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른 점
5-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위에서 우리는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그냥 적정처에 안주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혜 스님은 이를 흑산귀굴에 앉아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남방에서는 사마타로 표현하면서 이런 경지가 깨달음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간화선은 적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화두참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사마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는 법을 관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이 공히 대상을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제일 큰 차이점은 바로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참구의 궁극은 은산철벽이나 전후제단 등으로 표시되듯이 참구하는 자와 참구대상의 차별이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를 투과해야 주와 객, 심과 법의 대를 넘어선 절대의 경지 바로 性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런 주객이 끊어진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야말로 견성이다(心法雙忘 性卽眞 - 증도가).
후대로 오면서 많은 수행자들이 본자청정을 부르짖고 자신은 깨달았노라고 그래서 할일을 다해마쳤으므로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잠오면 잘뿐이라는 무사선의 아류에 빠져있음을 통탄하고 대혜는 조사관을 마련하여 이런 조사관을 투타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고불고조를 꾸짖고 돈오를 이야기해도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화두를 공문서 혹은 조사관이라 불러서 이런 공안이나 관문을 꿰뚫고 통과해야 깨달음이라고 주창하게 된 것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다. 위빳사나는 매 순간의 마음이 72가지로 정리된 법(대상)을 변하고 괴로움이요 실체가 없음으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위빳사나에서는 주와 객, 심과 법의 합일이라든지 초월이라든지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초월이라고 한다면 그 초월이라는 것도 마음의 대상일 뿐이라고 본다. 물론 마음이 대상에 완전히 집중되어 말길이 끊어진 경지(제4선)에 있을 때는 집중되어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심과 사와 희열 등이 끊어졌으므로) 그러나 이런 경지도 매 순간의 마음들이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매는 유익한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위빳사나는 집중이 아니므로 매순간 마음의 대상이 되는 물․심의 현상(법)을 무상(변함)과 무아(실체없음)로 철견하고 통찰을 계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변함과 실체없음을 통찰할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심의 현상(오온)이 해체되어버림을 통찰하는 멸괴지와 모든 현상(상카라)들에 완전히 초탈하여 평온하게 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공하고 상이 없고 바램이 끊어진 해탈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을 수관하는 위빳사나의 이런 태도는 분별망심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물․심의 현상이란 게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인데 이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순이며 설령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 해도 매순간 변해가는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엄청난 분별심을 기르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남방불교 내지는 아비다르마 불교를 我空法有라고 인식하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심의 현상(법)이란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이므로 공함을 직관해야지 그것을 매순간 다시 무아로 실체없음으로 통찰한다는 것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위빳사나는 본래실체가 없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으로 수행을 삼고 있다고 해명한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찰라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심의 제 현상[法]들을 변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통찰해내지 못하고 매순간 이런 무상․고․무아를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공이나 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진여 등에 즉각적으로 계합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빤냣띠, 산냐)놀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탐진치에 놀아나면서도 본자청정을 부르짖는 무사선의 폐풍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묵묵히 본자청정을 반조한다는 묵조선을 비판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순간에 화두를 실참실수하여 분별망심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과 같은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5-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또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심의 현상(법)을 분석하고 이것을 수관하여 무상․고․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아무 구분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다. 먼저 힌두 수행은 모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자리라는 식으로 아뜨만(자아)이나 브라흐만(梵)을 설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은 이런 대상을 향해서 몰두하고 몰입한다. 때로는 그 아뜨만․브라흐만으로 옴(Aum)자를 설정하고 이 옴을 찬찬히 발성하면서 그 진동음속으로 몰입하기도 한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모두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게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āra, 요즘 아봐타로 발음하기도 한다)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이다. 그래서 힌두 수행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이다.『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ññān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이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ātmā-samjñā)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빳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과 물질[色]의 72/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無我, anattā]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 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며 그래서 삼차결집을 주도한 아쇼까 대왕때의 띳사 스님에서 유래된 상좌부 불교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분석을 설하는 자들)’이라 하며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요즘 일본 학자들은 ‘분별상좌부’란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5-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간화선의 화두는 정해져 있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자는 무자화두만 참구해야지 화두를 ‘이뭐꼬’나 ‘간시궐’ 등의 다른 화두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유 없이 화두를 바꾸는 일이다.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것이 간화선의 제일 중요한 측면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인 법은 매찰나 바뀐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일어남과 꺼짐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온몸의 느낌은 의식이 집중되는 매순간 바뀌어 간다.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찰나찰나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오히려 이런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법)들을 매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무치게 꿰뚫어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대상의 변화와 실체없음을 망각해버리고 대상의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은 위빳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이런 위빳사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처음 한국에 위빳사나를 소개한 어떤 스님과 그에게서 위빳사나 수행을 지도받은 사람들이 간화선을 비판하는 제일 중요한 근거가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마타 수행으로는 번뇌를 꿰뚫지 못하고 그러므로 생사해탈을 못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해왔다.
만일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간화선은 분명히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화두는 단순한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가 소옥아!하고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안록산에게 그 목적이 있듯이 단순히 집중을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화두는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이라 하는 것이다. 화두에서 중요한 것은 의단이요 전후제단과 은산철벽이 된 화두는 지혜의 돈발이지 사마타(선정)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화는 염불이나 주력과 같은 집중을 닦는 삼매(사마타)수행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 몇몇 스님들이 남방수행을 비판하면서 ‘관법수행은 入定․出定에 걸려있으므로 선정을 닦는 소승선이다’라거나 ‘관법으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하는 것을 보아왔다. 여기서 그 스님들이 관법이라 표현한 것은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일컷는 것 같은데 이런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방에서도 부정관으로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사마타에는 입정출정이 있지만 위빳사나는 없다. 24시간 매순간 일어나고 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북방 공히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으로는 해탈을 못하고 지혜를 돈발하는 간화선, 혹은 위빳사나로만이 생사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오해하여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이므로 해탈 못한다고 하고, 위빳사나는 선정수행이므로 해탈못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남의 수행체계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기초 이론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5-4. 교학 무시와 중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교학을 무시하고 중시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간화선의 기본모토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물론 이 언구가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실현하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자를 무시하고 교밖의 가르침임을 강조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발제자는 이런 선종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경지나 진여의 자리를 현란하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는 대승교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보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오늘날 사람은 自心과 自性이란 말을 들으면 얕고 가깝다 하고, 장애 없는 法界란 말을 들으면, 깊고 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마음이 바로 法界의 도읍이며 부처와 중생의 근본임을 알지를 모른다. 만약 마음을 返照하여 情量이 다하면 곧 法界가 완연히 나타난다. 다만 그 마음을 잘못 사용하여 寂靜에 걸릴까 염려스럽다. ……”1)
이처럼 性을 내세워 현란한 법계를 그려내는 화엄을 상수로한 대승의 교학체계를 대부분의 중국과 한국의 선사들은 비판하여왔다.2) 그래서 달마대사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며 후대에는 마음 깨치는 이 공부법을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 불렀다고 발제자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란한 교학에 매몰되어버리면 마음이라는 바로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선종의 모토로 제시하였고 대혜 스님은 일체전제를 거부하는 무전제의 수행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였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위빳사나에서는 바른 위빳사나의 전제조건으로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아비담마는 현란하지 않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남방의 강원에서는 아비담마를 중시하고 있다. 아비담마란 다름 아닌 물․심의 현상(법)을 대면하여 이를 해체하고 분석하여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비담마의 밑그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법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고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에서는 말하고 있다.
지금 남방, 특히 미얀마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체계는 모두 아비담마에 바탕을 하고 있다. 이런 바탕 하에서 각 센터마다 지도자 스님들이 여러 가지 독특한 기법을 고안하여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여러 물․심의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발제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세기 미얀마 최고의 위빳사나 대가로 추앙 받는 레디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 두 분 스님은 아비담마에도 최고의 달인들이셨다는 점이다. 이 두 분 스님들이야말로 아비담마에 대한 분석지가 위빳사나 수행의 큰 디딤돌임을 보여주는 산 증인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아비담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자칫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기가 배운 기법만을 정통으로 고집할 우려가 있고 이 테크닉이라는 지엽적인 것에 걸려 위빳사나를 팔정도를 실현하는 큰길로 살려내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를 통해서 물․심의 여러 현상을 분석해서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에 속기 십상이다. 물론 아비담마는 수행의 길라잡이라는 것이 그 근본이다. 수행이라는 근본을 잃어버리면 아비담마는 그냥 고담준론이나 메마른 해석학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3)
발제자는 간화선은 무전제의 수행이요 이런 무전제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무아와 일치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무전제적 입장을 바로 이해하여 여기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를 이해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무전제가 일심이나 본자청정을 생사를 초월한 진아, 아뜨만, 대아, 주인공, 내부처 등으로 이해하여 저 힌두의 아뜨만 논리로 흘러가버린다고 보며 실제 작금의 한국 간화선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스럽다. 한편 남방의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의 분석에 철저히 바탕하고 있으며 아비담마의 분석은 바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이다. 북방 간화선도 이제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사무쳐야한다. 무아에 사무칠때 의정은 돈발한다고 발제자는 확신한다.
5-5. 인가 중시와 무시
교학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는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입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가이다. 저 학인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는 객관적으로 없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기본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인가와 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맥을 중시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특히 법맥을 계통 나열하여 한 종장의 권위를 확보하려 애쓰며 우리는 선종사를 통해서 이런 법통을 속가의 족보이상으로 중시여기는 점을 알 수 있다.4) 이는 한편으로는 법맥이 끊어진 간화선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는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조때 법통이 끊어졌음이 분명한 한국간화선이 그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빳사나에서는 인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는 인물 중심의 수행 법통을 중시하지 않는다. 실제 현대의 미얀마 위빳사나의 맥은 레디 사야도(1846-1923)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인가받았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미얀마에서는 굳이 스승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여러 지침서 등이 빠알리어와 미얀마 말로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에 무지한 몇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남방에까지 가서 인가 운운하며 남방 큰스님들을 괴롭혀왔다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몇몇 불자들은 어느 누구가 어느 사야도에게서 예류과에 들었다는 인가를 받았다는 둥 해가면서 수행을 흐려놓고 있다. 제대로 된 위빳사나 행자라면 이러한 탐욕과 무지를 드러내기 이전에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진단하여 겸손할 줄 알아야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수행자일 것이다.
5-6. 결론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빳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수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빳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고․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빳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5-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위에서 우리는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그냥 적정처에 안주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혜 스님은 이를 흑산귀굴에 앉아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남방에서는 사마타로 표현하면서 이런 경지가 깨달음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다. 간화선은 적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화두참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사마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는 법을 관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이 공히 대상을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제일 큰 차이점은 바로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참구의 궁극은 은산철벽이나 전후제단 등으로 표시되듯이 참구하는 자와 참구대상의 차별이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를 투과해야 주와 객, 심과 법의 대를 넘어선 절대의 경지 바로 性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런 주객이 끊어진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야말로 견성이다(心法雙忘 性卽眞 - 증도가).
후대로 오면서 많은 수행자들이 본자청정을 부르짖고 자신은 깨달았노라고 그래서 할일을 다해마쳤으므로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잠오면 잘뿐이라는 무사선의 아류에 빠져있음을 통탄하고 대혜는 조사관을 마련하여 이런 조사관을 투타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고불고조를 꾸짖고 돈오를 이야기해도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화두를 공문서 혹은 조사관이라 불러서 이런 공안이나 관문을 꿰뚫고 통과해야 깨달음이라고 주창하게 된 것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다. 위빳사나는 매 순간의 마음이 72가지로 정리된 법(대상)을 변하고 괴로움이요 실체가 없음으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위빳사나에서는 주와 객, 심과 법의 합일이라든지 초월이라든지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초월이라고 한다면 그 초월이라는 것도 마음의 대상일 뿐이라고 본다. 물론 마음이 대상에 완전히 집중되어 말길이 끊어진 경지(제4선)에 있을 때는 집중되어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심과 사와 희열 등이 끊어졌으므로) 그러나 이런 경지도 매 순간의 마음들이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매는 유익한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위빳사나는 집중이 아니므로 매순간 마음의 대상이 되는 물․심의 현상(법)을 무상(변함)과 무아(실체없음)로 철견하고 통찰을 계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변함과 실체없음을 통찰할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심의 현상(오온)이 해체되어버림을 통찰하는 멸괴지와 모든 현상(상카라)들에 완전히 초탈하여 평온하게 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공하고 상이 없고 바램이 끊어진 해탈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법을 수관하는 위빳사나의 이런 태도는 분별망심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물․심의 현상이란 게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인데 이것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순이며 설령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 해도 매순간 변해가는 물․심의 현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엄청난 분별심을 기르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남방불교 내지는 아비다르마 불교를 我空法有라고 인식하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심의 현상(법)이란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것이므로 공함을 직관해야지 그것을 매순간 다시 무아로 실체없음으로 통찰한다는 것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위빳사나는 본래실체가 없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으로 수행을 삼고 있다고 해명한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찰라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심의 제 현상[法]들을 변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통찰해내지 못하고 매순간 이런 무상․고․무아를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공이나 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진여 등에 즉각적으로 계합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빤냣띠, 산냐)놀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탐진치에 놀아나면서도 본자청정을 부르짖는 무사선의 폐풍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묵묵히 본자청정을 반조한다는 묵조선을 비판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순간에 화두를 실참실수하여 분별망심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과 같은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5-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또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심의 현상(법)을 분석하고 이것을 수관하여 무상․고․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아무 구분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다. 먼저 힌두 수행은 모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자리라는 식으로 아뜨만(자아)이나 브라흐만(梵)을 설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은 이런 대상을 향해서 몰두하고 몰입한다. 때로는 그 아뜨만․브라흐만으로 옴(Aum)자를 설정하고 이 옴을 찬찬히 발성하면서 그 진동음속으로 몰입하기도 한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모두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게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āra, 요즘 아봐타로 발음하기도 한다)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이다. 그래서 힌두 수행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듯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이다.『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ññān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여기 산냐로 표현된 것들이 바로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이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ātmā-samjñā)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빳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과 물질[色]의 72/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無我, anattā]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 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며 그래서 삼차결집을 주도한 아쇼까 대왕때의 띳사 스님에서 유래된 상좌부 불교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분석을 설하는 자들)’이라 하며 그래서 남방 상좌부 불교를 요즘 일본 학자들은 ‘분별상좌부’란 말로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5-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간화선의 화두는 정해져 있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자는 무자화두만 참구해야지 화두를 ‘이뭐꼬’나 ‘간시궐’ 등의 다른 화두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유 없이 화두를 바꾸는 일이다.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것이 간화선의 제일 중요한 측면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인 법은 매찰나 바뀐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일어남과 꺼짐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온몸의 느낌은 의식이 집중되는 매순간 바뀌어 간다.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찰나찰나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오히려 이런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법)들을 매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무치게 꿰뚫어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대상의 변화와 실체없음을 망각해버리고 대상의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은 위빳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이런 위빳사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처음 한국에 위빳사나를 소개한 어떤 스님과 그에게서 위빳사나 수행을 지도받은 사람들이 간화선을 비판하는 제일 중요한 근거가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사마타 수행으로는 번뇌를 꿰뚫지 못하고 그러므로 생사해탈을 못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해왔다.
만일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간화선은 분명히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화두는 단순한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가 소옥아!하고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안록산에게 그 목적이 있듯이 단순히 집중을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화두는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이라 하는 것이다. 화두에서 중요한 것은 의단이요 전후제단과 은산철벽이 된 화두는 지혜의 돈발이지 사마타(선정) 수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화는 염불이나 주력과 같은 집중을 닦는 삼매(사마타)수행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 몇몇 스님들이 남방수행을 비판하면서 ‘관법수행은 入定․出定에 걸려있으므로 선정을 닦는 소승선이다’라거나 ‘관법으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하는 것을 보아왔다. 여기서 그 스님들이 관법이라 표현한 것은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일컷는 것 같은데 이런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방에서도 부정관으로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사마타에는 입정출정이 있지만 위빳사나는 없다. 24시간 매순간 일어나고 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북방 공히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으로는 해탈을 못하고 지혜를 돈발하는 간화선, 혹은 위빳사나로만이 생사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오해하여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이므로 해탈 못한다고 하고, 위빳사나는 선정수행이므로 해탈못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남의 수행체계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기초 이론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5-4. 교학 무시와 중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교학을 무시하고 중시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간화선의 기본모토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물론 이 언구가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실현하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자를 무시하고 교밖의 가르침임을 강조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발제자는 이런 선종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경지나 진여의 자리를 현란하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는 대승교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보조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오늘날 사람은 自心과 自性이란 말을 들으면 얕고 가깝다 하고, 장애 없는 法界란 말을 들으면, 깊고 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마음이 바로 法界의 도읍이며 부처와 중생의 근본임을 알지를 모른다. 만약 마음을 返照하여 情量이 다하면 곧 法界가 완연히 나타난다. 다만 그 마음을 잘못 사용하여 寂靜에 걸릴까 염려스럽다. ……”1)
이처럼 性을 내세워 현란한 법계를 그려내는 화엄을 상수로한 대승의 교학체계를 대부분의 중국과 한국의 선사들은 비판하여왔다.2) 그래서 달마대사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며 후대에는 마음 깨치는 이 공부법을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 불렀다고 발제자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란한 교학에 매몰되어버리면 마음이라는 바로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선종의 모토로 제시하였고 대혜 스님은 일체전제를 거부하는 무전제의 수행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였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위빳사나에서는 바른 위빳사나의 전제조건으로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아비담마는 현란하지 않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남방의 강원에서는 아비담마를 중시하고 있다. 아비담마란 다름 아닌 물․심의 현상(법)을 대면하여 이를 해체하고 분석하여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비담마의 밑그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법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고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에서는 말하고 있다.
지금 남방, 특히 미얀마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체계는 모두 아비담마에 바탕을 하고 있다. 이런 바탕 하에서 각 센터마다 지도자 스님들이 여러 가지 독특한 기법을 고안하여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여러 물․심의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발제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세기 미얀마 최고의 위빳사나 대가로 추앙 받는 레디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 두 분 스님은 아비담마에도 최고의 달인들이셨다는 점이다. 이 두 분 스님들이야말로 아비담마에 대한 분석지가 위빳사나 수행의 큰 디딤돌임을 보여주는 산 증인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아비담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자칫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기가 배운 기법만을 정통으로 고집할 우려가 있고 이 테크닉이라는 지엽적인 것에 걸려 위빳사나를 팔정도를 실현하는 큰길로 살려내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를 통해서 물․심의 여러 현상을 분석해서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에 속기 십상이다. 물론 아비담마는 수행의 길라잡이라는 것이 그 근본이다. 수행이라는 근본을 잃어버리면 아비담마는 그냥 고담준론이나 메마른 해석학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3)
발제자는 간화선은 무전제의 수행이요 이런 무전제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무아와 일치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무전제적 입장을 바로 이해하여 여기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를 이해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무전제가 일심이나 본자청정을 생사를 초월한 진아, 아뜨만, 대아, 주인공, 내부처 등으로 이해하여 저 힌두의 아뜨만 논리로 흘러가버린다고 보며 실제 작금의 한국 간화선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스럽다. 한편 남방의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의 분석에 철저히 바탕하고 있으며 아비담마의 분석은 바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이다. 북방 간화선도 이제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사무쳐야한다. 무아에 사무칠때 의정은 돈발한다고 발제자는 확신한다.
5-5. 인가 중시와 무시
교학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는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입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가이다. 저 학인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는 객관적으로 없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기본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인가와 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맥을 중시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특히 법맥을 계통 나열하여 한 종장의 권위를 확보하려 애쓰며 우리는 선종사를 통해서 이런 법통을 속가의 족보이상으로 중시여기는 점을 알 수 있다.4) 이는 한편으로는 법맥이 끊어진 간화선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는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조때 법통이 끊어졌음이 분명한 한국간화선이 그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빳사나에서는 인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는 인물 중심의 수행 법통을 중시하지 않는다. 실제 현대의 미얀마 위빳사나의 맥은 레디 사야도(1846-1923)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인가받았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다. 미얀마에서는 굳이 스승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여러 지침서 등이 빠알리어와 미얀마 말로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에 무지한 몇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남방에까지 가서 인가 운운하며 남방 큰스님들을 괴롭혀왔다는 것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몇몇 불자들은 어느 누구가 어느 사야도에게서 예류과에 들었다는 인가를 받았다는 둥 해가면서 수행을 흐려놓고 있다. 제대로 된 위빳사나 행자라면 이러한 탐욕과 무지를 드러내기 이전에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진단하여 겸손할 줄 알아야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수행자일 것이다.
5-6. 결론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빳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수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빳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고․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빳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지장기도도량 오봉산 영선사
글쓴이 : 월공스님(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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