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 보라!
--상공화의 대수인 명상--
빼마 까르뽀 아왕 노르부
이 글은 변지, 빼마 까르뽀께서 저술하신 마하무드라 관한 핵심구결입니다.
이미 '티벳밀교요가'라는 책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어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큰 맥락에서 미심적은 부분이 있어,
다른 영역본인 The practice of the co-emergent Mahamudra 을 통해 수정한 것입니다.
마하무드라, 혹은 은총의 전승법맥은 사라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물론 그 기원에서 보면
그 가르침은 사캬무니 붓다의 보신의 형태인 지금강께서 가르치신
가장 뛰어나고 흠 없는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붓다의 화신의 두 가르침(이해와 방편의 두 전승법맥)과 보신의 가르침은
존재의 스펙트럼이 선명한 두 극을 연출할 때처럼
가르침의 두 가장자리와 하나의 중심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세상에는 세 가지 큰 전승법맥이 있다.
사라하에 의해 인간세계에 마하무드라의 네 전승법맥이 흘러 내려왔다.
이 가르침은 인간세계에서 시간의 먼지에 덮이게 되었으나
그 후 띨로빠에 의해 다시 새롭게 피어나게 되었다.
띨로빠는 두 분의 천상의 붓다를 모시었고,
네가지 전승법맥의 인간 스승과 교류하였다.
그는 성육화한 법신, 도르제창(지금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해탈의 축복을 받아 순간적으로 돈오하였다.
쉬리 간돌라 사원에서 성육화하신 법신·모·지혜다끼니를 만났다.
그에게서 3중 소망충족의 보배 가르침을 받았다.
<바라볼 지견의 조망이 필요 없는 지견>,
<명상의 대상이 필요 없는 명상>,
<행위가 필요 없는 행위>,
<만들지 않고 맺어지는 열매>가 그것이다.
도르제창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모든 비밀 만뜨라를 수지하신 분,
십지보살의 주님이신 바즈라빠니(금강수 보살)께서
여덟 살의 동자로 나타나 그를 축복하였고,
모든 내·외의 다르마가 순간적으로 파악되었다.
네 전승법맥의 인간스승을 만나
사라하로부터 시작된 첫 번째 전승으로부터,
핵심적 의미전수인 <마하무드라>와 <뚬모>를 전수받았고,
나가르쥬나로부터 시작된 두 번째 전승으로부터
<부딴뜨라>와<몽환행법>,<전이행법>과 <환신행법>과 <정광명행법>을 전수받았다.
쑤마띠로부터 시작된 세 번째 전승으로부터
<모딴뜨라>와 <바르도>, <동죽의 포와법; 변형행법>을 전수 받았다.
돔비 헤루까로부터 시작된 네 번째 법통으로부터
<쨔끄라삼바라>와 <나디·쁘라나·빈두의 법>을 전수 받았다.
본디 <마하무드라>의 심법과 <나로빠의 육법>과 같은 행법은 기원에 있어서 하나이다.
이 전승의 근본인 마하무드라 가르침의 꽃에서
나로빠 육법과 같은 행법의 열매가 영글게 되었기 때문이다.
띨로빠는 <마하무드라 우빠데샤>라는 수행지침서를 나로빠에게 주었다.
또한 띨로빠는 열두 가지 고행이라 하는 열두 가지 행법도 주게 된다.
그러나 한편 나로빠는 이 고행 속에서 어떤 어려움과 모순을 체험한다.
남·녀간의 성행위를 동반하는 까르마무드라 방편을 실천하다가
성적 대상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으며,
죄책감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성기를 돌로 찧어버린다.
그 후 나로빠는 스승의 도움으로 오줌은 다시 누게 된다.
띨로빠는 가르침에 수정을 가하여,
열두 가지 방편대신에
여섯 가지로 요약되는 대등한 가르침을 다시 주게 된다.
이 나로빠의 여섯 행법은 나중에 감뽀빠에 의해 다시 수정된다.
변형행법(종죽)은 죽은 자의 몸으로 의식을 옮겨가는 법으로,
감뽀빠는 이 <변형행법> 대신에 <바르도행법>을 넣어
나로빠의 육법을 재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까르마무드라는 효과적 수승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과 함정 때문에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열반과 삼사라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모든 방편은 깨달음을 일구어 내는 그 효과에 따른다면
어떤 형태의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진 생리적 반사효과 때문에
때로는 감추어지거나 버려지기도 한다.
인간 자신이 안고 있는 한계 때문에
가르침은 다소 근엄한 형태로 조율되었다.
밀라래빠 님의 말을 빌어
나 또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마하무드라와 나로빠의 육법에 만족하기에 더 이상 다른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 날 깨달음의 길에 자신의 발을 들여 놓은 자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 두 가르침에 주목하여 세밀하게 검토해 보시길 바란다.
가르침의 산 정상에 있는 백년설,
순수한 암브로시아의 청량수가 여러분의 가슴 속에 스며들기를...
본성의 하늘을 가리고 있는 두 가지 어둠의 장애가 걷히고,
원초지혜의 두 빛이 일체 유정의 가슴에서 동시에 비추어지기를...
고귀한 둑빠까규 전승조사께 엎드려 절 하나이다.
'상공화의 마하무드라 명상'에 관한 이 법문은
수행자의 <일상적인 마음>이 <청정무구한 근본 지혜>에 직면하게 할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며,
'예비적 가르침'과 핵심적 주제'와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 ‘상공화의 마하무드라 명상'을 통해
<근본마음의 일상적 연속성>인 수행자의 마음, 말, 행위는
무명이 자아내는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고,
원초적 지혜의 도구로 변형됨에 따라 붓다의 마음, 말, 행위의 수단이 된다.
인간의 초월심은 붓다의 본생의 거울 같은 지혜가 되고,
인간의 잠재심은 모든 사물에 동시 나투어 있는 평등성의 지혜가 되고,
현재심은 낱개의 사물을 다 헤아리는 묘관찰의 지혜가 되고,
인간의 오감은 형상의 세계 속에서 사물을 구체적으로 다루어가는 성소작의 지혜가 된다.
이 때 붓다가 이루어 낸 돈각, 마하무드라는
열반에 머무르지도, 삼사라에 머무르지도 않는 상공화의 모습, 중도를 취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타 동시충족의 모든 가능성은 사라지고,
동시충족의 보배인 붓다란 이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중생의 구원이라든가 구원의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우주안의 일체 유정은 어둠의 고통에서 살 것이고,
다만 존재의 이름은 무명이요, 고통일 것이다.
예비적 가르침
예비적 가르침은 일반적인 것(공가행)과 특별한 것(불공가행) 두 가지이다.
일반적인 가르침은 출발점이며,
다른 곳에서도 분명하게 되어있다.
뒤 이어지는 특별한 가르침은
귀의와 보리심을 바탕으로 하여, 구루요가로 이어지게 된다.
@, 삼사라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함으로서
모든 그릇됨을 버리고 참됨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마하무드라의 일반적 예비수행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마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해라는 것은 네 가지 일반적 기초라 불리우는
‘마음을 다르마로 향하게 하는 네 가지 생각’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얻어진다.
첫 번째, 인간의 자유와 기회의 얻기 어려움.
두 번째, 죽음과 무상.
세 번째, 삼사라의 허물.
네 번째, 까르마와 그 결과.
이와 같이 홀로 명상하여,
이세상의 모든 존재조건은 환영이며, 추구할 가치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
<현상을 초월한 단 하나의 실재에 귀의>하게 된다.
이러한 기초가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는다면
일체의 공부와 수행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 되며,
제거해야 할 목표인 망상위에 망상을 쌓아올리는 모래성일 뿐이다.
네 가지 명상이 분명해짐에 따라 귀의 또한 완전해진다.
그러나 붓다후드, 무상정등각의 길은 두 가지 공덕을 필요로 하며,
여기에는 큰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금강살타의 정화력과 만달라 공양의 힘과 구루요가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것을 마하무드라의 특별 예비수행, 혹은 4가행이라 한다.
모든 중생은 이미 모든 곳에 편재해 있고,
모든 존재 안에서 차별이 없고,
삶의 내용에 따라 변하지 않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
중생 즉 여래!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워질 수 없고,
본래 차별 없는 일체가 아니라면 합쳐질 수 없으며,
본래 편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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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옥과 아귀와 짐승의 세 가지 악한 삶의 형태 속에 태어나서
붓다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여덟 가지 자유와 열 가지 공덕자량을 갖춘 귀중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세 가지 믿음을 세울 때 가능하다.
생각과 입과 몸을 함부로 놀리니
귀중한 인간의 몸 가지고 태어나는 이 참으로 드물다.
생각은 있어도, 모든 환경과 조건이 그를 짓누르고, 차단하고, 꺼꾸러뜨린다.
그의 마음은 들 떠 있고, 일그러진 사물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탐, 진, 치의 성품이 곧 그를 대변한다.
그는 세상의 고통에 눈 감으며, 남 몰라라한다.
그의 마음은 여래의 씨앗을 믿지 않는다.
모든 현상이 이 하나의 성품에 지나지 않음을 모른다.
-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귀한 것임을 모르고,
- 어떤 고난이 와도 흔들릴 수 없는 주체임을 모르고,
- 목숨보다 더 중요하고 분명한 것임을 모르고,
- 아무리 의심하고 부정하더라도 사라질 수 없는 근본임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탐, 진, 치에서 벗어나
<이 유일한 성품에 확고히 귀의할 때>
깨달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성취해나가는 길에 확신을 가질 때
붓다는 그를 쓸만한 그릇으로 보고
그 앞에 나타나, 완전한 성취의 길을 보여준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모은 것은 흩어지고, 지은 것은 무너지고,
다가온 것은 떠나가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무상에 대해 묵상>함으로서 삶의 행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모든 것은 다 허물이다.
삼사라의 허물을 보니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고,
3계의 허물에 묶일까 두려우니 애써 달아나려 발버둥친다.
모든 존재방식은 다 잘못된 것이니 태어남이 곧 고통의 뿌리다.
모든 세계는 원인 따라 지어졌으니, 마음의 힘으로 지어진 것이다.
거기서 말과 몸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귀중한 인간의 몸 받고자 한다면 올바른 원인을 심어야 하리라.
네 가지 생각에 대한 명상이 무르익을 때,
현상계를 이해하게 되고, 출리심이 일어나며, 마음은 스승으로 상징되는 본생의 지혜에 귀의하게 된다.
혹은 정수리 위에 있는 스승의 몸에 마음이 몰입되고,
그의 마음의 빛이 연꽃의 뿌리를 타고,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 것은 향해 나아갈 목표의 인식이다.
감뽀빠께서는 수행의 단계를 제시한 ‘네 가지 다르마’에서, 이것을 두고 마음이 다르마로 향함이라고 하였다.
자기 스승을 붓다로 인정하고,
자기 마음이 스승의 마음에 깊이 공명하였을 때, 불변의 확신이 올라오며,
이 깊은 헌신 속에서 네 가지 관정을 받게 된다.
이것은 여래의 씨앗을 인식하는 것이며, <본 수행을 통해 붓다의 3신을 성취하기 위한 기반>이다.
이러한 네 가지 관정의 에너지가 펼쳐내는 포괄적 목표의 인식을 통해
제자는 <중생이 여래>라는 등식을 이해하게 된다.
‘’먼저 화병관정의 수여로
나의 육신은 본존의 현전으로 인식되었고,
그런 다음 말의 흐름인 비밀관정으로
나디 좌·우로 흐르는 쁘라나가 중앙으로 당겨졌다.
제 3관정의 지복을 불타오르게 하여
비자성의 공간 벌거벗은 소녀를 보았고,
제 4관정에서 상징으로 표현된 4신을 인식함으로서
나는 3신의 결합을 목격했다.‘’
1. 외적 대상을 떠나 유일한 실재에 머무를 때,
나의 몸과 모든 현상은 그 실재의 투사된 홀로그램으로 보이고, 예비수행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인 목표를 보고, 자신에게 도달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2. 마음의 투사가 고요히 꺼져 있고,
마음의 그 비어있는 공간을 비추어 볼 때,
좌 우 기맥은 균형 잡히고, 모든 쁘라나는 중맥으로 들어간다.
마음의 바탕(알라야)은 무명에 싸여있다 하더라도,
무명에 의해 영향 받거나 오염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발의 단계(생기차제)에서
<자신의 몸·말·마음과 현상계 전체를 붓다와 불국토로 변형시킴>으로써
마음의 오염된 에너지를
자기 내포되어 있는 순수하고, 눈부신 본질 안으로 용해시킨다.
- 모든 형상은 붓다의 모습이 되고,
- 모든 소리는 붓다의 소리가 되고,
- 모든 생각은 붓다의 지혜로 변형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굳게 지켜온 관념과 습관적 태도, 체질이 변형되고,
순수한 만달라인 세계, 본존의 형상이 여명처럼 떠오른다.
3. 모든 사물이 본존의 순수한 만달라로서 자각될 때,
나디, 프라나, 빈두를 다루는 비밀방편을 시작한다.
뚬모는 호흡, 자세, 관상을 통해 수슘나의 끝인 칸다에 프라나의 불을 집중시키고,
백색의 빈두와 적색의 빈두의 합일을 유도한다.
생명열의 회오리, 그 희열의 불이 두정까지 상승하고,
다시 하강하여 온 몸으로 퍼져나갈 때, 그의 존재는 천상의 빛으로 작열하고,
일체가 텅 비어 끝없이 펼쳐지는 공성의 하늘,
추한 것도 성스러운 것도 없는 처녀의 빈 몸둥아리,
거기엔 어떤 절망도 희망도 반사되지 않으며,
머무를 중심도 없고, 나아갈 방향도 없다.
4. 근본마음은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초월시공에서 지혜의 태양이 빛나, 모든 공간 모든 형상에 공명할 때
지혜는 곧 자비의 모습으로 움직이면서
현상계의 다르마 (그 안의 존재 )를 변형시켜 나간다.
열반과 삼사라의 상공화!
그 때 인간은 붓다의 세 가지 신체를 얻는다.
모든 것이 포괄적으로 자기 충족되는 하나의 원리는 구루이다.
하나의 실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올라올 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 바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스승, 유일한 실재를 위하여 아끼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포기할 수 있는 자는 그 생애에 무상정등각을 성취할 수 있다.
만달라 공양이란 자신의 몸과 말과 마음, 온 우주마저도 이 깨달음에 바침을 뜻한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근원인 구루와, 성취의 근원인 이담과 불사의 근원인 다끼니가
분리 없이 머리위에 좌정하고 있는 것으로 명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비수행을 통해
수행자는 하나의 절대적 의미, 구루를 발견한다.
그의 마음은 이 우주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동시 편재하는 붓다구루를 향한다.
자기 안에서 구루가 발견될 때,
오직 그 때 바깥의 구루를 알아보며, 온 마음으로 구루에게 귀의한다.
구루에 귀의한 자의 마음은 세상의 모든 허물을 버리기 시작한다.
삶의 모든 요소는 단 하나의 가치를 반영하기 시작한다.
세속적 행위와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욕망의 추구를 떠나 적정처에 머무른다.
이로서 제자는 싸마타의 바탕조건을 마련하게 된다.
마음이 사념의 흐름에서 쉴 때
실재의 인식에 의해 일어난 힘의 진동은 하늘북처럼 시공을 동시에 울리며, 그에게 전달된다.
구루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에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와 자비의 힘을 방사하고 있다.
실재의 인식에서 비롯된 순수한 헌신의 힘에 의해 구루의 깨달음과 지혜와 자비의 힘에 공명하는 자는
이 생애에서 붓다의 깨달음과 지혜와 자비를 성취할 것이다.
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명상의 기술이 요구된다.
그러나 아띠샤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오래 싸마타의 수행에 정진한다 하더라도
올바른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싸마타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조건을 갖춤으로서 싸마타를 성취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이뜨레야의 5부작 중의 하나인 <대승장엄론>에서
<싸마타를 성취를 위해 갖추어야 할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에 대해
마이뜨레야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1.수행처로서의 미덕과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 머문다.
말하자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있고,
머무를 장소는 불안과 산만함이 없이 저절로 편안함이 느껴져야 하고,
너무 춥거나 덥지 않은 쾌적함이 있어야 하며,
자신과 같은 견해와 소신을 갖춘 동료가 필요하며,
세속적인 행위와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것은 외적인 조건이다.
2.이 이상의 어떤 외적조건과 필요성에 대한 마음의 욕구가 사라져야 한다.
모든 대상에 대한 마음의 욕구를 떠나
내면적 명상의 대상에 올곧게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3.지금의 존재입지에 만족하고, 평안하게 머무른다.
자기 명상과 수행의 결과를 보채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4.너무 많은 세속의 일과 생계를 위한 행위를 떠나
유일한 본질, 목적에 집중한다.
여기까지는 내적인 조건이다.
5.행위로 어떤 것을 해치지 말고, 마음으로 어떤 것을 해치지 않는 온유함을 기른다.
프라띠모크샤의 계율에 의해
아힘사의 해치지 않고 온유하게 감싸는 정신을 기르고,
빼앗고, 속이고 기만하는 모든 정신에 저항하고,
아부하고, 불의에 타협하고, 도덕적 타락에 몸을 맡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마음은 싸마타의 고요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내·외의 조건에 해당된다.
그 다음에는
`비로자나의 이해`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몸을 바로 세우고 금강의 자세를 취한다.
동요하지 않는 마음이 마하무드라에 이르는 길이다.”
다리를 금강의 자세로 결인하고, 양손을 배꼽 아래에 수평으로 가지런히 놓는다.
등뼈를 곧게 세우고, 횡격막을 내리고, 어깨의 힘을 뺀다.
목을 안으로 끌어당겨, 턱 끝이 목젖에 닿게 한다.
그리고 혀끝을 입 천정에 댄다.
지성은 대부분 감각에, 특히 시각에 좌우된다.
눈을 깜박이거나 시선을 돌리지 않고,
한 멍에의 거리(양 팔을 벌린 길이)에 고정하라.
이것은 '비로자나의 일곱 가지 요점'이라 불린다.
이 일곱가지 요점은 물리적 수단을 통해 마음을 길들이는 다섯 가지 방편을 구성한다.
- 다리의 결인은 하강의 기운을 다스린다.
- 손의 수인은 균형의 기운을 다스린다.
- 등뼈를 곧게 세우고 횡격막을 내리는 것은 확산의 기운을 다스린다.
- 목을 구부리는 것은 상승의 기운을 다스린다.
- 혀끝을 입천정에 대는 것과 시선을 한 점에 고정하는 것은
- 생명의 기운이 중심 맥관으로 들어가게 한다.
다섯 가지 기운이 중심 맥관으로 들어갔을 때,
다른 파생적 기운 또한 그 안으로 들어가고, 무분별의 지혜가 떠오른다.
이 것은 몸의 적정, 몸을 멈추게 함,
또는 몸이 본래의 상태에 자연스럽게 머무름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 다리를 금강자세로 결인하는 것은
아파나(空) -아래로 움직이는 기운을 조절하여
중심맥관에 들게 하고, 프라나의 유입량을 크게 증가시킨다.
완전한 금강좌(결가부좌)를 취하거나 혹은 성취좌(반가부좌)를 취한다.
몸 전체의 균형과 자세가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으며,
편안하게 이완되는 것이 자세의 요점이다.
2. 양 손을 배꼽아래 수평으로 가지런히 놓고, 양 어깨를 나란히 하여 수평을 유지함은
나디의 양 흐름이 제자리를 잡게 함으로서,
사마나(水) - 온기를 균등하게 하는 기운이 중심맥관에 들게 한다.
3. 횡격막을 내리 밀어 아랫배에 힘을 주고, 척추를 바로 세움은
수슘나의 나디가 바로 펴지게 하고,
비아나(地) - 확산이라 불리는 기운이 중심맥관에 들게 한다.
몸의 균형을 회복하여 몸의 기운이 증가하게 된다.
몸의 상체는 곧고, 반듯해야한다.
몸이 굽으면 나디 흐름이 막히고, 마음은 산만하게 흩어진다.
어떤 흐름은 부족해지고, 어떤 흐름은 과도하게 되어
신체의 균형을 잃고, 기능적 이상을 초래하며, 사념들이 더 크게 일어난다.
4. 목을 구부려 목젖에 대는 것은
우다나(火) - 위로 움직이는 기운을 조절하여 중심맥관에 들게 하고,
몸의 각 기관으로 들어가게 하고, 몸의 기운을 회복한다.
이로서 마음은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 마음은 내적 대상에 잘 머무르고, 싸마타를 성취하기 쉬워진다.
5. 시선을 전방 한 점에 고정하고, 혀를 입천정에 대는 것은
프라나(風) - 생명을 유지하는 기운이 수슘나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응시하는 눈은 힘을 빼고 반개함으로서,
아무런 의식적 노력이나 긴장 없이 명상하는 대상에서 떠나지 않고,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탁한 숨을 토해낸 뒤 침묵을 지키는 것은
말의 적정, 말을 그치게 함, 또는 말이 본래의 상태에 자연스럽게 머무름이라 불린다.
- 지나간 일을 회상하지 마라.
- 다가올 일을 궁리하지 마라.
- 지금 이 순간 명상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 일체가 텅 비어있다는 식의 관념적 틀을 짓지 마라.
이 시점에서
- 어떤 감각적 인식이나 느낌도 분별하지 말고,
- ‘그렇다, 아니다’라고 말하지도 마라.
- 잠시 동안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고,
- 몸은 잠자는 아기처럼 가만히 두고,
- 마음은 본래의 상태에 자연스럽게 머무르게 하라.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행위를 모두 그치고, 잠자는 아기와 같은 몸의 고요를 간직하라.
겸손하게, 엄격하게 스승의 참된 가르침(수행의 차제)을 애써 따라가라.
그렇게 한다면, 분명 '상공화하는 상태'가 드러날 것이다.”
띨로빠께서 말씀하셨다.
- 상상하지 말고(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말고),
- 생각하지 말고(미래의 계획에 머물지 말고),
- 분석하지 말고(현재의 분별에 머물지 말고),
- 명상하지 말고(명상적 추론에 머물지 말고),
- 숙고하지 마라(구체적 사물로 묘사하지 마라).
- 마음을 본연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라.
@, 띨로빠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마음에 꼭꼭 숨겨진 소원 성취의 보석 그 길을 가라.
자라나는 나무가 찾아내는
변함없이 높고 드넓은 저 허공의 실재와 같은, 그리하여 벙어리들의 혀를 풀라.
에고에 대한 신념에 혼탁한 물이
뒤돌아보지 않고 흐르는 삼사라의 물결을 정지시켜,
빛과 함께하는 맑은 물소리를 내게 하라.
그리하여 그 물에 비췬 투명함처럼,
어머니가 자식을 알아보듯이
그대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쳐 내거라.
스스로 자체를 인지해내는 초월의식은 그러함일 뿐
말의 길 생각의 길 모두 끊어져 있으니
나 띨로빠가 가리킬 것 아무 것도 없다네.
그 자체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기에.
- 상상해 내거나(미노),
- 생각해 보거나(미삼),
- 가다듬은 사려의 틀마저 만들지 마라(미체칭).
- 명상하거나(미곰),
- 행위로 지어 내려 하지도 마라(미셈).
그 모든 것이 적정한 곳,
고요로 모아 질 어떤 대상 모습마저 갖지 마라(랑밥작).
불러 이름 짓지 마라.
다르마의 주, 감뽀빠께서 말씀하셨다.
"산란하지 않음이 모든 붓다께서 걸어가신 길이다."
@, 감뽀빠께서는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셨다.
- 어디로도 향하지 말고
- 어떤 모양도 짓지 마라.
- 내버려두고,
- 아무 시도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라>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마음을 길들임, 마음을 멈춤, 마음이 본연의 상태에 머무름이라 한다.
나가르쥬나께서 말씀하셨다.
“오 고귀한 자, 비끄라마시타여,
네 가지 기초(사념처)가 제 여래께서 걸어가신 유일한 길이 틀림없으니,
그러므로 매 순간 주의 깊게 깨어있도록 하시오.
여기에서 주의 깊지 못하면 모든 수행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오.”
마음의 깨어있음이 산란하지 않음이다.
이것을 두고 `아비달마`에서는
"깨어있다는 것은 관찰하는 대상에 친근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86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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