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일합이상분
합쳐진 세계나 부수어진 미진이라는 상을 버리라
一合理相分 第三十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 卽不說 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 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 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 대천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어야 할 것이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합쳐진 모양도 실은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합이상분에서 일합이상은 한자로 ‘一合理相’으로 옮긴다. 그렇기 때문에 일합이상에 대한 해석도 ‘하나로 합쳐진 이치의 모양’이라고 옮겨지곤 한다. 그러나 미진이라는 가장 작은 우주의 구성요소와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가장 큰 우주 그 자체에 대해서도 모두 상을 짓지 말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분의 내용에서 보았을 때 ‘하나로 합쳐진 이치의 모양’이라는 제목은 사뭇 어색하고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금강경 해석·주석가들이 이 분의 제목에 대한 설명에 있어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해석에서는 미진과 세계라는 현상 속에 부처님의 진리가 하나로 합쳐 있다고 하기도 하고, 이(理)는 현실 이면의 진리이고 상(相)은 현상이기에 그 둘이 하나로 합쳐졌다고 하기도 하고, 하나니 여럿이니 하는 분별을 떠나 하나의 이치에 합한다고도 하며, 또 어떤 해설에서는 이(理)를 다를 이(異)자로 보아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 주석가들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이 애써 끼워 맞춘 흔적이 역력하고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분의 제목은 일합이상(一合理相) 보다는 일합이상(一合離相)이라고 번역했을 때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 교수나 김용옥 교수 또한 일합이상(一合離相)이라는 번역이 원명이며, 일합이상(一合理相)은 동음이자(同音異字)의 오류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는 본문의 내용과 분의 제목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해석이 된다. 먼저 이 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하고 가장 작은 것을 미진이라고 하면서 이 극단의 두 가지 상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을 설하고 있는데, 일합(一合) 즉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인 미진들이 하나로 합쳐져 삼천대천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고, 이(離)라는 것은 한자의 의미처럼 떨어져 있다, 떼어져 있다, 흩어져 있다, 나누어져 있다는 의미로 삼천대천세계를 쪼개고 또 쪼개어 흩어 놓고 따로 떼어 놓은 미진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즉 이 분의 제목의 의미는 ‘합쳐진 삼천대천세계라거나 떼어진 미진이라거나 하는 상’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는 일합상(一合相)에도 얽매여서는 안 되고, 미진이라는 이상(離相)에도 얽매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 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부수고 또 부수어 잘게 쪼개고 또 쪼개어 만날 수 있는 가장 작은 원소를 미진이라고 이름 붙였다. 삼천대천세계를 쪼개고 또 쪼개면 가장 작은 단위의 미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큰 것을 쪼개면 작은 것이 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당연한 이치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쪼개고 쪼개 보면 자동차를 이루고 있는 작은 수많은 부품들로 나누어 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며 물질은 모두 이처럼 작은 것들로 쪼개어 지고 나누어진다. 그렇기에 그렇게 쪼개어진 가장 작은 단위인 미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모여야지만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도 마찬가지로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미진들이 모여야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그렇게 쪼개고 쪼개어 가장 최소 단위가 되어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내려가면 그 마지막 단계에서 있는 미진이라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마지막 단계의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야 그러한 것들이 많이 모여서 다른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비로소 다른 모든 것들 또한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깨는 설법을 하고 있다. 쪼개고 쪼개어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까지 내려간 ‘미진’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미진들이 모여 만들어 진 우리 눈 앞의 세계며, 존재며, 물질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 이 우리 눈 앞에 현전해 있는 삼천대천세계는 무엇인가.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어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는 질문에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라고 했다. 즉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실제로 있는 실체성을 가진 어떤 것이기에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이름이 미진일 뿐일 따름’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만 이름을 미진이라고 붙였을 뿐이지 거기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미진이라 이름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면 어째서 삼천대천세계를 만들어 낸 미진이라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체적인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즈음에서 현대 물리학의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반적으로 불교의 극미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과학에서는 일찍부터 원자(原子)라고 했다. 그런데 후대에 물리학이 더욱 발전되면서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고, 또한 이 양성자와 중성자도 궁극적인 물질이 아니라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 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수한 미립자들은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23승)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잘 이해가 안 될 것인데, 쉽게 말해 미립자의 생명과 1초와의 비는 1초와 약 300조년의 비와 같다고 한다. 300조 년은 지구 역사의 60만 배이며 우주 역사의 20만 배나 되는 긴 시간이다. 그야말로 찰나 동안 무수한 미립자들은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의 구성요소인 모든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모습 그대로를 항상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찰나로 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립자의 세계에서 더 중요한 한 가지의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한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다른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은 결코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각각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수많은 미립자들의 생성과 소멸은 미립자 전체의 긴밀한 상호 연관, 상호의존 속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과정의 한 단편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은 한 미립자만을 따로 떼어 내어 본다거나, 생성과 소멸의 어느 한 면만을 보려고 해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립자 서로간의 관계에 있어서, 한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은 다른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사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므로,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실제로써의 미립자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스스로의 독자적인 실체가 없고 실제성이 없어서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상의상관, 상호의존이라는 연기적인 성품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자 양형진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자성이 없이 상의상대하는 존재라는 것이어서, 그 전체가 곧 연기(緣起)요 공(空)이어서 화엄(華嚴)의 표현으로는 서로의 입자가 상즉(相卽)하여 사사무애(事事無碍)한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을 사사무애와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보고 있다. 사사무애란 현상세계와 현상세계가 서로 걸림이 없이 원융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미립자라는 미진이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미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미진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진이라는 것은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연따라 상의상관적으로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법칙에 의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를 이루는 모든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며 생명들 또한 모두가 실제가 아닌 공이요 무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인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해 본다면,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미진들이 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미진이 있으므로 저 미진이 있고, 이 미진이 생기기 때문에 저 미진이 생기며, 이 미진이 없기 때문에 저 미진이 없고, 이 미진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 미진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전형적인 경구가 의미하는 바다. 이처럼 모든 미진들이 서로 다른 미진의 생성과 소멸에 의존하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미진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 또한 ‘이웃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이웃이 없으면 나도 없는’ 관계로 이어지고, ‘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고, 자연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지는’ 관계로 이어지며, ‘삼천대천세계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삼천대천세계가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지는’ 동체(同體)적인 연기와 자비의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을 내 몸 처럼 따뜻하게 아끼고 돌보면 그것이 그대로 나의 삶과 직결되고,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또한 그대로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것이 그대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세계의 최소물질인 미진이 상의상관적인 연기의 존재이기에 그 미진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나와 세계의 관계 또한 상의상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니요, 내 몸과 이웃이 둘이 아니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사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모두는 따로 떨어진 존재 같지만 사실은 한 몸이요 동체(同體)이기에 내 몸처럼 이웃과 나라와 자연과 우주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동체적 자비, 연기적 자비, 무아적 자비의 실천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 대천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어야 할 것이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합쳐진 모양도 실은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인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하고, 텅 비어 있기에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는 과연 실제로 있는 것인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인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이라면 그러한 미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삼천대천세계 또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임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이기에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 즉 일합상이어야 할 것이지만 ‘일합상은 일합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다.
일합상이란 수많은 미진들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을 말한다. 즉 일합상은 우리들이 삼천대천세계라는 세계를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실제적인 모양으로써의 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삼천대천세계가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로 합쳐진 상’이라고 실제시 하고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 미진이 텅 비어 공할진데 미진으로 이루어진 삼천대천세계를 일합상이라고 실제시 하며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삼천대천세계, 즉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가장 큰 것 또한 실제가 아니며, 독자적인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시세계인 삼천대천세계를 현대의 과학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양형진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양 주위에는 지구를 포함한 9개 혹은 8개의 행성(명왕성을 빼면)이 있고 각각의 행성 주위에 위성이 있으며 이들 전체를 태양계라고 부른다.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항성 혹은 별이라고 부르는데, 태양계에서 별은 태양 하나뿐이다. 이 태양에서 태양계의 제일 바깥에 있는 행성인 명왕성까지의 거리는 약 60억 km 정도이며, 빛으로 약 5시간이 걸린다. 이 태양계의 바깥에는 ‘우리은하’라는 별의 집단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양을 비롯하여 약 3천억 개의 별이 원판 모양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빛이 1년 걸려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우리은하 안에서 별과 별 사이의 평균 거리는 대략 5광년이고 우리은하의 반지름은 약 5만 광년 정도 되며 태양은 그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내가 지리산에 갔을 때 장터목 산장에서 처음으로 선명한 은하수를 보고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하수라는 것이 바로 우리은하 안에 있는 별들의 모임이다. 태양계가 은하의 가장자리에 있고 은하수가 납작한 원판 모양의 형태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볼 때 우리은하에 속하는 대부분의 별들은 한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로 약 200만 광년의 거리에 있다. 이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를 포함하여 20여 개의 주변 은하가 하나의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지역군’이라고 부른다. 이 우리지역군에서 6000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버고 은하단이 있으며, 이 안에는 약 2500개 정도의 은하가 포함되어 있다. 버고 은하단은 다시 버고초 은하단의 일부가 되며, 버고초 은하단의 근처에는 이보다 더 큰 코마초 은하단이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우주의 대략적인 모습이다. 물론 이것으로 우주를 다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도 과학의 영역과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초월할만한 무량광 무량수의 우주가 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에 대한 무량한 설명을 보면 앞의 장에서 설명했던 삼천대천세계의 설명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감잡을 수 없고 상상도 해 낼 수 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야말로 무량수요 무량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삼천대천세계요 우주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런 우주는 과연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며, 실체적인 것일까? 별이며, 은하, 은하단,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주는 과연 끝없는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에 입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해 가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단계를 거친다. 우주의 성주괴공을 간단히 살펴보면, 위에서 설명했던 별이나 혹성 이외에도 별과 별 사이에는 대단히 넓은 공간에 수많은 물질이 존재하는데, 연기나 안개보다 희미하게 밀도가 적고 주성분이 수소로 이루어진 이 물질을 성간물질이라고 한다. 이 성간물질은 우주 공간에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여 있으며, 각 부분의 밀도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그렇기에 이 성간물질은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 성간물질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성간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이고, 별에서 오는 빛에 의해 광압이 가해지면 성간물질의 덩어리는 밀집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밀집과 수축이 가속화되면 내부의 압력과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1000만 도 이상 온도가 상승하면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고, 이 때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방출이 된다. 즉 이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 별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간물질이라는 공(空)의 단계에서 별이라는 성(成)의 단계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별은 한동안 크기와 빛의 밝기가 대략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주(住)의 단계다. 그러나 주의 단계라도 변함 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별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수소원자가 헬륨원자로 바뀌는 핵융합 반응은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서 결국 핵융합 반응의 원료가 되는 수소를 다 쓰게 되면 결국 빛은 소멸되고 별의 일생은 끝나게 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괴(壞)의 단계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공이 되고, 다시 성·주·괴·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태양도 이미 생성되고 나서 50억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하며 성주의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다시 50억 년 후가 되면 수소가 다 소멸되어 괴공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고 하니, 미시 세계인 미진과 같이 거시세계인 우주 또한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써 고정된 실체도 없고,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삼천대천세계라는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무자성이고,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라는 것은 다만 인연따라 무수한 조건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인 것이다. 미진이 그랬듯이 삼천대천세계 또한 그대로 연기법의 현현이며,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는 존재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50억년 후에 태양이 괴공의 단계를 맞게 되어 소멸한다면 그 때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며, 생명들 또한 인연따라 모두 함께 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무아와 공의 진리는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연기법을 그 기본 이치로 한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태양이 소멸하므로 내가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름이 소멸일 뿐이며, 이름이 죽음일 뿐이지, 단멸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모였듯이 인연이 다하면 소멸될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 즉 삼천대천세계라는 미진이 합쳐진 모양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합상도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것에 상을 짓는 것을 ‘일합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를 일합상으로 들고 있지만 사실 일합상은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즉, 나라는 존재도 일합상이요, 집도, 나무도, 산도, 바다도, 구름도, 자동차도, 연필도, 책상도 모두가 일합상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든 물질, 모든 존재가 다 일합상인 것이다. 그 일합상의 가장 큰 것이 삼천대천세계요, 우리가 가장 크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아상이다. ‘나’라는 것을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실제라고 생각하는 아상이 있다면 그 아상이 바로 일합상인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미진’도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이며, ‘삼천대천세계’도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이며, 나도 이웃도, 사람도 자연도, 풀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책상과 그 밖에 이름짓는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진에도, 삼천대천세계에도, 나에도, 모든 존재며 물질이며 생명이며 일체제법 그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거나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는 무집착, 방하착을 역설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합상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라고 했고,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법’은 ‘존재’ 혹은 ‘진리’로 해석되는데 여기에서는 법을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일합상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존재도 아니고, 존재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것은 다만 방편으로 이름을 일합상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사실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미진도, 삼천대천세계도, 나아가 나도 너도, 물질도, 자연도, 바람도, 구름도, 모든 일합상은 고정된 실체로써의 존재라고 해도 맞지 않고, 그렇다고 존재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는 것이다. 존재라고 한다면 유(有)에 치우칠 수 있고,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무(無)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진과 삼천대천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고, 다만 중도일 뿐이며, 연기일 뿐이며, 그렇기에 분별할 수 없고, 차별할 수 없고, 공이며 무아인 것이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분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최고의 실천 수행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희론이 일어나고, 모든 논쟁이 일어나며, 모든 문제가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인 미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며,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상에 얽매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금강경에서는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집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먼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중생들의 기본적인 상을 깨도록 이끌고 있으며, 부처님의 육신인 32상 80종호에 대한 상도 깨뜨리고,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는 것에 대한 상도 깨뜨리며,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도, 수행한다는 상도, 깨달았다는 상도, 보시했다는 상도, 나아가 법이 있다 없다 하는 상도 깨뜨리고, 결국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구성요소인 미진에서부터 가장 큰 요소인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것을 모조리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합쳐진 세계나 부수어진 미진이라는 상을 버리라
一合理相分 第三十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 卽不說 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 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 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 대천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어야 할 것이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합쳐진 모양도 실은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합이상분에서 일합이상은 한자로 ‘一合理相’으로 옮긴다. 그렇기 때문에 일합이상에 대한 해석도 ‘하나로 합쳐진 이치의 모양’이라고 옮겨지곤 한다. 그러나 미진이라는 가장 작은 우주의 구성요소와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가장 큰 우주 그 자체에 대해서도 모두 상을 짓지 말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분의 내용에서 보았을 때 ‘하나로 합쳐진 이치의 모양’이라는 제목은 사뭇 어색하고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금강경 해석·주석가들이 이 분의 제목에 대한 설명에 있어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해석에서는 미진과 세계라는 현상 속에 부처님의 진리가 하나로 합쳐 있다고 하기도 하고, 이(理)는 현실 이면의 진리이고 상(相)은 현상이기에 그 둘이 하나로 합쳐졌다고 하기도 하고, 하나니 여럿이니 하는 분별을 떠나 하나의 이치에 합한다고도 하며, 또 어떤 해설에서는 이(理)를 다를 이(異)자로 보아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 주석가들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이 애써 끼워 맞춘 흔적이 역력하고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분의 제목은 일합이상(一合理相) 보다는 일합이상(一合離相)이라고 번역했을 때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 교수나 김용옥 교수 또한 일합이상(一合離相)이라는 번역이 원명이며, 일합이상(一合理相)은 동음이자(同音異字)의 오류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는 본문의 내용과 분의 제목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해석이 된다. 먼저 이 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하고 가장 작은 것을 미진이라고 하면서 이 극단의 두 가지 상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을 설하고 있는데, 일합(一合) 즉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은 가장 작은 것인 미진들이 하나로 합쳐져 삼천대천세계를 이룬다는 의미이고, 이(離)라는 것은 한자의 의미처럼 떨어져 있다, 떼어져 있다, 흩어져 있다, 나누어져 있다는 의미로 삼천대천세계를 쪼개고 또 쪼개어 흩어 놓고 따로 떼어 놓은 미진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즉 이 분의 제목의 의미는 ‘합쳐진 삼천대천세계라거나 떼어진 미진이라거나 하는 상’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는 일합상(一合相)에도 얽매여서는 안 되고, 미진이라는 이상(離相)에도 얽매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 대천 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부수고 또 부수어 잘게 쪼개고 또 쪼개어 만날 수 있는 가장 작은 원소를 미진이라고 이름 붙였다. 삼천대천세계를 쪼개고 또 쪼개면 가장 작은 단위의 미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큰 것을 쪼개면 작은 것이 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당연한 이치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쪼개고 쪼개 보면 자동차를 이루고 있는 작은 수많은 부품들로 나누어 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며 물질은 모두 이처럼 작은 것들로 쪼개어 지고 나누어진다. 그렇기에 그렇게 쪼개어진 가장 작은 단위인 미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모여야지만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도 마찬가지로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미진들이 모여야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그렇게 쪼개고 쪼개어 가장 최소 단위가 되어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내려가면 그 마지막 단계에서 있는 미진이라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마지막 단계의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야 그러한 것들이 많이 모여서 다른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비로소 다른 모든 것들 또한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깨는 설법을 하고 있다. 쪼개고 쪼개어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까지 내려간 ‘미진’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생각해 보라.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미진들이 모여 만들어 진 우리 눈 앞의 세계며, 존재며, 물질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 이 우리 눈 앞에 현전해 있는 삼천대천세계는 무엇인가.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어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는 질문에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많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라고 했다. 즉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실제로 있는 실체성을 가진 어떤 것이기에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이름이 미진일 뿐일 따름’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께서 미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만 이름을 미진이라고 붙였을 뿐이지 거기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미진이라 이름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면 어째서 삼천대천세계를 만들어 낸 미진이라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체적인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즈음에서 현대 물리학의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반적으로 불교의 극미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과학에서는 일찍부터 원자(原子)라고 했다. 그런데 후대에 물리학이 더욱 발전되면서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고, 또한 이 양성자와 중성자도 궁극적인 물질이 아니라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 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수한 미립자들은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23승)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잘 이해가 안 될 것인데, 쉽게 말해 미립자의 생명과 1초와의 비는 1초와 약 300조년의 비와 같다고 한다. 300조 년은 지구 역사의 60만 배이며 우주 역사의 20만 배나 되는 긴 시간이다. 그야말로 찰나 동안 무수한 미립자들은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의 구성요소인 모든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모습 그대로를 항상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찰나로 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립자의 세계에서 더 중요한 한 가지의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한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다른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은 결코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각각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수많은 미립자들의 생성과 소멸은 미립자 전체의 긴밀한 상호 연관, 상호의존 속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과정의 한 단편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은 한 미립자만을 따로 떼어 내어 본다거나, 생성과 소멸의 어느 한 면만을 보려고 해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립자 서로간의 관계에 있어서, 한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은 다른 미립자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사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므로,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실제로써의 미립자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스스로의 독자적인 실체가 없고 실제성이 없어서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상의상관, 상호의존이라는 연기적인 성품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자 양형진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자성이 없이 상의상대하는 존재라는 것이어서, 그 전체가 곧 연기(緣起)요 공(空)이어서 화엄(華嚴)의 표현으로는 서로의 입자가 상즉(相卽)하여 사사무애(事事無碍)한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을 사사무애와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보고 있다. 사사무애란 현상세계와 현상세계가 서로 걸림이 없이 원융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미립자라는 미진이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미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미진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진이라는 것은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연따라 상의상관적으로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법칙에 의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를 이루는 모든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며 생명들 또한 모두가 실제가 아닌 공이요 무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인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해 본다면,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미진들이 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미진이 있으므로 저 미진이 있고, 이 미진이 생기기 때문에 저 미진이 생기며, 이 미진이 없기 때문에 저 미진이 없고, 이 미진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 미진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전형적인 경구가 의미하는 바다. 이처럼 모든 미진들이 서로 다른 미진의 생성과 소멸에 의존하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미진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 또한 ‘이웃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이웃이 없으면 나도 없는’ 관계로 이어지고, ‘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고, 자연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지는’ 관계로 이어지며, ‘삼천대천세계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삼천대천세계가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지는’ 동체(同體)적인 연기와 자비의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을 내 몸 처럼 따뜻하게 아끼고 돌보면 그것이 그대로 나의 삶과 직결되고,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또한 그대로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것이 그대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세계의 최소물질인 미진이 상의상관적인 연기의 존재이기에 그 미진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나와 세계의 관계 또한 상의상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니요, 내 몸과 이웃이 둘이 아니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사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모두는 따로 떨어진 존재 같지만 사실은 한 몸이요 동체(同體)이기에 내 몸처럼 이웃과 나라와 자연과 우주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동체적 자비, 연기적 자비, 무아적 자비의 실천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 대천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어야 할 것이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합쳐진 모양도 실은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인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하고, 텅 비어 있기에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는 과연 실제로 있는 것인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인 미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이라면 그러한 미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삼천대천세계 또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임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공한 것이기에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 즉 일합상이어야 할 것이지만 ‘일합상은 일합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다.
일합상이란 수많은 미진들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을 말한다. 즉 일합상은 우리들이 삼천대천세계라는 세계를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실제적인 모양으로써의 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삼천대천세계가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로 합쳐진 상’이라고 실제시 하고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 미진이 텅 비어 공할진데 미진으로 이루어진 삼천대천세계를 일합상이라고 실제시 하며 집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삼천대천세계, 즉 미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가장 큰 것 또한 실제가 아니며, 독자적인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시세계인 삼천대천세계를 현대의 과학에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양형진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양 주위에는 지구를 포함한 9개 혹은 8개의 행성(명왕성을 빼면)이 있고 각각의 행성 주위에 위성이 있으며 이들 전체를 태양계라고 부른다.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항성 혹은 별이라고 부르는데, 태양계에서 별은 태양 하나뿐이다. 이 태양에서 태양계의 제일 바깥에 있는 행성인 명왕성까지의 거리는 약 60억 km 정도이며, 빛으로 약 5시간이 걸린다. 이 태양계의 바깥에는 ‘우리은하’라는 별의 집단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양을 비롯하여 약 3천억 개의 별이 원판 모양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빛이 1년 걸려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우리은하 안에서 별과 별 사이의 평균 거리는 대략 5광년이고 우리은하의 반지름은 약 5만 광년 정도 되며 태양은 그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내가 지리산에 갔을 때 장터목 산장에서 처음으로 선명한 은하수를 보고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하수라는 것이 바로 우리은하 안에 있는 별들의 모임이다. 태양계가 은하의 가장자리에 있고 은하수가 납작한 원판 모양의 형태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볼 때 우리은하에 속하는 대부분의 별들은 한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로 약 200만 광년의 거리에 있다. 이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를 포함하여 20여 개의 주변 은하가 하나의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지역군’이라고 부른다. 이 우리지역군에서 6000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버고 은하단이 있으며, 이 안에는 약 2500개 정도의 은하가 포함되어 있다. 버고 은하단은 다시 버고초 은하단의 일부가 되며, 버고초 은하단의 근처에는 이보다 더 큰 코마초 은하단이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우주의 대략적인 모습이다. 물론 이것으로 우주를 다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도 과학의 영역과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초월할만한 무량광 무량수의 우주가 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에 대한 무량한 설명을 보면 앞의 장에서 설명했던 삼천대천세계의 설명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감잡을 수 없고 상상도 해 낼 수 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야말로 무량수요 무량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삼천대천세계요 우주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런 우주는 과연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며, 실체적인 것일까? 별이며, 은하, 은하단,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주는 과연 끝없는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에 입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해 가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단계를 거친다. 우주의 성주괴공을 간단히 살펴보면, 위에서 설명했던 별이나 혹성 이외에도 별과 별 사이에는 대단히 넓은 공간에 수많은 물질이 존재하는데, 연기나 안개보다 희미하게 밀도가 적고 주성분이 수소로 이루어진 이 물질을 성간물질이라고 한다. 이 성간물질은 우주 공간에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여 있으며, 각 부분의 밀도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그렇기에 이 성간물질은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 성간물질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성간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이고, 별에서 오는 빛에 의해 광압이 가해지면 성간물질의 덩어리는 밀집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밀집과 수축이 가속화되면 내부의 압력과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1000만 도 이상 온도가 상승하면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고, 이 때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방출이 된다. 즉 이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 별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간물질이라는 공(空)의 단계에서 별이라는 성(成)의 단계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별은 한동안 크기와 빛의 밝기가 대략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주(住)의 단계다. 그러나 주의 단계라도 변함 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별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수소원자가 헬륨원자로 바뀌는 핵융합 반응은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서 결국 핵융합 반응의 원료가 되는 수소를 다 쓰게 되면 결국 빛은 소멸되고 별의 일생은 끝나게 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괴(壞)의 단계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공이 되고, 다시 성·주·괴·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태양도 이미 생성되고 나서 50억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하며 성주의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다시 50억 년 후가 되면 수소가 다 소멸되어 괴공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고 하니, 미시 세계인 미진과 같이 거시세계인 우주 또한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써 고정된 실체도 없고,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삼천대천세계라는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무자성이고,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라는 것은 다만 인연따라 무수한 조건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인 것이다. 미진이 그랬듯이 삼천대천세계 또한 그대로 연기법의 현현이며,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는 존재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50억년 후에 태양이 괴공의 단계를 맞게 되어 소멸한다면 그 때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며, 생명들 또한 인연따라 모두 함께 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무아와 공의 진리는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연기법을 그 기본 이치로 한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태양이 소멸하므로 내가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름이 소멸일 뿐이며, 이름이 죽음일 뿐이지, 단멸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모였듯이 인연이 다하면 소멸될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 즉 삼천대천세계라는 미진이 합쳐진 모양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합상도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것에 상을 짓는 것을 ‘일합상’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를 일합상으로 들고 있지만 사실 일합상은 미진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즉, 나라는 존재도 일합상이요, 집도, 나무도, 산도, 바다도, 구름도, 자동차도, 연필도, 책상도 모두가 일합상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든 물질, 모든 존재가 다 일합상인 것이다. 그 일합상의 가장 큰 것이 삼천대천세계요, 우리가 가장 크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아상이다. ‘나’라는 것을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실제라고 생각하는 아상이 있다면 그 아상이 바로 일합상인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미진’도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이며, ‘삼천대천세계’도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이며, 나도 이웃도, 사람도 자연도, 풀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책상과 그 밖에 이름짓는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공이고 연기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미진에도, 삼천대천세계에도, 나에도, 모든 존재며 물질이며 생명이며 일체제법 그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거나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는 무집착, 방하착을 역설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합상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라고 했고,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법’은 ‘존재’ 혹은 ‘진리’로 해석되는데 여기에서는 법을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일합상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존재도 아니고, 존재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것은 다만 방편으로 이름을 일합상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사실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미진도, 삼천대천세계도, 나아가 나도 너도, 물질도, 자연도, 바람도, 구름도, 모든 일합상은 고정된 실체로써의 존재라고 해도 맞지 않고, 그렇다고 존재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는 것이다. 존재라고 한다면 유(有)에 치우칠 수 있고,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무(無)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진과 삼천대천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고, 다만 중도일 뿐이며, 연기일 뿐이며, 그렇기에 분별할 수 없고, 차별할 수 없고, 공이며 무아인 것이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분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최고의 실천 수행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희론이 일어나고, 모든 논쟁이 일어나며, 모든 문제가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 것인 미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며, 가장 큰 것인 삼천대천세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상에 얽매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금강경에서는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집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먼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중생들의 기본적인 상을 깨도록 이끌고 있으며, 부처님의 육신인 32상 80종호에 대한 상도 깨뜨리고,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는 것에 대한 상도 깨뜨리며,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도, 수행한다는 상도, 깨달았다는 상도, 보시했다는 상도, 나아가 법이 있다 없다 하는 상도 깨뜨리고, 결국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구성요소인 미진에서부터 가장 큰 요소인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것을 모조리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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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강경 제28분 불수불탐분 강설 (0) | 2017.12.10 |
[스크랩] 금강경 제27분 무단무멸분 강설 (0) | 2017.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