비담마론장'이라 한다. 아비담마는 '법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방편도 없이 법에 대하여 냉철하게 분석해 놓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있어서 니까야와 아비담마 논장이 존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대하여 알게 된것은 현대에 들어 와서라고 볼 수 있다.

 

니까야와 아함경,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담긴 경전에 대하여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는 서로 다르게 부른다. , 남방불교에서는 '니까야'라 부르고, 북방불교에서는 '아함경'이라 부른다. 똑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는 반면에 북방불교에서는 가장 수준이 낮은 경전으로 간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소승경전이라 해서 폄하 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남방과 북방에서 극과 극의 대우를 받고 있는 니까야와 아함경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많이 난다는 사실이다. 구조에 있어서는 비슷할 지 모르지만 내용이 일치 되는 곳은 60내지 7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한다. 또한 한역 아함경은 2차 번역된 것으로서 산스크리트 원본도 존재 하지도 않고, 번역하는데 있어서 서로 언어체계가 다름으로 인하여 해석상 오해의 소지도 매우 크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결정적으로는 주석서가 없다는 것이다. 즉 아비담마 논장에 대한 번역이 없는 것이다.

 

불교의 뿌리와 줄기는

 

니까야를 불교의 '뿌리'로 본다면 아비담마 논장은 불교의 '줄기'로 볼 수 있다. 줄기에서 수 많은 가지가 나와서 여러 부파로 갈라졌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가지가 잘 못 되었다면 잘라 내면 된다. 뿌리와 줄기만 있으면 생장이 가능 하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서 니까야와 아비담마논장의 위치를 뿌리와 줄기로 비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북방으로 전래된 대승불교에는 뿌리에 해당 되는 아함경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줄기에 해당 되는 아비담마 논장은 존재 하지 않아서 줄기가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이것은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와같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타력신앙과 같은 보살사상이 도입되고 도교와 습합된 선불교가 나오게 되었다. 또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그 나라의 고유의 신앙과 습합 되어 그 나라에서만 통용되는 불교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원래의 초기불교와 비교 하였을 때 상당히 훼손된 경우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 자체가 소승불교와 차별화 하기 위하여 분리 되었다고는 하지만 불교의 근본교리와 비교 하여 보았을 때 3법인이 변형된 사례가 있다. 그 중에 제법무아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참나'를 주장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참나'는 있을까

 

초기불교에서의 3법인은 '제법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이지만 대승에서의 3법인은 일체개고를 빼고 열반적정을 집어 넣어 '제법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되었다. 이렇게 한 이유를 세간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출세간의 입장에서 보았다고는 하지만 원래의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에 틀림 없다.

 

우리나라 큰스님들의 법문에 빠짐 없이 등장 하는 것이 '참나' 이다.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거의 대분분이 '불성' '여래장' '진여' '본래면목' '일심'과 같은 '불멸의 마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몸뚱아리만 바뀔 뿐이지 영혼불멸의 참나는 그대로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불교tv의 법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와 같이 참나를 주장 한다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사상에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참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열반은 결코 성취 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제법무아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 참나를 단지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 할 수 있어도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대승불교에서 참나를 주장 하는 것은 부처님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참나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개념이다. 불교가 힌두화 되어 멸망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이 세상 어느 존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 유일신을 받아 들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의 근거가 무상의 이치인데, 절대적으로 독존 하여 변치 않는 유일신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신이 있다면 변하는 신만 있을 뿐이다. 색계나 무색계의 천상신들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하지만 이들 역시 끊임 없이 변한다. 하물며 마음 또한 변하지 않고 고정된 영혼불멸하는 참나가 있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에도 위배 될 뿐 더러 부처님 말씀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법은

 

초기불교와 북방불교는 이론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가장 큰 차이는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대상을 '표상'에 두면 사마타 수행이고, 대상을 ''에 두면 위빠사나 수행인 것이다. 사마타 수행은 표상 즉 이미지에 집중하여 생각을 정지()하고 정() , 삼매에 이른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과 희열을 느낀다. 흔히 '선정수행'이라 부른다. 북방불교의 수행방법이 사마타수행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위빠사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법을 보는 수행이다. 수행을 함에 따라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고 지혜를 얻어서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동영상강의에서 "사마타 수행과 같이 대상을 표상으로 보면 모든 것을 관념으로만 알게 된다. 따라서 법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을 수 도 없고 열반에 이를 수도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방불교의 선정수행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고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우리나라에 대승불교가 전래된 이래 1700년이 되었다. 그 중 1000년 정도는 선불교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 와서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외국과 교류가 시작 됨으로서 선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방불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 소승이라고 비하하던 그 남방불교가 알고 보니 부처님법에 가장 가까운 불교라는 것도 최근에 들어와서이다. 더구나 위빠사나라 불리우는 수행법이 부처님이 깨달은 수행법이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이제까지 간화선과 같은 사마타 수행법만 있는 줄 알았으나 성격이 전혀 다른 위빠사나 수행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위빠사나 수행법은 매우 단순 하면서도 따라 하기 쉽다는 것이다. '알아차림'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시작하지만 이 수행을 통하여 집중과 지혜가 성숙하여 탐진치가 소멸되면 수행의 가장 높은 경지인 열반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새롭게 발견한 불교와 새롭게 발견한 수행법은 기존의 한국불교에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라 볼 수 있다. 1700년전 북방루트를 통해서 중국화한 불교가 들어와 전성시대를 누렸다면, 이제는 남방루트를 통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성격의 불교가 들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불교가 부처님 법에 가장 가까운 불교라는 사실이다.

 

초기불교가 대세이다

 

어쩌면 앞으로의 1000년은 초기불교의 전성시대가 될지 모른다. 그 증거로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위빠사나와 같은 각종 수행센터가 세워지고 그 열기 또한 예사롭지 않다. 또 니까야, 위빠사나, 아비담마, 사띠등과 같은 '팔리어 용어'가 유행하고 이런 용어를 사용해야 불교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또한 현실이다.

 

초기불교가 알려지게 된 요인중의 하나로서 인터넷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하여 초기불교 교리는 물론 동영상 강의를 통하여 생생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있어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 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일까 각묵스님은 "초기불교가 대세이다"라고 말하였다.

 

 

 

2009-03-11

진흙속의연꽃

 

 

 

출처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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