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48칙 王太傅煎茶 -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차 이야기

수선님 2018. 8. 19. 12:20

관련 이미지 <벽암록(碧巖錄)> 제48칙은 당말 복건성 천주(泉州) 초경원(招慶院)을 방문한 왕태부와 차를 대접한 혜랑상좌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왕태부가 초경원을 방문하니 마침 스님들이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왕태부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물었다. ‘차를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있지요.’ 왕태부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엎어 버렸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명초가 말했다.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군’ 혜랑이 말했다. ‘화상은 어떠십니까?’ 명초가 말했다. ‘귀신(非人)에게 당했군.’ 설두가 말했다.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

 

擧. 王太傳, 入招慶煎茶. 時, 朗上座, 與明招把, 朗, 却茶 太傳見, 問上座, 茶爐下是什. 朗云, 捧爐神. 太傳云, 旣是捧爐神, 爲什, 却茶, 朗云, 仕官千日, 失在一朝. 太傳, 拂袖便去. 朗上座, 喫却招慶飯了, 却去江外, 打野,

 

朗云, 和尙作生. 招云, 非人得其便 (雪竇云, 當時但踏倒茶爐.)


본칙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오등회원> 제8권 왕태부전에 보이고 있다. 왕태부는 천주칙사(泉州刺史) 왕연빈(王延彬)으로 설봉문하의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보복종전(保福從展. 867~928)선사를 참문한 당대의 안목있는 거사다. 왕태부는 혜릉선사가 설봉산에서 수행할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로 천우(天佑) 3년(906) 자신이 칙사(刺史)로 근무하는 천주에 초경원이라는 절을 지어 혜릉선사가 거주하도록 하고, 자주 찾아가 참선하며 선문답을 나누곤 하였다. 뒤에 조정으로부터 태부(太傅)라는 직위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왕태부라고 경칭(敬稱)하여 불렀다.

 

혜랑상좌는 혜릉의 제자로 뒤에 복주(福州) 보자원(報慈院)의 주지로 활약한 혜랑선사로 <전등록(傳燈錄)> 제21권에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명초는 무주 명초산의 덕겸(德謙)선사로 <전등록> 제23권의 전기에 의하면 지혜의 기봉이 민첩하고, 왼쪽 눈이 없어 독안룡(獨眼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본칙은 왕태부가 장경혜릉선사가 주석하는 초경원을 방문하자 혜릉화상이 부재중이라 혜랑상좌가 왕태부에게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냄비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고의인가 부주의인가? 왕태부가 혜랑상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다. 즉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화로를 떠받치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모양이 귀신처럼 생겼기 때문에 봉로신(捧爐神)이라고 한다. 구참의 거사가 혜랑상좌에게 한 방 먹이는 질문이다.

 

혜랑상좌는 왕태부의 질문에 정직하게 “화로를 떠받치는 신(神)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왕태부는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뒤엎어 버렸소?”라고 다구쳤다.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라면 차를 끓이는 주전자를 보호하고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어째서 뒤엎어 버렸소? 왕태부가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혜랑상좌가 봉로신이라고 대답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진여법성이라는 대답이다. 화로를 받치는 봉로신은 진여법성을 말하며,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생사망념을 말한다. 그렇다면 진여법성이 ‘어째서 생사망념을 일으키는가?’라고 왕태부가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혜랑상좌는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 났지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여법성과 생사망념의 관계에 맞추어 보면, <기신론(起信論)>에 설하고 있는 것처럼, 진여법성은 번뇌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며 불변(不變)이다. 그러나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 것처럼, 열반적정의 경지에서 홀연히 번뇌망념이 일어나 생사에 유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오랫동안 착실하게 근무 잘한 관리도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진여자성인 봉로신이 아무리 잘 보호해도 번뇌망념이 일어나는 시절인연을 만나면 어쩔 수가 없이 주전자가 뒤엎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태부의 행동은 안목없는 한심한 혜랑상좌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진여법성과 생사번뇌의 분별 망념에 떨어진 일체의 차별심을 함께 떨쳐버려야 한다는 주의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명초가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소란을 피우는군”이라고 말했다. 즉,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혜릉선사의 지도를 받고 있으면서 혜릉의 제자다운 정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않고, 불법을 모르는 세간 사람들과 쓸데없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가?’라고 질타하고 있다. 혜랑상좌는 올바른 불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못하고 삿된 길에서 왕태부의 말에 끌려 본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자 혜랑은 “화상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라고 명초의 견해를 묻고 있다. 명초는 “귀신(非人)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비인(非人)은 봉로신을 말하는데, 마음이 방심하면 귀신이 엿본다는 말처럼, 혜랑상좌의 마음이 번뇌망념에 떨어졌기 때문에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번뇌 망념의 실수가 아니라 본분의 작용이었다는 말이다. 원오는 “과연 정법의 안목(一隻眼)을 갖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명초의 견해를 칭찬했다.

 

설두화상은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라고 말했다. 즉 차 주전자와 화로의 논쟁에 대하여 설두는 왕태부나, 명초나 모두 차 도구를 가지고 이렇쿵저렇쿵 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의 지혜작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태부가 “차 달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을 때 논쟁의 씨앗인 화로를 뒤엎어버렸다면 봉로신이 엿볼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왕태부를 화내지 않게 할 수가 있었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묻는 말이 바람이 일 듯 하였으나, 선기로 대처함은 훌륭하지 못했다. 목수가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면서 코끝에 묻은 작은 진흙을 제거하였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사람 역시 꼼짝하지 않고 서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장자〉 ‘서무귀’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즉 왕태부가 혜랑상좌에게 던진 질문은 목수가 도끼를 휘두른 바람처럼 훌륭한 것인데, 혜랑상좌의 대답은 왕태부의 질문에 부응하지 못했다. 왕태부를 상대할만한 안목이 없었다고 비판한 말이다.

 

“가련하다, 애꾸눈 용이여!” 독안룡은 명초의 별명인데, 그가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읊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명초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코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지 않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용(龍)이라면 용답게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 왕태부와 대항했다면 좋았을 텐데, 용다운 활기를 들어내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면” 명초가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설두 자신이 대신 “왕태부가 질문할 때에 화로를 뒤엎어 버렸어야지!”라고 착어한 말을 본인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원오는 “만약 이러한 수단이 있었다면 화로를 뒤엎었을 것인데”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혜랑상좌나 명초가 설두화상과 같은 안목과 선기가 있는 선승이라면 이러한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오는 혼자 독백하고 있다. “구름과 우레가 일어나네” 용이 발톱과 어금니를 들어내면 그곳에 구름을 부르고 바람이 일며 우레가 진동하게 된다고 설두가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설두의 지혜작용에 “천하의 납승 몸 둘 곳이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를 몇 번이나 겪었던가?” 우레가 일고 큰 비가 쏟아져 파도가 일어난 것처럼, 설두자신의 선기를 칭찬하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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