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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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리고 마음은 상속(相續)한다. 이것을 마음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이라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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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고유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난다.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Pm.454)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식에서도 마음은 언제나 대상을 가진다.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種·根·器, 종자와 신체와 자연계,『주석 성유식론』194~195쪽 참조)라는 대상을 가진다. 대상 없는 마음이란 결코 상정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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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는 하나이지만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불가설·불가설의 마음이 일어나고 멸했고 일어나고 멸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멸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종류(jāti)에 따라서 넷으로 분류가 되는데 ‘유익한[善] 업을 짓는 마음’과 ‘해로운[不善] 업을 짓는 마음’과 ‘과보로 나타난(vipāka) 마음’과 ‘단지 작용만 하는(kiriya) 마음’이다. 이 넷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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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대상을 알면서 업(業, kamma, 의도적 행위)을 짓는다. 업이 중요하고 무서운 이유는 업은 반드시 과보[異熟, vipāka]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이다. 업의 과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삶의 과정 중에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고 ② 다음 생의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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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짓는 업은 당연히 ① 삶의 과정(pavatti) 중에 무수한 업의 과보를 생산한다. 이러한 무수한 과보 때문에 존재는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상과 마주치는 이러한 무수한 마음을‘과보의 마음(vipāka-citta)’ 혹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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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생에서 지은 무수한 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업의 과보에 의해서 ② 다음 생이 결정된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은 한 생의 맨 마지막 자와나(javana, 速行) 과정에서‘업’이나‘업의 표상’이나‘태어날 곳의 표상’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것을 대상으로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는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을‘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이라 하며 이것은 당연히 업의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이 결정되면 이 재생연결식은 그 생에 있어서 바왕가 혹은 존재지속심으로 찰나생·찰나멸하며 한 생 동안 상속하고 그 생의 맨 마지막 마음인 죽음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면 또 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위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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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업의 과보는 ① 삶의 과정 중에서도 무수히 나타나며 ② 재생연결식이 결정되어 존재를 지속하게 한다. 유식에서도 전자는 인전변(因轉變)과 관계가 있고 후자는 과전변(果轉變)과 연결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전자를 인식과정(vīthi-citta)에 개재된 마음(제4장)이라 부르고 후자를 인식과정을 벗어난(vīthi-mutta) 마음(제5장)이라 부른다. 전자는 대상과 마주치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윤회를 하고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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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업을 짓는다. 업은 과보를 가져온다. 과보는 ① 대상과 마주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만나서 이를 알고(경험하고) 업을 짓고 과보를 가져오고 또 만나고 알고 업을 짓고를 거듭하면서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흘러간다[相續, santati].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이처럼 아비담마와 유식은 철저히 마음의 찰나와 상속에 바탕하여 법의 이론을 전개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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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①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인식과정(vīthi-citta, 제4장)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은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에 상세히 설명되는데 이것은 가히 불교인식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식과정은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물질찰나)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심찰나, citta-khana)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 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상좌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설명이다.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五門인식과정과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意門인식과정으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바왕가(지나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javana, 速行), 2가지 등록이다. 그러나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나 버린다.(<도표 4.2> 참조)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해야할 것은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잠재의식을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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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마음을 상좌부에서는 존재지속심[有分心, 바왕가, bhavaṅga, 잠재의식, life-continuum]이라 하고 유식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알라야윈냐나, ālaya-vijñāna, 藏識)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마음은 이처럼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존재를 지속시키면서 흘러간다. 마음을 비롯한 오온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이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재생(再生, puna-bbhava, rebirth)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재생 즉 금생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相續, santati]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輪廻, saṁsāra, vaṭṭa)라고 정의한다.(Vis.XVII.115; DA.ii.496; SA.ii.97)
특히 마음의 흐름과 재생연결의 원동력인 업에 대해서 상좌부 아비담마는 16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남방 아비담마에서 제시하는 業說을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아비담마의 특징
이런 『아비담맛타 상가하』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남방 아비담마의 특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위 각 장의 요점과 중복되는 면도 있지만 남방 아비담마를 처음으로 접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정신-물질[五蘊]은 모두 찰나생/찰나멸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마음을 생사를 뛰어넘은 근본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의 대부분의 불자들은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라는 이 명제를 깊이 음미해 봐야 할 것이다. 마음을 찰나생/찰나멸로 이해하고 이것을 내 안에서 확인하지 못하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이런 궁극적 실재들을 마음(citta)을 근본으로 하여 여러 관계를 고찰해 보고 있는 것이 아바담마이다. 왜냐하면 존재(대상)란 것은 내가 알지 못할 때는 존재라는 말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런 존재들을 순간순간 생멸을 거듭하면서 알아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을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aarammanam cintetii ti cittam)’라거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특징으로 함(visayavijaanana-lakkhanam cittam)’ 등으로 주석가들은 모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한결 같이 정의하고 있다.(마음에 대해서는 1장 §3의 해설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셋째,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단지 하나일 뿐이지만 찰나생 찰나멸을 거듭하니 이것은 한 개인의 일생에서만 하더라도 수천 억 조 번 이상의 불가설 불가설전으로 일어나고 멸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 없이 많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은 역할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 14가지의 역할만을 하면서 일어나고 멸한다. 마음의 14가지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아비담마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3장 §8 해설 참조) 이렇게 14가지로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마음을 역할별로 분류하는 옛 스님들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다. 이런 14가지 역할을 하는 마음들을 다시 마음이 일어나는 곳(bhuumi), 선/악/무기 등의 종류(jaati) 등으로 분류한 것이 89/121가지 마음이다.
넷째, 거듭 말하지만 마음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상(aarammana)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을 가질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를 연구하는 것도 아비담마의 큰 주제이다. 사실 이것은 수행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중생은 항상 어떤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하여 해로운 업이나 유익한 업을 짓고 그래서 육도윤회하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대상은 ① 감성의 물질(pasaada-ruupa) ② 미세한 물질(sukhuma-ruupa) ③ 이전의 마음(citta) ④ 마음부수들 ⑤ 열반 ⑥ 개념(pannatti)의 여섯 종류라고 한다. 이 여섯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섯 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여 내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매순간 살펴서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피하고 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향해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혹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통해 해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을 일으키도록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aara, 如理作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다섯째, 남방 아비담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물/심의 현상은 생멸을 거듭하지만 물질이 생멸하는 속도와 마음이 생멸하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고 설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물질이 머무는 동안 마음은 16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친다.(물질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합치면 17번이 되고 그래서 『상가하』의 저자인 아누룻다 스님은 17번으로 정리하셨다) 북방 설일체유부 등의 아비다르마에서는 마음과 물질간의 이런 차이점까지 세밀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마음=17:1의 속도이므로 대상을 아는 것을 그 존재이유로 하는 마음은 당연히 하나의 물질적인 대상을 두고 최대 열일곱 번을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매에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 유정들이 한 대상을 두고 일으킬 수 있는 최대의 마음순간[心刹那, citta-kkhana]이다.
여섯째, 이것을 바탕으로 아비담마의 인식론은 정교하게 체계화되었다. 이렇게 인식과정을 정리해 보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 같은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엄연한 법칙에 의해서 매찰나 생멸하고 있다는 것을 아비담마는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정해진 법칙을 아비담마에서는 니야마(niyama)라 부르고 있다. 이런 마음의 법칙을 이해하면 오리무중이요 도저히 시종을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마음도 그 가닥이 잡히게 되고 어떠한 현상이 내 마음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속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힘을 아비담마는 길러주는 것이다.
일곱째, 남방 아바담마에서만 설하는 것이 24가지 빳짜야(조건)이다. 물론 북방 아비다르마에서도 조건에 대해서 설하기는 하지만 남방과 같이 정교하지는 않다. 남방에서는 연기법을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한다. 이것이 남방불교가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구도로만 남방불교를 이해해서 폄하하는 것은 남방불교에서 연기를 설명하는 심도 깊은 체계인 빳타나(상호의존)를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남방에서는 연기법을 일단 윤회를 설명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매찰나 찰나에 중중무진으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은 24가지 빳짜야(조건)로 조직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빳타나이다. 이것은 북방의 화엄에서 연기를 중중무진 연기로, 법계연기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봐야 한다.
여덟째, 이런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아비담마는 내 마음에서 매찰나 일어나는 모든 해로운 것들에 속지 말고 그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하고 그런 노력을 체계적으로 반복해서 닦아서 필경에는 모든 해로움[不善]의 뿌리인 저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痴]을 다 잘라버려서 성자가 되고 아라한이 되도록 인도하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두 가지로 이런 수행을 체계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은 이런 도닦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도닦음을 수행센터에서 찾고 가부좌하고 앉는데서만 찾으면 그것 또한 옳지는 않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매순간 도를 닦는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도닦는 가장 고귀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수행센터가 설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도 닦는 좋은 습관을 길러 일상생활에서도 매순간 마음챙기는 노력을 쉼 없이 해야 할 것이다.
도닦음은 매순간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아비담마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그 귀중한 시간들은 바로 나 자신을 통찰하는 도닦는 순간들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매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의 일어나는 양태에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견주어보지 않으면 아비담마는 진전이 없다. 아비담마는 결코 책을 통해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책의 가르침을 내 마음에 적용시켜야만 이해된다.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법수들은 실제 내 마음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비담마야말로 진정한 위빳사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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