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눈보라
부산엔 함박눈이 내려서, 누군가 금정산이 담긴 스노우볼을 살짝 흔들어 놓은 것 같았다. 위로 올라오며 춤추듯 흩날리는 눈보라를 보자 부산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던 말들이 실감났다.
선원 앞의 동백은 아직 꽃필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빨간 심지를 꽁꽁 뭉치고 있었다. 화엄전의 매화도 아직 피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에 매화가지에 눈이 쌓여서 설경이 몹시 아름답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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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은 여느 때처럼 내려오시자마자 법공양실로 향하셨다. 낱권으로 된 책들도 책장에 있었는데 그런 책도 다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다. 다 읽은 책들을 법공양실에 가져가서 서로 교환해서 읽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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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을 따라 폭설이 내려서인지 ‘오늘 수업하느냐’고 문의전화를 하신 스님들이 많았다고 했다. 빈자리가 많았다. 책상마다 붉은색의 ‘3대선시 특강CD’가 놓여있었다. 지난 번 동화사에서 특강하신 씨디였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눈이 와서 스님들이 많이 못오나보다.” 하고 큰스님이 스님들이 얼마나 오셨냐고 틈틈이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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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비구니스님이 “이건 법공양이 아니라 스님 마음대로 쓰세요”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씀하시면서 큰스님께 공양금을 올리셨다.
큰스님이 만류하시는데도 노스님은 한사코 ‘그냥 큰스님이 쓰시라’고 하셨다.
벌써 법공양에 써달라고 보시를 많이 하셨다고 옆에서 보살님이 귓속말로 액수를 살짝 말씀해주셨는데 ‘아유 스님!’ 하시는 큰스님과 똑같은 표정으로 노스님께 합장하게 되었다.
늘 씩씩한 비구니 스님이 오셔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시이소.” 하고 봉투를 올리시고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셨다.
큰스님이 환하게 웃으면서 “스님이 제일 재밌어. 따끈한 차 한 잔 할게” 하셨다.
그 순간 진짜로 따끈한 차한잔을 마신 듯했다. 펄펄 눈은 날리고 마음은 더없이 푸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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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새해 모두 공부 열심히 하시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나에게 법공양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법공양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 비구니 스님이 “스님 법체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계셔주십시오.” 하고 씩씩하게 청하셨다.
“네에.” 하고 큰스님이 합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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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보이면 내가 강의하는데 힘이 더 나, 스님 알겠지?”
하고 반가와 하신 스님들이 있었는데 오일플링이라는 책을 가져오셨다.
큰스님도 오일플링이 유행할 때 한참 했다고 하시면서 책은 읽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우리 입속 세상이 어때요?” 하고 물으셨다.
“무궁무진 생태계입니다.” 하고 스님들은 꼭 이 요법을 하셔서 큰스님이 건강하시면 좋겠다고 하셨다. 오일플링은 신선한 오일을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20여분 입에 물고 있다가 뱉어내는 건강법인데 ‘어려울 것 같지만 해보면 생각보다 쉽다’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화엄전에 올라가서 읽어보게 책을 잘 챙기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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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만든 사경집이 예쁘다는 말씀들 끝에 스님들이 자꾸 가져가기가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큰스님은 “나처럼 살라고 본보기로 보이는 거야. 다 가져가도 돼.”하셨다.
“이 사경집은 세계에서 제일이예요.”
스님들이 환하게 웃으며 새로 나온 사경집을 칭찬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七
初發心功德品 第十六
二. 法慧菩薩의 說法
초발심공덕품을 공부하고 있다. 처음 발심한 공덕에 대해서 설명하는 품이다. ‘처음 발심(發心)을 하다’ 할 때의 그 마음[心]은 보리심이다. 보리심이 막연하다면 불심이라고 해도 좋다. ‘그 사람 불심이 있다’ ‘불심이 좋다’ ‘불심이 수승하다’고 할 때의 보리심이나 불심은 ‘중생을 어떻게 위할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달아서 스스로도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도 유익하게 하는 자비심을 베풀었다. 그 자비심에는 당연히 지혜가 포함된다. 그래서 불심은 자비심이기도 하고 지혜심이기도 하다.
보리심이나 불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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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공덕품이 시작되면서 제석천왕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마음,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인 보리심을 냈다면 그 공덕의 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은 마음을 내면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있듯이 보리심을 발했다면 뭔가 공덕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화엄경을 공부하려고 마음을 내었는데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한량없다. 포교당이나 절을 하나 지어서 ‘내가 아는 불교를 세상에 소개하여 몽매한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겠다’고 하는 원력을 세워서 실천을 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공덕도 또한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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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불교가 들어온지 1700여년이 되었다. 처음에 아도화상이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하려고 한 마음을 내어서 한국불교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전해 내려오면서 오늘날 까지 전국 방방곡곡 명산(名山)에 명찰(名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써 깨우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큰 혜택이 돌아오는 것이 다 처음 한 마음을 낸 데서부터 출발한다. 발심한 공덕이 대단한 것이다. ‘보리심을 발한 공덕이 보통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제석천도 그러한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한 공덕은 대단하겠다. 한 번 물어나 보자’고 해서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법혜보살이 하시는 말씀이 ‘그 공덕은 대단히 깊고 깊어서 설명하기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분별하기도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설사 설명한다 하더라도 믿고 이해하기가 어렵고 마음에 계합하기도 어려우며 증득하기도 어렵다. 또 우리가 안다 고 하더라도 실천하기가 어렵다. 통달하기도 어렵다.
중생의 마음으로 아무리 사유한다 하더라도 사유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그 공덕이 대단하다’고 막연하게 말하지만 낱낱이 사유해 본다면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법혜보살은 ‘내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그대를 위해서 아는 데까지,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중생의 이익과 초발심의 공덕, 이승법과 초발심의 공덕, 세계의 변제가 얼마나 넓은가 하는 것과 초발심의 공덕, 세계의 성주괴공의 문제와 초발심공덕을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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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몸속에는 60조나 되는 많고 많은 세포가 끊임없이 생멸한다. 이 순간도 무수한 세포가 죽고 세포가 생성된다. 내가 왜 세포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스님들은 모를 것이다. 나는 한 달에 20억 개의 세포를 내 몸에 넣는다. 나는 아주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서 특수한 치료를 받고 있다. 20억 셀을 내 몸에 넣고 그것이 얼마나 견디느냐고 물었더니 의사가 “10분의 1이나 살면 잘 살죠.” 라고 대답을 했다. 몸속에 투입된 세포들이 가면서 죽고 오면서 죽고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60조나 되는 세포는 또 얼마나 많이 생겨나고 소멸하겠는가. 세계성괴와 초발심공덕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것은 미세한 부분을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 것이고, 좀 더 밖으로 눈을 돌려서 본다면 우리 지구상에 70억 인구가 있다. 이 순간에도 무수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는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무수한 생명체도 역시 생멸을 거듭한다.
좀 더 눈을 돌려서 밖으로 나가보면 허공에 떠있는 무수한 별들도 마찬가지다. 공기가 맑은 지역, 산으로 들어가면 겨울 하늘에 별들이 빼곡하다. 눈감고 하늘을 향해 쏘아도 여러 수십 개의 별을 맞출 수 있을 것같이 하늘에 는 공간이 전혀 없다. 그러한 별들도 끊임없이 성주괴공한다.생주이멸하고 생노병사를 거듭한다. 이 순간에도 수십 억의 별이 사라지고 수십 억의 별이 새로 생긴다.
지구는 다른 별들의 크기에 비한다면 눈에 넣어도 흔적이 없을 정도로 작다. 태양보다도 수만 수천 배가 더 큰 거대한 별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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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포도 60조 세포라고 하지만 그 세포 속에는 또 60조의 세포가 들어 있다.
지금의 과학으로는 세포로 개도 만들고 소도 만들고 돼지도 만든다. 여러 개의 세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나의 세포로 그렇게 만든다.
결국 한 개의 세포에서 소도 한 마리 생기고 돼지도 한 마리 생기는데 그 세포는 작아서 눈에 절대 안 보인다.
미세한 것으로 치면 60조 세포속에 또 다른 60조의 세포가 들어있고, 또 그속에 60조의 세포가 들어있는 것이 끊임이 없다.
거대한 것으로 나아가도 우주는 끝이 없다.
화엄경은 ‘천문학’이라고 할까, 이런 안목이 뛰어나서 그러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앞에서도 화장장엄 세계를 배웠는데 얼마나 광대한 세계인가? 그런 것을 잘 이해해서 내 자신이 이 드넓은 우주 공간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 또 얼마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도 한 번 생각해 보면 삶에 유익한 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6, 衆生의 差別理解와 初發心功德
佛子야 復置此喩하고 假使有人이 於一念頃에 能知東方阿僧祗世界所有衆生의 種種差別解호대 念念如是하야 盡阿僧祗劫이어든 有第二人이 於一念頃에 能知前人阿僧祗劫所知衆生諸解差別하야 如是亦盡阿僧祗劫하며 次第展轉하야 乃至第十하고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면 佛子야 此十方衆生의 種種差別解는 可知邊際어니와 菩薩의 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功德善根은 無有能得知其際者니라 何以故오 佛子야 菩薩이 不齊限하야 但爲知爾所衆生解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 爲盡知一切世界所有衆生의 種種差別解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所謂欲知一切差別解無邊故와 一衆生解無數衆生解平等故며 欲得不可說差別解方便智光明故며 欲悉知衆生海各各差別解하야 盡無餘故며 欲悉知過現未來善不善種種無量解故며 欲悉知相似解不相似解故며 欲悉知一切解가 卽是一解와 一解가 卽是一切解故며 欲得如來解力故며 欲悉知有上解無上解와 有餘解無餘解와 等解不等解差別故며 欲悉知有依解無依解와 共解不共解와 有邊解無邊解와 差別解無差別解와 善解不善解와 世間解出世間解差別故며 欲於一切妙解大解無量解正位解中에 得如來解脫無障礙智故며 欲以無量方便으로 悉知十方一切衆生界一一衆生의 淨解染解와 廣解略解와 細解麤解하야 盡無餘故며 欲悉知深密解와 方便解와 分別解와 自然解와 隨因所起解와 隨緣所起解와 一切解網하야 悉無餘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라
"불자여, 이 비유는 그만두고, 가령 어떤 사람이 한생각 동안에 동방의 아승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차별한 이해를 능히 알며, 생각생각마다 이와 같이 하여 아승지겁이 다 하도록 하였고, 또 둘째 사람은 한생각 동안에 앞에 사람이 아승지겁 동안에 아는 중생들의 여러 가지 차별한 이해를 능히 알아서, 이와 같이 아승지겁이 다하도록 하였으며,
이렇게 차례차례로 그렇게 하여 열번 째 사람에 이르렀고, 남방. 서방.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역시 그러하였다 하면 불자여, 이 시방 중생들의 갖가지로 차별한 지혜를 끝까지 알 수 있다하더라도, 보살이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샴보리심을 낸 공덕과 선근은 그 끝간 데까지를 알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불자여, 보살은 다만 저러한 중생들의 이해를 알기 위하여서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데 제한한 것이 아니고,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로 차별한 이해를 모두 알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이른바 일체 차별한 이해의 그지없음을 알려는 연고며, 한 중생의 이해가 무수한 중생의 이해와 평등함을 알려는 연고며, 말할 수 없이 차별한 이해를 아는 방편 지혜 광명을 얻으려는 연고며, 중생들의 제각기 차별한 이해를 모두 알아서 남음이 없으려는 연고며, 과거, 현재, 미래의 선(善)하고 선하지 못한 갖가지 한량없는 이해를 모두 알려는 연고며, 비슷한 이해와 비슷하지 아니한 이해를 모두 알려는 연고며, 일체 이해가 곧 한 이해요 한 이해가 곧 일체 이해임을 모두 알려는 연고며, 여래의 이해하는 힘을 얻으려는 연고이니라.
또 위가 있는 이해와 위가 없는 이해와 남음이 있는 이해와 남음이 없는 이해와 평등한 이해와 평등치 아니한 이해의 차별함을 모두 알려는 연고며, 또 의지 있는 이해와 의지 없는 이해와 함께하는 이해와 함께하지 않는 이해와 끝 있는 이해와 끝없는 이해와 차별 있는 이해와 차별 없는 이해와 선(善)한 이해와 선하지 못한 이해와 세간의 이해와 출세간의 이해가 차별한 것을 모두 알려는 연고며, 또 일체의 묘한 이해, 큰 이해, 한량없는 이해, 정위(正位)의 이해 가운데서 여래해탈의 걸림없는 지혜를 얻으려는 연고며, 또 한량없는 방편으로 시방의 일체 중생계에 있는 낱낱 중생의 깨끗한 이해 물든 이해 넓은 이해 간략한 이해 세밀한 이해 거친 이해를 모두 알아서 남음이 없게 하려는 연고며, 또 깊고 비밀한 이해 방편의 이해 분별한 이해 자연의 이해 인(因)을 따라 일어나는 이해 연(緣)을 따라 일어나는 이해를 모두 알아서, 일체 이해의 그물을 끝까지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하려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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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衆生)의 차별이해(差別理解)와 초발심공덕(初發心功德): 중생들의 온갖 이해를 아는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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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또한 생각해 볼 거리다. 중생들이 차별되게 이해하는 것이 각양각색이다. 우리가 지금 화엄경을 펼쳐놓고 있지만 내가 설명을 하더라도 그대로 똑같이 다 이해를 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이해한다.
한사람의 이해도 오늘만 이렇게 이해하지 내일은 또 달리 이해하고 모레는 더 다르게 이해한다. 그 이해가 시시각각 다르다. 시간 시간 전혀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여행자다. 어디를 다녀서 여행자가 아니라, 눈을 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안해도 시간이라고 하는 여행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무한한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시간여행자인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과거에 공자 맹자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이고 석가 달마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이다. 다음 시간도 또 마찬가지고 다음 다음 시간도 또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는 매시간 새로운 삶을 여행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중생의 이해차별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각양각색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달라져야 되고,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늘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표현에 한계가 있어서 같은 말을 쓸 뿐이다. 오늘 날씨가 푸근하다는 것과 내일이 되어서 날씨가 푸근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이해차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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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부치차유(復置此喩)하고 : 다시 앞에서 든 비유는 그만두고. 그것 가지고는 아직도 부족하다. 초발심공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데 교가 되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그만두고
가사유인(假使有人)이 : 가사 어떤 사람이
어일념경(於一念頃)에 : 한 생각 사이에
능지동방아승지세계소유중생(能知東方阿僧祗世界所有衆生)의 : 능히 동방아승지 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차별한 이해를 안다. 그것도 한 생각에 안다.
아승지는 무량인데 화엄경에서 말하는 수량의 단위로 보면 최소단위다. 무량, 무수, 무변, 불가설, 불가설불가설 또 불찰미진수 등등 화엄경에는 숫자를 세는 단위가 무수히 나온다. 동쪽으로 아승지 세계의 소유중생이
종종차별해(種種差別解)호대 : 종종 차별한 이해를 안다.
염념여시(念念如是)하야 :그것을 염념히 이와 같이
진아승지겁(盡阿僧祗劫)이어든: 모든 아승지겁을 다할 때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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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이인(有第二人)이 : 거기에 두 번째 사람이 또
어일념경(於一念頃)에 : 일념경에
능지전인아승지겁소지중생제해차별(能知前人阿僧祗劫所知衆生諸解差別)하야: 능히 앞의 사람이 아승지겁에 알았던 모든 중생의 이해차별을 안다.
여시역진아승지겁(如是亦盡阿僧祗劫)하며: 이와같이 또한 아승지겁이 다하며
차제전전(次第展轉)하야 : 차제로 차제로 계속해서 나아가서
내지제십(乃至第十)하고 : 열 번째 사람에게 이른다. 동방으로만 그렇게 하고
남서북방(南西北方)과 : 그 다음에는 남서 북방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 사유상하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면: 역부여시한다. 한사람이 일념에 그렇게 알고 또 염념히 알아서 각 시방 마다 그렇게 중생의 종종차별을 안다고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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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시방중생(此十方衆生)의
종종차별해(種種差別解)는: 종종 차별 이해는
가지변제(可知邊際)어니와: 그 끝을 알 수가 있다고 해도. 사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그 끝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보살의 입장에 있어서는 그 정도 끝을 안다고 하더라도
보살(菩薩)의
초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처음 보리심을 발한
공덕선근(功德善根)은:그 공덕의 선근은
무유능득지기제자(無有能得知其際者)니라: 그 끝을 능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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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러느냐, 어째서 초발심공덕이 그렇게 어마어마 한가?
불자(佛子)야
보살(菩薩)이
부제한(不齊限)하야 : 부제한하야, 제(齊)자는 분제라고 할 때의 제자다. ‘어디까지다’ 라고 한계를 짓는 것이다. 한계를 지어서
단위지이소중생해고(但爲知爾所衆生解故)로: 다만 그 정도의 중생의 이해를 알기 위한 까닭으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 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다. 부제한 할 때의 아닐 불(不)자를 여기 새긴다. 문장 형태가 똑같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 정도 중생들의 이해를 알려고 발심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뭐하려고 발심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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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지일체세계소유중생(爲盡知一切世界所有衆生)의 : 다 알려고 발심한 것이다. 무엇을 다 알려고 하는가? 일체 세계의 소유 중생의
종종차별해고(種種差別解故)로: 종종차별의 이해를 다 알기 위한 까닭으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다. 그렇게 다 알려고 하는 것이 어느 만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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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욕지일체차별해무변고(所謂欲知一切差別解無邊故)와: 소위 일체 차별 이해의 가없는 연고로
일중생해무수중생해평등고(一衆生解無數衆生解平等故)며: 욕지를 이 앞에 새긴다. 일체중생해의 이해와 무수중생의 이해가 평등한 것을 알고자 하는 연고며
욕득불가설차별해방편지광명고(欲得不可說差別解方便智光明故)며 : 또 불가설 차별이해와 방편 지혜 광명을 얻고자 하는 연고며
욕실지중생해각각차별해(欲悉知衆生海各各差別解)하야: 또 중생의 이해를 다 알고자 함이며,
이런 식으로 약간씩 변화를 주면서 나간다. 무수 중생의 각각 차별의 이해를 다 알아서
진무여고(盡無餘故)며: 하나도 남음이 없도록 다 알고자 하는 연고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리심, 보리심’ 하는 그 보리심 속에는 이와 같이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져 있다. 앞서 보리심을 불심이다, 지혜의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이다 등으로 해석했었는데, 이와 같은 설명 속에 보리심의 광대무변한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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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지과현미래선불선종종무량해고(欲悉知過現未來善不善種種無量解故)며 : 과거 현재 미래의 선한 일이나 불선한 일 그런 가지가지 한량없는 이해를 다 알고자 하는 연고며
욕실지상사해불상사해고(欲悉知相似解不相似解故)며 : 비슷한 이해와 비슷하지 않는 이해를 다 알고자 하는 연고며
욕실지일체해(欲悉知一切解)가: 일체이해가
즉시일해(卽是一解)와 : 곧 한 가지 이해인 것과.
일해(一解)가: 또 한 가지 이해가
즉시일체해고(卽是一切解故)며: 즉시 일체이해인 것을 다 알고자 하는 연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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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득여래해력고(欲得如來解力故)며: 여래의 이해의 힘을 얻고자 하며
욕실지유상해무상해(欲悉知有上解無上解)와:위가 있는 이해와 위가 없는 이해와
유여해무여해(有餘解無餘解)와: 남음이 있는 이해와 남음이 없는 이해와
등해불등해차별고(等解不等解差別故)며:평등한 이해와 평등하지 않는 이해의 차별을 다 알고자 하는 연고며
욕실지유의해무의해(欲悉知有依解無依解)와 : 또 의지함이 있는 이해와 의지함이 없는 이해와
공해불공해(共解不共解)와: 공해와 불공해와
유변해무변해(有邊解無邊解)와:유변해와 무변해와
차별해무차별해(差別解無差別解)와: 차별해와 무차별해와
선해불선해(善解不善解)와: 선해와 불선해와
세간해출세간해차별고(世間解出世間解差別故)며:세간해와 출세간해의 차별을 다 알고자 하는 연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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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어일체묘해대해무량해정위해중(欲於一切妙解大解無量解正位解中)에: 또 일체 미묘한 이해, 대해, 무량해, 바른 지위에 있는 이해
득여래해탈무장애지고(得如來解脫無障礙智故)며: 여래 해탈의 무장애지를 얻고자 하는 연고며
욕이무량방편(欲以無量方便)으로 : 한량없는 방편으로
실지시방일체중생계일일중생(悉知十方一切衆生界一一衆生)의 : 시방일체중생계 일일중생의
정해염해(淨解染解)와: 청정한 해와 물든 이해와
광해약해(廣解略解)와 :넓은 이해와 간략한 이해와
세해추해(細解麤解)하야 : 미세한 이해와 거친 이해를 다 알아서
진무여고(盡無餘故)며: 다 남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연고며
욕실지심밀해(欲悉知深密解)와 : 깊고 비밀한 이해와
방편해(方便解)와: 방편 이해와
분별해(分別解)와:분별이해와
자연해(自然解)와: 자연이해와
수인소기해(隨因所起解)와: 인을 따라서 일어난 바의 이해와
수연소기해(隨緣所起解)와: 연을 따라서 일어난 바의 이해와
일체해망(一切解網)하야 : 일체해의 그물을 다 알고자 해서. 위에 있는 욕실지를 여기에도 새긴다.
실무여고(悉無餘故)로 : 다하야 남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연고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나니라.
그래서 보리심을 발한 것이지 ‘하이고’ 위에서 열거한 내용 정도의 중생의 이해를 알려고 발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발심이라는 말을 흔히 쓰고, 개나 고양이를 보고도 ‘발보리심하라’는 말을 한다.
그 한마디 속에는 화엄경에서 발심의 공덕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러한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발심의 공덕이 너무 커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그 정도만 우리가 느껴도 그 공덕이 무량하다.
7, 衆生의 根性理解와 初發心功德
佛子야 復置此喩하고 假使有人이 於一念頃에 能知東方無數世界一切衆生의 諸根差別호대 念念如是하야 經阿僧祗劫이어든 有第二人이 於一念頃에 能知前人의 阿僧祗劫에 念念所知諸根差別하며 如是廣說하야 乃至第十하고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면 佛子야 此十方世界所有衆生의 諸根差別은 可知邊際어니와 菩薩의 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功德善根은 無有能得知其際者니라 何以故오 菩薩이 不齊限하야 但爲知爾所世界衆生根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 爲盡知一切世界中一切衆生根의 種種差別하며 廣說乃至欲盡知一切諸根網故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라
"불자여, 이 비유 또한 그만두고, 가령 어떤 사람이 한생각 동안에 동방의 무수한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근성이 차별함을 알며, 생각생각마다 이러하여 아승지겁을 지내었고, 또 둘째 사람이 한생각 동안에 앞에 사람이 아승지겁 동안에 생각생각마다 아는 모든 근성의 차별함을 알며, 이렇게 하여 내지 열째 사람에 이르렀고, 남방. 서방. 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 하방도 역시 이와 같았느니라.
불자여, 이 시방세계에 있는 중생들의 근성이 차별함을 끝까지 안다 하더라도,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처음으로 낸 공덕과 선근은 그 끝까지 알 사람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이 다만 저러한 세계 중생들의 근성을 알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데 제한한 것이 아니라,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일체중생의 근성이 갖가지로 차별한 것을 모두 알기 위한 것이며, 더 말하면 내지 일체 근성의 그물을 죄다 알려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
중생(衆生)의 근성이해(根性理解)와 초발심공덕(初發心功德): 중생들의 근성의 차별을 아는 비유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부치차유(復置此喩)하고 : 다시 이 비유는 그만 두고
가사유인(假使有人)이: 가사 어떤 사람이
어일념경(於一念頃)에: 일념경에
능지동방무수세계일체중생(能知東方無數世界一切衆生)의 : 능히 동방의 무수 세계 일체 중생의
제근차별(諸根差別)호대 : 제근 차별을 능히 알되
염념여시(念念如是)하야: 역념에 여시해서
경아승지겁(經阿僧祗劫)이어든: 아승지겁을 지나거든
*
유제이인(有第二人)이 : 이렇게 제 이인이
어일념경(於一念頃)에 : 일념경에
능지전인(能知前人)의 : 능히 앞의 사람의
아승지겁(阿僧祗劫)에 : 아승지겁에
염념소지제근차별(念念所知諸根差別)하며 : 염념히 아는 바의 제근이해를 능히 알며
여시광설(如是廣說)하야 :이와 같이 널리 설해서
내지제십(乃至第十)하고: 내지 열 명까지 이른다. 바로 앞의 사람이 아는 것만 아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사람이 아는 것부터 죽 밟아서 다 아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아는 것과 두 번째 사람이 아는 것을 다 알고 다섯 번 째 사람은 첫 번째 두 번째 세번째 네 번째 사람이 아는 것 까지 안다. 그렇게 제10에까지 이른다. 동쪽의 이야기가 그렇다.
남서북방(南西北方)과 : 남서북방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사유상하도
역부여시( 亦復如是)하면 : 역부여시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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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차시방세계소유중생(此十方世界所有衆生)의 : 이 시방 세계에 있는 바 중생들의
제근차별(諸根差別)은 :모든 근의 차별은. 그 외에도 다른 근들이 있겠지만 주된 근인 안이비설신의 6근이라고 하자. 이 모든 근의 차별은
가지변제(可知邊際)어니와 : 그 끝을 알 수 있거니와
보살(菩薩)의
초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初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 초발심한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공덕선근(功德善根)은 : 공덕의 선근은
무유능득지기제자(無有能得知其際者)니라: 그 끝을 능히 알 수가 없느니라.
*
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러느냐? 어째서 그와같이 초발심 공덕의 선근은 그 끝을 모른다고 하느냐?
보살(菩薩)이: 보살이
부제한(不齊限)하야: 제한을 딱 해서, 어디까지라고 하는 분제를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 38선까지다’ 아니면 ‘중국 경계선까지다’ 아니면 ‘유럽까지다’ 이런 식으로 한계를 딱 나눠놓고
단위지이소세계중생근고(但爲知爾所世界衆生根故)로 : 다만 이소 세계 중생의 근을 알기 위한 까닭으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 아니다. 부제한 할 때의 아닐 불(不)자를 여기 새긴다.
*
위진지일체세계중일체중생근(爲盡知一切世界中一切衆生根)의 : 일체 세계중 일체중생근의
종종차별(種種差別)하며 : 종종차별을 다 알며
광설내지욕진지일체제근망고(廣說乃至欲盡知一切諸根網故)로 : 널리 이야기 하면 내지 일체 제근의 그물을 다 알고자 하는 까닭으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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