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46칙의 경청스님은 설봉스님의 뒤를 이은 도부스님(868~937)을 말한다.
경청스님이 한 스님에게 “문 밖에서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다. 스님은 “빗방울 소리”라고 답했다. 경청스님이 말했다. “너는 빗방울 소리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러자 그 스님이 “스님께서는 저 소리를 뭘로 듣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경청스님은 “자칫했으면 나도 사로잡힐 뻔 했지”라고 응대했다. “자칫하면 사로잡힐 뻔하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하고 그 스님이 또 물었다. 경청스님이 잘라 말했다.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는 그래도 쉽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擧. 鏡淸問僧, 門外是什聲. 僧云, 雨滴聲. 淸云, 衆生顚倒, 迷己逐物. 僧云, 和尙作生. 淸云, 不迷己. 僧云, 不迷己 意旨如何. 淸云, 出身猶可易, 脫體道應難.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제10권, 〈전등록〉제18권 경청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경청화상(868~937)에 대해서는 〈벽암록〉제16칙 본칙에도 등장한 선승으로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도부(道)선사다. 〈현사어록〉에는 경청화상이 젊은 시절 현사사비선사의 처소에서 수행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도부상좌가 밤중에 현사화상에게 나아가 예배를 올리고 법문을 청했다. ‘저는 여기에 와서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화상은 자비를 베풀어 깨달음을 체득하는 길(入路)을 제시해 주십시요.’ 현사는 말했다. ‘그대는 저기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가?’ 도부는 ‘예. 들립니다.’ 라고 말하자, 현사는 ‘그러면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청화상은 현사의 지시를 받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였다.
〈운문어록〉에 운문이 항상 ‘일체의 모든 소리는 부처의 소리요, 일체의 모든 모양은 부처의 모습이며, 모든 대지가 바로 법신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소동파도 동림상총선사를 참문하여 무정설법을 듣고 대오하고 ‘개울 물소리가 곧 부처의 설법이요, 산의 모습이 청정법신이로다.’라고 오도송을 읊고 있는 것은 이러한 법문을 체득한 경지이다.
원오도 ‘평창’에 경청화상이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빗방울 소리, 비둘기 울음소리 등 자연을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하는 법문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도 경청화상이 방안에서 어떤 스님에게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고 있다. 스님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경청화상은 ‘중생들은 누구나 마음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사물을 쫓는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수능엄경〉 제2권에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자기에 미혹하여 사물이라고 하고,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물의 지배를 받아서 굴림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대(大)를 보고, 소(小)를 본다. 만약 능히 사물을 지배하여 굴리면 여래와 같이 되리라.’라는 일절에 의거하고 있는 말이다. 즉 중생은 빗소리를 들으면 빗소리에 집착하고,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소리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고 항상 밖의 경계에 끄달리고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입사행론〉에도 ‘미혹할 때는 사람이 법(사물)을 쫓고, 깨달으면 법(사물)이 사람을 쫓는다. 깨달으면 마음이 사물을 수용하고, 미혹하면 사물이 마음을 포섭한다.’라고 설한다. 〈육조단경〉에도 혜능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법달에게,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의 지배를 받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경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굴릴 수가 있다.’라고 설하고 있다. 임제가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라!’고 설하는 것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일체의 사물과 경계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수능엄경〉에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들음(聽)과 소리(聲)는 모두 처소가 없다. 들음과 소리, 이 둘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실체도 없는 소리에 집착하고, 자기 자신이 미혹하여 빗소리와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중생은 전도되어 있다고 한다. 중생의 전도된 모습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자기의 진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물이나 대상에 집착하여 망념과 분별심을 일으키는 심(心)전도, 두 번째는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데 마치 공중에 나타난 꽃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체로 착각하는 견해를 견(見)전도라고 하며, 세 번째는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알지 못하고 분별망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상(想)전도라고 한다.
스님은 저는 빗소리로 들었습니다만 ‘화상은 어떻게 들었습니까’라고 경청화상의 경지를 물었다. 경청화상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즉 하마터면 나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에 집착할 뻔 했다. 스님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하자, 경청화상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그래도 쉬운 일이지만,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네’라고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앞에서 말한 빗소리와 사물모양의 차별경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즉 밖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빗소리에 끄달려 자신을 잃어버릴 뻔 했지만 곧바로 차별경계에 집착한 자신을 자각하고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다. 선에서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없어지고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된다는 선수행의 방법과 본래심을 깨닫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사물을 인식하고 사물에 집착하면 중생이 되지만, 사물의 본질을 깨닫고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부처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道)한다는 말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 자체를 그대로 본분 전체를 언어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조론〉에도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 문자로 표현 할 수가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 할 수 없다(言語道斷,心行處滅)’고 설하고 있으며, 선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언전불급(言詮不及)을 말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빈 집의 빗방울 소리’ 밖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집 안에는 텅비어 아무도 없다. 텅 빈 집(마음)에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도 없으니 자신이 미혹한 일도 없고, 사물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고 읊은 말이다. ‘훌륭한 작가도 대답하기 어렵다.’ 문 밖에 들리는 소리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고 말하면, 사물을 쫓는 것이기에 마음이 법을 보는 것이 되고, 빗방울 소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현실의 사실을 위배하여 만법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정법의 안목 없는 사람이 된다. 훌륭한 선지식도 언어와 사량분별이 끊어진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 문자로 말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만약 흐름을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역시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수능엄경〉에 ‘관음보살 흐름을 바꾸어서 아는 바를 잊었다.’라는 말을 토대로 한 게송이다. 흐름을 바꾸다(入流)는 말은 객관의 사물을 주관으로 바꾸어 받아들인 작용(入)을 말한다. 즉 밖에 비오는 소리(객관)를 비오는 소리를 그대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지 비오는 소리로 인식하는 경지라면 여전히 빗소리를 듣는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에 진실로 깨달음의 경지인 비의 소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 비의 소리는 알거나 알지 못했거나 관계없이 역시 비의 소리일 뿐이다. ‘남산과 북산에는 더욱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네.’ 이곳저곳 어느 곳에도 비의 소리가 울린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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