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실천강의

[스크랩] 금강경 제31분 지견불생분 강설

수선님 2017. 12. 10. 13:58
제 31, 지견불생분
지견을 내세우지 말라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菩提 若人言 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解我所說義不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내가 말한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은 곧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을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야, 지금 말한 바 법상도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이다.”

지견(知見)이란 흔히 ‘알음알이’ ‘분별’ ‘생각’ ‘관념’ ‘지식’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지견불생이란 지견을 내세우지 말라,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무언가를 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아는 지식을 뽐내거나, 내세우고자 하는데, 그런 식의 지견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분에서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든 지식이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은 만큼의 지견을 내세우고, 자랑하고자 하며, 스스로도 지식을 많이 쌓았을 때 그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며 뿌듯해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아는 것이 많을수록 말도 많아지고,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따지기를 좋아하게도 된다. 그러나 이 분에서는 그러한 일체의 지견을 버리라고 하고 있다. 왜 그렇겠는가. 그러한 알음알이 내지 지식들은 본질적인 참된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음알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말인데, 지식이 많으면 자연스레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판단과 분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판단, 분별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기만 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체 모든 판단과 분별, 즉 알음알이 지견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차별적인 생각일 뿐이다. 존재 본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 어떤 차별이나 분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보기만 할 뿐인 것이다. 그랬을 때 그 어떤 대상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분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여하게 다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말해 알음알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세계관이며 가치관이 투철하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아는 것에 대한 집착도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생각’ ‘자기 지견’에 집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본질적인 지혜와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 모든 생각, 알음알이, 지식들은 모두가 본질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무심(無心)이야말로 가장 큰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옳은 생각’일지라도, 그 어떤 ‘진리의 생각’일지라도, 그것 자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진리의 생각’이라는 말일 뿐이고, 언어일 뿐이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여 ‘이것이 진리다’라고 절대적으로 고정 짓는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로써의 가치를 잃는다. 진리는 고정지을 수 없으며, 한정지을 수 없고, 그 어떤 틀에도 가두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한정하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심지어 불법에도, 부처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 분에서 말하고 있는 지견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도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어떤 지견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내가 말한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은 곧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으며, 그 핵심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설법이었다. 금강경은 한 마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고 하는 설법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금강경을 통해 훌륭한 하나의 가르침을 마음 속에 새길 것이다.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생각을 일으킬 것이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알음알이 지식, 지견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견해에 대해 사람들은 알음알이, 지견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될 것이다. 마치 학교에서 배운 것을 머릿 속에 잘 기억해 내고, 잘 암기해 내어 언젠가 써 먹을 일이 생길 때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하듯이,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견해를 머릿 속에 잘 기억하면서 ‘금강경을 공부했다’는 지견을 하나 추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뿌듯해 할 것이다. 이 어려운 금강경을 내가 다 공부하고 이해했으며 헤아려 알게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그러면서 주위 도반들과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도 경전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금강경을 공부했던’ 그 사실과 가르침들에 대해 자랑삼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강경을 마무리하는 31분의 가르침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공부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금강경의 공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견해와 그러한 견해를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견해를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견해, 즉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을 설해 오셨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 여래가 아·인·중생·수자라는 견해를 말했다고 한다면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겠느냐는 질문에 수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드리고 있다. 즉, 지금까지 여래가 아·인·중생·수자에 대한 견해를 끊임없이 설법하셨지만 그것이 하나의 ‘견해’ ‘지견’으로 굳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인·중생·수자라는 견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견해에도 치우치거나, 머물거나, 집착하거나,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가르침일 뿐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막바지에서는 이제 지금까지 타고 왔던 방편인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는 뗏목 또한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강을 건너 왔다면 뗏목을 짊어지고 갈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가르침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의 일체 상을 놓아버리라고 하지만 본연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버릴 것도 잡을 것도 없는 것이다. 신기루를 보고 기뻐하고 집착하다가, 그것이 신기루임을 알고는 다시 괴로워하다가, 그동안 신기루에 집착했던 마음을 놓아버려 편안해 졌다고 하더라도 사실 본래에는 신기루에는 실체가 없었으므로 잡을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공연히 내 혼자서 지견을 일으켜 집착하여 붙잡고서는 잡았다고 착각하여 즐거워하다가, 또 공연히 내 혼자서 집착을 버리고 편안해 졌다고 할 뿐이지,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신기루라는 말도 사실은 신기루가 아니라 이름을 신기루라고 붙여 놓았을 뿐이지, 신기루라는 말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애써 방편으로 신기루라 이름지었을 뿐인 것이다. 그저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기 혼자서 착각하고, 집착하고, 지견을 일으켜, 신기루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고, 크다고도 하고 작다고도 하고, 아름답다고도 하고 더럽다고도 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본래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텅 빈 공(空)일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기루다[아상이다]’ ‘신기루니 놓아라[아상을 타파하라]’ 라고 이름 붙인 것 뿐이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이 이와 같다.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버릴 것이 있어서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편으로 버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혼탁한 마음을 닦으라고 하지만 닦을 것이 있어서 닦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 스스로 혼탁하다고 상을 짓고, 견해를 일으킨 바로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을 것이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란 것이 있어서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 견성을 했다는 사람,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전혀 진리와는 동떨어진 착각 속에 빠진 사람이요, 삿된 법을 따르는 사람일 뿐이다. 얻을 것이 없음을 바로 보고 아는 것이 깨달음일 터인데, 어찌 얻을 어떤 ‘법’이 있을 것인가.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을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야, 지금 말한 바 법상도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고, 진리의 견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지견도 내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법’이라고 하는, ‘진리’라고 하는 견해도 버려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에 대해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법상(法相)이란 말 그대로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하는 법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진리다,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이 되는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견해가 법상인 것이다. 법이라는 모양 즉 법상도 법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법상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 이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법상에 집착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파괴와 전쟁과 투쟁을 가져왔는가. 불교만이 진리라는 생각,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생각,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 코란만이 진리라는 생각, 이러한 진리에 대한, 종교에 대한 고정된 상, 즉 법상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핵이 위험하다고 하지만 과연 법상만큼 위험할 수 있을까. 법상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모든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법상 앞에서 이성이나, 논리나, 생각이나, 도덕이나 윤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신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행하게 되면 심지어 살인 조차도, 전쟁 조차도 정당성을 확보받는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런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목격해 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는 수많은 자기만의 ‘법상’에 빠져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이 진리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진리인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려는 그 어떤 노력도 서슴치 않는다. 심지어 진리인 ‘내 견해’와 맞지 않는다면 죽여도 무방하다는 믿는 사람도 얼마나 많았는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법상에 깊이 집착하고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종교, 자기 진리의 신념을 믿도록 상대방에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전도, 포교, 선교를 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 생각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 거칠 것은 없다. 앞뒤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공공의 장소에서, 맹목적이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이단이기 쉽고, 진리와는 먼 사람이기 쉽다. 진리는 이와 같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심지어 ‘진리에도 극단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법상도 버려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리일수록 유연하고 열려있으며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도 보라. 어리석은 종교인일수록 치우치고, 극단적이며, 자기 종교만이 전부라고 고집스레 믿고 있지 않은가. 깨어있는, 지혜로운 종교인이라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그 어떤 다른 가르침이나 사상에 대해서도 활짝 열려있으며,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고 깨어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불교는 ‘불교적 가치관’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물론 방편으로 ‘불교적 가치관’ ‘불교적 지견’을 설하고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그 또한 놓아버려야 함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부처님답게 사는 것’을 주장하거나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