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

[스크랩] 선법요해 28. 선정의 두 종류 = 제법실상을 관하는 것/법을 이용하는 것

수선님 2018. 8. 5. 11:25

[문]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자삼매(慈三昧)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중생을 관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삼매(慈心三昧)란 두루 시방에 가득한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지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를 원한다고만 말하는가?

 

[답] 자심을 처음 닦아 익힐 때는 즐거움을 얻도록 원하는 정도이지만

자심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향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이 나올 때 처음에는 가늘고 부드러운 건초를 태우지만 불기운이 점차 커지면 젖은 나무와 산림을 일시에 함께 태우는 것처럼,

 

자심도 이와 같아서 처음 들어가 관할 때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도록 바라지만 자심의 힘이 점차 성숙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문] 중생은 진실로 얻을 것이 없으니,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뒤바뀐 생각이 아니겠는가?

 

[답] 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관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진주(眞珠)를 다루는 기술자는 첫째로 진주의 모양이 귀한지 흔한지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를 잘 알며, 둘째로 잘 가공하여 이용하는데 어떤 이는 그 모양은 잘 알지만 가공해 이용할 줄 모르고, 혹 어떤 이는 가공해 이용할 줄은 알지만 그 모양을 잘 모르며, 혹 어떤 이는 모양도 잘 알고 가공해 이용할 줄도 잘 아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현성(賢聖)으로서 욕심을 떠나지 못한 이는 법상(法相)과 4진제(眞諦) 등을 관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이용하지는 못하니, 4무량(無量)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범부가 욕심을 떠나 여러 공덕을 행한다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으니,

4무량심(無量心)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두 갖추어 해탈한 아라한 등은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도 있고,

선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4무량심을 생각할 수도 있다.

 

4무량이란 해탈을 얻는 법이니,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불법에는 진실로 어떤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괴로움은 진실하고 즐거움은 뒤바뀐 것이라고 관하는가?

 

이른바 뒤바뀌었다는 것은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항상하거나 무상(無常)하다거나 끝[邊]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뒤바뀐 것이다.

 

자심(慈心)을 행하는 사람은 중생이 가명임을 아니,

마치 바퀴 등이 합해져서 그것을 수레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수행자는 자심이 청정하면 뒤바뀌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실재한다고 여기면,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한다는 이것도 마땅히 뒤바뀐 것이다.

 

중생이 존재한다거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치우친 견해[邊見]이니,

단지 중생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만이 뒤바뀜인 것은 아니다.

 

 

 

 

 

 

선법요해 28. 선정의 두 종류 = 제법실상을 관하는 것/법을 이용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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