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간화선과 위빳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6.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苦言) "-각묵-

수선님 2018. 7. 29. 11:58
6.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苦言)


이처럼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보았다. 오늘 여러 스님네들이 구참과 후학, 비구․비구니를 막론하고 한자리에 모여서 이처럼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비교해보는 것은 한국에서 바른 수행풍토를 진작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라도 만들어보자는 것일 것이다. 발제자는 다음의 몇 가지 苦言을 한국 간화선 수행에 붙여보고자 한다. 발제자는 화두에 대한 의정 때문에 출가하였고 지금도 화두참구를 기본수행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발제자의 苦言을 발제자를 키워주신 한국 수좌계에 바치는 충정으로 받아주실 것을 엎드려 빈다.


첫째, 한국 간화선은 힌두화 되어가고 있다. 발제자는 감히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한국 간화선은 성, 불성, 여래장, 심지어 참나, 대아, 주인공, 내부처, 본래면목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아뜨만(자아=진아)이라는 대상을 세우고 그것과 하나 되는 수행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국불교 전반에서 가장 심각한 타락이라 본다. 수행자가 수행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은 그 어떤 타락보다 심각한 것이다. 일례로 ‘진아여여’나 ‘나는 누구인가’ 등 라마나(Ramana)가 주장한 힌두의 수행법을 ‘이뭐꼬’ 화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이런 책들을 최고의 수행지침서로 이미 제방에서 읽고 있으며 강원에서 까지 읽고 간화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중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힌두적 발상과 서양의 상업주의가 결탁된 아봐타(Avatar) 수행에 스님들과 불자들이 뛰어드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성스러운 부처님제자가 되어 최상승이라는 간화선을 하면서 소승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외도선을 찬양하고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면 어느 佛祖인들 통탄하지 않으랴. 한국에서 간화선이 피폐해가고 남방 소승 수행법인 위빳사나가 뿌리내려간다고 걱정하기 전에 소승도 아닌 외도선을 찬양하고 있는 제방의 풍토부터 통탄해야하지 않겠는가? 거듭 제기하지만 아뜨만-브라만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것에 몰입하여 그것과 합일하려는 힌두적 발상과 모든 전제를 부정하고 부정한다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간화선의 직관은 전혀 다른 수행법이다.
물론 모든 전제를 부정하는 화두수행은 어렵다. 그래서 합리성을 존중하는 현대에 와서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고 그래서 간화선 위기론이 지금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을 제대로 하려면 부처님의 무아의 선언에 뼈시리게 사무쳐야한다. 무아에 대해서 처절하게! 사유하고 고뇌해야한다. 그런 뼈를 깎는 자기점검이 없고서는 간화선은 간화선이 아니고 힌두아류로 떨어질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속의 부귀영화 따위는 뒤닦은 휴지버리듯 버리고 출가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이처럼 사무치지 못한다면 이미 화두하고는 십만팔천리리라. 사무침이야말로 대분지요 대의단 아니겠는가?


둘째, 한국 불교의 수행에는 힘의 논리가 팽배해있다. 화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여서 온 몸과 마음을 몰아세워가고 있다.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에 도인이 되고 부처가 되어 만중생의 존경과 귀의와 찬탄과 예경을 받게 되는 것으로 돈오돈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국 수행자들은 너무 긴장해있고 날카롭다. 도대체 한국 수행자들에게서 편안함이나 고요함이나 자비심을 찾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절집안이 맹수집단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생기지도 않는 의심을 힘으로 밀어부쳐 일으켜서 이를 타파하려는 발상을 하고 있는 수행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겠는가 발제자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이해가 간다.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강한 의도를 일으키는 이면에는 본자청정,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 대아, 진아, 여래장, 불성, 진여, 내부처라는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는 발상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고 그래서 ‘이뭣고’를 라마나의 ‘나는 누구인가’로 파악하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업이 되면 매사가 그런 힘을 쓸려는 강력한 의도에 지배되어 면밀히 살피고 사유하는 기능이 개발되지 못해서 경계에 속게 될 것이다. 아니, 건전한 상식이나 경우를 무시하고 세상사 모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발제자는 반성해본다.


셋째, 한국 간화선은 화두만 타파하면 다 된다는 단세포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있다. 그러다보니 합리성을 놓치고 있다. 물심의 현상(법)에 대한 분석적인 사유가 결여되면 자칫 허공에 구름 잡는 주장을 대승불교나 간화선 아니면 頓悟라는 이름으로 하게 된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나 직관을 보여 주어야할 우리 불교가 오히려 궁극에 가서는 의지해야할 판단기준이 없어져 더욱더 세속의 논리나 세속적 가치판단을 중시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바른 정진[正精進]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바른 정진을 善․不善의 판단에서부터 구하고 계신다. 선․불선을 판단하여 선은 유지하고 더 증장시키고 불선은 없애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정정진이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기서 선이란 고의 소멸, 즉 해탈․열반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이로운 심리현상이요 불선은 고의 소멸과 해탈에 장애가 되는 심리현상이다.
선․불선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바른 견해를 갖추어야한다. 불교의 출발은 초기․남․북을 막론하고 바른 견해[正見]에서부터 비롯된다. 저 팔정도의 출발이 정견이지 않는가. 발제자가 처음 선방에 다녔을 때 노스님들은 ‘견해가 비루한데 어찌 바른 수행이 있겠는가’라고 항상 정견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견해가 비루한 놈들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고 꾸짖으셨다. 위산 스님께서도 그대의 견해가 바른 것만을 본다고 하셨다. 바른 가르침과 바른 도와 바른 수행을 두고 사유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화두에 바른 의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연목구어이다. 화두를 참구하여 의정이 펑하고 터지면 즉시에 도인이 되고 … 하여 만인의 귀의와 존경을 받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의정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의정은 한 순간 반짝한 반딧불 의정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발제자는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면 그 화두를 내려놓자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정견이 뭔지 고뇌하자고 말하고 싶다. 부처님은 사제를 아는 것이 바로 정견이라 하셨고 사제를 완전히 통찰하는 것을 번뇌를 소멸한 지혜, 바로 깨달음이라고 정형구로 표현하고 계신다. 사제는 팔정도로 귀착된다. 사제는 그 자체가 연기․연멸의 연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최소한 사제가 뭔지, 팔정도가 뭔지, 연기법이 뭔지, 이것이 내 중노릇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도는 사유하고 고뇌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제․팔정도․연기의 근본입각처인 무아를 두고 고뇌해야할 것이다. 고뇌하고 고뇌하여 아무 전제도 붙지 못할 때 그때야 비로소 의정이 돈발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어야사 참으로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후제단, 은산철벽, 몰자미가 되어야사 참화두이며 그전에는 모두 염화두일 뿐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가.


넷째, 한국 간화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간화선의 권위의 원천인 인가해줄 사람이 없다는데서 찾아야할 것이다. 인가해줄 권위를 확보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간화선의 현실이다. 이제 대안을 찾아야한다. 간화선의 권위를 인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는 수밖에 없다. 인가의 법맥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가라는 간화선의 권위를 강조하면 할수록 자기모순에 빠지는 수밖에 없다. 지난번 6차 논강의 기조연설에서 고우 스님께서는 이제 법체계를 세워야하며 법으로서 모든 판단의 근거를 삼아야한다고 역설하셨다. 발제자는 크게 공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가대신에 법(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물․심의 현상이든)의 정확한 이해를 강조하는 위빳사나로부터 법체계화를 배워야할 것이다.


조금 거칠기는 하지만 대략 네 가지로 한국 간화선의 문제점을 들어 보았다. 이 네 가지는 다시 ‘한국 간화선은 무아를 잊어버렸다’라는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은 불교의 근본인 무아에 바탕한 무전제의 수행이다. 부처님 원음은 무아에 바탕한 사제․팔정도․12연기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간화선 수행을 하는 자는 먼저 이런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하고 그것을 내 중노릇과 수행에 적용시켜야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는 것은 고사하고 버젓이 불조의 밥을 먹고 외도를 찬양하는 꼴이 되고 만다고 덧붙이며 苦言을 접는다.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지장기도도량 오봉산 영선사
글쓴이 : 월공스님(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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