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3. 위빳사나란 무엇인가"-각묵-

수선님 2018. 7. 29. 11:57
3. 위빳사나란 무엇인가1)


3-1. 위빳사나란 무엇인가
vipassanā는 vi(분리해서)+√dṛś(to se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서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in-sight)을 의미한다. 물․심의 현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觀으로 옮겼고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한다. 영어로는 insight로 정착되었다.
『중부(Majjhima Nikāya)』의 131번 경부터 134번 경까지의 네 경은 부처님이 읊으신 ‘경사스런 하나에의 몰입(bhaddekaratta)’이라 부르는 게송에 대한 설명과 관계된 것이다. 이 게송의 핵심은,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2)


는 것이다. 여기서 ‘통찰하다’로 옮긴 원문은 다름 아닌 위빳사띠(vipassati)인데 위빳사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동사이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한결같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물․심의 현상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ṭivedha, 洞察)3) 혹은 수관(隨觀)하는 것(anupassanā)4)으로 위빳사나를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빳사나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향하는 지혜(반야, paññā)라는 것이다. 즉, 위빳사나는 바로 반야(지혜)를 뜻하지 선정이나 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5)


3-2. 사마타란 무엇인가
위빳사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남방 수행의 두 핵심 용어인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사마타와 대가 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samatha는 √śam (to be quie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원 의미는 ‘고요함, 맑음’ 등이다. 모든 해로운 상태[不善法]가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止로 옮겼다. 이 단어는 삼매(samādhi)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8가지 선정의 경지(samāpatti, 等持) ― 네 가지 색계 禪(아비담마에서는 5禪으로 나눔)과 네 가지 무색계 禪 ― 에서 마음의 집중[心一境, cittassa 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6)


여기서 우리는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사마타/禪/삼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숙지하고 있어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혼란없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첫째, 禪의 경지는 결코 깨달음의 경지(출세간)가 아니라는 것이다. 禪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이요 과정이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을 보는 데도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 할 명제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禪은 사마타의 경지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마타만으로는 결코 번뇌를 멸할 수가 없다.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안으로 들여다봐서(內觀 = in-sight = vipassanā) 번뇌를 꿰뚫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야 하겠으나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위빳사나(내관)는 禪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禪이 없이 위빳사나만 닦는 것을 숙카 위빳사나(sukkhavipassana, 마른 위빳사나)라고 부르며 경에 나오는 혜해탈(慧解脫, 빤냐 위뭇띠, paññā-vimutti)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禪(특히 무색계禪)과 위빳사나를 같이 닦아 해탈한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俱分解脫, 우바또 바가 위뭇띠, ubhatobhāga-vimutti)이라 부르는데 초기경(M65/i.439; M70/i.477)에도 나타나는 술어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禪定수행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으며 선정을 닦은 사람은 반드시 번뇌멸을 위한 내관을 닦아야 해탈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같이 닦은 자는 신통을 갖추지만 위빳사나만 닦아서 해탈한 자는 신통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번뇌멸이라는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행법이라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북방의 간화선이 묵조선을 묵묵함에 빠져있는 경지로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4/5禪이 바탕이 되어야만 다음의 四處 즉 무색계 四禪에 도달할 수 있다. 무색계선은 모두 색계 4/5禪을 닦아야 도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까시나 수행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여기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4장의 까시나 수행편을 참조할 것)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무색계선을 제4/5선에 포함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셋째, 이런 수행을 『청정도론』에서는 사문이 해야 할 일7)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이 없이는 번뇌멸의 위빳사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없는 위빳사나는 사실 불가능하다.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고서 어떻게 미세한 번뇌를 관찰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꿰뚫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위빳사나를 강조하는 주석서들에서도 카니까 사마디(khaṇika-samādhi, 刹那三昧)라 하여 어떤 식으로든 禪定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자세한 것은『아비담마 길라잡이』9장 §29의 해설을 참조할 것)


그리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지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전제를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한다.


전제⑴: 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라는 점이다. 마음과 마음들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 매순간에 기멸하는 마음들이 대상에 집중된 상태가 사마타이고 이 마음들이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전제⑵: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처럼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 ‘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이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든 사마타든 남방수행은 항상 대상에 대한 수행이다. 즉 위빳사나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하는 수행이고 사마타는 대상에 집중하여 대상이 익힌 표상이 되고 닮은 표상으로 승화되어 이런 표상에 집중된 상태가 다름 아닌 사마타이다.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물․심의 제 현상은 찰나생찰나멸이기 때문에(전제1) 마음들은 하나의 대상에만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없다. 집중하려는 그 대상은 찰나생찰나멸이라서 다음 찰나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들의 집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멸하지 않는 대상에 마음이 고착되어야한다. 남방불교에서는 개념(혹은 명칭, 빤냣띠)은 삼세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집중은 물․심의 현상인 법이 아닌 개념을 대상으로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마타는 대상에 집중하여 그것에서 익힌표상을 습득하고 다시 닮은 표상을 일으킬 때 그 닮은 표상은 개념(빤냣띠)이므로 그것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이라 불리는 개념인데 오랜 사마타 수행에 의해서 대상이 익힌표상이 되고 마침내 닮은 표상이 되어서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은 모두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고도로 집중이 된 상태를 사마타라고 한다.
이런 사마타는 전통적으로 ⑴ 감각젹 욕망 ⑵ 악의 ⑶ 해태와 혼침 ⑷ 들뜸과 후회 ⑸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8)를 극복한 상태로 표현한다. 『위바위니 띠까』는 해태․혼침과 들뜸․후회가 쌍으로 합해져서 나타나는 이유를 그들 각각의 기능과 조건과 대처하는 방법이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해태와 혼침은 둘 다 정신적인 해이함을 생기게 하는 기능을 하고 게으름과 나른함을 조건으로 가지며 정진(viriya)을 일으켜서 대처해야 한다. 들뜸과 후회는 동요를 생기게 하는 기능을 하고 혼란스러운 생각을 조건으로 하며 삼매(선정)를 닦아서 대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함만으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요함(사마타)의 상태란 마음들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내관)라는 강력한 지혜를 개발시켜서 이런 지혜의 힘을 통해서 이들을 여실지견하고 꿰뚫어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혜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고 선정의 힘이 아니면 지혜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은 초기경에서부터 남․북방 불교에서 모두 다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술어는 초기경에서도 거의 대부분 함께 붙어서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止觀수행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보조국사께서 定慧雙修를 주창하신 것이다.


3-3. 위빳사나의 대상 ― 법(dhamma, 물․심의 현상)
앞에서 사마타의 대상은 법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말했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빤냣띠, paññatti)이라는 술어와 법(담마, dhamma)이라는 술어를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냣띠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최소단위를 아비담마에서는 법(dhamma)이라 부른다. 개념(빤냣띠, paññatti)은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다.
반면에 위빳사나의 대상은 물․심의 현상 ― 바로 법이다. 남방에서 법은 찰라생찰라멸을 거듭하는 우리 인식에 개재되는 최소단위라고 규정한다. 남방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 1,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 52, 물질(구체적 물질 18, 추상적 물질 10), 열반 1하여 모두 82가지 법을 들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 물질은 구체적인 토대가 없으므로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 10가지를 제외한 72가지 법들을 위빳사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마음은 지나간 마음이다. 지나간 무수한 마음들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의 통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열반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성자들에게만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72가지 법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위빳사나이고 이렇게 제법을 철저하게 꿰뚫을 때 해로운 법(불선법)들의 뿌리인 탐․진․치를 철견하게 되고 그래서 탐․진․치를 멸절하여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빤냣띠)이요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숙지하고 있어야한다.


남방불교의 가장 큰 매력과 힘이라면 이런 두 유형의 참선수행(사마타/위빳사나)에 대한 분명한 방법론과 여러 단계의 명상주제를 체계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을 집대성해서 남방불교 부동의 준거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청정도론』이다. 그럼 『청정도론』에 준해서 위빳사나를 통한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3-4. 隨觀과 內觀(아누빳사나와 위빳사나)
위에서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수관(隨觀, anupassanā)하는 것이라 정의한다고 했다. 이처럼 삼특상을 수관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시작일 뿐 아니라 위빳사나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삼특상을 관찰하는 것을 隨觀이라고 부른다. 수관으로 옮긴 anupassanā는 anu(따라서)+√dṛś(to see)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따라서 본다’는 문자적인 뜻을 살려 ‘수관(隨觀)’으로 옮겼다. 내관(內觀)으로 옮기기도 하는 vipassanā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위빳사나는 10/11/16가지 위빳사나로 아비담마에 기초하여 물․심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체계 전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아누빳사나는 여기서처럼 삼특상 등을 관하는 것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빠띠삼비다막가』와 이를 주요한 출처로 삼는 『청정도론』에 의하면 18가지로 물질과 정신을 수관하는 것을 마하(큰) 위빳사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매 단계에서 정신-물리적인 현상을 수관(아누빳사나)하는 것이 내관(위빳사나)인 것이다.
『청정도론』을 보면 아래에 나타나는 열 단계의 위빳사나의 지혜는 거친 물질에서 출발해서 점점 미세한 마음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수관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쳐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 해탈도 아래 §27에 나타나듯이 공, 표상 없음, 원함 없음의 수관을 통해 성취된다. 그만큼 아누빳사나와 위빳사나, 즉 隨觀과 內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10단계의 위빳사나의 지혜를 설하고 있다. 그것은 ⑴ 명상의 지혜 ⑵ 생멸의 지혜 ⑶ 무너짐의 지혜 ⑷ 공포의 지혜 ⑸ 위험의 지혜 ⑹ 역겨움의 지혜 ⑺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⑻ 깊이 숙고하는 지혜 ⑼ 상카라[行]에 대한 평온의 지혜 ⑽ 수순하는 지혜이다.


이 10단계 각각은 모두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관찰(수관)하는 것이 더욱더 정교해지고 깊어지는 단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처럼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관찰[隨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무상․고․무아를 관찰하는 것으로 끝을 맫는다.


이 열가지 위빳사나의 지혜가운데서 ⑵ 생멸의 지혜와 ⑶ 무너짐의 지혜와 ⑼ 평온의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 간략하게 이들을 『청정도론』을 통해서 살펴보자.


<생멸의 지혜>
[청정도론 XXI]: “2. 무슨 목적으로 생멸의 지혜를 수행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삼특상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3. 무엇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아 특상들이 나타나지 않으며, 무엇이 그들을 가려 특상들이 나타나지 않은가? 무상의 특상은 생멸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흐름(santati)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고의 특상은 계속되는 압박(sampaṭi-pīḷana)을 마음에 잡도리않고, 행동거지[威儀, iriyā-patha]에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아의 특상은 갖가지 요소[界, dhātu]의 분리됨(vinibbhoga)을 마음에 잡도리않고, 견고함(ghana)으로 가려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
[청정도론 XXI]: “10. 그가 이와 같이 관찰 반복하여 무상․고․무아라고 물질과 정신을 고찰하고 조사할 때 그의 지혜가 예리하게 작용하면 상카라[行]들이 빨리 나타난다. 지혜가 예리하게 작용하고 상카라들이 빨리 나타날 때 그는 일어남(uppāda), 혹은 머묾(ṭhiti), 혹은 [업에서 생긴 물질의] 진행(pavatta), 혹은 [상카라들의] 표상(nimitta)을 취하지 않고, 오직 파괴함(khaya), 사그라짐(vaya), 무너짐(bheda), 멸함(nirodha)에 그의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11. 그가 ‘행들은 이와 같이 생겼다가 이와 같이 멸한다’라고 볼 때, 이 곳에서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라 불리는 위빳사나의 지혜가 일어난다. 그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어떻게 대상(ārammaṇa)을 깊이 숙고한 다음 무너짐을 수관하는 지혜가 위빳사나의 지혜인가? [생멸하는] 물질을 대상으로 가졌기 때문에 마음은 생겼다가 멸한다. 그 대상을 깊이 숙고한 다음 그 마음이 무너짐을 수관한다. 수관한다는 것은 어떻게 수관하는 것인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이라고 수관한다….(Ps.i.57-58)”
27. 그가 이와 같이 동요되지 않고 멸하지 않은 것은 멸할 것이고 부서지지 않은 것은 부서질 것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가 깨지는 것처럼, 가는 먼지가 흩어지는 것처럼, 볶인 깨가 터지는 것처럼, 모든 상카라[行]들의 일어남과 머묾과 진행과 표상을 내려놓고 오직 부서짐을 본다. 마치 눈을 가진 자가 호수가나 강둑에 서서 억수 같이 비가 내릴 때 물 표면에 커다란 수포 덩어리가 계속해서 생겼다가 곧 바로 부서짐을 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상카라[行]들이 계속해서 멸함을 본다. 이와 같은 수행자를 두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신기루처럼 보는 자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Dhp.170)”라고.”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ntilde;āṇa)>
[청정도론 XXI]: “53. 그가 이와 같이 깊이 숙고함을 수관하는 지혜로써 모든 상카라[行]들이 공하다고 파악하고 다시 “이것은 자아가 없고 혹은 자아에 속하는 것이 없다(M.ii.263)”라고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을 파악한다. 그가 이와 같이 자아와, 자아의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다시 “나는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고, 누구에게 그 무엇도 아니다(M106/ii.263-64)”라고 네 가지 측면에서 설한 공을 파악한다.
61. 이와 같이 공하다고 본 뒤 세 가지 특상을 제기하고 상카라들을 파악할 때 공포와 즐거움을 버리고 상카라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중립적이 된다.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취하지 않는다.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여기서 평온으로 옮긴 우뻬카는 捨로 한역되었다. 한편 『영가집』에서 우필차로 음역되어 나타나는데 사마타(禪定)의 4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술어이다.(우뻬카사띠빠리숫디, upekkhāsati-pārisuddhi, 평온과 그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 捨念淸淨) 여기서 보듯이 평온[捨]은 위빳사나에서도 해탈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단계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영가집에서는 우뻬카[捨]를 사마타와 위빳사나에서 분리독립하여 사마타(止)-비파사나(觀)-우필차(捨)로 그 핵심을 삼고 있으며 이 셋을 원이삼점(∵)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위빳사나의 지혜가 익으면 마침내 해탈이 있게 된다. 위빳사나로 증득되는 해탈에 대해서는 아래 4-3에서 설명하겠다.


3-5. 위빳사나와 사띠(sati, 念, 마음챙김)9)는 같은가
한편 남방의 몇몇 위빳사나 대가들은 위빳사나를 사띠(念, 마음챙김)와 같은 개념으로 보고 아무런 구분 없이 이 둘은 같은 것이라고 설하고 있고 특히 한국에서도 남방수행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발제자는 그런 관점은 남방 아비담마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방에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에서 기인한 듯하다.
초기경에서 마음챙김은 (大)念處經(마음챙김의 확립, D22; M10)과 念身經(몸에 대한 마음챙김, M119)과 出入息念經(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M118)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념처경에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身(몸)․受(느낌)․心(마음)․法으로 정리하고 있고 염신경에서는 몸의 여러 현상에 마음챙기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출입식념경은 호흡하나에 마음챙기는 것을 설하고 있다. 특히 염처경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제목 하에서 몸 등을 隨觀(anupassanā)한다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수관은 다시 무상․고․무아로 수관하는 것을 위빳사나라 정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띠→수관→위빳사나의 관계를 따라서 사띠를 위빳사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염처경의 원문에서 사띠는 삼빠자노 사띠마(sampajano satimā,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가 되어)라는 구절 등으로 나타날 뿐 사띠를 아누빳사나(수관)와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된 출처는 발제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염처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과 염신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은 같다. 그러나 염처경과 염신경의 중요한 차이는 염처경은 법념처로 인도하여 5가지 장애와 7각지와 4제를 수관하는 [위빳사나를 통해서] 해탈로 인도하고 있고 염신경은 몸에 대한 챙김을 개발하여 4선과 5신통을 개발하는 사마타(삼매)로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번뇌를 멸하여(누진통) 해탈하는 것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입식념경은 첫 단계에서는 다분히 사마타로 인도하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사념처와 칠각지를 통해 [위빳사나로] 인도하여 해탈로 결론짓고 있다. 이처럼 이 세 가지 마음챙김에 대한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모두 다 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사띠는 사마타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에 의하면 마음챙김은 전적으로 유익한 마음부수법(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뜻하는 위빳사나에도 반드시 있게 되고 유익한 마음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에도 반드시 있어야하는 마음부수법이다. 이들 세 가지 경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음챙김은 사마타를 개발하든 위빳사나를 개발하든 반드시 제일먼저 개발되어야할 유익한 마음부수법이기 때문에 수행을 설한 세 경에서 제목을 마음챙김(염처, 염신, 출입식념)으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지혜(반야)이며 그래서 모든 유익한 마음에는 항상 함께하는 마음챙김과는 다른 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와 사띠는 결코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물론 사띠와 위빳사나는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위빳사나에는 항상 사띠가 함께 하기 때문이며 사띠의 작용없이 위빳사나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띠는 위빳사나건 사마타건 유익한 마음작용에는 반드시 함께하는 심리현상이며 위빳사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이야기 하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개발하는 단계 그 자체는 사마타가 아니고 위빳사나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사마타는 4선-4처(욕계禪과 무색계禪)의 지고한 삼매의 경지이고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열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 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는 사마타나 위빳사나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본격적인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개발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염처) 단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마음챙김이 확고하게 될 때 사마타도 위빳사나도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수행 3경들에서도 사마타나 위빳사나 대신에 사띠를 경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지금 남방에서 수행되고 있는 사마타 기법이나 위빳사나 기법은 사마타라 불러서도 위빳사나라 불러서도 안된다. 정확하게 붙이자면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띠(정념, 마음챙김)을 개발하는 수행’이라 불러야한다. 그러므로 남방수행법은 통틀어 ‘정념수행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처님 원음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3-6. 지금 남방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법
이상을 다시 정리해보자.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태도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것에 치중하여 수행을 하여 그 대상의 표상을 일으켜 그것에 집중하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이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관찰(수관)하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이다. 이 둘에는 반드시 마음챙김이 함께한다. 마음챙김이 없다면 사마타도 위빳사나도 불가능하다. 위빳사나에는 근접삼매 수준의 집중(사마타)이 항상 함께 한다. 여기서 위빳사나에 개재되는 삼매를 근접삼매라고 하는 이유는 본삼매에 들었을 때는 위빳사나란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삼매는 표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된 경지이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위빳사나만 닦으면 사마타는 자연적으로 닦아진다고 하며 이런 힘으로 사마타에 전념하면 쉽게 사마타의 경지, 즉 삼매=선정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타를 닦는다고 해서 위빳사나는 얻어지지 않는다.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타를 많이 닦은 자는 그런 집중력으로 쉽게 무상․고․무아를 깊이 관찰할 수 있음은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사마타 상태에서는 위빳사나를 할 수없다. 반드시 사마타에서 나와야한다. 그래서 사마타는 入定과 出定이 있게 마련이다.


3-6-1. 마하시 위빳사나 ― 순수 위빳사나
그래서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사마타를 아예 무시한다. 사마타를 닦는 동안에는 위빳사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는 근접삼매에 준하는 찰나삼매가 매 찰나 현전하기 때문에 위빳사나만으로도 근접삼매 수준의 사마타는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마하시 전통을 순수 위빳사나라 부르고 미얀마에서는 정통 위빳사나로 간주한다.
마하시 스님(Mahāsī Sayādaw, 1904-1982)이 지도한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은 좌선할 때는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mūlālambana)으로 배의 움직임(일어남, 사라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행선(걷기 수행)이나 행주좌와의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선할 때, 물론 배의 움직임만을 대상으로 삼으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네 가지 물질적인 요소(四大)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움직임의 요소(風界, vāyo-dhatu)인 배의 움직임을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알아차리라고 하신 점은 마하시 수행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선의 경우에도, 걷는 동작(바람의 요소)에 마음을 챙기면서(사띠, 念) 무릎 아래 부분의 다리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중심으로 알아차리라고 한 점과 일상적인 동작을 면밀하게 관찰하라고 한 점은 마하시 수행법을 특징지울 수 있는 수행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움직임의 요소를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곧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10) 이처럼 풍대라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수관하는 수행법을 기본으로 한 것이 마하시 수행법이다.
한편 마하시의 제자 중의 한분인 세우민 사야도가 개설한 세우민 센터에서는 마음을 보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데 매 찰라의 마음은 바로 법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수관하는 것 역시 위빳사나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러한 心隨觀을 가르치는 세우민 사야도의 지도법을 사마타라고 근거 없이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기본정의조차도 모르는 무지한 발상이다. 세우민 사야도의 수행법은 마음이라는 법을 수관하는 순수 위빳사나이다. 이처럼 마하시 계열에서는 사마타를 무시하고 법을 수관하는 위빳사나만을 주창한다하여 순수 위빳사나라 부른다.


3-6-2. 고엔카 위빳사나 ―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병행
한편 미얀마가 낳은 최고의 학승이자 수행승이었던 레디 사야도(1846-1923)에서 비롯된 수행법이 전승되어 오는데 4대째가 인도에서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고엔카 거사이다. 고엔카 수행법에서는 전체 일정 가운데서 30% 정도는 사마타를 닦고 70% 정도는 위빳사나를 닦을 것을 권한다. 여기서 권장하는 사마타는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숨을 쉴 때 일어나는 코 주위의 느낌에 집중할 것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온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다양한 방법으로 관찰할 것을 가르친다. 이런 관찰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평온(우뻬카, 捨)이라고 가르치는데 발제자는 이것을 고엔카 위빳사나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모두 우뻬카(평온)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은 법에 속하므로 이런 느낌의 무상․고․무아를 수관하는 것은 위빳사나인 것이다.11)


3-6-3. 기타
한편 모곡 사야도는 사마타로서 4선까지 체득하고 그 힘으로 위빳사나를 닦을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초기경에서도 4선-3명 혹은 4선-6통으로 정형화된 경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초기 수행자들이 많이 닦던 방법이었다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4선 자체도 자유자재로 체득하기란 용이하지 않으므로 이런 4선을 자재하게 닦고서 위빳사나를 개발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경절문이 아니며 오히려 사마타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수행으로 간주해야할 듯하다.


한편 북방에서 소승선이라하여 백골관이나 수식관이나 호흡관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런 것은 사마타 계열에 속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히 마하시 수행법이 널리 보급된 미얀마에서는 이런 수행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백골관 등을 위빳사나라고 말하고 있는 일부 우리나라 스님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서 바로 잡아야한다. 남방에서도 사마타로서는 결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고 간곡하게 설하고 있음을 유념해야한다. 한편 이런 사마타 수행을 위한 명상주제는 40가지로 『청정도론』에 정리되어 나타나며 『아비담마 길라잡이』9장에서 정리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3-7. 결론
본 장에서 발제자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와 마음챙김의 차이점을
살펴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방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수행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마타는 4선 4처에서의 유익한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상태이다. 위빳사나는 법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무상․고․무아를 수관 혹은 통찰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제행에 대한 완전한 평온(우뻬카)을 개발하여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한편 마음챙김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둘 다를 개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심리현상으로서 전적으로 유익한 마음에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경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염처경을 설하였고 身․受․心․法의 넷으로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닦는 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사띠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마음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빳사나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한편 전적으로 사마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내관만을 행하는 것을 순수한 위빳사나라 부르고 마하시 계열에서 가르치는 수행법이다. 어느 정도 사마타를 닦고 이를 바탕으로 위빳사나를 행하는 것이 고엔카 계열의 수행법이다.
우리가 소승 수행법으로 알고 있는 백골관 등의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법으로는 해탈 못한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지장기도도량 오봉산 영선사
글쓴이 : 월공스님(천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