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佛
若佛이 是梵行者인댄 爲色是佛耶아 受是佛耶아 想是佛耶아 行是佛耶아 識是佛耶아 爲相是佛耶아 好是佛耶아 神通이 是佛耶아 業行이 是佛耶아 果報가 是佛耶아
"만일 부처님이 범행(梵行)이라면, 색온(色蘊)이 부처인가. 수(受)온이 부처인가 상(相)온이 부처인가 행(行)온이 부처인가. 식(識)온이 부처인가 상(相)이 부처인가 호(好)가 부처인가 신통이 부처인가 업행(業行)이 부처인가 과보(果報)가 부처인가.”
*
불(佛): 부처님을 관찰하다
다음에 부처님까지 왔다.
*
약불(若佛)이: 만약 부처님이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이 범행이라고 한다면
위색시불야(爲色是佛耶)아: 부처님도 형색이 있다. 형색이 부처인가?
수시불야(受是佛耶)아: 부처님도 감정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 부처인가?
상시불야(想是佛耶)아 : 생각하는 것이 부처인가?
행시불야(行是佛耶)아 : 행은 생각이 계속 지어가는 것이다. 수상행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인가?
식시불야(識是佛耶)아 : 식이 부처인가?
위상시불야(爲相是佛耶)아 : 상은 32상이다. 32상이 부처인가?
호시불야(好是佛耶)아 : 80종호가 부처인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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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神通)이 : 신통이
시불야(是佛耶)아 : 불인가?
업행(業行)이 : 업행이
시불야(是佛耶)아 : 불인가?
과보(果報)가 : 과보가
시불야(是佛耶)아: 불인가? 청정범행이라고 할 만한 부처는 그 무엇도 실체가 없다.
9, 敎法
若法이 是梵行者인댄 爲寂滅이 是法耶아 涅槃이 是法耶아 不生이 是法耶아 不起가 是法耶아 不可說이 是法耶아 無分別이 是法耶아 無所行이 是法耶아 不合集이 是法耶아 不隨順이 是法耶아 無所得이 是法耶아
"만일 교법이 범행(梵行)이라면, 적멸(寂滅)이 법인가 열반이 법(法)인가. 생기지 않음이 법인가 일어나지 않음이 법인가 말할 수 없음이 법인가. 분별없음이 법인가 행할 바 없음이 법인가 모이지 않음이 법인가. 순종치 않음이 법인가, 얻을 바 없음이 법인가."
*
교법(敎法): 교법(敎法)을 관찰하다
*
약법(若法)이 :만약 법이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범행이라면
위적멸(爲寂滅)이 : 적멸이 법인가? 보통 적멸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열반경에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설산동자도 구법행각을 할 때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이라고 하는 구절을 듣는다. 제행은 무상해서 모든 것이 적멸한 도리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인생이 복잡하더라도 결국은 제행이 무상한 것이고 적멸이 근본이다. 끝내는 적멸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얼마나 근사한 법문인가. 설산동자가 그 소리를 듣고 한 번 착 깨달았다. 그런데 법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설산동자가 생각할 때 그 구절만 가지고는 부족한 법문이었다.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니 나찰이 숲속에서 나타나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설산동자가 “당신이 그런 법문을 했습니까?” 하니까 그렇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결국 설산동자는 다음 구절을 듣기 위해서 나찰에게 그야말로 뜨거운 사람의 피공양을 올리겠다고 약속을 한다.
“내가 먼저 먹히고 당신이 법문을 설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수고스럽더라도 먼저 법문을 설해주십시오.”그래서 다음 구절인 ‘생멸멸이적멸위락(生滅滅已寂滅爲樂)’이라고 하는 법문을 듣게 된다. 생멸을 멸하면 적멸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구절을 말해주고 나찰은 설산동자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나의 생명을 바쳐서 들은 소중한 법문입니다. 저 혼자만 듣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산동자는 자기의 피를 짜서, 더 이상 피가 안나올 때까지 암벽마다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 생멸멸이적멸위락(生滅滅已寂滅爲樂)’이라고 한껏 써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리고는 “이제 됐습니다. 내가 위에서 떨어질 터이니 받아서 먹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떨어지니 나찰이 천신으로 변해서 “나는 당신의 수행을 시험했습니다.”하고 그 몸을 받아주었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법을 위해서 몸을 잊는다고 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여기도 적멸이 나온다. 적멸(寂滅)은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현상은 이렇게 드러나 있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이고 동요하는 것이지만 그 움직이고 동요하는 현상의 내면에 적멸, 공성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법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적멸이 교법의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적멸부터 나왔다.
시법야(是法耶)아 :적멸이 법인가?
열반(涅槃)이 : 열반도
시법야(是法耶)아:법인가? 적멸 다음에 열반이 나온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요도에 따라서 매긴 순서라고도 볼 수 있다.적멸 다음에 열반이 법이냐? 하고 물었다.
불생(不生)이 : 불생이
시법야(是法耶)아 : 법이냐? 우리가 흔히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불기(不起)가 :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불기가
시법야(是法耶)아: 법이냐?
불가설(不可說)이 : 가히 설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이치가
시법야(是法耶)아: 법이냐?
무분별(無分別)이 : 현상으로는 분별로 꽉 차있지만 사실 그 본질은 무분별이라고 하는 무분별이
시법야(是法耶)아: 법이냐?
무소행(無所行)이 : 행할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
시법야(是法耶)아 : 법이냐?
불합집(不合集)이 :모든 것은 합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몸도 합성이 되어 있고 일체가 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독립된 실체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집합하지 않는 것이
시법야(是法耶)아 : 법이냐?
불수순(不隨順)이 : 수순하지 않는 것이
시법야(是法耶)아 : 법이냐?
무소득(無所得)이 : 무소득이
시법야(是法耶)아: 법이냐? 반야심경의 종지가 이무소득(以無所得)이다. ‘이무소득고로’ 할 때의 무소득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 교법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이론들이다.
책을 펼쳤다 하면 으레 여기 소개된 교법들이 나온다.
만약에 법이 청정범행이라면 이러한 교법들 중에 그 무엇을 꼬집어서 청정범행이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10, 僧
若僧이 是梵行者인댄 爲預流向이 是僧耶아 預流果가 是僧耶아 一來向이 是僧耶아 一來果가 是僧耶아 不還向이 是僧耶아 不還果가 是僧耶아 阿羅漢向이 是僧耶아 阿羅漢果가 是僧耶아 三明이 是僧耶아 六通이 是僧耶아
"만일 스님네가 범행(梵行)이라면, 예류향(豫流向)이 스님인가. 예류과(果)가 스님인가
사다함(斯多含)향(向)이 스님인가. 사다함(斯多含)과(果)가 스님인가, 아나함(阿那含)향이 스님인가 아나함(阿那含)과(果)가 스님인가. 아라한(阿羅漢)향이 스님인가. 아라한(阿羅漢)과가 스님인가. 삼명(三明)이 스님인가 육통(六通)이 스님인가."
*
승(僧): 스님을 관찰하다
열 번째는 승이다.
*
약승(若僧)이: 스님이 만약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 범행이라고 하면 스님은
위예류향(爲預流向)이 :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그 사과(四果)를 지금 이야기 하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수행자라고 하면 무조건 이 사과 중에 어딘가에 해당이 되어야 한다. 예류향 성인의 무리에 참여하는 것이
시승야(是僧耶)아: 승인가?
예류과(預流果)가: 참여한 다음의 어떤 결과를 예류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 화엄법회에 동참했다. 동참하는 일을 예류향이라고 하면 동참해서 공부하면 거기에 대한 결과가 있다. 그것을 예류과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과가 다 그렇다. 예류과가
시승야(是僧耶)아: 승인가?
*
일래향(一來向)이 : 바라문은 인생을 사기(四期)로 나누는데 금강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바라문들은 7.8세에 처음 출가를 한다. 그래서 공부를 충분히 하고 20세 전후가 되면 다시 환속을 한다. 그것이 한번 갔다온다고 해서 일래향이다. 일래향, 한 번 갔다 온 것이
시승야(是僧耶)아: 승인가?
*
일래과(一來果)가: 한번 갔다 오는 그 결과를 가지고
시승야(是僧耶)아: 승이라고 하는가? 이야기는 동일하다.
불환향(不還向)이: 다음에 한 번 속가에 갔다 오면 불환이다. 더 이상 세속에 돌아오지 않는다. 바라문들은 가정을 다 꾸려놓고 집안도 충분히 살 수 있도록 해놓고 나서 40세 전후가 되면 다시 출가를 한다. 그렇게 재출가를 하면 더 이상 속가로 안돌아오기 때문에 불환이다. 속가로 돌아오지 않는 불환향이
시승야(是僧耶)아 : 승인가?
불환과(不還果)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입장에서 과가 있다. 이 불환과가
시승야(是僧耶)아:승인가?
바라문들은 처음 7, 8세에 출가를 하고 20세에 환속을 해서 집안을 다 꾸려놓고 다시 40세에 재차 출가를 한다. 이렇게 두 번 출가를 하는 힌두교 바라문 성직자들의 전통은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재차 출가를 해서는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고 전법활동을 하느라 유행을 하며 바라문교를 펴고 의식을 집행한다. 그런 식으로 일생의 주기가 짜여져 있다.
간혹 금강경을 해석하면서 ‘천상과 인간을 오간다’ ‘죽은 후 천상에 갔다온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사실 상징이다. 인간 세상은 세속이고 천상은 출가한 세상을 상징한다. 사찰이면 사찰, 바라문이라면 힌두교의 사원이 천상이다. 그런 상징을 꼭 죽어서 천상에 가고 천상에서 다시 죽어서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하면 안 된다. 죽어서 천상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누가 알 것이며, 설사 천상에 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다시 인간 세상에 와서 수행을 할지 안할지를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다 해결되는 문제다. 금강경 강의를 할 때도 그렇게 합리적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 일래향은 한 번 갔다 오는 것이고, 불환은 재출가를 하여 다시는 세속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라한향(阿羅漢向)이 : 아라한향이
시승야(是僧耶)아 : 승인가?
아라한은 완전히 유행기다. 바라문의 마지막이 유행기인데 돌아다니면서 전법 활동을 하는 기간이다.
아라한과(阿羅漢果)가 : 그 과가 아라한과인데 아라한과가
시승야(是僧耶)아 : 승인가?
출가한 사람은 이 네가지 과에 다 해당이 되는데 그 무엇이 승인가를 묻고 있다.
삼명(三明)이 : 삼명이
시승야(是僧耶)아: 승인가?
육통(六通)이 : 육통이
시승야(是僧耶)아 :승인가? 수행을 잘하면 삼명을 얻을 수 있고 육신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삼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승려냐? 육신통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승인가? 그 무엇도 승이라고 할 것이 없다.
승이라고 할 것이 없으면 청정범행은 날아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산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말 뿐이고 본질은 공성이다, 텅 빈 것이다, 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11, 戒律
若戒가 是梵行者인댄 爲壇場이 是戒耶아 問淸淨이 是戒耶아 敎威儀가 是戒耶아 三說羯磨가 是戒耶아 和尙이 是戒耶아 阿闍黎가 是戒耶아 剃髮이 是戒耶아 着袈裟衣가 是戒耶아 乞食이 是戒耶아 正命이 是戒耶아
"만일 계율이 범행(汎行)이라면 계단[壇場]이 계율인가. 청정한가를 묻는 것이 계율인가 위의(威義)를 가르침이 계율인가. 갈마를 세 번 말함이 계율인가. 화상(和尙)이 계율인가 아사리(阿闍梨)가. 계율인가 머리 깎는 것이 계율인가. 가사 입은 것이 계율인가 걸식함이 계율인가. 정명(正命)이 계율인가.
*
계율(戒律): 계율을 관찰하다
*
다음은 열 한 번째로 계율이다. 계율이야말로 청정범행과 제일 밀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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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계(若戒)가 : 만약 계가
시범행자(是梵行者)인댄 :이 범행자인댄
위단장(爲壇場)이 : 단장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범어사에도 금강계단이 있고 통도사에도 금강계단이 있다. 계를 설할 때는 단을 차린다. 늘 차려져 있는 곳도 있고 임시로 차려있는 경우도 있다. 그 단에 삼사칠정이라고 해서 열 명의 스님이 앉아있다. 그 단이 계단이고 단장인데, 목수들이 뚝딱거리고 짜 놓은 단이 그럼 계인가? 하는 말이다. 물론 그 단장이 없으면 계를 설할 수도 없다.
문청정(問淸淨)이 : 청정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계를 받을 때 ‘계 받을 자격이 있느냐?’‘현재 청정하냐?’하는 것을 묻는다. 그러면 ‘예’ 하고 대답을 하는데, ‘청정하냐?’고 묻는 것이 계인가?
교위의(敎威儀)가 : 교수사가 위의를 가르친다. 승려는 이렇게 해야 되고, 사미는 이렇게 해야 되고, 보살은 이렇게 해야 되고,비구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그 위의를 말하는 것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삼설갈마(三說羯磨)가 :갈마 하는 데는 세 번을 묻는다. ‘네가 계를 받는데 하자가 없느냐? 오입죄를 짓지 않았느냐? 지은 사람은 나가거라.’ 이런 식으로 갈마를 한다. 이것을 계를 받을 수 있는 법도를 짓는다는 뜻으로 작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 번 설하는데, 그 세 번 갈마하는 것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화상(和尙)이 : 화상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아사리(阿闍黎)가 : 아사리는 화상이다. 삼화상 칠증사가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체발(剃髮)이 : 계를 받을 때는 으레 삭발을 하고 계를 받는데 그렇게 삭발하는 것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착가사의(着袈裟衣)가 : 어떤 계를 받든지 그 계에 맞는 가사를 입는데 가사의를 입는 것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걸식(乞食)이 : 수계하는 사람은 늘 걸식을 해야 하는데 그럼 그 걸식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정명(正命)이 : 정명이
시계야(是戒耶)아: 계인가? 정명은 8정도에 나오는 말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바르게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을 정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르게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맹자에 모순(矛盾)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창을 파는 것 보다 방패를 파는 것이 좋은 직업이다. 창은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창을 만드는 것이 정명이다. 방패 장사는 방패를 만드는 것이 정명이다. 어부는 고기 잡는 것이 정명이고 백정은 도살하는 것이 정명이다. 또 비구는 걸식 하는 것이 정명이다. 정명이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정명, 바른 직업이다.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 바른 직업이라는 뜻이 정명이지만, 무엇이 바른 직업인가 하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비구는 걸식을 해야 되고 백정은 도살해야 되고 어부는 고기 잡아야 되고, 창 만드는 사람은 창을 만들어야 되고, 방패 만드는 사람은 방패를 만들어야 되고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그 사실 하나하나가 전부 정명이다. 그렇게 정명을 이해해야 된다.
그러나 이왕이면 사람을 죽이는 창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방패로 장사를 하는게 낫다.
전에 어느 암자의 신도회장이 인쇄소를 하다가 고기잡이 하는 도구인 어구를 파는 장사로 전업을 했다. 부산사람인데, 그때 내가 실망을 많이 했다. 고기잡는 어구를 팔다가도 그것을 버리고 인쇄소를 차려야 옳지 인쇄소라고 하는 문화사업을 하다가 왜 어구를 파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입장도 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다 같이 수용하는 중도적인 입장으로 보려면 또 이런 입장에서도 정명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
계율에 대해서도 이렇게 저렇게 분석을 해보니 계율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없다. 계율이라고 하는 자체가 없는데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또 어디에 붙을 수가 있겠는가?
승이 그렇고 교법, 불, 의업, 의, 어, 어업, 신, 신업이 그렇고 모든 것이 분석해 보니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얼기설기 이론적으로 묶어서 청정범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2, 觀察成就相
如是觀已에 於身에 無所取며 於修에 無所着이며 於法에 無所住며 過去已滅이며 未來未至며 現在空寂이며 無作業者며 無受報者며 此世不移動이며 彼世不改變이니라
"이렇게 관찰하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물 것이 없으며,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이르지 못하였고 현재는 고요하며,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으며,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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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성취상(觀察成就相): 관찰이 성취되었을 때의 상(相)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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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관이(如是觀已)에 : 이와 같이 관찰한 뒤에
어신(於身)에 : 이 몸에
무소취(無所取)며 : 취할 바가 없으며. 그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몸에 대해 취할 것이 그 무엇도 없다.
어수(於修)에: 닦음에 있어서도
무소착(無所着)이며: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어법(於法)에 : 법에 대해서도
무소주(無所住)며 : 머물 바가 없다. 법도 여러 가지인데 어디에 머물러야 청정범행인가? 머물 데가 없는 것이다.
*
과거이멸(過去已滅)이며: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1초 전의 과거라고 해도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다.
미래미지(未來未至)며: 미래는 아직 안 왔다. 일초 이후의 미래라고 해도 아직 안 왔다.
현재공적(現在空寂)이며 : 현재는 실체가 없다. 우리가 현재라고 했을 때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 이멸이고 미래 미지며 현재 공적이다.
*
무작업자(無作業者)며 : 업을 짓는 자도 없으며
무수보자(無受報者)며 :과보를 받는 사람도 없으며
차세불이동(此世不移動)이며 :이 세상이 이동하지도 아니하고
피세불개변(彼世不改變)이니라 :저 세상이 변하거나 고쳐지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이렇게 관찰해서 성취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무로 돌아가고 공으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일체개공이다.
13, 梵行의 如實觀察
此中何法이 名爲梵行고 梵行이 從何處來며 誰之所有며 體爲是誰며 由誰而作고 爲是有아 爲是無아 爲是色가 爲非色가 爲是受아 爲非受아 爲是想가 爲非想가 爲是行가 爲非行가 爲是識가 爲非識가
"이 가운데 어느 법이 범행이냐, 범행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며 자체는 무엇이며 누구로 말미암아 지었는가.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색(色)인가 색이 아닌가 수(受)인가 수가 아닌가. 상(想)인가 상이 아닌가 행(行)인가 행이 아닌가 식(識)인가 식이 아닌가."
*
범행(梵行)의 여실관찰(如實觀察): 범행을 여실히 관찰하다
*
차중하법(此中何法)이 : 이 가운데 무슨 법이
명위범행(名爲梵行)고 : 이름이 범행이냐?
범행(梵行)이 :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종하처래(從何處來)며 : 어디로부터 왔느냐?
*
수지소유(誰之所有)며 : 누구 것이냐? 청정범행이 누구 것인가?
체위시수(體爲是誰)며 : 그 실체는 누가 되며
유수이작(由誰而作)고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를 말미암아 짓느냐?
위시유(爲是有)아 : 이것이 있음이 되는가?
위시무(爲是無)아 : 없음이 되는가?
함허스님의 금강경 오가해 서문에는 ‘공야(空耶)아 유야(有耶)아 오미지기소이(吾未知其所以)로다’ 하는 구절이 나온다. 금강경 오가해 서문도 손꼽을 만한 불교의 명작이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절명상(絶名相)호대 관고금(貫古今)하고 처일진(處一塵)호대 위육합(圍六合)이로다. 내함중묘(內含衆妙)하고 외응군기(外應群機)하며 주어삼재(主於三才)하고 왕어만법(王於萬法)하니 탕탕호기무비(蕩蕩乎其無比)요 외외호기무륜(巍巍乎其無倫)이로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그러한 사실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내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공야(空耶)아 유야(有耶)아 오미지기소이(吾未知其所以)로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금강경 오가해 서문도 아주 빼어난 법문이다.
여기도 ‘위시유(爲是有)아 위시무(爲是無)아’‘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라고 하는 구절이 나왔다.
*
위시색(爲是色)가 :청정범행은 색인가?
위비색(爲非色)가 : 색 아닌 것인가?
위시수(爲是受)아 : 수인가?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나온다.
위비수(爲非受)아 :수가 아닌 것인가?
위시상(爲是想)가 :상인가?
위비상(爲非想)가 : 상이 아닌 것인가?
위시행(爲是行)가 : 행인가?
위비행(爲非行)가 : 행이 아닌 것인가?
위시식(爲是識)가: 식인가?
위비식(爲非識)가: 식이 아닌 것인가?
여실관찰해야 그 범행이 제대로 드러난다. 그렇게 관찰하고 또 관찰해서 그 관찰이 아주 깊어졌을 때 그것이 청정범행이다. ‘청정범행 닦고 닦아’라는 것은 그러한 관찰로 이해해야 제대로 된 이해라는 것이다.
여실히 관찰해서 그 무엇도 실체가 없고 주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진정한 청정범행이다.
일종식을 하고, 옆도 안돌아보고 살고, 제 때 시간 맞춰서 딱딱 일어나서 예불하고, 그런 것은 다 좋은 일이지만 실체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고 보장이 안 되어 있다. 그동안 다른 저급한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청정범행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화엄경 안목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청정범행이라면 감기 한 번 걸려도 청정범행이 안 되고, 어디 가다 얼음에 미끄러져서 다리가 부러져도 청정범행이 안된다. 병이 나면 삼시 세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다. 아무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실체가 없다.
화엄경 안목으로 볼 때 청정범행이라는 것은 무엇을 해도 청정범행이라는 것이다. 잠을 자도 청정범행이고 잠을 깨도 청정범행이고 염불을 해도 청정범행이며 낮잠을 자도 청정범행이다. 범행의 여실관찰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14, 梵行成就相
如是觀察에 梵行法을 不可得故며 三世法이皆空寂故며 意無取着故며 心無障礙故며 所行無二故며 方便自在故며 受無相法故며 觀無相法故며 知佛法平等故며 具一切佛法故니 如是가 名爲淸淨梵行이니라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는 연고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한 연고며 뜻에 집착이 없는 연고며 마음에 장애가 없는 연고며 행할 것이 둘이 없는 연고며 방편이 자재한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받아들이는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관찰하는 연고며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연고며 온갖 부처님 법을 갖춘 연고이므로 이와 같이 청정한 범행이라 이름하느니라,"
*
범행성취상(梵行成就相) : 범행이 청정하게 성취된 상을 밝히다
*
여시관찰(如是觀察)에 : 여시관찰에
범행법(梵行法)을 : 범행이라는 법을
불가득고(不可得故)며 : 가히 얻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범행이라는 것은 어디 날아가 버리고 없는 것이다. 범행의 실체가 없으니까 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말만 있을 뿐이다. 청정범행은 불가득이니까 말뿐이다.
삼세법(三世法)이: 과거 현재 미래의 법이
개공적고(皆空寂故)며 : 다 공적한 까닭이다.
의무취착고(意無取着故)며: 생각으로 취착할 것이 없다. 마음에 무엇도 취할 것이 없다.
심무장애고(心無障礙故)며 :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연고다.
소행무이고(所行無二故)며: 서로 차별되거나 상대적인 것이 없다. 소행이 둘이 없고
방편자재고(方便自在故)며: 방편이 자재하다. 이런 자유자재한 방편, 범행품의 설법이 정말 화엄경다운 설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수무상법고(受無相法故)며 : 형상 없는 법을 받는 연고며
관무상법고(觀無相法故)며 : 형상 없는 법을 관찰하는 연고며
지불법평등고(知佛法平等故)며 : 불법의 평등을 아는 연고며
구일체불법고(具一切佛法故)니 :본래로 일체불법을 구족한 연고다. 본래로 일체불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 무엇이 불법이다 라고 해서 그것을 도입을 해서 물고 늘어지고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없다. 일체불법이 다 갖춰져 있다. 이미 갖춰져 있는 기존의 것에 눈을 뜨는 것이 화엄경의 이치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눈을 뜨는 것이지 다른 데서 찾는 것이 아니다.
*
이제 결론이 나온다.
여시(如是)가 : 이런 것이
명위청정범행(名爲淸淨梵行)이니라: 이름이 청정범행이다.
걸식을 하는데 옛날에는 멀리가서 걸식을 해와서 도량에 이르면 낮 12시가 넘을 수가 있다.
그럼 실컷 탁발해 왔는데 공양할 시간이 지나버렸다. 시간이 넘었다고 안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수행자가 잘 먹어서 소화를 해야 시주의 은혜를 갚는 것이지 안 먹고 버리면 시주의 은혜를 갚는 일이 아니다.
이런 작은 문제에 대해서도 초기 불교에서는 시시비비가 너무 많았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는 해가 넘어가도 먹어도 된다고 하자, 등등의 이야기도 있고 소금을 탁발했을 때 그것을 다 먹어야 하는가, 두어도 되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탁발한 음식은 그 때 다 먹고 남기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소금 쉬는 것 봤냐?’ 하는 말도 있듯이 소금은 쉬는 것도 아닌데 그 짠 것을 다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사소하게 탁발 음식 문제를 가지고 종파가 나눠지고 시시비비가 생기는 사례들이 초기 불교에 많았다. 승단중심, 권위 중심의 불교가 판을 치는 시대여서 형식적인 것에 너무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본래의 부처님 뜻이 아니다, 본래의 부처님 뜻으로 돌아가자, 라고 해서 운동을 일으킨 것이 대승불교운동이다. ‘대승경전을 많이 보라, 이것이 진짜 부처님 뜻이다.’ 라고 해서 그 때부터 대승경전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15, 修習十種法
復應修習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處非處智와 過現未來業報智와 諸禪解脫三昧智와 諸根勝劣智와 種種解智와 種種界智와 一切至處道智와 天眼無礙智와 宿命無礙智와 永斷習氣智니라 於如來十力에 一一觀察하면 一一力中에 有無量義니 悉應諮問이니라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옳은 곳 그른 곳을 아는 지혜 지난 세상 지금 세상 오는 세상의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 모든 근성(根性)의 승(勝)하고 열(劣)함을 아는 지혜 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 갖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 온갖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는 지혜 천안통이 걸림 없는 지혜 숙명통이 걸림없는 지혜 습기(習氣)를 영원히 끊는 지혜이니 여래의 열 가지 힘을 낱낱이 관찰하며, 낱낱 힘에 한량없는 뜻이 있는 것을 마땅히 물어야 하느니라."
*
수습십종법(修習十種法): 다시 열 가지의 법을 닦아야 한다
*
부처님을 표현할 때 십력으로써 많이 표현한다.
청정범행을 할 때 이 열 가지 힘은 반드시 갖추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
부응수습십종법(復應修習十種法)이니: 다시 응당히 십종법을 수습해야 하나니
하자(何者)가 :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가지 힘인가.
소위처비처지(所謂處非處智)와: 처와 비처, 도리와 도리 아닌 것,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아는 지혜다. 이치다, 이치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지혜가 처비처지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처비처지 하나만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늘 관심을 가져도 된다.
과현미래업보지(過現未來業報智)와 : 과거 현재 미래 업보지(業報智). 과거에 도대체 내가 무슨 공덕을 닦았고 화엄경과 무슨 인연을 맺었기에 여기에서 지금 화엄경을 공부하는가, 또 나에게 잘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과거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이렇게 안되는가, 등등의 이야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을 환히 하는 지혜다.
제선해탈삼매지(諸禪解脫三昧智)와: 제선과 해탈과 삼매를 아는 지혜
제근승열지(諸根勝劣智)와: 그 사람의 근기는 수승하다, 아니면 하열하다 하는 것을 아는 지혜다. 불법을 이해하는 기준은 따로 있어서 우리는 누가 진짜 불법에 대해서 근기가 수승한지 하열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종해지(種種解智)와 : 가지가지를 아는 지혜
종종계지(種種界智)와 :여러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
일체지처도지(一切至處道智)와 : 사후에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 또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죽어서 금생에 여기 와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일체지처도지다.
천안무애지(天眼無礙智)와 : 천안통이 걸림이 없는 것
숙명무애지(宿命無礙智)와 : 숙명통이 걸림이 없는 숙명무애지
영단습기지(永斷習氣智)니라: 습기를 영원히 끊는 지혜, 이것이 부처님이 표현할 때 열 가지 힘이다. 이 십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화엄경에 나온 것만 해도 한 10여 번은 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
어여래십력(於如來十力)에
일일관찰(一一觀察)하면: 일일 관찰하면
일일력중(一一力中)에 : 낱낱 힘 가운데서
유무량의(有無量義)니 : 한량없는 뜻이 있다. 앞에 십력의 첫 번째 처비처지가 나왔었다. 이치인가 이치가 아닌가를 아는 지혜인데 앉을 자리인가 앉을 자리가 아닌가, 갈 곳인가 안 갈 곳인가를 아는 지혜도 처비처지다. 예를 들어서 무슨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의 회원들만 다 모였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회원이 아닌 사람을 데려온다고 치자. 그 사람은 자기하고만 친했지 다른 사람하고 친한 것은 아니다. ‘괜찮다, 이 사람은 내가 잘 안다’고 해서 데려온다면 그 나머지 회원들은 어떻게 생각되겠는가. 그렇게 철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것도 처비처지를 모르는 행동이다. 그렇게 끌고가는 사람도 잘못이고 끌려가는 사람도 잘못이다. ‘거기는 내가 갈 데가 아닌데 왜 자꾸 데려가느냐’ 고 딱 잘랐어야 된다.
실응자문(悉應諮問)이니라: 다 응당히 물어야 된다. 자꾸 물어서 깨달아야 되고 물어서 알아야 된다는 이야기다.
16, 起大慈悲心
聞已에 應起大慈悲心하야 觀察衆生하야 而不捨離하며 思惟諸法하야 無有休息하며 行無上業하야 不求果報하고 了知境界가 如幻如夢하며 如影如響하며 亦如變化니 若諸菩薩이 能與如是觀行相應하야 於諸法中에 不生二解하면 一切佛法이 疾得現前하야 初發心時에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야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하리라
"또한 설법을 들은 뒤에는 크게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나니,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아니하며 위없는 업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말며 경계가 요술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지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觀行)함으로써 더불어 서로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여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성품임을 알 것이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를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아니하리라."
*
기대자비심(起大慈悲心): 그 위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
문이(聞已)에 : 듣고 나서, 묻고 나면 설명이 있을텐데 그 설명을 듣고나서
응기대자비심(應起大慈悲心)하야 : 응당히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관찰중생(觀察衆生)하야 : 중생을 관찰해서
이불사리(而不捨離)하며: 그 사람을 내치거나 버리지 말라.
사유제법(思惟諸法)하야 : 모든 법을 깊이 생각을 해서
무유휴식(無有休息)하며 :그 사유하는데 있어서 휴식하지 말며
행무상업(行無上業)하야: 위없는 업을 행해서
불구과보(不求果報)하고: 과보를 구하지 말라.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지난 번에 동화사한문불전승가대학원에서 3대 선시 강의를 했는데 그 중에 ‘수행을 하거나 아니면 도를 통해서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장사꾼과 같다’는 말이 있었다. 불법 가지고 이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시중의 장사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무서운 소리다.
불자들을 꾸준히 좋은 길로 인도하고 복 짓는 길, 이러한 불법 속으로 열심히 인도하다 보면 물질적인 이익도 절로 따라온다. 그런데 자기 수행이나 자기가 알고 있는 불법을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권하거나 선전한다면 불교가 장사꾼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불법은 세상에 권선하는 것이다.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좋은 길로 인도하면 예를 들어서 어디에 여행을 권해서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따라가서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고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나중에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 하게 되는 것이다. 불법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불법이 얼마나 귀중하고 좋은 것인가. 그 불법을 자꾸 널리 권하다 보면 사람들이 가만히 안 있고, 다른 것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야지 그 앞뒤가 바뀌면 장사꾼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요지경계(了知境界)가 : 경계가
여환여몽(如幻如夢)하며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여영여향(如影如響)하며 : 그림자 같고 메아리와 같고
역여변화(亦如變化)니 : 또한 변화하는 것과 같음을 환하게 깨달아 알아야 하느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 모든 보살이
능여여시관행상응(能與如是觀行相應)하야 :능히 이와 같은 관행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이 관행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참선’이라고 표현하는데 옛날 부처님 때부터 전통적으로 사유하는 방법은 관행이다. 예를 들어서 무상을 관하는 것도 관행이라고 하고 여기 나온 것처럼 그림자 같고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이런 것으로 사유하는 것도 관행이다. 그 관행이 관법이다.
요즘 수식관이라고 해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호흡을 예의 주시한다. 또 호흡만 예의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예의 주시한다 이 모두가 관행이다.
어제법중(於諸法中)에 :그래서 모든 법가운데
불생이해(不生二解)하면:다른 이해를 내지 않는다.
일체불법(一切佛法)이 : 일체 불법이
질득현전(疾得現前)하야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초발심시(初發心時)에 : 그래서 처음 마음을 발할 때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품은 초발심공덕품이다.
초발심공덕품에는 ‘초발심시에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라고 하는 구절이 무수히 나온다.
여기 이 구절을 살짝 끌고 와서 미리 맛을 보이는 것은 이 범행품과 초발심공덕품의 상관관계를 연결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일체법이 곧
즉심자성(卽心自性)하야: 자기 마음의 자성인 줄을 알아서
성취혜신(成就慧身)호대: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 것은
불유타오(不由他悟)하리라: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도 몇 번 나왔다. 결국 내 자신 속에서 내가 눈을 뜨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다.
화엄경의 사구게가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약 사람들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관할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라는 구절이다.
모든 것이 내 마음 자성자리임을 알라는 것이다.
이 화엄경 사구게는 아침종송에도 있고, 49재 시식문에도 들어있다.
이 한 구절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하고 마음을 담아서 종송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한다면 그 법력으로 모두가 제도되고 천도된다는 의미다.
일체법이 곧 내마음 자성자리임을 알아서 그것을 알면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아미타불을 부르든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든지 나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기회있을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불교는 타력신앙이 아니다.아미타불을 불러도 지장보살을 불러도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결코 타력신앙이 아니다.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다.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부르는 그 힘, 그 힘은 내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데 아령으로 운동하는 그 힘으로 알통이 생기고 팔이 튼튼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아령 때문에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이 와서 데려간다’는 등의 방편상 유혹하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힘이 나의 자생력이다. 나한테 저절로 생기는 힘이다. 결국 나의 힘이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바른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와서 건져준다는 것은 다 좋은 유혹이다. 그런 이야기는 얼마나 달콤한가. 그러나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 이치가 ‘염피관음력으로’이지 ‘염피관음력하야’가 아닌 것이다. ‘관세음보살력을 생각해서’가 아닌 것이다.
보문품을 해석하는 길이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자기의 관점에 따라서 ‘관세음보살의 힘을 생각해서’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그 힘으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아령을 가지고 내가 팔 운동하는 그 힘으로 내 몸이 건강해졌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내가 들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아령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즉심자성(卽心自性)하야 성취혜신(成就慧身)호대 불유타오(不由他悟)’ 이것이 참 중요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여러 번 나왔었다.
*
이렇게 해서 짧은 품이지만 범행품이 끝났다.
계율의 문제라든지 청정범행이 실체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사정없이 파헤친다. 범행품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기상천외한 설법이다.
이런 이치를 믿든 말든 화엄경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부처님 당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그냥 펼쳐보이는 것이다. 듣는 사람들 수준이 되느냐 안되느냐, 유치원생을 앉혀놓고 이런 소리를 하면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설해졌다.
이런 것을 우리가 언제 또 미루어 두었다가 공부할 기회가 있겠는가.
범행품은 어찌 보면 상당히 조심스러운 품이기도 하면서 또 시원한 법문이다.
이런 기회에 우리가 또 한 번 이런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줘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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