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스크랩]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해설

수선님 2018. 9. 9. 13:03

● 선가귀감 개요

서산 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이 1579년에 저술한 것이다.
휴정은 법명이고 호는 청허이다. 스스로 금강산 백화암에서 수행하였기에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고 칭했으며, 1577년에 모든 승직을 물러난 이후에는 퇴은(退隱)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서산 대사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경론과 조사어록의 50여 부에서 참선공부를 위하여 꼭 필요한 어구를 선별하고,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입장에서 각 내용마다 스스로 주해를 붙였다. 제자였던 노원(魯願), 의천(義天), 정원(淨源), 대상(大常), 법융(法融) 등이 공편(共編)하고 사명 대사인 송운유정(宋雲惟政)이 발문을 붙였다.

서산 대사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는 조선조 때 불교의 박해가 심하였다. 이에 서산은 도교·유교·불교의 세 종교를 아우르는 삼가귀감(三家龜鑑) 3권을 저술하여 각 종교의 대의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본(異本)에는 선가귀감·도가귀감·유가귀감으로서 선가귀감이 간략하게나마 그 일부로 편입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여기에서는 단행본으로 출간된 『선가귀감』본에 의한다. 본문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먼저 옛 전적에서 인용한 어구를 드러내고, 둘째는 다음으로 이에 대하여 서산의 개인적인 견해를 서술하며, 셋째는 마지막으로 게송으로 어구의 대강을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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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家龜鑑』1) 2)

조계종3)에 속한 퇴은4)이 서술5)(曹溪 退隱 述)


1.6) 한 물건 - 마음  HPC 7.634c3~7.635a4.

7)여기 한 물건(一物)8)이 있습니다. [그것은]9)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져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10)‘한 물건’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둥근 원(一圓相)-입니다. 옛사람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노래하였습니다(頌云). “옛 부처께서 나시기도 전에, [이미] 뚜렷한(凝然) 둥근 하나의 모습(一相圓). 석가모니(釋迦)가 오히려 이해하지(會) 못한 것을 가섭(迦葉)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 물건’이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고 일찍이 사라져지지도 않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고 한 이유입니다. 육조 혜능 선사(六祖 慧能, 638-718)가 [둘러앉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어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 너희들이 곧 알겠느냐?” [이에] 신회 선사(荷澤 神會 686-760)가 곧 나와 대답했습니다. “[일물은] 모든 부처의 근본(本源)이고 저(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것이 [신회가] 육조의 [선(禪)의 법맥(法脈)에서] 서자가 된 까닭입니다. 회양 선사(南岳 懷讓 677-744)가 숭산(嵩山)11)에서 오니 육조가 물었습니다. “어떤 물건이길래 이렇게 오는가?” [이에 회양] 선사는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으며, 팔 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스스로 [깨닫고서] 기뻐 말했습니다. “한 물건이라고 [말]할지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不中).” 이것이 [회양이] 육조의 [선의 법맥에서] 적자가 된 까닭입니다. ◆12)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의 성인이 [모두] 이 말에 따라서 나왔다. 누가 이것을 예로 드는 것에 있어서 눈썹이 빠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겠는가!13)


2. 자각의 중요성 - 깨달음의 주체는 바로 나다.  HPC 7.635a5~7.635a13.

부처(佛)와 조사(祖)가 세상에 나타났으니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이는구나!

부처와 조사라는 것은 석가모니(世尊)와 가섭입니다.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은 [부처와 조사가] 큰 자비를 본체로 삼아 중생들을 구하려(度衆生) 함입니다.14) 그러나 ‘한 물건’의 관점에서 본다면(觀) 곧 [이와 같은 부처와 조사가 대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자 세상에 나옴은] 각 사람(人人)의 본래 타고난 얼굴(面目)이 본래 완전히 이루어져있는데(圓成) 무엇하러(豈) [그 얼굴에] 기름을 더해주고 분을 발라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 하는가[라 할 수 있습니다].15) 이것이 세상에 나온 것이 파도를 일으키는 까닭입니다. 『허공장경虛空藏經』16)에서 이르기를, “문자(文字)는 악마의 일(魔業)이 되고 이름과 형상도 악마의 일이 되며 심지어(至於) 부처의 말까지[도] 또한 악마의 일이 된다”[라고 한 것은] 곧 이 뜻(意)입니다. 이는 본래 타고난 본성(本分)을 직접 들어 보인 것입니다. 부처와 조사는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게 할] 공덕과 능력(功能)이 없습니다. ◆ 하늘과 땅이 빛을 잃으며 해와 달도 빛이 없구나!17)


3. 부처와 조사의 자비의 방편  HPC 7.635a14~7.635a24.

그러나 진리(法)에는 여러 뜻이 있으며 사람에게도 여러 기질(機)이 있으니 [여러 방편을] 베풀어 설비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진리(法)’라는 것은 ‘한 물건’입니다. ‘사람’이란 ‘중생’입니다. [세계의] 실상에는 변하지 않는(不變: 본질적인, 본래적인) 이치(義)와 인연을 따르는(隨緣: 현상적인, 현실세계의)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단박에 깨치는(頓悟) 기질(機)과 오래 닦아야(漸修) [깨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와 언어[의 방편]을 베풀어 설비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이른바 ‘관(官)에서는(공적으로는) 바늘[만큼]도 용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수레와 말이 오간다’[라는 것입니다].18) 중생이 비록 [그 본성이] 완전히 이루어져있다고 하지만 [윤회의 세상에] 지혜의 눈(慧目)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윤회와 전변(輪轉)을 달게 받습니다. 그러하니 만약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와서 베푸는]  [지혜의] 금칼(金?)19)이 없다면 어느 누가(誰) 근본적인 무지(無明)의 두꺼운 꺼풀을 깍아낼(刮) 수 있겠습니까! 고통의 바다(苦海)를 건너 즐거운 피안(樂岸)[의 세계]에 이르는 것은 모두 [부처와 조사의] 큰 자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한즉 갠지즈강(恒)의 모래[만큼 많은] 목숨과 온 몸(身命)으로도 [그 대자비의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훈습(新熏)을 널리 들어 보여 [부처와 조사의 대자비의] 깊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 왕이 보좌(寶殿)에 오르니 시골 노인들이 그 은덕을 칭송하네(謳歌)!20)


4. 개념에 묶이지 말라.  HPC 7.635b1~7.635b8.

[일물에] 갖가지 이름(名)과 호칭(字)을 억지로 붙여서(强立) 혹은 마음(心)이라 하고 혹은 부처(佛)라 하고 혹은 중생(衆生)이라 하지만, 이름에 집착해서(守) [주객을 구별하는 분별심(分別心)에 기초한] 이해(解)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體)은 곧 [그 자체로] 옳습니다. 생각이 움직이면 곧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그러집니다.

‘한 물건’에 굳이 세 가지 이름과 호칭을 붙이는 것은 부처가 가르치면서(敎)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바[의 방편]입니다. 이름에 집착하여 [분별심에 기초한] 이해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한 선(禪)의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바 [방편]입니다. [이처럼 교학의 가치를] 한 번 들어올리고 한 번 잡아 누르며, 순간에 세우고 순간에 깨뜨리는 것21)은 모두 부처(法王)의 가르침과 명령(法令)의 [거칠 것 없는] 자재로움(自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로는 묶고 아래로는 일으켜서(높은 기질의 중생의 방자함을 막고 낮은 기질의 중생을 [깨달음을 향하여] 마음을 내도록 하여) 부처와 조사의 [세상에] 드러남(事)과 본래 모습(體)이 각각 다른 것임을 논하는 것입니다. 오랜22) 가뭄에 단비를 만나고 타향에서 고향사람(故人)을 만나네!


5. 선과 교의 정의  HPC 7.635b9~7.635b23.

석가모니가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은 선의 뜻이 되었고 일평생(一代) 설법한 바의 것은 교학(敎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이라고 합니다.

‘세 곳’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가섭에게 자신이] 앉은 자리의 반을 나누어 준 것이 첫 번째 [곳]이고, 영산의 모임(靈山會)에서 꽃을 집어 든 것이 둘째 [곳]이고 [석가모니가 입멸한] 쌍수(雙樹) 아래에서 [늦게 온 가섭에게] 관 [밖으로] 두 다리를 [내] 보인 것이 세 번째 [곳]입니다. 이른바 가섭에게 선의 등불을 따로이 전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일평생’이라는 것은 사십 구 년 동안23) 다섯 교문(敎)을 가르치신 바의 것입니다. 인간과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가르침(人天敎)이 첫째 [교문]이고,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小乘敎)이 둘째 [교문]이며, 다른 사람까지 깨닫게 하고자 하는 자비를 내는 것(大乘敎)은 셋째 [교문],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頓敎)은 넷째 [교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圓敎)이 다섯 째 [교문]입니다. 이른바 가섭이 가르침의 바다(敎海)를 세상에 널리 통용되도록(流通) 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24) 그러한즉 선과 교(敎)의 근원(源)은 석가모니입니다. 선과 교가 갈라져 나온 것은 가섭과 아난입니다. 말없음(無言)으로써 말없음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有言)로써 말없음에 이르는 것은 교입니다.25) 또는 마음(心)은 선의 가르침(法)입니다. 말(語)은 교의 가르침입니다. 즉 [모든] 가르침(法)은 비록 한 맛(一味: 같은 것, 세존이라는 한 근원으로부터 나왔을지라도)일지라도 [선과 교 각각이 갖고 있는] 의견은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멉니다. 이것이 선과 교의 두 [깨달음으로의] 접근법(途)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 방자하거나 잘못하지 말라. 풀 속에 쓰러질라!


6. 말에 집착하지 말라. - 선의 우위성  HPC 7.635b24~7.635c11.

이런 이유로 만약 사람이 입에서 [가르침을] 잃는다면(失之於口)26) 곧 꽃을 집는 것과 은은히 미소짓는 것은 모두 교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되고, [만약] 마음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면27) 곧 세상의 [불법을 전하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말(?言)과 [부족한 말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말(細言)이 모두 교학 이외에 따로이 전한 선의 뜻이 됩니다.

[세상의] 참된 모습(法)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言不及), 참된 모습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心)이 미칠 수 없습니다(心不及). 입에서 [세상의 참된 모습을] 헤아리려는(擬) 사람은 본래의 마음(本心王)을 잃게되며, 본래의 마음을 잃게되면 곧 석가모니가 꽃을 집고 가섭이 은은히 미소지은 것이 모두(盡) 진부한 말(盡落陳言)로 떨어져 마침내는 죽은 물건이 되고 맙니다. 마음에서 얻은 사람은 단지 길거리의 잡담도 잘 설해진 가르침의 요지(要)가 될 뿐 아니라 제비의 울음소리(?語)까지도(至於) [세상의] 참된 모습(實相)을 깊이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보적선사(寶積禪師)는 [상가집에서] 곡하는 소리를 듣고서 몸과 마음[의 진리]를 깨닫고 춤추었으며, 보수선사(寶壽禪師)는 주먹질하며 싸우는 것(諍拳)을 보고서 [인간의] 본래 참모습(面目)에 탁 트여 깨닫게(開豁) 되었으니 [바로] 이로써 입니다. 이는 선과 교의 깊고 얕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 밝은 구슬을 손에 가지고서 이리 저리 자유로이 노니는구나!28)


7.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얽매임 없는 자유  HPC 7.635c12~7.635c20.

“내가 한 마디 말하겠다. ‘근심을 끊고 인연을 잊어 [작위적으로] 일[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앉아 있구나. 봄이 오니 바야흐로 풀이 푸르구나!’”

근심을 끊고 인연[의 산란함]을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한가히 노니는 도인(閑道人)처럼 말입니다. 아! 그 사람됨이여! 본래 [어디에도] 얽힘(緣)이 없고 본래 [작위적으로] 일[하는 것]도 없어서(無事) 배고픔이 오면 곧 먹고 피곤하면 곧 잠듭니다. 맑은 물과 푸른 산에서 마음대로(任意) 노닐면서(逍遙) 어촌과 술집(酒肆)에 거침없이 자유롭게(自在)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냅니다.29) 시대(年代)와 나이(甲子)를 도무지(摠) 모릅니다.30) 옛날과 다름없이(依舊) 봄이 오면 풀이 바야흐로 푸르러집니다. 이는 한 생각(一念)이 일어나려(歎=欲)할 때를 판단하여 [마음의] 빛을 돌이켜 [원래의 본 모습을 보고자] 함입니다. ◆ 문득(將) 이르기를, 사람이 없나 [했더니] 때마침(賴) 한 사람이 있구나!31)


8.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  HPC 7.636a1~7.636a10.

교학적 방법(敎門)은 오로지 한 마음에 대한 [말과 글로 된] 가르침(法)을 전하며, 선 수행(禪門)은 오로지 본성을 보는 가르침을 전합니다.

마음(心)은 거울의 본체와 같고 존재의 성품(性)은 거울의 빛과 같습니다. 본성은 [그] 스스로 맑고 깨끗하기에 깨닫는 즉시(卽時豁然)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습니다. 이것이 한 생각(一念)이라는 뜻(意)을 얻는 것을 비밀스럽게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 첩첩이 쌓인 산과 물. 깨끗하고 맑은 옛 가풍(家風)이구나.32)

평하여 말하자면,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본체적 측면의 마음(本源心)이고 둘째는 존재에 대한 무지(無明)로 [인해 대상의] 모습(相)을 취하는 마음입니다. 존재의 성품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원리적 [차원의] 성품(法性)이고 둘째는 본성과 형상(相)이 상대되는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차원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선과 교의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어 이름을 지키고 [잘못된] 이해를 내어서 혹 얕은 것으로서 깊은 것을 삼고 혹 깊은 것으로서 얕은 것을 삼으니 마침내 앎(觀)과 실천(行)에 있어 큰 병이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구별한 것입니다.


9. 선 수행에 대한 찬탄 - 근원을 바로 드러내는 간결한 가르침  HPC 7.636a11~7.636a17.

그러나 모든 부처가 설한 경에서는 먼저 모든 현상세계(法)를 분별하고 후에 궁극적인 공(空)을 설합니다. 조사들이 보인 구절에서는 생각(意)의 자취를 끊고 마음의 근원(心源)에서 이치를 드러냅니다.

모든 부처[의 가르침]들은 만대의 의지할 바가 되어서 모름지기 [존재의 실상의] 이치를 자세히 보였습니다. 조사들[의 가르침]은 [수행자로 하여금] 즉시에 깨닫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뜻이 현묘하게 통하게 합니다. 자취란 조사의 말의 자취이고 뜻이란 배우는 자의 마음입니다. ◆ 오랑캐 난리에 손가락으로 물을 대더라도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33)


10. 지적인 알음알이에 대한 비판  HPC 7.636a17~7.636b1.

모든 부처의 말한 것은 활(弓)이고 조사의 말한 것은 [활]줄(絃)입니다. 부처가 말한 막힘이 없는 가르침은 바야흐로 한 맛(一味)으로 돌아갑니다.34) 이 한 맛의 자취마저도 떨어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인 바 한 마음(一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는 용궁의 대장경(龍欌)35)에도 아직 없는 바의 것입니다.

활이라고 말한 것은 구부러진 것입니다. 줄이라고 말한 것은 곧은 것입니다. 용장이라는 것은 용궁의 대장경입니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 從?, 778-897)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조주는 대답하여 이르기를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르는바 틀 밖의 선의 뜻입니다. ◆ 물고기가 지나가니 물이 탁하여지고 새가 나니 깃털이 떨어진다!36)


11. 교와 선의 비교 : 살 길 - 사교입선  HPC 7.636b2~7.636b14.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먼저 참다운 말의 가르침으로써, 불변하고 인연에 따르는 두 뜻이 곧 자기 마음의 본성과 형상임과, 단박에 깨닫는 것과 점차로 닦아 나가는 두 수행법(門)이 곧 자기의 수행(行)의 처음과 끝임을 판별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가르침의 뜻(敎義)을 내려놓고서 다만 원래 가진 마음을 한 생각 앞에 드러내어 선의 뜻을 상세히 참구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번뇌의] 몸을 벗어나게 하는 살 길(活路)입니다.

높은 기질의 큰 지혜는 이 [교학적] 한계에 있지 않습니다. 보통이거나 낮은 기질의 사람은 [교학적 수행의] 등급을 뛰어넘어서는 안됩니다. 교는 불변함과 인연에 따름, 단박에 깨달음과 점차로 닦는 것에서 [무엇이] 먼저 있고 나중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선을 가르치는 것(禪法)은 한 생각 중에 불변함과 인연에 따름과 본성과 형상과 본체와 작용이 옳음을 떠나고 그릇됨을 떠나며 옳음도 긍정되고 그릇됨도 긍정되는 것이 본래는 [서로가] 곧 같은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사가 진리(法)를 들어 가르칠 때에 말에 의지하지 않고(離言) 한 생각을 직접 가리켜서(直指一念)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할뿐이니(見性成佛), 교학을 내려놓는다는 뜻은 [바로] 이로써입니다. ◆ 날 밝을 때에 구름이 깊은 계곡을 덮고 깊고 빽빽한 곳에 해가 맑은 하늘을 비춘다.


12. 활구의 중요성  HPC 7.636b15~7.636b23.

대개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산 말(活句)을 참구하고 죽은 말(死句)을 참구하지 마십시오.

산 말 아래에서 자리를 얻으면(薦得; 깨달음을 얻다) 부처와 조사와 마찬가지로(與, 더불어) 스승이 되는 것을 감당하고 죽은 말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도 끝내지 못합니다. 이에 특히 산 구절을 들어 가르쳐서 스스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 임제(臨濟 義玄, ?~867)를 보려면 모름지기 철의 사나이(鐵漢)가 되어야!37)

평하여 말하자면, 화두에는 말(句)과 뜻(意)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참구한다는 것은 빠른 방법으로 산 말이니, 마음의 길을 빼앗고 말의 길을 빼앗어 더듬어 찾지(摸索, 지적이해) 않기 때문입니다. 뜻을 참구한다는 것은 원교와 돈교의 방법으로 죽은 구절이니, 이치의 길이 있고 말의 길이 있기에 들음, 이해, 생각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13. 화두 공부의 자세  HPC 7.636b24~7.636c9.

수행하는 사람이 본래 공안(公案, 화두)을 참구할 때에 간절한 마음(切心)으로 공부하기를 닭이 알을 품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며, 배고픔에 밥을 생각하듯이 하며, 목마름에 물을 생각하듯이 하고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는 것같이 하면 투철하게 알 수 있는 때(透徹之期)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조사의 공안에는 일 천 칠백 칙(則)이 있으니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뜰 앞의 잣나무’, ‘마 세 근(麻三斤)’, ‘마른 똥 막대기’ 같은 류(類) 들입니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따뜻한 기운이 서로 이어집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고 인위적으로 짓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절실하다(切) 합니다. 참선할 때에 이 절실한 마음이 없이 능히 투철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4. 참선의 세 가지 요소  HPC 7.636c10~7.636c16.

참선에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큰 믿음의 근거(大信根)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깨달음을 이루려는] 큰 분투의 의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왜 내가 부처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큰 의문의 마음(大疑精)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그 하나라도 없으면(闕) 마치 [세 발] 솥의 다리를 [하나] 끊은 것과 같아 결국 버리는 그릇이 되고 맙니다.

부처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근본을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영가(永嘉 玄覺, 647-713)는 “수도자는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몽산(蒙山 德翁, 13C.)은 “참선하는 자가 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으니 곧 큰 병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 “큰 의심 아래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15. 일상에서 선에 전념하라 - 지적 이해에 얽매이지 말라  HPC 7.636b17~7.637a7.

일상 생활 속에서 다만 ‘개에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어서 들고 가며 들고 오고(마음에 두고) 의심하여 오고 의심하여 감에 이해하는 길을 잃고 뜻의 길을 잃고 좋은 맛(滋味)을 잃어 깨달음을 얻어 마음(心頭)을 몰두하는 때가 곧 마땅히 사람이 몸과 목숨을 내버릴 곳이 됩니다.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 됩니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조주가 대답했습니다. “없다.” [‘없다’는] 이 한 글자는 종문(宗門)38)의 한 관문으로 역시 허다한 악한 지식과 악한 깨달음을 꺾는 무기(器仗)가 되며 역시 모든 부처의 본래 면목이 되고 역시 모든 조사들의 골수(骨髓: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름지기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간(透得) 다음에야 부처와 조사가 되는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은 [깨닫고서] 노래했습니다. “조주가 칼39)집에서 뺀 칼(露人劒)에 찬 서리 빛이 번득인다! 무엇인가(如何)를 주저하고 망설여(擬議) 묻는다면 몸이 나뉘어 두 동강나리!”


16. 바른 화두 들기 - 분별심이 없도록  HPC 7.637a8~7.637a20.

화두는 들어 일어나는 때(處)에 이해하려(承當)해서는 안되며 생각(思量)으로 헤아리려(卜度)해서도 안되며 또 어리석게(將迷)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생각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생각하면(就不可思量處思量: 생각할 수 있는 극단, 곧 생각의 막다른 곳에까지 이르면) 마음이 갈 바가 없는 것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40) [그런 지경에 이르면] 곧 [우리의 생각이] 끊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평소에(尋常) 이리저리 비교하고(計較) 적절히 꾀어 맞춰 견주어보는 것(按排)도 곧 잘못된 생각(識情41) : 망념  혹은 망상)이며 [존재의 참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도 곧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서 다만 [자신의 잘못된 견해] 안에 머물며 머리만 들락날락 합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 생기기 쉬운] 열 가지 병(病, 잘못된 습관)이 있으니, 생각(意根) 아래에서 헤아리는 것42)을 말하며,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 우물쭈물 하는 것43)을 말하고, 말로써 살 계획(活計)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문자 가운데에서 끌어 증명하려는 것(引證)44)을 말하고, [화두를] 들 때에 [그 뜻을]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방 안에 일없이 있는 것45)을 말하고 있고 없음을 이해하려하는 것을 말하며, ‘존재에는 참된 실상이 없다는 것(眞無)’을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고, 도리(道理)를 이해하려 하는 것을 말하며, 미혹으로써 깨달음을 기다리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열 가지 잘못된 습관을 떠난 사람은 다만 화두를 들 때에 정신(精神)을 다스리고 분발하여 다만 ‘이 무엇인가’46)를 의심할 뿐입니다.


17. 바른 화두 들기 - 목숨을 다하라.  HPC 7.637a21~7.637b1.

이 일(화두를 바로 참선하는 것)은 쇠로 만든 소 위에 앉은 모기가 어찌 어찌할 것인가 고쳐 묻지 않고(更不問如何若何: 즉, 다짜고짜) 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한 번 [정신을] 모아 [온] 몸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금 위의 뜻을 결말지으면 산 구절을 참구하는 자로 하여금 물러나거나 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47)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고, 오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는 것(要窮心路絶)48)을 다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18. 바른 화두 들기 - 외곬으로 치우치지 말라.  HPC 7.637b2~7.637b7.

[참선] 수행(工夫)은 [악기의] 줄을 고르는 원리(法)와 같아서 당김과 풀어짐이 적절함(中)을 얻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부지런하면 곧 집착에 가까워지며 [지나치게] 잊어 [소흘히 하면] 곧 근본적인 무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 수행자의 정신 자세는] 또랑또랑하고 맑고 또렷하며 철두철미하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거문고를 타는 자가 말하기를 느림과 빠름의 적절함을 얻은 연후에야 맑은 소리가 널리 퍼진다고 합니다. [참선] 수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서두르면 즉 혈기(血囊)가 움직이게 되고 게으르면 즉 귀신의 소굴에 들어가게 되니49),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그 가운데에 오묘함이 있습니다.


19. 바른 수행법 - 마음의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 마귀도 내 마음 작용의 소산이다.  HPC 7.637b8~7.637b19.

수행이 걸으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으면서도 앉는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면 마땅히 이 때가 팔만 사천50)의 마귀의 군대(魔軍)가 인간의 모든 감각과 의식(六根)의 출처(門頭)51)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음[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따라서 [그들도] 생겨나 펼쳐지는 때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마귀의 군대와] 다투겠습니까?52)

마귀란 것은 생과 사[의 반복]을 즐기는 귀신의 이름입니다. 팔만 사천 마귀의 군대라는 것은 곧 중생의 [가진 바] 팔만 사천 가지의 번뇌입니다. 마귀는 본래 씨앗(種)이 없습니다53). 수행자가 [본래의] 마음을 잃으면 따라서 그 [마귀의] 근원54)을 물결치게 합니다. 중생이 그[렇게 일어난 마귀의 군대라는 애욕과 집착의] 대상세계를 따르기 때문에 [생사의 순환고리를] 따르고,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그[렇게 일어난 마귀의 군대라는 애욕과 집착의] 대상세계를 거스르기 때문에 [생사의 순환고리도]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도](道)가 높으면 마귀도 번성한다”라고 했습니다. 선 수행(禪定)할 때에 누구는 효자를 보고서 허벅다리를 찍었다고 하며55) 누구는 돼지를 보고서 코를 잡았다고 합니다.56) 또한 스스로의 마음에[서] 견해가 일어나 감응한 것이 [바로] 이 밖의 마귀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가지가지의 재주(伎倆)는 도리어 물을 가르고 빛에다 바람을 부는 것(割水吹光)[과 같이 쓸모 없는 것]이 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벽의 틈으로는 바람이 들고 마음의 틈으로는 마귀가 침입한다 했습니다.


20. 조사가 전한 선의 가르침에는 분별심이 없다.  HPC 7.637b20~7.637b24.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하늘의 마귀(天魔)57)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어둠의 마귀(陰魔)58)이며 때로는 일어나고 때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번뇌마귀(煩惱魔)59)입니다. 그러나 나의 바른 진리(正法) 가운데에는 본래 이와 같은 일(事)은 없습니다(無, 일어나지 않습니다).60)

대저 꾸민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忘機)61)이 부처의 길(佛道)이고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분별하는 것은 마귀의 상태(魔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상태[조차]도 꿈속의 일(夢事, 실체가 없는 것)이니 어찌 판단하고 꾸짖는 것을 힘쓰겠습니까.


21. 살아있는 동안 부처는 못될지언정 노력해봐라.  HPC 7.637c1~7.637c4.

수행하는 것(工夫)이 만약 쳐서 한 조각을 이루는 것(打成一片)62)이라면 곧 지금 생(今生)에서 비록 [진리를] 꿰뚫지는 못할지라도,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眼光落地之時, 죽을 때)에 악한 업(惡業)에 이끌리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업(業)이라는 것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無明)[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선(禪)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般若, prajn?)[를 낳는 것]입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필적하지 못하니 이치(理)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22. 참선 수행인의 일상 도리  HPC 7.637c5~7.638a16.

참선하는 사람은 대저 네 가지 은혜(四恩)63)가 깊고 두터운가64)를 또한 압니까? 세계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四大)65)[로 이루어진] 추한 육신이 생각생각마다 쇠하고 썩어가는 것(衰朽: 늙어가는 것)임을 또한 압니까? 인간의 목숨이 호흡에 달려있다는 것을 또한 압니까? 살아오면서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만났습니까? 그리고 최고의 가르침을 들어서 아주 기쁜 마음(希有心: 일어남이 드문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압니까? 절간을 떠나지 않고 수절(守節)66)했습니까? 주위 사람들(?單)67)에게 잡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68) 절대적으로 선동(鼓扇)하거나 시비를 가리는 것(是非)을 피했습니까? 화두가 하루 종일(十二時中) 뚜렷하여(明明) 어둡지 않았습니까(不昧)?69) 사람을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화두 잡음이] 끊어진 적은 없습니까? [무언가를]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 [잡생각들을] 두드려서 한 조각[의 마음]으로 [집중되도록] 만들었습니까? 자기자신(自己)을 돌아봐 관조(觀)하여 부처와 조사를 패퇴시켰습니까?70) 지금 생에서 부처의 지혜(慧命)를 이어받고자 [굳게] 결단(決定)하였습니까? 일어서거나 앉거나 편안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돌이켜 생각합니까?71) 이 한 [진리의] 능력(報身)72)이 정녕 윤회를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사람을 흔들리게 하는] 온갖 대상과 환경(境)73)에 당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이 평상시에(日用中) 점검해야 할 도리입니다. 옛 사람이 “이 몸이 이 생에서 깨달음(度)을 내지(生) 못한다면 어느 생에서 다시금 이 몸에 깨달음을 낼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네 가지 은혜(四恩)’라는 것은 부모와 임금과 스승과 보시를 베푼 자(施主)의 은혜입니다. ‘세계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추한 육신(四大醜身)’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정액(精)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血) 한 방울[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이니 [이것은 육신의] 물의 요소(水大)의 ‘습함(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액이 뼈(骨)가 되고 피가 가죽(皮)이 되었다는 것은 땅의 요소(地大)의 ‘견고함(堅)’[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액과 피가 [만나 뭉친] 한 덩어리가 썩지도 않고 허물어지지도 않[고 태아로 자라난다]는 것은 불의 요소(火大)의 ‘따뜻함(暖)’[을 말하는 것]74)입니다. 콧구멍이 먼저 생겨서 들고 나는 숨이 통하게 하는 것은 바람의 요소(風大)의 ‘움직임(動)’[을 말하는 것]75)입니다. 아난(阿難)76)은 “[육신은] 거칠고 탁한 정욕의 기운이 비리고 노린내 나는 [더러운 것]과 서로 [만나] 도랑을 이룬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더러운 육신’[이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생각 생각마다 쇠하고 썩어간다’는 것은 머리 위[로 흘러가는] 세월(光陰)이 한 순간(刹那)이라도 머물지 않고 얼굴은 스스로 주름살[이 늘어가고] 머리털도 스스로 희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옛날과 같지 않으니 후에는 당연히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 무상(無常)한 육신입니다. 그러나 무상한 귀신(無常之鬼)[인 육신]은 [그 육신을] 죽이는 것으로써 놀이(戱)를 삼으니 생각 생각마다(念念, 늘) 두려운 것입니다. ‘내쉰다(呼)’는 것은 숨을 내보내는 불[의 요소]이고 ‘들이쉰다(吸)’는 것은 숨을 들여보내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인간 수명은 단지 숨이 들고 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여덟 바람(八風)’이라는 것은 [인간이 처하는] 좋은 [환경과] 좋지 않은 [환경] 두 가지의 환경(境)입니다.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의 육십 겁77)[의 무한히 긴 시간]이 지옥(泥犁)78)의 하루 낮과 밤이니, [지옥에서 받는] 끓는 큰 솥(?湯)과 숯불 화로(爐炭)[의 고통과] 칼로 된 숲과 칼[로 가득 찬] 산에서의 고통을 입으로는 표현(形言)할 수 없습니다. [다음 생에 날 때] 사람의 몸을 얻기가 어려운 것79)이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 [보다 어렵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愍, 안타까이) 여겨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평하여 말하자면, 위에 나온 가르침의 말들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차가움과 따뜻함을 스스로(自, 자연스럽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총명함으로는 업을 다 상대할(敵) 수 없고 마른 지혜로도 고통스런 윤회를 피할 수 없습니다. 각자 반드시 생각을 살펴서 스스로 [총명과 지혜로 고통을 벗을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23. 언행일치 - 말 공부만 하지 말라.  HPC 7.638a17~7.638a20.

말(語, 교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달은 것 같으나 대상과 환경(境)을 대하게 되면 다시금 미혹되니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의 ‘스스로 자만하다(自?)’80)는 [것의] 뜻을 맺은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니 거짓됨(虛)과 참됨(實)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24. 분별심을 깨뜨리라.  HPC 7.638a21~7.638b1.

만약 나고 죽음[의 문제]와 맞대결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한 생각(一念, 분별심)이라는 놈을 탁 소리나도록 단번에 깨뜨려야만 바야흐로 나고 죽음[의 뜻]을 깨달아 얻게 됩니다.

‘탁(爆)’은 칠통(漆桶)81)을 깨부수는(打破) 소리이고 칠통을 깨부순 후에야 나고 죽는 [문제를] 대적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부처가 수행 단계(因地)에서 가르침에 [따라] 행한 것은 단지 이것일 뿐입니다.


25. 선맥禪脈의 전통을 잇는 깨달음의 확증이 필요하다.  HPC 7.638b2~7.638b6.

그러나 ‘한 생각이란 놈(一念子, 분별심)’을 탁 소리나도록 단 번에 깨트린 후에는 반드시 [진리에] 밝은 선사(師)를 찾아가서 올바른 [지혜에 대한] 눈(正眼)을 가진 것인지 결정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은 매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공부할 때는 자신의 경지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愧)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道)는 큰 바다와 같아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가기까지는] 점차 들어가게 되며 점차로 깊어지니 삼가 적은 것(少, 적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깨달은 후에 만약 선사(人)를 만나 [깨달음을 확증받]지 못하면 버터 위에 생긴 맛좋은 액체보다 뛰어난 맛(醍?上味)82)[을 가진 것]도 도리어 독약(毒藥)이 되어버립니다(成).


26. 행위보다도, 무엇보다 깨달음이 먼저다.  HPC 7.638b7~7.638b12.

옛 위인(古德)은 “다만 그대(貴子)의 바른 눈(正眼,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요 그대(汝)의 행위와 [그] 결과(行履處)83)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네”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앙산(仰山 慧寂, 840-916) 선사가 위산(?山 靈祐, 771-853) 선사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열반경涅槃經』84) 사십 권은 모두 마귀의 설교일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앙산[이 가진]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正眼)입니다.85) 앙산이 또 행위와 [그] 결과(行履處)에 대해 질문하니 위산은 “단지 그대의 [진리에 대한] 눈(眼이, 견해) 바른 것만을 귀히 여길 뿐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먼저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열고 [그] 후에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만약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단박에 깨닫는 것을 수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27.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  HPC 7.638b13~7.638c5.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道者)은 자기 마음(自心)을 깊이 믿어서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말되 스스로 자만해져서도 안됩니다.

이 ‘마음’은 본래 평등하고 보통 사람(凡)과 성인(聖)[의 구분]이 본래 없습니다.86)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미혹됨(迷)과 깨달음(悟), 보통사람과 성인[의 구분]이 있게 됩니다.87) 선사(師)의 격려와 가르침(激發)으로 인하여88) [어느 순간] 홀연히 참된 내(眞我)가 부처와 더불어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단박(頓)[의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비굴해지지 말라’는 [것의] 이유이니89) “본래 한 물건(一物)은 없다”90)라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으로 인하여 잘못된 습관(習)을 끊게 되고 보통 사람을 바꾸어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이 ‘점진적(漸)[인 수행]’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의] 이유이니 “때마다 부지런히 [잘못된 습관을] 떨쳐내야 한다”91)는 것과 같습니다. ‘비굴해진다(屈)’는 것은 교(敎)를 배우는 사람들의 병이고 ‘자만한다(高)’는 것은 선 수행을 하는 자들의 병입니다. 교를 배우는 사람은 선 수행의 방법(禪門)에 깨달음에 들어가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방편(權)인 교학에 깊이 정체되어(滯, 막혀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의 구분에] 특별히 집착하며 참선 수행을 닦지 않습니다. 남의 보배(他?寶)92)만 헤아리고(數) 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서고 비굴해지는 것을 내는 것입니다. 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교학을 통한 방법(敎門)에 [잘못된 생각을] 닦아서 끊어버리는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비록 더러운 습관이 일어날지라도 참회(?悔)[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므로 [선 수행의] 결과의 정도가 비록 초보라 할지라도 가르침에 대한 자만함(法慢, 잘 모름에도 자만함)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거만한 말을 하는(發言)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을 닦을(修心) 뜻을 얻는(得意, 결심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굴해지지도 말아야 하며 스스로 자만해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평하여 말하자면, ‘비굴해지지 말되 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라는 것은, 간략하게 들[어 말하자]면 [깨달음을 향한] 첫 마음이라는 원인(因)에 결과(果海)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 곧 수행의 제일 첫 단계(一位)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크게 들[어 말하]자면 보살이라는 수행의 결과(菩薩果)는 수행의 원인이 되는 근거들(因源)을 완전히 이루어야 [얻어진다는 것], 곧 수행의 가장 마지막 단계(五十五位)[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93)


28. 깨달음과 수행은 함께 가야 한다.  HPC 7.638c6~7.638c8.

미혹된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자] 수행하면 단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만 조장할 뿐입니다.

깨달음이 만약 투철하지 못하다면 수행하는 것이 어찌 참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과 닦음의 뜻(悟修之義)은 기름과 밝음이 서로 의뢰하고(膏明相賴)94)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目足相資)[과 같습니다].95)


29. 깨달음은 다가가기 어려운 특별한 것이 아니다.  HPC 7.638c9~7.638c10.

수행의 핵심은 단지 보통사람의 분별심과 감정들(凡情)을 사라지게 하는 것(盡)이지 성인의 지혜(聖解)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다하면 약도 제거해야 곧 본래의 사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30. 이분법적인 인식을 버리라.  HPC 7.638c11~7.638c13.

중생의 [평범한] 마음(衆生心)을 버리거나 사용할 것이 아니라 단지 본래의 성품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른 가르침(正法)’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 추구한다는 것 모두 더러움입니다.


31. 이분법적인 인식이 생겨나지 않게 하라.  HPC 7.638c14~7.638c15.

번뇌를 끊는 것을 이름하여 이승(二乘)96)[의 수행]이라 하고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진정한 열반(大涅槃)이라고 합니다.

‘끊는다(斷)’는 것은 주관(能)과 객관(所)이 [남아있는 것이]고 ‘생겨나지 않는다(不生)’는 것은 주관과 객관도 없는 것입니다.


32. 마음의 본 모습이 곧 깨달음이다.  HPC 7.638c16~7.638c17.

모름지기 [마음속에] 품고있는 [이분법적 생각]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보아(自照, 내적 성찰) [욕망과 생각, 그리고 행동의] 인과 관계(緣) 없이 생겨나는 한 생각(一念)97)[이 내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본연의 자유자재한] 성품이 [어떠한 욕망과 의도에 이끌림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일어나는 것(性起)을 밝힌 것입니다.


33. 인간의 모든 악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HPC 7.638c18~7.639a1.

죽임(殺)과 도둑질(盜)과 음란함(淫)과 거짓됨(妄이) 모두 한 마음(一心)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살펴보십시오. 이 곳(當處: 한 마음)이 곧 [비어] 고요한데(寂) 모름지기 무엇을 고쳐 끊을 것입니까!

이것은 본체(體)와 현상(相)의 둘(雙)을 밝힌 것입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근본적인 무지(無明)를 영원히 끊는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그 생각이 근본적인 무지로부터 말미암음을]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34. 만물의 헛됨을 깨닫는 단박의 깨달음  HPC 7.639a2~7.639a9.

[세상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아 곧 [그 환상을 일으키는 망념을] 떠나면 방편을 짓지 않습니다(더 이상 방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환상을 떠나면 곧 깨달으니 또한 점차로 [수행]할 것이(필요가) 없습니다.

마음(心)은 마술사(幻師)이고 몸(身)은 환상의 성(幻城)98)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幻衣)99)이고 이름(名)과 형상(相)은 환상의 음식(食)100)이니,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과 거짓이라 말하고 참이라 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환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시작이 없는 환상인 근본적인 무지(無明)는 모두 깨달은 마음(覺心)을 따라 생겨나니, 모든 환상(幻幻)은 허공의 꽃(空花)101)과 같으므로 환상이 사라진 것을 이름하여 부동[의 경지](不動)102)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꿈에 부스럼이 난 자가 의사를 찾는(夢瘡求醫) 것이 잠이 깨고 나니(寤來) 방편(方便: 의사)이 [필요]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임]을 안다는 것은 또한 이와 같습니다.


35. 구분 짓지 말라. 생사와 열반도...  HPC 7.639a10~7.639a17.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에서 나고 죽음과 열반을 망령되게 보는 것은 허공의 꽃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성은 본래 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것과 [죽는 것, 그리고] 열반[의 구분]이 없습니다. 공(空)에는 본래 꽃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起)과 사라짐(滅)[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는 것과 죽는 것을 보는 것(見, 분별적인 견해를 갖고 보는 것)은 허공의 꽃이 생겨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을 보는 것(見)은 허공의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어남은 본래 일어남이 없고 사라짐은 본래 사라짐이 없습니다. 이 두 견해를 끝까지 캐어묻는 것(窮詰)은 쓸모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익경思益經』103)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가 세상에 나온 것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度)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고 죽음과 열반의 두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중생이] 깨닫게 하기 위한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6. 구분 짓지 말라. 중생과 보살도...  HPC 7.639a18~7.639a22.

보살(菩薩)은 중생을 깨닫게 하여 열반(滅度)에 들어가게 하지만 사실은 깨달음을 얻어야할 중생도 없는 것입니다.

보살은 단지 [그의] 모든 생각(念念)으로써 중생을 위합니다. 생각의 본체가 공(空)임을 깨닫는 것이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미 공적(空寂)하다는 것은 사실 깨달음을 얻어야 할 중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위는 믿음(信)과 깨달음(解)을 논한 것입니다.


37. 깨달음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실천적 수행  HPC 7.639a23~7.639b1.

[존재의 참된 실상에 대한] 이치는 단박에 깨달아질(解) 수 있을지라도 잘못된 행위(事)는 단박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문수(文殊) 보살104)은 하늘의 진리(天眞: 존재의 실상)에 이르렀고 보현(普賢) 보살105)은 [만물이] 서로 잇대어 일어나는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깨달음은 번개 빛과 유사하며 수행은 곤궁한 아이(窮子, 갓난 어린애)106)와 같습니다. 이 아래는 수행(修)과 깨달음의 완성(證)을 논했습니다.


38. 계율을 지키며 선 수행하라.  HPC 7.639b2~7.639b20.

음란함을 띠고서(帶: 갖고서) 선을 수행하는 것은 모래를 찌어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죽임을 갖고서(帶) 선을 수행하는 것은 막힌 귀에 소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탐냄(偸)을 갖고서 선 수행하는 것은 새는 잔이 가득 차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거짓됨을 갖고 선 수행하는 것은 분뇨를 깎아서 향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설사 많은 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모두 악마의 길(魔道)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수행의 법칙인 세 가지 새는 것 없는 배움(三無漏學)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소승(小乘)[의 사람들/가르침]은 [부처의] 가르침(法)을 받아서 계율로 삼으니 그 끝을 대강 다스립니다. 대승(大乘)[의 사람들/가르침]은 마음(心)을 잡아 계율로 삼으니 그 근본을 세밀하게 끊습니다. 그러한 즉 가르침의 계율(法戒)에는 몸으로 범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계율에는 생각으로 범하는 것이 없습니다. 음란한 것은 말고 깨끗함을 끊습니다. 죽이는 것은 자비로움을 끊습니다. 도둑질하는 것은 복과 그 덕(福德: 일체의 선행과 그 선행에 의해 얻는 행복과 이익)을 끊습니다. 거짓된 것은 참된 열매를 끊습니다. 지혜를 능히 이루어 가령 여섯 가지 신통력(六神通)을 얻는다 할지라도 만약 죽이는 것과 도둑질과 음란함과 거짓됨을 끊지 못한다면 곧 반드시 악마의 길로 떨어져서 영원히 깨달음의 바른 길을 잃어버립니다. 이 네 가지 계율은 모든 계율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를] 별도로 명확히 하는 것은 생각으로[라도] 범하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억함(憶, 마음에 계속 품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을 일러 계율(戒)이라고 하며 생각(念)이 없는 것을 일러 선정(定)이라고 하고 거짓되지 않는 것을 일러 지혜(慧)라고 합니다. 또 계율은 도적을 잡는 것이며 선정은 [그] 도적을 포박하는 것이며 지혜는 [그] 도적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 계율의 그릇이 온전하고(完) 견고(固)해야 [그 곳에 고인] 선정의 물이 맑고 깨끗하게 되어 지혜의 달(慧月)[의 바른 모습]이 바야흐로 드러납니다. 이 세 가지 배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명확히 하여 모든 새어남(漏: 완전한 지혜로부터 부족한 것, 또는 번뇌)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영산(靈山)의 모임에 어찌 [수]행(行)하지 않는 부처가 있겠으며 소림(小林)의 문중에 어찌 거짓된 말[을 하는] 조사가 있겠습니까.


39.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은 모든 허물의 근원  HPC 7.639b21~7.639c2.

덕이 없는 사람(無德之人)107)은 부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몸과 말과 마음이 짓는 선한] 세 가지의 업(三業)108)을 지키려 하지 않으며 제 멋대로 방자하게 행하고 게으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많고 적음을 비교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마음의 계율을 한 번 깨트리면 모든 허물이 함께 생겨납니다.

평하여 말하자면, 이와 같은 악마의 무리가 말법(末法) 시대109)에 세력이 강대하고 왕성하니(熾盛) 배우는 자는 번뇌와 참된 진리(正法)를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110)


40.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다.  HPC 7.639c3~7.639c6.

만약 계율을 지니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음 생에]111) 비루병 걸린 여우의 몸[조차]도 얻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맑고 고요한 깨달음이란 열매(淸淨菩提果)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계율을 부처와 같이 중히 여기면 부처가 늘 [그 수행자의 곁에 함께] 있습니다. 모름지기 풀을 매는 것112)과 구슬 [먹은] 거위[의 이야기]113)로 길잡이를 삼아야 합니다.


41. 욕망을 끊어라.  HPC 7.639c7~7.639c11.

생과 사[의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貪欲)과 모든 애욕의 목마름(愛渴)을 끊어야 합니다.

애욕(愛)은 [생사의 세계에서의]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고, 탐욕(欲)은 [또 다시] 생명(生)을 받는 조건(緣)이 됩니다. 부처는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사번뇌(塵)114)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가족 사이의 애정(恩愛)[일지라도 그것]에 한번 묶여버리면 사람을 끌어 죄를 범하는 근원(罪門)에 들어가게 하고 [애욕의] 목마름(渴)이란 것은 정욕과 애욕(情愛)이 간절한 [상태]이다”라고 했습니다.


42. 선정 수행의 중요성  HPC 7.639c12~7.639c14.

막힘 없으며 맑고 깨끗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 [수행]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범부[의 경지]를 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서 앉아서 [육신을] 벗고 서서 [육신을] 잃어버리는 것(坐脫立亡)115)[이 가능한 것]은 모두 선정의 힘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聖道)를 구하고자 하려면, 이것(선정의 수행)을 떠나서는 길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43. 존재의 실상을 알게 하는 지혜인 선정  HPC 7.639c15~7.639c17.

마음이 선정 [수행 중]에 있으면 곧 세상의 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相)을 알 수 있습니다.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허공[을 비추이면] 가는 티끌의 어지러운 움직임[이 드러나고] 맑은 연못 물[에 비치는 사물]의 영상이 밝게 빛납니다.


44. 깨달음의 확증인 참된 지혜  HPC 7.639c18~7.640a2.

대상세계(境)를 보고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생겨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생겨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다(無念)’고 이름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이름합니다.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는 [각각이] 하나를 들어서 셋을 [함께] 갖추니 [이것들은 모두 깨달음에 있어서] 홀로 떨어진 별개의 모습[을 갖는 것](單相)116)이 아닙니다.


45. 존재에 대한 바른 앎, 그것이 열반이다.  HPC 7.640a3~7.640a6.

도를 닦아서 [모든 잘못된 생각을] 깨달음(滅) 확증한다(證)는 것도 또한 참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체(心法)의 본래 공적(寂)함이 곧 참된 깨달음(眞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法)은 본래 항상 스스로 열반의 모습(寂滅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으니 [스스로의] 눈을 본다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 보살(妙首)117)은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유마 거사(淨名)118)가 침묵으로 막아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래에서는 세부적인 수행(行)을 갖가지로 들어 보이려고 합니다.


46. 계율의 첫째 덕목 - 베품  HPC 7.640a7~7.640a10.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면 처지(分)에 따라서 베풀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과] 몸을 같이 하는 큰 자비(同體大悲)119)가 곧 참된 베품(布施)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몸을 같이 한다(同體)’고 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삶(吾家)의 살아가는 방식(活計)인 것입니다.


47. 계율의 둘째 덕목 - 참음  HPC 7.640a11~7.640a14.

어떤 사람이 와서 해롭게 하거든 마땅히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攝心) 성냄(嗔)이나 원한(恨)이 생겨나지 않게 하십시오. 한 생각 성내는 마음(一念嗔心)이 일어나게 되면 모든 [깨달음을 막는] 장애[들이 튀어나오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번뇌(煩惱)가 비록 무한히 많다지만 성내고 거만한 [마음을 품는] 것이 [그보다 더] 깊은 것(甚, 제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은 “남이 나에게 잘하든(塗) 못하든(割)120) 양자의 경우 [모두]에도 [어떠한] 마음도 내지 말라. 성냄은 흰 구름(冷雲)121) 속에서 벼락(霹靂)이 쳐서(起) 불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48. 참음의 중요성  HPC 7.640a15~7.640a17.

만약 참음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수행(萬行)122)을 이루지 못합니다.123)

수행의 방법(行門)이 비록 셀 수 없이 많지만 자비와 참음이 근본이 됩니다. [그렇지만] 참는 마음(忍心)도 헛된 꿈이고 치욕[을 주는] 대상(辱境)도 거북이의 털(龜毛)124)과 같습니다.


49. 수행에 정진하라.  HPC 7.640a18~7.640a21.

본래의 참된 마음을 [깨끗이] 지키는 것이 제일가는 정진(精進)입니다.

만약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도] 곧 잘못된 생각이고 [참된] 정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은 항상 과거[만]을 추억합니다. 이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50. 묵은 업을 제거하기 위해 진언을 외우라.  HPC 7.640a22~7.640b1.

진언(呪)125)을 지니는 것(持, 외우는 것)은, 현재의 업은 쉽게 제어할 수 있어서 스스로의 수행(行)으로 고칠 수 있지만 묵은 업(宿業, 지난 생의 업)은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신령한 힘(神力)126)을 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신분(摩登)127)[의 어떤 사람이 진언의 도움을 얻어 깨달음의]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128) 그러므로 신령한 진언을 지니지 않고서 마귀의 일을 멀리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51. 참된 예배 - 나의 참된 본성에 예배하는 것  HPC 7.640b2~7.640b4.

예배라는 것은 공경(敬)하는 것이고 굴복(伏)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참된 본성(眞性)을 공경하고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無明)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행동(身)과 말(口)과 뜻(意)이 깨끗하면 곧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52. 진정한 마음으로 하는 염불이 참된 염불  HPC 7.640b5~7.641a19.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입에 있으면(在口, 입으로만 하면) 외우는 것(誦)이고 마음에 있[을때](在心, 마음으로 하면) ‘마음에 두는(念)’ 것입니다. 헛되이 외우기만 해서 ‘마음에 두는 것(念)’을 잃으면 깨달음(道)에 유익이 없습니다.

아미타 부처(阿彌陀佛)의 여섯 자로 된 진리에의 방법(六字法門)129)은 반드시(定)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捷徑)입니다. 마음은 곧 부처의 경지를 따라서 마음에 품고 지니고 잊지 말[아야 하]고, 입은 곧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분명하고 혼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을 이름하여 ‘염불’이라고 합니다.

평하여 말하자면, [선의] 다섯 번째 조사(五祖)130)는 “자기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모든 세계의 모든 부처를 마음에 두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선의] 여섯 번째 조사(六祖)131)는 “언제나 남의 부처를 마음에 두면 나고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지키면 곧 깨달음의 세계(彼岸)에 이르른다”고 했습니다. 또 “부처는 본성 가운데를 향하여서 이룰 것이지 몸 밖[의 다른 무엇]을 향하여 구할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또 “[나고 죽음에] 미혹된 사람은 염불을 하여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生)을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했습니다. 또 “대저 중생은 마음을 깨달아서 스스로를 구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구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위와 같이 덕이 높은 모든 사람들(諸德, 고승高僧)은 [중생의] 본래 마음을 직접 가리켰습니다. 별도의 방편은 없습니다. 바야흐로 하나의 가르침으로써 곧 모든 근본을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치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방편설(迹門)에는 참으로 극락세계와 아미타 부처의 마흔 여덟 가지 큰 서원132) [세운 것]이 있습니다. 무릇 열 번 염불하는 사람은 이 서원의 힘을 이어서 죽어서는 연꽃의 태(蓮胎)133)에 나고 윤회의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다른 입에서 같은 소리를 낸 것이고(異口同音, 같은 말을 하였고) 모든 세계의 보살들도 [그 곳에] 나기를 같이 원한 것입니다. 더구나 과거와 현재에 [그 곳에] 왕생(往生)한 삶들의 전기가 분명하니(昭昭), 원컨데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삼가 [정토(淨土)가 없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고 염불에 힘쓰고 힘쓰십시오.

산스크리트어(梵語)의 아미타(阿彌陀, Amit?). 이것은 ‘무한한 목숨(無量壽, Amit?yus)’이라고 하며 또 ‘무한한 빛(無量光, Amit?bha)이라고도 합니다. 어디서나(十方) 언제나(三世) 첫째가는 부처의 이름입니다. 수행할 때의 이름(因名)이 법장(法藏)이었던 남자 승려(比丘)가 세자재왕 부처(世自在王佛)134)에 대하여 마흔 여덟 가지 서원을 내고서는 “내가 부처가 될 때에 셀 수 없이 [많은] 모든 세계의 모든 하늘의 존재와 사람들에서 제비 같은 나는 것과 움직이는 곤충들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나의 이름을 열 번 마음에 두는 자는 반드시 내 집에(刹中, 정토淨土를 말한다) 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옛 성인은 “[수행자가] 부처를 한 번 부르면 하늘의 마귀가 쓸개를 잃고(喪膽, 매우 놀라고) [그] 이름이 귀신의 명부에서 지워지며 [수행자의] 연꽃이 금 연못에서 나오게 된다135)”고 했습니다. 또 『참법懺法』136)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自力)137)과 타인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他力) [중에서] 하나는 더디고 하나는 빠르니 [윤회의] 바다를 넘고자 하는 사람이 나무 씨를 뿌리고서 [자라기를 기다려] 배를 만들려면 더딜 것이고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만들어진] 배를 빌려서 바다를 넘으려 하면 것은 빠를 것이니 이는 부처의 힘을 비유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 “세상에서 물이나 불이 어린아이에게 닥쳐와서138) [그 아이가]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으면 바로(則) 부모가 그것을 듣고서 급히 달려와 구원하는 것처럼, 사람이 목숨이 다하는 때가 이르렀을 때에 높은 소리로 부처를 마음에 두면 바로(則) 부처는, 신통[력](神通)을 갖추었기에, 반드시 와서 [그를] 맞이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큰 성인의 자비는 부모보다 나으니 [이는] 중생이 나고 죽는 것이 물이나 불보다 심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정토(淨土)이기 때문에 정토가 [마음 밖의 다른 곳에] 생겨날 수가 없으며 자신의 본성이 아미타부처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보여질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옳은 듯 하지만 틀린 것입니다. 저 부처(彼佛, 아미타부처)는 탐냄도 없고 성냄도 없습니다. 나 또한 탐냄과 성냄이 없습니다. 저 부처는 지옥을 바꾸어 연꽃의 세계(蓮花, 깨달음이 넘치는 정토)를 만드는 것을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합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則) [쌓여 있는] 업(業)의 힘 때문에(以) 늘 [나]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 세계를] 바꾸어 연꽃의 세계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 부처는 무한히 많은 세계를 모두(盡)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응시(觀)하고 있으나 나는 곧 벽으로 막혀 있는 일(隔壁事, 벽 뒤편의 일)[조차]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모든 세계를 보기를 눈앞의 것[을 보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사람 사람마다 [그] 본성은 비록 부처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곧 [미혹된] 중생의 것입니다. [본성(體)에 있어서는 같으나]139) 그(其, 부처와 인간)의 드러남(相)과 쓰임(用)은 하늘과 땅[처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天地懸隔). 규봉(圭峰 宗密, 780-842)140) 선사는 “설사 진정으로 단박의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設實頓悟) 결국에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終須漸修)”고 했습니다. 진실이구나! 이 말이여! 그런 즉 자신의 본성이 아미타 부처라는 사람에게 말을 부치니(寄語, 물어보겠으니) 어찌 하늘이 낸(天生) 석가(釋迦)와 스스로 그러한(自然, 타고난) 아미타 부처가 있겠습니까?141)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 보면(忖量, 생각해보면) 사람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습니까.142) 목숨이 끝나는 때가 임하여서 나고 죽는 고통을 겪을 때에 걸림 없는 자유함(自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한 때의 공덕(一時貢,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의 높음으로 인해서(以) 오히려 [지옥에] 영원히 깊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 마명(馬鳴, A?vaghosa, 1~2C., C. E.)143)과 용수(龍樹, N?g?rjuna, 추정 150~250 C. E.)144)가 모두 조사(祖師)[이지만] 교학(言敎)[을 배울 것]을 명백히 교훈하였고 [염불하여] 왕생할 것을 깊이 권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도] 왕생을 원하지 않으니...145) 또 부처 자신도 “서방 [정토]는 가기에 여기에서 멀다. 수많은 악함과 수많은 사악함[을 지나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둔한 근기(鈍根)[의 사람들]을 위해 [인간 현실의] 현상(相)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서방 [정토]는 가기에 여기에서 멀지 않다. 즉 중생인 마음이 아미타인 부처[인 것]이다(卽心衆生是佛彌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리한 근기(利根)[의 사람들]을 위해 [인간의] 본성(性)을 설명한 것입니다. 가르침에는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한] 방편(權)과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한] 진실(實)이 있으며 말(語)에는 [자세히 밝히기 위해] 드러내는 [가르침](顯)146)과 [자세히 밝혀 드러내지 않는] 비밀한 [가르침](密)147)이 있습니다. 만약 깨달아 아는 것(解, 바른 알음알이)과 행하는 것(行)이 상응하는 사람이라면 먼 것(遠, 인간 현실의 현상相과 정토淨土)과 가까운 것(近, 인간 본성性과 즉심시불卽心是佛)이 모두 갖추어져 [서로] 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사의 가르침(祖師門)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도] 역시 한 편으로는(或) 혜원(慧遠, 334-416)148)[과 같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한 편으로는(或) 서암(瑞巖, ?-?)149)처럼 ‘주인인 공(主人空)을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150)


53. 실천의 중요성 - 공부하라.  HPC 7.641a20~7.641a24.

경전을 들으면 [그 소리가] 귀를 지나는 인연과 기쁨이 따르는 복이 있게 됩니다. 헛된 육신에는 다함이 있으나 참된 행동(實行)은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슬기로운 배움은 다이아몬드(金剛)를 먹는 것과 같아서151) 갖가지 보물을 베푸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영명(永明 延壽, 904-975)152) 선사는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 들음은] 부처의 씨앗[으로 심어지는, 깨달음의] 원인으로 결과지어(結, 맺어)질 것이고 배워서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배움의 공덕은] 오히려 인간 세계나 하늘의 복을 덮어버립니다(盖, 더 큽니다).


54. 글공부보다 중요한 마음 공부  HPC 7.641b1~7.641b5.

경전을 보면서 만약 자기 자신을 향하여서 의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비록 모든 경전을 다 본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유익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리석게 수행 공부하는 것이 봄에 새가 낮에 울고 가을에는 벌레가 밤에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종밀 선사는 “글자를 알고 경전을 보는 것[만]으로는(識字看經) 원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글을 새기고 뜻을 푸는 것(銷文釋義)도 오로지 탐냄과 성냄과 사악한 견해(見)를 불타오르게 할뿐이다”라고 했습니다.


55. 자만하지 말라.  HPC 7.641b6~7.641b9.

수행하는 것(學)이 깨달음(道)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견해와 들은 바를 자랑하고, 쓸데없이 입과 혀의 말을 날카로이 함으로써 [수행자 사이에서] 서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측간(厠屋)에 단청을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가르침과 수행을 찾아보기 힘든] 혼란한 세상(末世)의 [수행자들이] 어리석게 수행 공부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수행 공부는 본래 [자기의] 본성을 닦는 것인데 모두들 [자기의 깨달음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익히고 있으니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 그리하는 것]이겠습니까?


56. 수행에 전념하는 자는 다른 가르침에 기울면 안 된다.  HPC 7.641b10~7.641b12.

[수행에 전념하고자] 출가(出家)한 사람이 [불교의 가르침] 밖의 가르침(外典)153)을 익히는 것154)은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은 아무 곳에도 쓸모 없는 것이고 칼만 상할 뿐입니다.

문 밖의 부잣집 아들이 도로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는구나!155)


57. 승려가 되는 이유  HPC 7.641b13~7.641b17.

출가해서(出家, 세속을 떠나서) 승려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편안하고 한가한 것(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익과 명예를 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고 죽음[의 문제]를 위한 것이며156) 번뇌를 끊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의 지혜의 생명(慧命)을 잇기 위함이고 중생들을 구제해서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다.

기세가 하늘을 찌름이 대장부라 할만 합니다.


58. 수행하는 자가 되었으면 전력을 다하라.  HPC 7.641b18~7.641b23.

부처는 “덧없는(無常) [중생의 욕망의] 불이 온 세상을 태운다”고 했으며 또 “중생의 고통의 불길이 사면(四面)에 모두 타오른다”고 했습니다. 또 “모든 번뇌라는 도둑이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마땅히 자기를 경책하고 깨우치기를 머리 위에 불붙은 것을 구하듯이 [수행해야 합니다].

육신(身)에는 나는 것과 늙는 것과 병과 죽음이 있고 세계(界)에는 이루어지는 것(成)과 지속되는 것(住)과 파괴되는 것(壞)과 없어져버리는 것(空)이 있으며 마음(心)에는 생겨나는 것(生)과 지속되는 것(住)과 달라지는 것(異)과 사라지는 것(滅)이 있습니다. 이것이 ‘덧없는 고통의 불길이 사면에 모두 타오른다’는 것입니다. 삼가 고하오니 현묘[한 진리](玄)를 구하는(?) 사람은 세월(光陰)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59.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  HPC 7.641b24~7.641c7.

세상의 떠다니는 명예(浮名)를 탐내는 것은 쓸데없이(枉功)157) 육신(形)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애써서 구하는 것은 업의 불구덩이(業火)에 땔나무(薪)를 더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떠다니는 명예를 탐낸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큰 기러기가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머문 흔적[만] 모래에 [남았구나]. 사람은 저승에 가고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158)라고 시를 지어 말했습니다. ‘세상의 이익을 애써 구한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온갖 꽃에서 채취해 얻어 꿀을 만든 후에 누구의 [혀의] 단 것을 위한 신고[의 고생]인지 알지 못하는 구나”159)라고 시를 지어 말했습니다. ‘쓸데없이 육신을 괴롭힌다’는 것은 얼음을 뚫어서 조각하는 쓸데없는 재주[와 마찬가지]입니다. ‘업의 불구덩이에 땔나무를 더한다’라는 것은 거칠고 닳아버린 색과 향[을 가진 것]들이 불의 도구(火之具, 땔감)가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60. 명예와 이익에 물들지 말라.  HPC 7.641c8~7.641c15.

명예와 이익을 쫓는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衲子, 승려)은 풀로 지은 옷을 입은 야만인만도 못합니다.

금으로 된 [수레] 바퀴에 침을 뱉고 눈 덮인 산에 들어간 것160)은 모든 세상의 존귀한 자(世尊, 깨달은 자, 부처)[가 되기 위해서]의 바꾸지 못할 철칙입니다. [진정한 가르침과 수행자를 찾기 힘든] 혼돈한 시기(末世)에 양의 바탕을 하고 호랑이 가죽을 쓴 무리들161)은 염치도 알지 못하고 [세상] 풍조를 바라고(望風) 세력을 따르며(隨勢) 아첨하기를 몰래하고(陰媚) 총애받는 것을 좋아하니(取寵) 아! [슬프다.] 그것을 징계해야 할 것인저!

마음이 세상의 이익에 물든 사람은 권력(權門)에 아부(阿附)하고 세속의 일(風塵)에 바삐 움직이다가(趨走)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얻을 뿐입니다. 이런 승려(衲子)를 ‘양의 바탕’으로 삼은 것(此衲子以羊質, 이런 승려를 양의 바탕[을 갖고 있다고] 비유한 것)은 이를 증명할만한 행위가 많이 [있기 때문에] 162)‘징계할 것인저(懲也夫)’라는 세 글자로 그것(之, 증명할만한 많은 행위)을 맺은 것입니다. 이 세 글자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것입니다.163)


61. 부처의 옷을 입은 도둑  HPC 7.641c16~7.642a8.

부처는 “어떤 도둑이 내 의복을 빌려 여래(如來)를 소소하게 팔아(裨販) 갖가지 [악한] 업을 짓는가?”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가르침도 수행자도 없는] 혼란한 시대(末法, 말세)에 승려164)에게 흔한(多般) 이름이 [있으니] 혹은 ‘박쥐 승려(鳥鼠僧)’라고 혹은 ‘벙어리 염소 승려(啞羊僧)’라고 혹은 ‘대머리 거사(禿居士)’165)라고 혹은 ‘지옥의 찌꺼기(地獄滓)’라고 혹은 ‘가사 입은 도적(被袈裟賊)’이라고도 합니다. 아! [슬프다.] 그[렇게 불리는] 까닭은 이로써 입니다(以此, 아래와 같습니다).

‘여래(如來)를 소소하게 판다(裨販)’는 것은 인과(因果)[의 가르침]에 반발하고(撥, 믿지 않고) [그 결과인] 죄와 복을 배척하며 육신과 입으로 물 끓듯이 해서(沸騰身口, 몸과 입을 제멋대로 해서) 애욕(愛)과 증오(憎)를 번갈아(迭, 끊임없이) 일으키는 것이니 가엽다고 할 만합니다. 승려도 피하고(避, 싫어해서 멀리하고, 아니고) 세속[의 사람]도 피하는 [자를] ‘박쥐’라고 합니다. 혀[가 있으나] 가르침을 펴지 못하는 [자를] ‘벙어리 양’이라고 합니다. 승려의 모습(形)[이나] 속세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를] ‘대머리 거사’라고 합니다. 죄가 무거운[데도] 고치지 않는 [자를] ‘지옥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부처를 팔아 생계(生)를 유지하는 [자를] ‘가사 입은 도적’이라고 합니다. ‘가사 입은 도적’[이라는 것]으로써 이를 증명하는 이름이 많이 [있기 때문에] 166)이 두 글자로서 맺은 것입니다. 이 두 글자는 『노자(老子)』에서 나온 글입니다.167)


62.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HPC 7.642a9~7.642a12.

아! 부처의 길을 가는 사람(佛子)의 옷 한 벌과 밥 한 끼가 농부의 피와 베 짜는 여자의 고통이 아닌 것이 없으니, 도의 눈(道眼)이 밝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전등록傳燈錄』168)에 ‘한 도인(道人)이 도의 눈이 밝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서] 나무 버섯의 몸이 됨으로써 신자의 보시(信施)를 갚았다’169)[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63.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수행도 하지 않으면서...  HPC 7.642a13~7.642a19.

그러므로 “요컨대 털을 덮어쓰고170) 뿔을 이는 것을 알겠는가? [그것은] 곧 지금 신자의 보시를 헛되이 받는 것[의 결과]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대저 배고프지 않은데도 먹고 춥지 않은데도 옷 입는 자가 있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모두 눈앞의 즐거움이 곧 죽은 후의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론智論』171)에 ‘한 도인이 다섯 낱알 곡식 [을 헛되이 버렸기] 때문에 소의 몸을 받아서 살아서는 [그] 힘으로써 [헛되이 버린 죄과를] 갚고, 죽어서는 가죽과 고기로써 갚았다’172)[라고 했습니다]. 신자의 보시173)를 헛되이 받는 보응(報應)의 여파(響)와 같습니다.


64.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전심으로 수행하라.  HPC 7.642a20~7.642b1.

그래서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감을지언정 신자(信心人)[가 보시하는] 옷을 받지 말고, 차라리 바닷물 [같이 많은] [청]동 [녹인 물]을 입에 부을지언정 신자[가 보시하는] 밥을 먹지 말며, 차라리 [끓는 커다란] 쇠 솥에 몸을 던질지언정 신자[가 보시하는] 방이나 집 따위를 받지 말라”174)라고 했습니다.

『범망경梵網經』175)에 “계율을 깨트린 몸으로써 신자의 갖가지 공양(供養)과 갖가지 보시물(施物)을 받지 말라. 보살이 만약 이 서원을 내지 않는다면 곧 경구죄(輕垢罪)176)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65. 보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전심으로 수행하라.  HPC 7.642b2~7.642b5.

그래서 “도인은 독에 나아가는 것처럼 음식에 나아가고 화살을 받는 것처럼 보시를 받아야 한다. 후한 재물과 달콤한 말은 도인이 두려워하는 바이다”라고 했습니다.

독에 나아가는 것처럼 음식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 도의 눈(道眼)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화살을 받는 것처럼 보시를 받는다는 것은 그 도의 열매(道果)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66. 헛된 명예를 구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  HPC 7.642b6~7.642b10.

그래서 “수도하는 사람은 한 덩어리의 칼 가는 돌 과 같아서 이 사람이 와서 [칼을] 갈고 저 사람이 와서 [칼을] 갈며 오면서 [칼을] 갈고 가면서 [칼을] 가니, 다른 사람의 칼은 예리해지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돌에 [칼을] 갈러 오지 않는다고 도리어 불만스러워하는 자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워할 만하구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도하는 사람이 평생 바라는 바는 단지 따스함과 배부름에 있[을 뿐입]니다.


67. 분발하여 수행하라.  HPC 7.642b11~7.642b17.

그러므로 옛 말이 또 있으니 이르기를 “삼도(三途)177)가 고통인 것이 아니고, 가사(袈裟) 아래에서 인간의 몸을 잃는 것178)이 고통의 시작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지금 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해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사 아래에서 인간의 몸을 잃게 되는 까닭입니다.

부처의 길을 가는 자여! 부처의 길을 가는 자여! 분해하고 분발하라! 이 장은 처음 하나의 ‘아!’[라는 감탄사]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에 하나의 옛 이야기에서 맺어졌으며, 중간에 허다한 실마리(紬繹)들이 있으니 그러므로 “글자 또한 한 층의 문법이다”라고 한 것이다.


68. 헛된 육신에 집착하지 말라 - 청결의 규례  HPC 7.642b18~7.643a15.

쯧쯧!179) 이 몸은 아홉 구멍에서 [더러운 것이] 항상 흐르고 수많은 악창(癰疽: 더러운 종기)을 한 조각 얇은 가죽[으로 싸 놓은 것입니다].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그득하고 피고름이 뭉쳐 있으니 냄새나고 더러워 천하게 여길만하며, 탐내거나 아까워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백 년을 기른다고 할지라도 한 숨에 은혜를 저버릴 것180)이겠습니까.

위의 모든 업(業)은 모두 이 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꾸짖는 소리를 내는 것은 깊이 경계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은 모든 애욕의 근본이니 [그것의] 허망함을 깨달으면 곧 모든 애욕이 자연히 제거됩니다. 그와 같이 [자기 몸에 대한 애욕에] 빠져버리면 곧 무수히 많은 허물과 근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특별히 그것-육신의 허망함-을 밝힘으로써 도를 닦는 눈을 열려는 것입니다.

평하자면,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四大)181)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한 편으로 [육신은] 네 가지 원수를 빌려 이루어진 것입니다.182) 네 가지 물질적 요소는 [그것들로 이루어진 육신을 길러주는] 은혜를 저버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네 [마리] 뱀을 기르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들과 더불어(爲他人也; 타인들을 대하여) 성내고 업신여깁니다. 타인 또한 [자신의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더불어(爲我也; 나를 대하여) 성내고 업신여깁니다. [이것은] 두 귀신이 한 시신을 갖고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시신이 몸이 되는 것은 한 편으로는 거품이 모인 것이라 말하고, 한 편으로는 꿈이 모인 것이라 말하며, 한 편으로는 괴로움이 모인 것이라 말하고, 한 편으로는 똥이 모인 것이라 말하니 [그 시신은] 걸어다니지 못하고 속히 썩어서 또한 매우 비루(鄙陋)한 것입니다. [육신의] 위의 일곱 구멍에서는 항상 눈물과 침이 흐르며 아래의 두 구멍에서는 항상 똥과 오줌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하루 종일(十二時中) 몸의 그릇(身器)184)을 깨끗이 함으로써 [함께 수행하는] 무리에 참예해야 합니다. 대저 행위가 거칠고 깨끗치 못한 자는 선한 신(善神)185)이 반드시 등 돌리고 가 버립니다. 『인과경因果經』186)에서는 “깨끗치 못한 손으로써 경전 책을 잡거나, 부처님 앞에 있으면서 눈물과 침을 흘리는 자는 반드시 뒷간 벌레[가 되는] 보응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문수경文殊經』187)에서는 “대소변 볼 때에는 모습을 목석같이 하고 신중하게 말하거나 소리내지 말라. 또 벽에 글이나 글자를 그리지 말라. 또 측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 가래를 뱉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또 “측간에 오르고서 씻어 깨끗하게 하지 않는 자는 선방의 자리에 앉을 수 없고 [부처님 모신] 보전(寶殿)에도 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계율(律)에서는 “뒷간에 처음 들어갈 때에는 먼저 반드시 손가락을 아래로 세 번 튀김으로써 더러운 곳에 있는 귀신을 경계하고 신주(神呪, 신통력 있는 주술)를 [뒤에 나오는 경우에] 각각 일곱 번씩 조용히 외워야(?誦) 한다. 처음 외우는 것은 뒷간에 들어갈 때의 주문(呪)으로 ‘옴 ?로다아 ?바’라고 한다. 다음 외우는 것은 씻어 깨끗하게 할 때의 주문으로 ‘옴 하나?리데 ?바하’라고 하며 [이것을 외우면서] 오른 손에 [물]병을 집고서 넷째 손가락을 이용하여 왼손을 닦는데 깨끗한 물을 조금씩 기울여서 착실하게 씻어 깨끗하게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손을 씻을 때의 주문으로 ‘옴 주가라야 ?바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더러움을 제거하는 주문으로 ‘옴 시리예바혜 ?바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외우는 것은 몸을 깨끗이 하는 주문으로 ‘옴 바?라 놔가닥 ?바하’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신통한 주문은 큰 위엄과 덕이 있어서 모든 악함과 귀신이 들으면 반드시 손을 맞잡는다.188) 만약 규칙에 맞게 [주문을] 외워 지키지 않는다면 비록 일곱 개나 되는 갠지스 강의 물을 [다] 사용하여 씻어서 다이아몬드와 같은 깨끗함(金剛際)에 이를지라도 또한 청정한 몸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씻어 깨끗이 함에는 반드시 차가운 물을 써야하고 손을 씻음에는 반드시 귀염나무 껍질(?角)189)을 사용해야 한다. 또 톱밥(木屑)이나 물에 갠 재(灰泥)도 또한 쓸 수 있다. 만약 물에 갠 재를 쓰지 않는다면 물을 만져 그 손등에서 물이 듣을 정도190)가 될지라도 때와 더러움은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런 자는] 예불하거나 경을 외울 때에 반드시 죄를 얻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뒷간에 오르고서 씻어 깨끗하게 하는 규칙(法)은 또한 도를 추구하는 사람(道人)이 날마다 때때로(日用) 실천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말을 간략히 인용하여 여기에 함께 덧붙이는 것입니다.


69. 죄를 참회할 줄 알라.  HPC 7.643a16~7.643a20.

죄가 있으면 바로 참회(懺悔)하고 [악한] 업을 냈으며 바로 부끄러워할(?愧) [줄 알아야]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이 있는 것입니다. 또 허물을 고쳐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죄도 [그] 마음을 따라서 없어지게 됩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그 이전(前)의 허물(愆)을 뉘우치고 그 이후(後)의 허물(過)을 뉘우치는 것(悔)191)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은 안으로 꾸짖고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밖으로도 [예불, 사과, 기도 등을]192) 내고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空寂)이기 [때문]에 죄의 업이 기댈 곳이 없는 것입니다.193)


70. 곧은 마음의 중요성  HPC 7.643a21~7.643a24.

수행하는 사람(道人)은 마땅히 단정한 마음(端心)을 가져서(應, 단정한 마음[의 드러남]에 응해서) 타고난 본성(質)과 바른 [마음](直)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며 표주박(瓢, 발우) 하나와 누더기(納, 가사) 한 [벌]로 여행(旅泊)하면서 [걱정에] 묶임(累)이 없어야 합니다.

부처는 “마음은 곧은 줄(直絃)과 같[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 “곧은 마음(直心)이 바로 수행하는 곳(道場)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육신을 탐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여행하면서 [걱정에] 묶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71. 객관과 주관 모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HPC 7.643b1~7.643b6.

보통 사람(凡夫)은 대상세계를 구하며(取境) [소승의] 수행하는 사람(道人)194)은 마음을 구합니다(取心). 마음과 대상세계 양자를 잊어야면 곧 참된 진리(眞法)인 것입니다.

‘대상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사슴이 허공의 꽃[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구한다’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세계[를 구하는 것]과 마음[을 구하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진리가 아니라] ‘병’을 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곧 하나입니다(一, 같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과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이라는 소승의] 두 수행(二乘)을 합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천지는 오히려 비어 진나라(秦, 221-207, B. C. E.)의 해와 달이 [없고]195) 산과 강에는 한나라(前漢, 202 B. C. E.-8 C. E. ; 後漢, 25-220)196)의 임금과 신하가 보이지 않는구나.197)


72. ‘나 자신’이라는 생각조차도 버려야 한다.  HPC 7.643b7~7.643b12.

성문(聲聞)198)의 수행자는 산 속에 편안하게 앉아 [수행에 전념할지라도] 마귀의 왕(魔王)199)에게 붙잡히게 되[지만] 보살200)은 세상에서 노닐지라도 외부의 마귀들이 [그를] 보지 못합니다.

성문의 수행자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곧 귀신201)이 [그를] 보게 됩니다. 보살은 [그] 본성이 스스로 비어 고요하기 때문에 [어떠한] 자취가 없습니다(無迹, 메임이 없습니다). 메임이 없으면 곧 외부의 마귀(外魔, 유혹이 되는 대상)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不見, 끌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이승[의 수행]과 보살[의 수행]을 합하여 이야기한 것입니다. ◆ 삼월에 꽃길에서 한가롭게 노니는데 한 집이 우중충하게 빗속에 문을 닫고 있네.202)


73.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 - 죽는 순간에도...  HPC 7.643b13~7.643b22.

무릇 사람은203) 목숨이 끊어질 때에 다다라서는 다만 인간존재의 모든 것(五蘊)이 모두 헛된 것이고 [세계의] 물질적 요소들(四大)도 자아라 할 것(我, 실체)이 없는 것이며 참 마음(眞心)[조차]도 모습(相)이 없는 것이어서 [이 모든 것이 어디로]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觀) 합니다. 태어날 때에도 본성(性)은 역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에도 본성은 역시 [어디로]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맑고(湛) 자연스러우며(然) 완전하고(圓) 고요하기에(寂) 마음(心, 주관)과 대상세계(境, 객관)가 동일합니다(一如). 다만 이처럼 [존재의 진리를 관찰]하면 바로(直下) 단박에 깨닫게 되어 [윤회의] 세계(三世)에 의해 잡혀 매이지 않게 됩니다. 곧 [윤히의] 세상을 벗어난 자유인(自由人)인 것입니다. 만일 모든 부처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따라서 가려는 마음이 없게 되며 만일 지옥을 보게 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204) 다만 스스로 [잘못된] 마음이 없게되면(無心) 현상세계 [모두](法界)와 같아지게 되니(同)205) 이것이 곧 [진리의] 요지(要節)입니다. 그러므로 평소 때는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는 때](因)이고 죽을 때는 [깨달음의]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늘그막에나 석가모니를 만나렵니까.206) ◆ 이 때를 향하여서도(向此時, 죽을 때까지도) ‘자기(自己, 나는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것을 좋아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백년의 세월(光影)이 머리 [한 번] 돌림에 그릇[되게] 되려니...207)


74. 분별심을 내지 말라.  HPC 7.643b23~7.643c10.

무릇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에 다다라서는 만약 가는 털 한 [가닥 만큼]이라도 보통 사람과 성인이다 하는 감정과 구분(精量)을 다 없애지 못하고 [분별적인] 생각(思慮)을 잊지 못하면 [죽은 후에는] 나귀의 태(胎)나 말의 뱃속(腹裏)으로 향하여 [존재의] 바탕을 [동물에] 의탁하게 되고208) 지옥(泥犁, Niraya)의 끓는 솥 가운데에서 삶아지게 되며 심지어 앞의 것(前, 털 한 가닥의 분별심)에 의해서 땅강아지나 개미나 모기나 등에로 다시 [태어]나게(再爲) 나게 될 것입니다.

백운(白雲 守端, 1025-1072) 선사는 “만일 한 가닥 털[만큼]의 보통 사람과 성인에 대한 감정과 [분별적인] 생각(情念)이 깨끗이 없어졌다 해도 또한 나귀의 태나 말의 뱃속을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이분법적인 견해(二見)가 [하늘의] 별처럼 날아다니니 별의 별 존재(諸趣)에 흩어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209) ◆ 맹렬한 불길(烈火, 인간의 번뇌)이 아득히 [뻗어있으니](茫茫) 보검(寶劍)210)이 [불길을 벗어날] 마땅한 문일세.

평하여 말하자면, 이 두 구절은 특별히 종사(宗師)가 ‘분별적 견해 없이 진리와 하나되는 방법(無心合道門)’을 열고서 [부처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염불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念佛求生門)’을 임시로(權) 막은 것[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根)와 그릇(器)이 같지 않고 뜻(志)과 원하는 것(願)이 또한 다른 것이 각각 이와 같아서 [‘분별적 견해 없이 진리와 하나되는 방법’과 ‘염불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 양자가 서로 방해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각자의] 분수에 따라 각자 노력하여 최후의 순간(最後刹那, 죽음의 순간)에 의심이나 후회를 내지 마십시오.


75. 선 수행하는 사람들의 병  HPC 7.643c11~7.643c19.

선 수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래 모습(本地風光, 존재의 참 모습)을 만약 아직 밝히 [드러]내지 못했다면 곧 홀로 우뚝 솟은 심원한 [진리의] 관문(孤?玄關)을 무엇을 따라 본떠서 뚫겠습니까. 더러는 ‘[완전히] 끊어 사라져버린 공(斷滅空)’211)으로 선 수행하며 [더러는 ‘언어로] 기록할 수 없는 공(無記空)’212)으로 진리를 삼고(爲道) [더러는] ‘모든 것이 다 없다(一切俱無)’213)는 것으로 뛰어난 견해(高見)를 삼습니다. 이것은 공(空)[에 대한] 어두우면서도 완고한 [견해들이니] 병(病)214)을 받음이 깊은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天下)에서 ‘선 수행(禪)’을 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병에 앉아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한 관문(一關)’215)으로 향하는 것은 발 놓을 곳이 없는 방법입니다.216) 운문(雲門 文偃, ?-949) 선사는 “[진리의] 빛(光)을 뚫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두 종류의 병이 있고 진리 그 자체(法身)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에도 두 종류의 병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병들을] 하나 하나 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217)라고 했습니다. ◆ 풀 내음 나는 길을 가지 않고서는 꽃잎 떨어지는 마을에 가기 어렵구나.218)


76. 뛰어난 선 수행자의 병  HPC 7.644a1~7.644a9.

종사(宗師)들에게도 역시 많은 병이 있습니다. 병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眉)과 눈을 부릅뜨는 것(努目)과 귀를 기울이는 것(側耳)과 머리를 끄덕이는 것(點頭)으로써 선[의 진리]를 삼고 병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말을 바꾸고(顚言) 말을 뒤집는 것(倒語)과 사납고 난잡한 고함 침(胡喝亂喝)으로 선[의 진리]를 삼습니다. 병이 손과 발에 있는 자는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서는 것(進前退後)과 동쪽을 가리키고(指東) 서쪽에 그림 그리는 것(畵西)으로 선[의 진리]를 삼고 병이 마음에 있는 자는 현묘함을 끝까지 연구하려 하는 것(窮玄究妙)과 감정을 뛰어넘고 견해를 떠나려는 것(超情離見)으로써 선[의 진리]를 삼습니다. [하지만] 사실대로(據實) 말하자면 [이 모두가] 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219)

부모를 죽인 사람은 부처 앞에서 참회할 수 있지만 진리(般若)를 비방하는 자는 참회할 길이 없습니다.220) ◆ 허공 속의 그림자를 잡는 것이 현묘한(妙) 것이 되지 못하는데 세상 밖物外)에서 [무언가를] 뒤쫓는 것이 어찌 뛰어난 근기[의 사람이 할 일]이겠는가.221)


77. 스승은 진리를 말로써 표현하지 않는다.  HPC 7.644a10~7.644a15.

최고의 스승(本分宗師)이 이 [진리를 담은] 구절을 완전하게 들어보이는 것222)은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 노래하고 박수치는 것과 붉게 달아오른 화로에 눈(雪)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223) 또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과 번개와 마찬가지입니다.224) 수행하는 사람(學者)은 참으로 [진리를] 생각[으로 알려]하거나 의논[해서 알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스승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앞 선 스승의 깨달음(道)과 공덕(德)을 중히 여기지 말고 다만 앞 선 스승의 나를 위해 [진리를] 끝까지 말한 것225)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지 마십시오. 종이와 먹 위에 오르게 될까 두렵습니다!226) ◆ 화살이 강에 비친 달 그림자를 꽤뚫는 것이 반드시 독수리를 쏘는 사람일 것이니...227)


78. 선맥의 흐름  HPC 7.644a16~7.645c2.

대저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종파의 갈래(宗途)를 상세하게 분별해야 합니다.228) 옛날에 마조(馬祖 道一, 708-788) 선사가 한 번 고함침에 백장(百丈 懷海, 749-814)은 귀가 멀었고 황벽(黃蘗 希運, ?-850?)은 혀를 내밀었습니다. 이 ‘한 번 고함침’은 곧 [부처가] 꽃을 을었다는 소식[과 같은 것]이며 또한 달마(菩提 達磨, ?-528?)가 처음 온 본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아! 이것이 임제종(臨濟宗)이 [생겨난] 근원(淵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法)을 아는 사람은 두려워하라. [함부로 말로 진리를 드러내려 하면] 소리[냄]과 더불어 곧 때릴 것이니... ◆ 한 가지 마디 없는 [조사의] 지팡이(杖子)를 밤 길 가는 사람에게 은근히 건네주네.229)

옛날에 마조 선사가 한 번 고함쳤을 때에 백장 선사는 존재의 본질(大機)을 깨달았고(得) 황벽 선사는 존재의 현상(大用)을 깨달았습니다.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원만하게 응하는 것(圓應, 존재의 원리)’의 뜻이고 ‘존재의 현상’이라는 것은 ‘바로 끊는 것(直截, 잘못된 견해를 바로 끊는 것)’의 뜻입니다. [이런] 일은 『전등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략 구분하면(大凡) 조사선(祖師)에는 다섯 갈래가 있으니 임제종,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仰宗), 법안종(法眼宗)이라 합니다.

《임제종》 근본 되는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釋迦佛)이고 [그로부터] 삼십 삼대 째인230) 육조 혜능 대사 아래로 직접 전해지기를(直傳)231) 남악 회양(南岳 懷讓, 677-744)232),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8-788)233),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234), 황벽 희운(黃蘗 希運, ?-850?)235),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흥화 존장(興化 存?, ?-925), 남원 도옹(南院 道?, ?-?), 풍혈 연소(風穴 延沼, 896-973), 수산 성념(首山 省念, 926-993), 분양 선소(汾陽 善昭, 947-1024), 자명 초원(慈明 楚圓, 987-1040), 양기 방회(楊? 方會, 992-1049), 백운 수단(白雲 守端, 1025-1072), 오조 법연(五祖 法演, ?-1104), 원오 극근(圓悟 克勤, 1063-1135), 경산 종고(徑山 宗?, 1089-1163)236)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조동종(曹洞宗)237) 육조 [혜능] 아래에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傍傳)를 청원 행사(靑原 行思, ?-740), 석두 희천(石頭 希遷, 700-790), 약산 유엄(藥山 惟儼, 751-834), 운암 담성(雲巖 曇晟, 782-841), 동산 양개(洞山 良价, 807-869), 조산 탐장(曹山 耽章, 839-901), 운거 도응(雲居 道膺, ?-902)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운문종(雲門宗)》 마조 [도일에게서]238)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천왕 도오(天王 道悟, 748-807), 용담 숭신(龍潭 崇信, ?-?), 덕산 선감(德山 宣鑑, 780-865), 설봉 의존(雪峯 義存, 822-908), 운문 문언(雲門 文偃, ?-949), 설두 중현(雪竇 重顯, 980-1052), 천의 양회(天衣 義懷, 989-1060)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위앙종(?仰宗)》 백장 [회해에게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위산 영우(?山 靈祐, 771-853), 앙산 혜적(仰山 慧寂, 840-916), 향엄 지한(香嚴 智閑, 818-914), 남탑 광용(南塔 光涌, ?-?), 파초 혜청(芭蕉 慧淸, ?-?)239), 곽산 경통(?山 景通,?-?)240), 무착 문희(無著 文喜, 820-899)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법안종(法眼宗)》 설봉 [의존에게서] 곁 갈래로 전해지기를 현사 사비(玄沙 師備, 835-908), 지장 계침(地藏 桂琛, 867-928), 법안 문익(法眼 文益, 885-958), 천태 덕소(天台 德韶, 891-972), 영명 연수(永明 延壽, 904-975)241), 용제 소수(龍濟 紹修, ?-?), 남대 수안(南臺 守安, ?-?) 같은 선사들[을 통해 이어 왔습니다].

242)《임제종의 가풍(臨濟家風)》 맨 손에 단도[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며 ‘현묘함과 요긴한 것(玄要)’[이라는 방편으로] 과거와 현재[의 가르침의 뜻]을 판단하고 ‘주인과 손님(主賓, 주관과 객관)’[이라는 방편으로] 용(龍, 깨달음)인지 뱀(蛇, 깨닫지 못함)인지 시험합니다. 다이아몬드[같이 날카롭고 단단한] 보검(金剛寶劒)243)을 잡고서 대나무와 나무(竹木)[같이 무성히 솟아 있는] 도깨비(精靈)244)를 쓸어버리고 사자(獅子)의 모든 위엄으로 분노(奮)하여 여우와 살쾡이의 심장과 쓸개245)를 찢어발깁니다. 요켠대 임제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푸른 하늘에 벼락의 굉음[과 같은 것]이고 평평한 땅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동종의 가풍(曹洞家風)》 방편으로 다섯 [수행의] 자리(五位)246)를 열어놓았기에 세 [종류의] 근기[의 사람들]을 잘 가르칩니다.247) [하지만 결국에는 지혜의] 보검을 비스듬히 [겨눠] 들고서 모든 [잘못된] 견해의 빽빽한 숲을 베어버립니다. [여러 방편들을] 널리 통하도록 신기하게 잘 맞추고(?, 합하고) 온갖 세속의 일(萬機)에 대해 천착(穿鑿)하는 것을 끊어버립니다. 최초의 부처(威音那畔)248)[가 부처가 될 때]의 위엄 있는 모습이요(滿目烟光)249) 아주 오랜 시간 이전(空劫已前)250)의 한 병에 비친 풍경입니다.251) 요켠대 조동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부처와 조사가 나기 전의 아주 먼 옛날 밖에서는 원리(正)와 작용(偏)이 [모두] 있다거나 없다거나(有無)하는 틀(機, 분별적인 기준)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운문종의 가풍(雲門家風)》 칼날(劒鋒) [위]에는 [드물게] 길이 있[을 수 있]지만 철벽(鐵壁)에는 문(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뒤집히는 것을 번쩍들고 갈등은 분산시키고 평소의 [애욕의] 감정(精)과 [분별적] 견해(見解)를 잘라버립니다. 빠른 번개[조차]도 생각과 헤아림[의 번잡함]에 이를 수 없거늘 [그렇게 번잡한 생각이] 맹렬한 불구덩이에 머무르는 것을 어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252) 요컨대 운문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조사의] 지팡이(?杖子)가 하늘 위에 날뛰고 술잔 안에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 펼쳐집니다.

《위앙종의 가풍(?仰家風)》 스승(師)과 제자(資)가 부르고 화답하니(唱和)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옆구리 아래에 글자를 쓰고 머리 위에 뿔이 솟아있고253) 사자의 허리가 꺾어집니다.254) ‘네 가지 구절(四句)’도 떠나고 ‘백 가지 아니다[라는 가르침](百非)’255)도 끊어버리기를 한 번에 쳐서 부숴버리니(粉碎) 두 사람의 입이 있으나 하나도 혀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 아홉 번 구부러진 구슬에 [실을 꿰어] 통과시키는 것[과 같은 것]256)입니다. 요컨대 위앙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부러진 비석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옛 길에 쓰러져있고 쇠로 만든 소는 작은 방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법안종의 가풍(法眼家風)》 말 가운데에 메아리침이 있고 화두(句) 속에 칼날이 숨겨져 있습니다. 해골은 늘 세계에 [널려있고] 콧구멍은 [법안종의] 가풍을 비벼댑니다(磨觸, 일깨웁니다).257)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이 비친 시냇물은 참된 마음(眞心)을 드러냅니다. 푸른 대나무와 누런 꽃에는 오묘한 진리(妙法)이 선명합니다. 요컨대 법안종의 가풍을 알겠습니까? 바람은 구름을 끊어 고개로 돌아가도록 보내고 달과 [그 달이 비친]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 [흘러]갑니다.

258)《임제종의 교의(旨)를 별도로 밝힙니다.》 크게 개요를 잡으면(大凡), ‘하나의 구절(一句)’ 속에는 ‘세 가지 현묘함(三玄)’이 갖추어져 있고 ‘하나의 현묘함’ 속에는 ‘세 가지 요지(三要)’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 구절’에는 문장의 훌륭한 모양이나 풍채(文綵)의 흔적(印)이 없으나 ‘세 가지 현묘함’과 ‘세 가지 요지’에는 문장의 훌륭한 모양이나 풍채의 흔적이 있습니다. 방편(權)과 진실(實)은 ‘현묘함’이고 [스승이 배우는 자의 속을] 비추어보는 것(照, 떠보는 것)과 [진리의 가르침을] 쓰는 것(用, 보여주는 것)은 ‘요지’입니다.

《세 가지 구절(三句)》 ‘첫 번째 구절’은 ‘몸을 잃고 목숨을 잃는 것’259)이고 ‘두 번째 구절’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릇된 것’260)이고 ‘세 번째 구절’은 ‘똥 삼태기와 빗자루’261)입니다.

《세 가지 요지(三要)》 ‘첫째 요지’는 ‘비추어 봄(照)이 곧 큰 기틀(機, 體, 본체)’262)이[라는 것이]고 ‘둘째 요지’는 ‘비추어 봄이 곧 큰 씀(用, 작용)’263)이[라는 것이]며 ‘셋째 요지’는 ‘비추어 봄(照, 體, 본체)과 씀(用, 작용)이 동시(同時)’264)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현묘함(三玄)》 ‘[진리의] 본체 가운데의 현묘함(體中玄)’[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세계(三世, 모든 역사와 시간)가 한 생각(一念)[일 뿐이다]’와 같은 것들(等)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구절 가운데의 현묘함(句中玄)’[이라는 것]은 ‘지름길(徑截)[과 같은] 말 구절(言句, 화두)’265)같은 것들이고 ‘현묘함 가운데의 현묘함(玄中玄)’이라는 것은 ‘[말없이] 한참 있는 것(良久)과 방망이질(棒)과 고함치는 것(喝)’ 같은 것들입니다.

266)《네 가지 헤아려 분간한다[는 것](四料揀)》 ‘주관(人)은 빼앗으나 대상(境)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낮은 근기(下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대상을 빼앗으나 주관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중간 근기(中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주관과 대상을 모두 빼앗는다는 것’은 높은 근기(上根)[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며 ‘주관과 대상을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근기의] 틀(格)을 벗어난 [뛰어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손님과 주인의 네 가지 [유형]》 ‘손님(賓, 배우는 사람) 중의 손님(賓中賓)’이라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콧구멍이 없기에(無鼻孔)267) 질문이 있고 대답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268) ‘손님 중의 주인(主, 가르침을 전하는 종사)(賓中主)’이라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콧구멍이 있기에 주인도 있고 가르침도 있[는 것입니]다.269) ‘주인 중의 손님(主中賓)’이라는 것은 스승의 집(師家, 스승 자신)에 콧구멍이 없기에 질문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270) ‘주인 중의 주인(主中主)’이라는 것은 스승의 집에 콧구멍이 있는 것271)이니 [그] 기특함을 막을 수 없습니다.272)

《비추어 보고 씀273)의 네 가지 [유형](四照用)》 ‘먼저 비추어 본(학인의 속을 떠본) 후에 쓰는 것(가르침을 보이는 것)(先照後用)’에는 사람이 있을 뿐274)이고 ‘먼저 쓴 후에 비추어보는 것(先用後照)’에는 가르침이 있을 뿐275)입니다. ‘비추어보는 것과 쓰는 것이 함께 할 때(照用同時)’에는 [밭] 가는 것을 내어쫓고 먹는 것을 빼앗습니다.276) ‘비추어 봄과 씀이 함께 하지 않을 때(照用不同時)’에는 질문이 있고 대답이 있습니다.277)

《네 가지 큰 방식(四大式)》 ‘섞임이 없는 이익(正利)278)[을 얻는 방식’이라는 것]은 ‘[달마가] 소림(少林)에서 벽을 대하여 수행한 것(面壁)’ 등[과 같은 것]입니다. ‘늘 그러함(平常)[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화산(禾山)에서 북을 두드린 것(打鼓)’279) 등[과 같은 것]입니다. ‘본분(本分)[을 드러냄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산승(山僧)280)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281) 등[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을 바침(貢假)[을 통한 방식’이라는 것]은 ‘달마(달마, ?-528)가 “알지 못합니다(不識).”라[고 대답]한 것’282) 등[과 같은 것]입니다.

《고함침(四喝)의 네 가지 [쓰임]》 가장 뛰어난 금강[역사](金剛王)의 보검은 모든 감정(情)과 [분별적] 이해(解)를 칼 한 번 휘두름에 끊어 버립니다. 땅에 웅크린 사자가 말을 발하고 기를 토하여내면 마귀의 무리의 뇌수가 찢어져버립니다. 장대로 더듬고(探竿) 풀[뭉치]의 그림자[로 기척을 살피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쳐 받은(師承) 콧구멍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한 고함침(一喝)을 [단순한] 한 번 고함침(一喝)로 만들지 않는 [고함침의] 쓰임은283) 위의 세 가지 현묘함과 네 가지 손님과 주인[의 유형] 등[과 같은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방망이질(棒)의 여덟 가지 [쓰임]》 명령에 의거하여 현묘함에 돌아오게 하는 것과 [망념됨을] 쓸어버림을 접하고서 바름(正)을 따르게 하는 것과 현묘함에 의지하여 바름을 해치는 것을 강하게 꾸짖는 것[에 쓰는 것]을 벌주는 방망이질(罰棒)[이라고 합니다.] 진리(宗旨)를 따르는 것을 상주는 방망이질(賞棒)[이 있습니다.] 헛됨(虛)과 참됨(實)을 판별하는 방망이질(辨棒)이 있습니다. 눈 먼 도리깨[처럼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눈 먼 방망이(?棒)[가 있습니다.] 보통사람과 성인을 깨끗이 닦는, 바로잡는 방망이(正棒)[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임제종풍(臨濟宗風)에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위로는 모든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수 위의 일284)입니다. 만약 이 풀어놓은 가르침(說法)에서 떠난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말(妄語)입니다.


79. 고함침과 방망이질도 방편일 뿐이다.  HPC 7.645c3~7.645c8.

임제의 고함침(喝)과 덕산의 방망이질(棒)은 모두 생겨남[이나 멸함]이 없다는 [진리를] 꿰뚫어 깨닫게 하는 것이며 꼭대기를 뚫고 바닥을 뚫은 것285)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훌륭한 진리 자체(大機, 체)와 훌륭한 [진리의] 드러냄(大用, 용)에 [있어서] 방향없이(無方, 어디에서든지) 자유자재(自在)하기에 온 몸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온 몸으로 맡아 [육신이라는 물건을] 짊어집니다.286) [고함침과 방망이질의] 가르침을 펴지 않을 때에도(退) 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과 같은] 위대한 사람(大人)의 경지(境界)에 있지만(守) 사실대로 논하자면(據實而論) [임제와 덕산이라는] 이 두 스승도 또한 귀신(鬼子)[들이나 하는] 탐내는 마음(偸心)을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살을 에일 듯 [찬 빛을 뿜어내는 칼날에] 작은 털을 불어 [베어버리는 구나]! 날카로운 기세에 덤비지 말라! ◆ 번뜩이는 차가운 빛[을 내는] 구슬이 [담겨 있는] 물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적막하고 구름도 흩어진 [텅 빈] 하늘을 달이 간다!


80. 어디에도 얽매이지 말라. 부처와 조사에게까지도...  HPC 7.645c9~7.645c19.

[수행의 길에서 정진하는] 대장부(大丈夫)는 부처를 보고 조사를 보기를 원수(?家)같이 [합니다]. 만약 부처[의 경지]를 구하는 것에 집착하면 부처에게 얽매이게 되고 만약 조사[의 경지]를 구하는 것에 집착하면 조사에게 얽매이게 됩니다. [어떤 경지를] 구하는 것이 있는 것은 모두 고통이니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부처와 조사가 원수’라는 것은 위의 ‘바람이 없는데도 파도가 이는구나!’287)를 맺는 것이고 ‘구하는 것이 있는 것은 모두 고통’이라는 것은 위의 ‘[사물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體)은 곧-그 자체로-옳습니다.’288)를 맺는 것이며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는 것은 위의 ‘생각이 움직이면 곧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그러집니다’289)를 맺는 것입니다. 이에 이르면 천하 사람의 혀와 머리290)를 앉아서 끊어버리고291) 나고 죽는 [윤회의] 빠른 바퀴[의 회전]을 거의(庶幾) 멈춰 서게 합니다. 위기에서 구원하고 난리를 평정한다는 것292)은 단하(丹霞 天然, 739-824) 선사가 나무로 만든 부처를 태운 것293)과 운문(雲門 文偃, ?-949)이 개를 먹이겠다고 한 것294), 그리고 [한] 노파가 부처를 보지 않겠다고 한 것295)과 같은 [일들입니다].296) 이는 모두 사악함을 막고 바름을 드러내려는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늘 강남의 삼월을 그리워합니다.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의 향기가!


81. 모든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마음의 신령한 빛을 스스로 드러내라. 이 글 조차도 방펀일 뿐이다.  HPC 7.645c20~7.646ac14.

신령한 297)빛이 어둡지 않으니 영원토록(萬古) 훌륭한 지혜여(徽猷)! 이 문(門, 선 수행)에 들어와서는 지식(知)과 [분별적] 이해(解)로 [진리를] 묻지(存) 마십시오!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으니’라는 것은 위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를 맺는 것이고 ‘영원토록 훌륭한 지혜여’라는 것은 위의 ‘본래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298)를 맺는 것이며 ‘지식과 [분별적] 이해를 있게 말라’는 것은 위의 ‘이름에 집착해서(守) [주객을 구별하는 분별심(分別心)에 기초한] 이해(解)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299)라는 것을 맺는 것입니다. ‘문(門)’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과 성인이 [모두] 나고 든다는 의미가 있는데 하택(荷澤 神會, 685-760) 선사는 소위 “지식(知)이라는 한 글자가 모든 오묘한 [이치](妙)가 [나고 드는] 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 ‘이름 붙이거나 모습을 그릴 수 없습니다’300)[라는 표현]에서 시작하여(起) ‘지식과 [분별적] 이해를 있게 말라’로 [끝을] 맺으니 한 편(篇)의 얽히고 설킨 [모든] 것(葛藤)이 한 구절(一句)에 모두 깨트려집니다(破).301) 그러나 [이 책 『선가귀감』도] 한 [분별적] 이해(一解)로 처음과 끝을 삼고 중간에 온갖 행동[에 대한 설명]을 [예로] 들었으니 세상의 서적(世典)들의 세 가지 뜻(三義)302)과 같 ‘지식(知)’과 [분별적] 이해(解)라는 두 글자는 부처의 가르침에 큰 해(害)[가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것들을 마지막에] 들어 [경고하고]서 마치는 것입니다. 하택 신회 선사가 조계(曹溪)303)의 정통 후계자(嫡子)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이 같이 으뜸 되는 뜻(宗旨, 진리)을 들어 소리 높여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파란 눈의 중이 크게 웃었을 것을...”304)이라고 게송(頌)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어찌하겠습니까! ◆ 외로운 달(孤輪)이 강과 산을 외로이 비쳐 고요하고, 저절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네!


HPC 7.646ac15.

『선 수행자들의 귀감禪家龜鑒』[의 서술]을 마칩니다.





번역에 참고한 도서 목록                                    


1. 원전류

休靜. 동국대학교 한국 불교전서 편찬위원회 편. 『禪家龜鑑』. 『韓國佛敎全書』.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6, 제 7권, pp. 634~646.


2. 사전류

홍법원 편집부 편. 전관응 감수. 『佛敎學大辭典』. 서울: 홍법원, 1988.

민중서림 편집국 편. 『漢韓大字典』. 서울: 민중서림, 1997.

김상영 책임 편집. 『국어대사전』. 서울: 금성출판사, 1993.

Harvard-Yenching Institute, ed. A Concordance to the Analects of Confucius. Taipei:       Chinese Materials & Research Aids Services Center Inc., 1965.


3. 번역본

休靜. 法頂 옮김. 『禪家龜鑑 : 깨달음의 거울』. 서울: 불일출판사, 1962, 1992.

____. 이종익, 심재열 강설. 『西山大師 禪家龜鑑』. 서울: 보성문화사, 1999.

莊子. 안동림 역주. 『莊子 : 다시 읽는 원전 장자』. 서울: 현암사, 1993.

老子. 노태준 역해. 『新譯 道德經(老子)』. 서울: 홍신출판사, 1997.


4. 단행본

Buswell, Robert E. Jr. 김종명 옮김. 『파란 눈 스님의 선 수행기』. 서울: 예문서원, 1999.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신현숙 옮김. 『한국불교사』. 서울: 민족사, 1988.

길희성. 『인도철학사』. 서울: 민음사, 1984.

한형조. 『한글 세대를 위한 선불교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서울: 여시아문, 1999.

출처 : 茗田의 차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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