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중종 15년(1520)에 태어났다.
대사의 성은 완산(完山) 최씨(崔氏), 이름은 휴정(休靜)이며 호는 청허(淸虛) 또는 서산이라 한다. 대사가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세인들이 서산대사라 하였다. 대사의 증조(曾祖)는 태종조에 등과하여 창화(昌化)에 이주했었는데 외조인 김우(金禹)가 연산군에게 죄를지어 관서의 안릉(安陵)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대사의 조부도 역시 연루자가 되어 관서로 가게 되었는데 8년 후에 죄가 없어져 사적(士籍)을 회복하였으니 이로 인해 관서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세창(世昌), 어머니는 김씨로서 세창은 향리에서 추천받아 기자묘(箕子廟)의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향관으로 있었다. 오랫동안 자손이 없다가 부모의 연세가 47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남(一男)을 얻으니 이가 곧 서산대사였다.대사는 어려서부터 취사성탑(聚沙成塔)하고 장호입사(將互立寺)하여 일상행사(日常行事)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부모에게 효가 지극했으므로 일찍부터 향리에서 명칭이 있었다. 9세에 어머니가 홀연히 별세하더니, 이듬해 봄에 아버지도 따라 작고하여 광막한 천지 안에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이때에 안주목사로 와 있던 이사회(李思會)가 사정을 알고 소년을 불렀다. 그리고 "향기 그윽한 높은 누각에 해가 기울기 시작했네"와 "온누리에 덮인 눈이 꽃받 같구나"라고 글귀를 짓는 것을 보고 과연 듣던 바대로 빼어난 재주라고 탄복하며 양자로 사았다. 이때 나이가 불과 10세였다. 얼마 후에 목사가 내직으로 들어올 때 서울로 데리고 가서 12세 때부터 공부를 시켜15세에 진사의 시험에 응시를 하였으나 낙제를 하여 동학 몇 명과 함께 호남으로 내려와서 지리산에 들어가 화암동(華巖洞),연곡동(燕谷洞) 등 여러 사암을 역방하며 지내다가 반년이 되었다.
하루는 숭인노승(崇仁老僧)이 찾아와 서산에게 "그대의 기골을 보아하니 보통사람이 아니로다. 생각을 돌려 심공급제(心空及第)한다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를 잊게 되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면서 <<전등록>><<화엄경>> <<법화경>> 등을 주었다. 소년의 돌변한 심경을 눈치 챈 숭인은 당시의 고승인 부용영관(芙蓉靈觀) 대사에게 맡겼다. 영관 밑에서 행자가 된 지 6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깨치면서 은장도로 머리를 깎고 맹세를 했다. "차라리 한평생을 우둔하고 못생긴 놈으로 지낼지언정 맹세코 글자풀이나 하고 살아가는 강사노릇은 않겠다"라고 하면서 불문에 출가한 것이다. 도솔산에 들어가 학묵대사(學默大師)에게 인가를 받고 다시 지리산에 돌아와 삼철굴(三鐵窟) 대승암과 의신(義神), 원통(圓通), 은신(隱神) 등을 전전하면서 5년간 수행정진하였다.
그 후 중인(衆人)의 강권에 따라 최고득점으로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서산의 나이 37세 때에 홀연히 승관직이 승려의 본분사가 아님을 자각하고 모든 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낸 뒤 다시 지리산에서 6년, 관동의 태백, 오대, 금강산을 다시 밟았다가 관서의 묘향산에 들어가 여러 암자에 기적(寄迹)하면서 도예(道譽)를 팔도에 충만케 했다. 선조22년(1589)에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나 그때도 무고하게 검거되어 투옥당한 일도 있었으나 선조는 곧 대사를 석방하였다.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명을 받아 의승군(義僧軍)을 창단하고 행주, 평양, 한성 등을 지키고 수호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대사는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그 직을 물려주고 관동.관서의 명승지를 다시 찾았다. 선조37년(1604)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85세이며 법랍은 67년이니 그 해가 선조 37년(1604) 1월23일이었다.
휴정은 선교사상에 있어 선교통합, 삼교회통 등이 모두 동일동근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사명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또 임진왜란의 국가적 위기를 당하였을 때 진충보국(盡忠報國)하여 불교적 주체를 세워 국가혼을 바로잡음으로써 승단의 결속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국의 승도에까지 미쳐 조선불교를 중흥시켰으며, 배불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불교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또 사상적으로는 한국 불교사상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화(和)의 사상을 다시 조명하면서 보조 이후 선사상의 맥락을 이어받았다는 데에 서산의 큰 업적이 있다.
출처: 달마넷
행자실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is834/2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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