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탑승안내를 하듯이
“내가 요즘 화엄경 공부 얼마나 많이 하는지 정신이 없어.아따 힘이 드네. 혼이 싹 빠지네.”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인터넷으로 염화실을 열지 않으셨다면 공부 못했을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렇지 한 둘이 아니지. 염화실 때문에 불교 공부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네.”
*
법회가 열리기 직전 부회장 스님이 성지순례 안내를 스님들에게 하시면서
“비행기를 탈 때 마지막 탑승 안내 하듯이”라는 표현을 하셨다. 큰스님께서 그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웃으셨다.
화엄산림이 벌써 만 4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한 중간이고 ‘마지막 탑승’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스님들의 빈자리가 많았다. 그래도 오신 스님들은 밝고 환하게 빈자리를 채웠다.
*
부회장 스님은 시내에 새로 절을 개원하셔서 얼굴이 싱글벙글이셨다.
“새 절 주지가 되니 기분이 좋제? 신나지?”
큰스님이 함께 웃으셨다.
“예. 절이 아주 요사채가 아주 좋습니다. 넓고요. 신도들 200명이 한자리에 모일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아주 뼈를 묻을 작정을 하고 열심히 포교를 해. 시내에 있을 때 포교 열심히 해야지.”
큰스님이 덕담하셨다.
*
자원봉사를 하러 오시는 보살님들에게 큰스님은
“보살님들 봉사 덕택에 스님들 공부 잘하고 잘 굴러갑니다.”하셨다.
*
여러 스님들의 법회에 다니시는 학무거사님에게 큰스님이 노스님들의 안부를 물으셨다.
편안하신 스님도 계셨고, 갑자기 몸이 아프신 스님들도 계셨다.
*
책상 위에 못보던 액자가 있었는데 지난 주, 불자를 위한 화엄경에 할머니를 따라왔던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애기가 아주 잘 그렸어. 유치원에서 방학이니까. 잘 보이는데 내려놓고 사진 찍어서 올려라.”
하셨다. 그림 속에는 부처님과 큰스님이 나란히 있었다.
*
화엄산림을 촬영하는 BBS 프로듀서가 인사를 올렸다.
“요즘 비비에스 보는 사람이 많제? 차마고도를 사가지고 비비에서에서 방영을 하대? 참 좋대. 그건 뭐 일년내내 해도 좋대”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七
梵行品 第十六
대방광불화엄경 제 17권, 품수로는 16번째 품 범행품을 할 차례다.
불교의 기념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기념일은 내일모레(2014.1. 8) 부처님 성도일이다.
화엄경은 부처님 성도와 제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해서 6년간 피나는 고행을 하신 뒤에 부다가야의 보리수 나무 밑 금강보좌에 앉아서 마지막 바른 선정에 들었다. 이름이 근사하게 금강보좌이지 가보면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시커먼 바위 덩어리다. 고행을 다 끝내고 목욕을 하시고 우유죽을 드신 부처님이 기력을 차려서 제대로 된 선정에 들어간 것은 7일간이었다.
7일간 선정에 들었다가 납월 8일(음력 12월 8일) 비로소 큰 깨달음을 이룬다.
7일, 2·7일, 3·7일, 7·7 사십구재 등등 불교에서 7을 많이 이야기 하는 최초 근거가 바로 부처님께서 7일 동안 마지막 바른 선정에 들어서 성도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7일간 바른 선정에 들었다가 성도하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다 설파하셨다. 그것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듣는 사람의 상하 근기와 상관없이 부처님 자신이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을 거침없이 설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신앙의 입장에서 화엄경을 보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의 입장, 대승경전의 경전 성립사적인 입장을 본다면 이와는 다른 학설이 많다. 그러나 불자로서, 또 화엄경을 바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7일간의 선정에 들어 깨달은 바를 막힘없이 설했다고 보는 이 입장이 아주 맞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러나 어쨌든 부처님은 ‘사람이 모두가 부처님이다’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남김없이 설파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죄업이니, 과거 한량없는 세월동안에 지은 업장이니 등등 불교에서도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안목이 많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업장 많고 죄업 많은 사람을 ‘본래로 부처다’ 라고 부처로서 격상을 시켰다.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인해 부처님 이전의 과거사람이나 부처님 당시 사람이나 부처님 이후에 우리보다 더 먼 미래에 올 많고 많은 인류가 모두 본질적으로 부처님이 되었다. 이 사실을 일깨운 사건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인류사에서 최고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남김없이 설파한 화엄경은 인류가 남긴 최고의 걸작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걸작품은 없다.
*
우리는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스님들은 아마추어도 아니고 불교의 프로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늘 화엄경을 가까이 하고 포교일선에서 전법을 할 때도 화엄경으로 전법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화엄경이 제일 좋은 교재다. 내가 화엄경 공부를 해보니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자나깨나 화엄경을 곁에다 두고 불교 이야기를 꺼냈다 하면 ‘화엄경 무슨 품에’ 이렇게 법문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한 전법활동이 아닐까 하는 욕심도 내본다.
一, 正念天子의 請法
爾時에 正念天子가 白法慧菩薩言호대 佛子야 一切世界諸菩薩衆이 依如來敎하야 染衣出家인댄 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從菩薩位로 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梵行)이 청정하게 되오며,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道)에 이르리이까."
*
정념천자(正念天子)의 청법(請法): 정념천자가 범행에 대하여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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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예불을 올릴 때 ‘청정범행 닦고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하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읽는다. 일반 불교의 안목에서 볼 때 청정범행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준수하고 살아가는 것을 청정범행이라고 한다. 계율이 물론 기본이다. 거기에 부연하면 삼천위의가 있고 팔만가지 세부적인 행동 지침이 있다.
그런데 여기 범행품에서는 깨달음의 입장에서, 화엄경의 안목으로 볼 때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일반불교의 안목과는 차원이 다르고 파격적이다. 범행품을 잘못 읽으면 좀 넘칠 수도 있고, 건방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뿐인 인생에 부처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면, 실천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부처님의 고준한 안목, 고준한 설법을 통해서 부처님의 견해가 무엇인지 한 번 접해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고 큰 복이 아닐까 한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정념천자(正念天子)가 : 정념천자가
백법혜보살언(白法慧菩薩言)호대 : 법혜보살에게 고해 말하대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일체세계제보살중(一切世界諸菩薩衆)이 : 일체 세계 모든 보살대중들이
의여래교(依如來敎)하야 :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염의출가(染衣出家)인댄 : 염의 출가를 했다면, 여기 스님들 모두가 염의 출가를 했다. 먹물옷을 입고 물들인 가사를 입은 것이 염의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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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이득범행청정(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 어떻게 청정범행이 되어서
종보살위(從菩薩位)로 :보살의 지위로부터
체어무상보리지도(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무상보리의 도에 이르게 되겠나이까, 하고 정념천자가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화엄경 안목으로는 불교에 입문한 사람은 모두가 보살지위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중생이라고 하는 말도 자주하지만 화엄경에서는 모든 불자를 다 보살지위로 본다.
二, 法慧菩薩의 說法
1, 十種觀察名
法慧菩薩이 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修梵行時에 應以十法으로 而爲所緣하야 作意觀察이니 所謂身과 身業과 語와 語業과 意와 意業과 佛과 法과 僧과 戒니라 應如是觀호대 爲身是梵行耶아 乃至戒是梵行耶아
법혜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이니라. 마땅히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내지 계율이 범행인가 할 것이니라"
*
법혜보살(法慧菩薩)의 설법(說法)
*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이 ‘어떻게 청정범행이 되어서 최상가는 깨달음의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정념천자의 질문에 대한 법혜보살의 설법이다.
*
십종관찰명(十種觀察名):열 가지 관찰하는 법의 이름
*
열 가지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
법혜보살(法慧菩薩)이 : 법혜보살이 이렇게
언(言)하사대: 말씀하사대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수범행시(修梵行時)에: 청정범행을 닦을 때
응이십법(應以十法)으로 :응당히 열 가지 법으로써
이위소연(而爲所緣)하야:반연할 바를 삼아서
작의관찰(作意觀察)이니:생각을 지어서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사물을 보면 거기에 다른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습관대로 기존의 안목대로 본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마음을 지어서, 뜻을 내어서, 작의관찰하라고 한다.
지을 작(作), 뜻 의(意)자 생각을 지어서 관찰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꽃이 있다고 하면 ‘저 꽃은 본질적으로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는 꽃이라고 하는 그 현상에 이끌릴 것이 아니라 ‘저 또한 하나의 생물이다’이렇게 본질적인 관찰을 하는 것이 작의관찰이다.
*
소위신(所謂身)과 : 소위 몸과
신업(身業)과 : 몸이 짓는 업과
어(語)와 : 말과
어업(語業)과 : 말이 짓는 업과
의(意)와 : 생각과
의업(意業)과 : 생각의 업
불(佛)과: 그리고 불
법(法)과: 법
승(僧)과: 승
계(戒)니라 : 그리고 계 이렇게 하면 꼭 열 가지가 된다. 열 가지를 맞추려는 의도도 있지만, 화엄경에서 대부분의 법문이 열 가지 숫자로 나가는 것은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전부 완전무결하다’ ‘본래로 원만하다’고 하는 원리에 근거해서 법문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게송을 읊는 것도 한 보살이 나와서 게송을 읊으면 꼭 열 자리 노래를 부르고 들어간다. 게송 열 개를 읊고 들어가야 직성이 풀린다. 화엄에서는 모든 존재의 실상을 그렇게 원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간혹 아홉 가지도 있고, 11가지도 있지만 숫자 10이 화엄경 법문의 원칙적인 숫자다.
*
응여시관(應如是觀)호대: 이와 같이 응당히 관하대
위신시범행야(爲身是梵行耶)아: 진정 청정한 범행이란 무엇인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몸이 범행이 되는가? 몸 자체가 청정한 범행인가? 신업인가? 어인가? 어업인가? 의인가? 의업인가? 불인가? 법인가? 승인가?
내지계시범행야(乃至戒是梵行耶)아:내지 계가 범행인가? 이런 식으로 관찰한다.
2, 身
若身이 是梵行者인댄 當知梵行이 則爲非善이며 則爲非法이며 則爲渾濁이며 則爲臭惡이며 則爲不淨이며 則爲可厭이며 則爲違逆이며 則爲雜染이며 則爲死屍며 則爲蟲聚니라
"만일 몸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선하지 않은 것이며, 법답지 않은 것이며, 흐린 것이며, 냄새나는 것이며, 부정한 것이며, 싫은 것이며, 어기는 것이며, 잡되고 물든 것이며, 송장이며, 벌레무더기인 줄을 알 것이니라."
*
신(身): 몸을 관찰하다
*
첫 과목이 신이다. 신의 실체를 우리가 한 번 보자는 것이다.
신이 범행이냐? 몸뚱이가 청정범행이냐? 우리 한 번 냉정하게, 그 동안의 불교 지식을 다 내려놓고 새로운 시각에서 한 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약신(若身)이: 만약 이 몸뚱이가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청정범행이라고 한다면
당지범행(當知梵行)이 : 범행은
즉위비선(則爲非善)이며 : 좋지 않은 것이다. 이 몸뚱이 좋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몸은 늘 아프고, 병도 보통 한꺼번에 두 세가지씩 가지고 있다. 설사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 번 병이 나기도 하고 그 병이 끝나면 다른 병이 생길 수도 있다.
즉위비법(則爲非法)이며 : 또 몸은 법답지도 못하다. 법이 아니다.
즉위혼탁(則爲渾濁)이며 : 혼탁한 것이고
즉위취악(則爲臭惡)이며 :취악한 것이고
즉위부정(則爲不淨)이며 : 부정한 것이다.
즉위가염(則爲可厭)이며 : 싫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싫은 것이다. 부정하고 취악하고 혼탁하고 늘 씻어줘야 하고, 먹여줘야 하고, 입혀줘야 한다. 그렇게 해도 항상 탈이 난다. 몸은 참 가관이다. 우리 몸뚱이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범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위위역(則爲違逆)이며 : 계속 어기고 있다.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몸이 또 마음과 다르게 말을 안 듣고 춥다고 한다.
즉위잡염(則爲雜染)이며 : 이것 저것 다 물들고 뒤섞여 있다.
즉위사시(則爲死屍)며 :끝내가서 몸은 송장이다. 몸뚱이라는 것이 끝내 송장이 아니면 무엇인가? 송장도 그냥 가만히 송장이 아니다.
즉위충취(則爲蟲聚)니라: 벌레덩어리다. 살아있어도 벌레덩어리인데 죽고나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것이 몸이다. 이것을 가지고 청정범행이라고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잘못 읽으면 사람이 건방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화엄경만이 설할 수 있는 속이 시원한 내용이다.
말하자면 일체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몸뚱이라는 것은 조금만 따져봐도 전부 공하고 별로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송장 덩어리고 온갖 벌레가 파먹는다. 인도 같이 더운 나라에서 시체가 하나 있다면 하루 안에 그 속에서 벌레가 여러 수천, 수만 마리가 생겨서 야단법석을 떨게 된다.
3, 身業
若身業이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行住坐臥며 左右顧視며 屈伸俯仰이니라
"만일 몸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가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왼쪽으로 돌아보는 것, 오른쪽으로 돌아보는 것, 구부리는 것, 펴는 것, 숙이는 것. 우러르는 것이니라."
*
신업(身業): 몸의 업을 관찰하다
*
약신업(若身業)이 : 만약 신업이, 신업은 몸이 하는 짓이다.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몸이 하는 짓이 범행인데
범행(梵行)이 : 범행이라고 하는 것이
즉시행주좌와(則是行住坐臥)며 : 곧 행주좌와며
좌우고시(左右顧視)며 :오른 쪽으로 돌아보기도 하고 왼쪽으로 돌아보기도 하고
굴신부앙(屈伸俯仰)이니라: 위로도 쳐다보기도 하고 밑으로 구부려 보기도 하는 것, 이것이 몸이 하는 짓인데 그러면 그것이 범행인가? 앉는 것이 범행이라면 서는 건 범행이 아니어야 될 것 아니냐? 또 눕는 것이 범행이라면 걸어다니는 것은 범행이 아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앉거나 서거나 한 가지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청정범행의 실체를 이렇게 드러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착각하고 속아 산다. 많은 세월을 너무 엄청난 것에 속아 사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기꾼이 와서 나를 속여서 속은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어떤 잘못된 의식에 속아서 사는 세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속지 않으려면 사람이 툭 터져야 한다. 화엄경을 보고 툭 터지지 않는다면 언제 터질 기회가 오겠는가. 범행품의 내용은 사람을 툭 터지고 시원하게 해준다.
4, 語
若語가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音聲風息이며 脣舌喉吻이며 吐納抑縱이며 高低淸濁이니라
"만일 말이 범행(梵行)이라면, 범행은 곧 음성, 숨, 가슴, 혀, 목구멍, 입술, 뱉고 삼킴, 들고 놓음, 고저(高低), 청탁(淸濁)일 것이니라."
*
어(語): 말을 관찰하다
*
약어(若語)가 : 만약 말이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범행이라고 한다면
범행(梵行)이: 범행은
즉시음성풍식(則是音聲風息)이며 : 즉시 소리, 말할 때 바람이 들락날락 하는 풍식, 바람이 없으면 말이 생길 수가 없다. 모든 소리가 다 그렇다.
순설후문(脣舌喉吻)이며 : 입술 혀 목구멍 입술 이런 것들이 전부 동원이 되어서 소리를 내고 말을 한다.
토납억종(吐納抑縱)이며 : 토하고 또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쫓아가고
고저청탁(高低淸濁)이니라 : 높은 소리 낮은 소리 맑은 소리 탁한 소리 이런 것이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범행인가? 무엇을 가지고 꼬집어서 범행이라고 할 것이냐?
5, 語業
若語業이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起居問訊이며 略說廣說이며 喩說直說이며 讚說毁說이며 安立說隨俗說顯了說이니라
"만일 말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인사, 문안하고 대강 말하고 널리 말하고 비유로 말하고 직설(直說)하고 칭찬하고 헐뜯고 방편으로 말하고[安立說] 세속 따라 말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리라."
*
어업(語業): 말[言]의 업(業)을 관찰하다
*
약어업(若語業)이: 만약 어업이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범행인댄
범행(梵行)이 : 범행이
즉시기거문신(則是起居問訊)이며 : 즉시 기거에 문신인가? 문신은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이다. 말소리를 내서 아침에 일어나서 문안 인사를 한다.
*
약설광설(略說廣說)이며 : 간략히도 말하고, 길게도 말하고
유설직설(喩說直說)이며 :비유로서도 말하기도 하고 직설로도 말하고
찬설훼설(讚說毁說)이며 : 찬탄하는 소리, 훼방하는 소리
안립설수속설현요설(安立說隨俗說顯了說)이니라: 안립설은 정돈하고 배대하고 안배하는 소리다. 세속의 관념이라든지 관습을 따르는 이야기가 수속설이다. 그런 것이 많다. 현요설은 이치를 다 드러내서 하는 소리다. 말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지 거기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다.
6, 意
若意가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應是覺이며 是觀이며 是分別이며 是種種分別이며 是憶念이며 是種種憶念이며 是思惟며 是種種思惟며 是幻術이며 是眠夢이니라
"만일 뜻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깨달음[覺]이며 관찰이며 분별이며 갖가지 분별이며 기억함이며 갖가지 기억함이며 생각함이며 갖가지 생각함이며 요술이며 꿈이리라."
*
의(意): 뜻을 관찰하다
*
약의(若意)가 : 만약 의가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이 범행자인댄
범행(梵行)이 : 범행은
즉응시각(則應是覺)이며 : 뜻은 느끼는 것, 감각이다. 그러니까 의(意)가 범행이 아니고, 어(語)도 범행이 아니고, 신(身)도 범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
시관(是觀)이며 : 관찰하는 것이고
시분별(是分別)이며 :분별하는 것이고
시종종분별(是種種分別)이며 : 종종 분별하는 것이고
시억념(是憶念)이며: 기억하는 것이고
시종종억념(是種種憶念)이며 : 여러 가지를 다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전부 우리 의식이 하는 일이다.
*
시사유(是思惟)며 : 사유하는 것, 사유하는 것도 의식이 한다.
시종종사유(是種種思惟)며 :한 가지만 사유가 아니라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사유하고
시환술(是幻術)이며 : 우리 의식이 헛 것을 생각하는 것이 환술이다.
시면몽(是眠夢)이니라: 잠들어서 꿈꾸고 이런 것이 전부 우리 의식의 작용이다. 그러면 이런 작용들을 범행이라고 할 것인가?
‘청정범행 닦고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하는 털끝마저도 범하지 않는 사(事)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또 이렇게 범행의 실체를 완전히 꿰뚫어서 일체존재의 공성으로써 범행을 보는 중도적인 입장을 다 함께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7, 意業
若意業이 是梵行者인댄 當知梵行이 則是思想寒熱飢渴苦樂憂喜니라
"만일 뜻의 업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생각함[思]이며 생각[想]이며 추위며 더위며 주림이며 목마름이며 괴로움이며 즐거움이며 근심이며 기쁨이리라."
*
의업(意業): 뜻의 업을 관찰하다
*
약의업(若意業)이 : 만약 의업이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범행이라고 한다면
당지범행(當知梵行)이: 마땅히 알아라 범행이
즉시사상한열기갈고락우희(則是思想寒熱飢渴苦樂憂喜)니라: 즉시 사(思) 상(想) 한(寒) 열(熱)기(飢) 갈(渴) 고(苦) 락(樂) 우(憂) 희(喜) 전부 이렇게 숫자로 한 번 나열해 보는 것이다.
춥다, 덥다, 괴롭다, 즐겁다, 기쁘다, 근심스럽다, 이런 것은 다 생각이 짓는 업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한겨울에 영하 10도나 되면 대단히 춥다고 하지만 영상 5도 정도는 춥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 같이 더운 지방에서는 영상 5도만 되어도 추워서 죽는 사람이 있다. 전부 우리의 의식작용이고 습관이다. ‘사, 상, 한, 열, 기, 갈, 고, 락, 우, 희’ 이런 것은 전부 의식으로 빚어내는 감정들인데 그것을 청정범행이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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