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성취

보리도등론 : 마하무드라, 불성/공성, 반야바라밀 명상

수선님 2018. 9. 9. 11:30



고귀한 가문의 아들 딸(뛰어난 근기 지닌 자)는

은둔처에 자리를 마련하고,

방해에서 벗어난 장소에 머무르기를 좋아해야 한다.

그런 다음 완전한 연꽃자세로 앉아,

무엇이 나타나든 마음이 그 현상과 체험에 끼어들지 말게 하라.


마음은 모든 명상적 행위의 노력에서 떠나야 하고,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 따위의 일체 관념적 분별이 사라지고,

긍정과 부정, 선택과 내버림의 꾸밈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희망과 단념 따위의 미세한 관성적 노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상해 내거나,

생각해 보거나,

가다듬는 사고의 틀마저 만들지 마라.

명상하거나,

행위로 머금어 내려 하지도 마라.

그 모든 것이 적정한 곳,

고요로 모아질 어떤 대상 모습마저 갖지 마라.

불러 이름 짓지 마라.



들어봐라 아들아 !

네 마음은 망념으로 물들어 있구나.

자아는 형상의 틀에 묶인 것도 아니고,

거기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께호 !

그러므로 지어내거나 꾸미지 말고 지친 마음을 쉬어라.


코끼리 같은 마음도

길들여지고 나면 온순해지는 것처럼,

오고 감을 모두 그침으로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이완된다.

이 사실을 알진데,

내게 무슨 다르마가 더 필요하겠는가!

어떤 모습으로든 모양을 짓지 말고,

그 무엇도 마음에 그리지마라.

분주한 마음의 기교를 떠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머물라.

궁리하지 않는 마음이 태어남이 없는 본생의 지혜요,

삼세의 모든 붓다들이 도달한 곳이라네.



그 어디에도 잘못이 있다고 보지 마라.

그 어떤 것도 일체 다스리지 말고,

체험의 단계와 징조가 나타나길 바라지 마라.

그리고 무명상의 단계를 가르쳐 받았다 하더라도,

타성에 젖지 말고,

마음의 무의식적 침잠과 분산을 조정하면서,

그침 없이 그 마음을 깨어서 지켜보라.



명상의 순간에,

일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명상하지 마라.

명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지어낸 망상일 뿐이다.



어딘가에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놓아버려라.

각성이 힘이 미치는 곳에

모든 것이 그 것(네 마음)이다.

이 밖에는 더 이해해야 할 것이 없다.



이것은 헤아리기 어렵고, 가다듬은 틀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은 홀로 스스로를 비추고 있으되

어떤 모양으로도 나타나 있지 않다.

발생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본래 순수하다.

모든 곳에 동시 편재하는 법계는 열반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자아의 중심도 없고,

현상의 가장자리도 없으니

혜안을 가진 자 만이 상징적 틀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느긋함과 조급함, 무의식적 어둠이 사라진 채 비추어져야 한다.

전편재의 법계가 가다듬은 틀에서 벗어나 있듯이

네 마음을 가다듬은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라.

현상적 존재는 개념화의 산물이므로

현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적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관념적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슬픔을 넘어선 최후의 경지, 무주처열반이라 한다.

관념은 대무명이기에, 사람을 윤회의 바다 속으로 빠트린다.

관념적 분별에서 벗어난 명상적 몰입은

하늘처럼 투명하고 비어있다.



모든 추론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으면,

마음 역시 털끝만큼도 얽매이지 않고 머물러 있게 된다.

마음에 떠올리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으면,

그 향함이 없음에 절을 한다.

현명한 자는 모든 공성의 이치에서,

그 공성을 다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대상적 인식을 떠나서,

중심도 경계도 없는 거기에 머무른다.

이 비어있는 성품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현상적 틀을 인정하거나

구체적으로 다듬거나 버리는 노력이 사라질 때마다

반야바라밀의 명상이 있게 된다.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곳 마다 반야바라밀의 명상이 있게 된다.

분별하는 망념이 사라지고 마음의 모습으로 그려내지 않을 때 마다

반야바라밀의 명상이 있게 된다.


반야바라밀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일체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명상하지 않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명상은 비어있는 하늘을 명상하는 것과 같다.

빈 하늘이 사념의 틀을 벗어나 있듯이

반야바라밀은 사념의 틀을 갖고 있지 않다.


생각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마라.

생각할 만한 것도 그렇지 않을 만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대상이 멸한 공성이 보일 것이다.


공성이 보일 때, 어떤 것도 봄이 없다.

어떤 현상도 보이지 않음이 완전하게 보고 있음이다.

어떤 것도 보고 있지 않음이 진여를 보는 것이다.


어떤 중생은 자신이 빈 하늘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늘이 보인다고 하는가?

이 의미를 잘 따져 보라.

마찬가지로 여래는 모든 현상을 보는 법을 보여주었다.



여래의 아들이여,

이 뛰어난 법의 수행으로 현상의 무분별을 명상한다면,

상분별을 넘어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점차 무분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형상, 형상인식 등의 오온이 마법적인 환영과 같다고 이해하는 자는

마법적 환영과 오온 사이에 어떤 차이를 분별하지 않는 자는,

그리고 행위가 대상의 집착에서 벗어난 평온이 있기에,

이것을 두고,

그의 행위에서 반야의 지혜가 완전히 드러난 자라 한다.

설령, 무분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덕을 쌓는 행위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궁극적인 진리인 공성의 상태에 머무르는 데서 얻는 공덕은

몇 겁 동안 다르마에 대해 듣고 읽고, 공덕의 바탕, 보시, 등을 수행하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러한 삼매 속에 든다면,

삼계에 걸친 중생의 삶을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유익한 일이다.


하루 동안 궁극적 다르마의 의미를 명상하는 것은

수많은 생애동안 가르침을 듣고, 숙고하는 것 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

이로 인해, 그 수행자는 탄생과 죽음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공성의 의미가 마음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다른 공덕의 수단으로 해탈을 이룰 수는 없다.

오랜 기간 동안 계율을 수지하고,

수 없는 생애동안 삼매를 수행했다하더라도,

공성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다.


몇 생애동안 다르마를 베끼고, 읽고, 듣고, 설명하고, 낭독하는 것보다,

하루 동안 공성의 명상 속에 머무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


공성의 의미가 하나하나의 사물 속에 확충될 때,

그 어떤 것도, 이러한 방식에 의해 포용될 수 없는 사물은 없다.

귀의도 그렇다.


모든 현상이 자아라는 결정된 성품이 없고,

나의 몸이라는 소유의 실체가 없고,

생명현상의 오고 감이 없고,

윤회 전생하는 영혼이라는 실재 또한 없다.

여래처럼, 아무 것도 봄이 없음은 인식의 오류,

어둠이 사라진 마음으로 붓다에 귀의하는 것이다.

이른바 여래라는 현상은 모든 곳에 편재하는 법계이다.

모든 곳에 편재하는 법계는 모든 현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고 표현된다.

그래서 이 것은 모든 곳에 편재하는 법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것은

인식의 오류, 어둠이 사라진 마음으로 다르마에 귀의하는 것이다.

형상을 초월한 모든 곳에 편재하는 법계(법무아)를 명상하는 자,

혹은 소승의 인무아에 의지하는 자는

인식의 오류, 어둠이 사라진 마음으로 상가에 귀의하는 자이다.


가섭이여, 모든 현상은 공간과 같아, 특성이 없고,

본래 절대청정의 투명한 빛이다.

이 것은 보리심의 개발이라 표현된다.


명상함도 명상하는 자도 없다.

본존은 존재하지 않고, 만뜨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마음의 상분별의 행위에서 벗어난 본성 안에,

모든 본존과 만뜨라 -베로짜나, 악쇼브햐, 아모가싯디,

라뜨나삼브하바, 아미따브하, 바즈라싸뜨와가 존재한다.


깨달음은 마음의 그림을 그리는 따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리심, 궁극적 깨달음을 향해 노력을 기울이면,

거기에서 요기는 본존이 될 것이다.


만뜨라는 현상의 요체를 성취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만뜨라의 특성은 모든 붓다의 마음이다.

만뜨라의 특성은 모든 곳에 삼투되어 있는 법계를

적절하게 포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다.”


다르마의 단계, 육바라밀 또한 공성의 자각 속에서 완성된다.

생각하지 않음이 귀의이다.

차별을 두지 않음이 계율이다.

모습으로 분별하지 않는 것이 인욕이다.

좋고 싫음의 선택을 떠나는 것이 정진이다.

마음의 집착 없음이 선정이다.

마음의 상 없음이 지혜이다.


공성은 정해진 특성이 없으므로 한 맛이다.

마음은 그 어디에도 머무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이러한 인욕은 커다란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현자는 정진의 태도로 행동하기 시작했기에,

모든 집착을 멀리 내 던진다.

그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머무르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이 것은 완전한 공덕장이라 말한다.

모든 중생의 유익과 참 행복을 위해 선정이 수행되고 있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일체의 장애를 몰아내는 것은 완전히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다.


물에 물을 붇듯이 버터가 버터 안으로 녹아들어가듯이,

사람이 자신을 자각하는 근본지혜를 보는 것은 예배의 행위가 된다.


현상의 공성에 의지하는 사람, 붓다의 세계를 염원하는 것은 스승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고의 공양이다.


궁극적인 의미의 공양은 붓다를 기쁘게 한다.

그는 향, 물 따위의 공양을 기뻐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순하게 하는 것이 붓다를 기쁘게 하는 최상의 공양이다.


참회하길 원하는 자는 똑바로 앉아 궁극적 의미를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최상의 참회, 자각이다.


처사로서 머리를 깍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사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현상적 진리를 지니고 있기에,

완전한 승려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사람이 무위의 특성을 지닌 음식을 먹었다면,

모든 교의를 빠짐없이 만족시킬 것이다.

어린 티를 못 벗은 자는 이 것을 알지 못하기에, 용어와 말에 의존한다.

모든 현상은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다.


이 것은 읽음이요, 이 것은 통찰이요, 이 것은 명상이다.

이 것은 해설의 핵심을 배움이다.

이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견해도 없다.


자체성품은 하늘과 같다.

나는 시간성을 초월하여 있는 자체성품을 얻었다.



모든 곳에 동시 편재하는 법계의 바다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서로 다른 길과 단계가 존재한다.

모든 곳에 동시 편재하는 법계의 바다로 들어갔다면,

나아갈 단계와 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을 평형 속에 견고하게 의지하였을 때,

사람은 몸과 말의 덕에 근본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없다.


반야수행의 효과가 나타나는 징후는 다음과 같다.

공덕이 자체 안에서 저절로 성숙되고,

번뇌의 감정이 가라않고,

중생을 향한 자비심이 일어날 것이다.

수행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 강하게 올라오고,

모든 현상에 대한 몸과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이 삶의 모습에 고정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86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