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실천강의

[스크랩] 금강경 제32분 응화비진분 강설

수선님 2017. 12. 10. 13:58

제 32, 응화비진분
응화신은 참이 아니다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 優婆塞優婆尼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했더라도, 만약 선남자 선녀인으로써 보살심을 일으킨 이가 이 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 전해 준다면 그 복이 더욱 뛰어날 것이다. 어떻게 남을 위해 전할 것인가? 가르침을 전하되 전한다는 생각과 상에 집착하지 말고 전하며, 여여하고 부동하게 하라.
그 까닭은 이러하다.”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여 마치시자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응화비진분의 응화(應化)는 응화신을 뜻하는 것으로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 가운데 하나인 화신을 의미한다. 화신을 응신이라고도 부르는데, 화신이란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들의 세계에 화현하여 나투신 몸으로써의 부처님을 의미한다.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에 응(應)하여 화(化)현으로 몸(身)을 나툰다는 의미에서 응신 혹은 화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진리의 법신(法身)이신 진여 본성으로써의 부처님께서 중생들 앞에 응화로써 몸을 나툰 것을 응화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응화신을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의 경계로 마주할 수 있는 일체 모든 존재, 경계들이 그대로 다 법신의 응화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내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족들, 산과 나무와 풀과 바람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것들이 그대로 법신부처님께서 그러한 현상으로 나투신 것이요, 현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존재가 불성이 있으며, 한 송이 꽃과 들풀과 나무와 바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부처요 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응신과 화신이 모두 참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그동안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데 주력해 왔다. 일체의 모든 상은 참이 아니며, 허망한 것이고, 공한 것임을 일깨워왔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일체 모든 상에 응화신이라는 부처님의 몸까지도 참이 아니며, 상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응화신에 조차,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형상에 조차 얽매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눈귀코혀몸뜻 육근으로 마주치는 일체 모든 대상이 그대로 응화신이라고 보았을 때 그 모든 것들 또한 공하며,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음을 설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금강경의 마지막장인 응화비진분의 본문을 살펴보자.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했더라도, 만약 선남자 선녀인으로써 보살심을 일으킨 이가 이 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 전해 준다면 그 복이 더욱 뛰어날 것이다. 어떻게 남을 위해 전할 것인가? 가르침을 전하되 전한다는 생각 없이 상에 집착하지 말고 전하며, 여여하고 부동하게 하라.

앞의 장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수지독송’과 ‘위인연설’에 대한 설법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경전의 마지막 분이 유통분(流通分)이라고 하여 경전에 대한 유포와 전법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 담긴 것과 같이 금강경의 마지막 분인 응화비진분에서도 이 경전의 가르침을 어떻게 유포하고 전법할 것인가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아무리 많은 칠보로써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이 경전의 한 게송 만이라도 수지독송하고 위인연설한다면 그 복이 더욱 뛰어날 것을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위인연설을 통해 전법, 교화, 포교, 유통을 할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언급되고 있다.

남을 위해 법을 전할 때는 가르침을 전하되 전한다는 생각 없이 상에 집착하지 말고 전하며 여여하고 부동하게 하라는 것이다. 법을 전하면서 스스로 법을 전한다는 생각에 빠지고, 전법한다는 상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전법은 전법이 아니라 다만 상에 빠져 사는 세속적인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법을 전한다는 그 단순한 언어와 사실만이 아니라 법을 전하는 이의 정신이 법과 얼마나 상응하고 있는가, 법다운가 하는 점에 있다. 법을 전하는 사람이 법답지 못한 행동과 말을 하며, 전혀 법과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면 그 가르침은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좋은 말이야 얼마나 많은가. 부처님 가르침이야 입으로 읽어내려가기만 한다면이야 어떤 사람인들 위인연설을 못 하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경전을 유포하고, 전하고, 수지독송하며, 전법포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한 경전의 가르침이 얼마만큼 내 안에 중심을 잡고 서 있는가, 또한 그러한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이 변화하고, 법다운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이 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인데, 법을 설하면서 내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상이 있고, 금강경을 몇 권을 유포하고 보시했다는 상이 있으며, 금강경을 잘 설한다거나, 수지독송을 잘 한다고 생각하거나, 금강경을 하루에 몇 독씩 독송한다거나, 100만번을 독송했다거나 하는 등등의 이러한 ‘수지독송’과 ‘위인연설’에 대한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전혀 금강경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야말로 금강경을 공부하고 수지독송하며 유통전법하는 많은 수행자에게 있어 경전의 말미에 꼭 깨우쳐 주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오늘날 금강경을 수행하고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말인가.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금강경을 공부했다느니, 몇 독을 몇 일만에 했다느니, 몇 년간 했다느니, 몇 백권을 사서 보시했다느니 하는 상에 우리는 얼마나 얽매여 있는가. 이렇게 32분으로써 금강경 강의를 마치고 있으나, 지금 이 순간까지 금강경을 함께 공부해 온 자신을 돌이켜 보라. ‘드디어 내가 이 어려운 금강경을 끝냈구나’ ‘금강경을 다 이해했다’는 등의 생각과 상이 얼마나 들겠는가. 바로 그 점을 이 분에서는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을 아무리 잘 공부했고, 수지독송했으며, 다른 이를 위해 수많은 위인연설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 그렇게 했다고 하는 생각과 상이 있다면 전혀 금강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금강경을 더럽힌 것이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금강경을 깨뜨린 것이요, 파괴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매 순간 순간 나의 금강경 공부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드러낸 것인가, 아니면 파괴한 것인가를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법을)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하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즉 법을 가르쳐 주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 처럼 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나니, 그것이 바로 참되게 금강경을 가르쳐 준 것이 된다는 뜻이다. 금강경을 가르쳐 주면서 가르쳐 주었다는 생각이나 상이 있다면 그것은 가르쳐 준 것이 아닌 것이다.
이와같이 가르쳐 주고, 사람들을 위해 위인연설하는 것이야말로 금강경을 잘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을 공부한 사람은 여여하고 부동하다. 그 어떤 아상도 있지 않기 때문에 한 치도 ‘나’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상도 일으키지 않아 한결같고 여여하며 부동하다. 끊임없이 ‘나’를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 비로소 한결같아 여여하고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삶에 있어 여여하고 부동하지 않을진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여여하고 부동하라고 설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경계며, 괴로운 일들이 다가오더라도 그 경계가 허망하며, 꿈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아 한 치도 머물러 집착할 것이 없음을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여여하고 부동한 경계가 현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금강경을 마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현상계의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여 마치시자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현상계의 일체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현상계의 모든 경계를 이와 같이 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여여하고 부동한 정신이 내 안에 오롯이 자리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이며, 사람이며 경계가 모두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잠시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 버리는 허망한 것이며, 공한 것이고, 텅 빈 것이라면 어디에 집착하거나 머물러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신이 깃들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이 괴로운 것은 현상계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집착하고, 돈에 명예, 권력, 지위, 계급, 학벌, 사랑, 목숨, 건강 등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잠시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인연가합의 연기적인 존재요, 공한 존재며,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어디에도 집착하여 붙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붙잡고 집착하며 얽매이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그 모든 현상계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도 같음을 관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일시에 소멸되고 만다. 거기에 아상이 붙을 것도 없으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붙을 수도 없다.

그러한 여여부동의 깨달음의 경지는 삶 그 자체가 그대로 수지독송이요 위인연설이 된다. 삶을 사는 것이 그대로 수지독송이요, 입을 열면 그대로 위인연설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가르침을 설하지 않고 있더라도 여여부동한 삶 그 자체로써 끊임없이 법을 설하는 것이 된다. 삶 그 자체가 설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설법은 설법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화 중에도 가장 으뜸은 위의교화(威儀敎化)라고 한다. 즉 가르침이 그대로 실천됨으로써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위나 삶의 모습만을 보고도 충분히 감화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보살님들께서 설법을 듣고 나면 ‘우리 남편에게도 이 설법을 꼭 들려주고 싶다’거나, ‘우리 아이가 이 설법을 들어야 하는데’ 하면서 내 가족에게도 부처님 가르침을 들려주고 싶어 한다. 물론 그 마음이야 백번 이해 가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렇게 부처님 말씀을 가족들에게 배워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고 입으로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들 그것이 직접 가족을 실천으로 이끌지는 못하지 않는가. 아마도 속으로는 ‘엄마도 잘 못하시면서’ ‘당신이나 좀 잘 해’라고 할 지 어찌 알겠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위의교화다. ‘아내가 절에 가고 수행을 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거나, ‘어머님께서 금강경을 공부하시더니 너무 행복해 보이시고 평화로와 보인다’거나, 혹은 ‘불교를 공부하더니 그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오더라도 전처럼 휘둘리지 않고 여여하고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간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는 온 존재로써 변화되었을 때만이 뒤따라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나 남편도 절에 오게 해 달라거나, 설법을 해 달라거나 하는 말 대신에 내 스스로 가르침의 실천이 부족함을 알아 더욱 정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금강경 가르침을 듣고 장로 수보리를 포함하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과 일체 세간의 인간과 하늘신과 아수라가 모두 크게 기뻐하고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는 구절로 금강경은 끝을 맺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어찌 크게 기뻐하고 믿고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금강경 공부를 맺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믿고 받들어 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믿고 받들어 행하는 것은 곧 믿고 받들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믿고 받들어 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믿고 받들어 행함 없이 믿고 받들어 행하자.

 

* 이것으로써

그동안 계속되어왔던

금강경 강의를 마칩니다.

그동안 금강경 강의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 주시고

함께 공부해 주신 많은 도반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본 강의는

다음 주 쯤에 '금강경과 마음공부'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될 예정입니다.

출판이 되면 다시 공지 해 드리겠습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이 출판 될 때 함께 '금강경 독송 지침서'인 '금강경 독송' 책자도

함께 출판되어 '금강경과 마음공부'를 구입하실 때

한 권씩 드릴 예정입니다.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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