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빠데샤는 수행에 관한 가르침의 글을 뜻한다.
우빠데샤란 용어가 중요한 것은 그 것이 효과가 아주 커서
오랜 기간 동안 수행할 필요가 없는 수행방편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것은 갠지스 강둑에서 인도의 대 성취자 띨로빠가
그의 수제자이자, 대 학승이며, 대 성취자인 나로빠에게 준 마하무드라의 핵심 가르침이다.
[일곱 가지 주제:]
1. 견해 / 바탕
마하무드라는 가르쳐질 수 없다 하더라도,
지성이 있고, 숙고의 과정을 지나온 나로빠여,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행 속에 들어가,
구루에게 헌신하고 있는 그대여,
복된 자여!
이 것을 마음으로 행하거라.
[여섯 가지 비유]
예를 들면,
허공 속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가?
인간의 마음, 마하무드라 속에는 나타내 보일 어떤 사물도 없다.
어떤 마음의 대상으로 파악하려 하지 말고,
본유의 상태에서 편안하게 머무르라.
예를 들면,
이 것은 허공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방법으로,
네 <마음이 마음을 바라볼 때> 상념이 그치고 위없는 보리심에 이른다.
<상념의 속박>이 풀리면,
분명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대지에서 피어올라 구름이 되고,
드넓은 창공으로 사라지는 안개처럼,
그 어디에도 가지 않으면서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마음속에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상념의 동요>는
그대가 <마음의 본성>을 보는 순간 진정된다.
예를 들면,
허공의 본질이
색과 형상을 초월해 있고,
그 안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색과 형상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모양이 변하거나, 흐려지지 않는 것처럼,
그와 같이
마음의 본질은 색과 형상을 초월하며,
선행과 악행이라는 다양한 색과 형상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마음은 밝은 태양의 중심 같아서,
일천 겁의 어둠마저도 그 빛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본질인 정광명은
무수겁 동안의 세속의 삶에 의해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공성을 허공에 비유하더라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공간 속에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그와 같이,
마음을 정광명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묘사하는 바탕인 마음속에
어떤 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마음의 본성은 허공과 같아,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 다르마는 하나도 없다.
2.명상 후 행위조율: 몸, 음성, 마음
모든 육신의 행위를 버리고,
수행자는 편안하게 쉬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네 음성은 메아리와 같아,
텅 빔의 바탕에서
구별되지 않는 소리가 된다.
마음으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도약의 다르마를 바라보라.
3.명상-견해와 친숙해짐
몸은 아무 의미가 없고,
대나무 속처럼 비어 있다.
마음은 허공 한 가운데와 같아
파악이 불가능하다.
그 안에 편안하게 머무르라.
그 것을 떠나지도 말고,
거기에 붙어 있지도 마라.
그 것을 밀어내거나,
그 안에 잡아놓지 말고,
떠나게 놔두거나 붙잡으려 시도하지 말고,
저항 없이 머물러라.
마음에 일체 향함이 없으면, 그 것이 마하무드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궁극적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4.싸마야-서약-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림
자신이 속한 법통과 철학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밀교와 바라밀승, 율의, 경전, 붓다의 다양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빛나는 마하무드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한 정광명의 자각은
그 것을 보려는 관념과 태도에 의해 가려지기 때문이다.
관념화된 서약을 수지하는 것은 싸마야의 의미를 감소시킨다.
대상으로 향하거나, 하나의 틀로 가꾸려 하지 말고,
일체의 의도에서 벗어나라.
상념은 물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스스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대가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
틀을 짓거나 집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꼴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마음의 분별을 넘어서지 못함으로 인해,
초월하지 못하고, 싸마야를 깨트리게 되리라.
그러므로 서약은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이다.
5.마하무드라 수행의 이로움
모든 마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두 극단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를 빠짐없이 보게 되리라.
그대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삼사라의 감옥에서 해방되리라.
이 안에 균등하게 머무른다면,
모든 악업과 장애가 소멸되리라.
이 것은 그러한 이유로 가르침의 등불이라 불린다.
6. 마하무드라를 수행하지 않음의 해로움
여기에 관심이 없는 아둔한 사람은
삼사라의 물살에 의해 끊임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으리라.
낮은 존재의 세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러한 아둔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
7. 마하무드라의 본 수행
[A. 예비수행]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해방을 얻고자 한다면
현명한 스승에게 의지하라.
구루의 은총이 네 심장으로 들어갈 때,
마음은 해방되리라.
들어 보라!
세속에서 누리는 것은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으며,
고통의 원인이다.
이루어 놓고 가꾸어 온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의미 있는 것을 바라보라.
[B. 마하무드라의 본 수행]
[요약: 초심자의 관점에서]
그대가 객관 대상에 대한 내적 심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떠나 있다면,
모든 견해의 제왕이다.
동요 없이 부동에 머무른다면, 그대는 모든 명상의 제왕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모든 행위의 제왕이다.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을 때,
그것은 궁극적 결과, 열매가 성취된 것이다.
이 것은 관념적 초점의 대상이 아니며,
마음의 본성은 정광명이다.
건너 갈 길이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다.
명상의 목표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 익숙해지면,
그대는 무상정등각에 도달하리라.
[은둔 수행의 중요성]
세속적인 사물을 잘 관찰해 보라.
그렇게 해보면,
그 어떤 것도 지속되는 것이 없고,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와 같이 세속의 것은 모두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
꿈과 신기루는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포기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세속적인 일을 버리라.
네 주변에 있는 관계와
삶의 내용을 이루어 온 것에 대한 집착과 반감의 끈을 자르고,
고립된 은둔처, 숲 등에서 명상하며, 홀로 살아가라.
명상하지 않는 그 상태에 머무르라.
나아가야 할 마음의 목표가 없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
마하무드라에 도달한 것이다.
[마하무드라 수행의 이로움]
예를 들면,
많은 가지와 잎을 달고 있는 나무의 뿌리를 자르면,
수많은 가지가 말라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뿌리가 잘리면,
삼사라의 가지도 말라버린다.
예를 들면,
일천 겁 동안 축적된 어둠도
등불 하나가 비추자 사라지듯이,
마찬가지로,
단 한순간의 정광명의 지혜는
수많은 겁 동안 쌓아 온 무지와 죄업, 장애를 몰아낸다.
[모든 극단을 넘어서 있는 마음의 본성을 발견하기]
인간의 지성은 인식의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나타나 있는 사물을 통해,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대가 지성을 초월해 있고,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마음을 유심히 관찰하고,
깨어서 지켜봄이 드러나게 하라.
[중도: 받아들이지 않음, 거부하지 않음]
사념의 탁한 물이 맑아지도록 놓아두어라.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없애려 하거나 연출하지 마라.
있는 그대로 내 버려두라.
나타난 모양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을 때,
나타나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드라로 비추어질 것이다.
[비발생, 비소멸, 현상과 공성의 불가분성]
모든 사물의 바탕은 비발생이며,
그 사물의 비발생적 바탕 속에서 행위와 습성, 장애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모습으로 결정짓거나,
원하는 모양으로 가꾸지 말고,
나타남이 없는 본질에 머무르라.
그 상태에서 현상의 모습은 뚜렷하지만,
선명한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 대한 관념이 사라 없어지게 하라.
[요약: 길과 열매의 궁극적 견해의 차원에서]
두 극단인 유·무의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남이 견해의 열매요,
마음이 무한 광대하게 펼쳐짐이 명상의 열매이며,
지향하는 방향이 없고, 어디로도 기울지 않음이 행위의 열매이며,
기대나 희망이 일지 않는 자기충족의 해방이 구경의 목표, 열매이다.
[세 수준의 체험 단계]
처음에 이 것은
좁은 물목을 빠져나가는 급물살과 같다.
중간에 이것은
갠지스 강의 도도한 흐름과 같다.
끝에 이 것은
모든 강의 흐름이 어머니 바다로 들어감과 같다.
[초심자를 위한 방편]
지성이 무딘 자는
그 상태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되거든,
호흡의 기술을 유지하고,
주의 깊게 깨어있음의 본질이 드러나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응시하여
마음을 거기에 두게 하고,
각성의 줄을 팽팽히 당겨라.
마침내 마음은 멈추어 있게 된다.
이 때,
지켜보는 의식이 마음의 본성에 머무를 때 까지
마음의 파도를 조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보된 수행자를 위한 보조방편: 까르마무드라]
그대가 까르마무드라에 의지하면,
락공불이의 지혜가 일어나리라.
지혜와 방편을 성화한 결합 속으로 들어가라.
천천히 보리심을 떨어뜨려,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다시 되돌리고,
본래의 장소로 보낸다.
마침내 그 것을 방사시켜,
몸 전체에 퍼지게 한다.
애착과 욕망이 전혀 없다면,
지복과 공성의 지혜가 드러나리라.
[마하무드라 수행의 열매]
그 때,
흰 머리 없이 긴 수명을 누리고,
둥근 달처럼 젊음을 누리리라.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사자와 같은 힘을 얻으리라.
재빠르게 일반 신통을 얻고,
구경의 성취에 도달하리라.
[회향]
마하무드라의 이 핵심 가르침이
고귀하고 복된 존재의 가슴에 머무르길 바랍니다.
[후기]
이 가르침은
갠지스 강 언덕에서
크게 빛나는 성취자 띨로빠가 마하무드라를 깨달은 뒤
배움과 깨달음을 겸비한 까쉬미르의 대 학승, 나로빠에게 전수한 것이며,
나로빠가 열두 가지 고행을 마친 뒤였다.
이 것은 북방의 뿔라하리에서
나로빠에 의해 산스끄리뜨어로 옮겨지고,
대역경사 마르빠 최기 로되가 티벳어로 옮기게 되었다.
이 판본은 켄첸 탕구 린포체의 해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라마 예쉐 ?쵸에 의해 영문으로 번역되었다.
***
삼사라에서 벗어나려면
고통과 윤회의 원인인 모든 집착을 깨끗이 털어버려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면
근본 원인인 사물이 하나의 대상으로 실재한다는 무지를 비워내야 한다.
무지를 비워내려면
일체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일체 사물의 본성을 보려면
대상으로 향해 있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
마음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 것은 사유의 노력으로 모방할 수도 없고,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에,
마음의 본성을 직접 체험함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을 의도 없이 관찰하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그 마음의 뿌리를 그대로 보면 된다.
드러나는 모습을 없애려 하거나, 모습을 취하거나 꾸미려 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예비수행을 통해,
공덕과 지혜의 두 자량을 모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편과 지혜가 둘 다 필요하다.
이것이 대승의 길이다.
마음은 모습이 없다.
일체의 다르마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은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바탕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바탕은 네 가지 극단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마음을 볼 때, 그 어떤 모습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보지 않기에 마음의 본성을 체험한다.
비록 마음을 볼 때 어떤 사물도 보는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완전한 무 자체는 아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어떤 것이지만 작용하는 위치가 따로 없다.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의 기본적 특성, 본질은 정광명이자 나타난 모양 없음(공성)이다.
그러한 정광명과 나타난 모양 없음의 상호 불가분성이 붓다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마음은 나타난 모양이 없는 정광명이다.
마음의 본성은 생각이 꾸며낼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의 모양은 마음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은 경험하는 행위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은 그 안에 모양이 없어,
그 마음을 찾아보더라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명정함이기에 인식하고 있고, 알고 있다.
마음의 밝고 투명함은 명정한 인식을 뜻하며,
물리적인 빛이나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찾을 모양이 전혀 없고, 한편으로는 자각이 있다.
알고 있는 것, 경험하고 있는 것, 자각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마음을 경험할 때 경험하는 것, 자각하는 대상은
그 것을 경험하는 자에게도
관념적 언어로 묘사되거나 인식의 내용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악되는 것, 객관적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물이거나, 혹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의 사물인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무도 아니다.
사물의 참된 본성은 언어가 담아낼 수 없는 것이며,
나타난 모양과 모양이 없음의 상호불가분성이다.
마음의 참 본성을 볼 때,
모든 사물의 참 본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모두 마음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그러한 환영의 모양을 잡으려는 어떤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
나타난 모양을 보더라도 그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이 마음의 참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을 깨달으면, 저절로 모든 고통의 감정이 꺼지고,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
마하무드라 명상, 혹은 족첸 명상의 방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몸과 마음을 주의 깊게 깨어서 관찰해야한다.
이 것은 마음이 다르마에 들어가게 하는 네 가지 관찰이며,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일반적 예비수행이라 한다.
그런 다음, 싸마타와 위빠사나를 행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마음을 집중시킬 대상 없이 행하는 명상을 말한다.
이 순간에 자신이 행위와 상념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마음을 대상으로부터 이완하는 것이다.
마음이 바라보는 대상으로부터 이완할 때,
마음의 체는 동요를 멈추고 투명하게 될 것이고,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경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본성과 직접 대면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하고 해석하려는 마음의 시도없이 남아있게 될 것이다.
사념의 성질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정도에 비례하여,
대상 속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의 노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음의 노력에서 벗어날 때,
상념은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고,
상념은 저절로 자신의 틀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사라져 없어진다.
이와 같이 하려면,
과거의 모든 스승들의 본보기를 따라,
주의 깊음과 깨어있음의 두 기능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 것이 마음을 쉬는 방법이다.
그런 다음, 마음이 머물러 있는 그 상태에서,
위빠사나의 통찰명상을 실천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빠사나의 정의는
어떤 무엇도 바라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라 볼 대상적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마음에 어떤 방향이 생긴다면,
마음이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모양으로 지을 수 있고, 꾸밀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어떤 위치, 목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실, 인식의 범위로 파악되는 마음이라는 것은
그 것이 차지하고 있는 시공간상의 위치가 없고,
구체성을 띠고 있는 어떤 성질도 모양도 아니다.
그래서, 마하무드라인 그 마음의 본성은
이미 직면하고 있는 것이면서도,
자신이 스스로 익숙해지려 하는 이것이다.
이미 직면하고 있는 이것과 익숙해지는 것이 마하무드라의 수행이다.
붓다께서는 서로 다른 상황, 인식의 레벨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방법을 설명하고 계신다.
붓다께서는 개별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무아를 말씀하셨고,
하나의 독립적 사물과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무아를 말씀하셨다.
그 분께서는 이것을 공성,
즉 개체적 사물이라는 내용이 없음이라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불성,
즉 모든 구체적 사물의 보편적 바탕이라 하셨다.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이해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마음의 본성은 시공의 어느 한 자리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 추구나 목표라는 상대성을 초월해 있거나,
추구나 목표라는 방향성을 포괄하고 있는 마음이
나아가 희망하고 추구할 수 있는 대상적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은 인무아이고,
마음의 본성은 법무아이다.
마음의 본성은 공성이며,
마음의 본성은 부처의 성품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와 같이 바라본다면,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은
인간의 마음에 무상정등의 보리를 밝게 비출 것이다.
해결책은 직면한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분노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이것이 어떠하다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고,
아무런 힘도 가하지 않으면,
거기에는 아무런 실체성이 없다.
나타난 모양이 어떤 것이든,
모양을 초월한 이 마음의 보편적 바탕을 보면,
그것은 더 이상 해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궁극적 깨달음에서 뿐 아니라,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능력에 있어서도,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마음은 모습이 있는가?
마음은 하나의 내용인가?
마음은 그 자신을 형상이라는 틀로 보거나,
무엇이라 지칭할 수 있는 내용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나의 의식의 흐름이 마음의 본바탕을 볼 때,
그 것은 보거나, 형언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음이 마음을 볼 때 어떤 것도 봄이 없다.
자아가 현상을 경험할 때 어떤 것도 경험함이 없다.
어떤 것도 봄이 없고, 경험함이 없을 때,
자아라는 중심도 없고, 현상이라는 가장자리도 없을 때,
그 것을 두고, 참다운 법성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는 상호 대치되는 어떤 모순도 없다.
마음이 형상을 바라볼 때,
마음의 하늘에 떠 있는 형상이라는 그림을 보고,
마음이 형상을 볼 때,
형상이 비어있는 그 형상의 하늘을 보고,
마음이 형상을 볼 때,
형상과, 그 형상을 감싸고 있는 공간이
무분별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다.
이 때 수행자의 마음은
마음이 지어낼 수 없고 개념화 하지 못하는
불확정성, 무분리의 함일적 시공을 경험한다.
이 것은 자아라는 중심,
현상이라는 어우러짐,
마음이라는 흐름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마음,
원초적인 지혜, 수행자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띨로빠가 마하무드라 우빠데샤에서
마음은 마음자체를 알 수 있다고 말하며,
자기 내포적 자각, 자기 충족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산띠데바와 찬드라끼르띠가
마음은 마음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자기 내포적 자각, 자기 충족성이라는 용어를 부정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볼 때, 아무 것도 봄이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봄이 없음에서,
그 본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마하무드라(mahamudra) 우빠데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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