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
-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
김 경 재
(한신대교수, 신학)
[1]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의 요청
공자는 "산다는 것도 아직 체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안단 말이냐"고 말했다. 지당한 말씀이며, 진리를 구도하는 겸양한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을 다 모르면서, 사람섬기는 법도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의 문제와 제사 문제를 문제삼지 않을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은 진정 인간의 한계상황으로서 위대한 신비이면서 풀고 넘어서야 할 매듭이고, 초월하여 뛰어 넘어서야 할 존재의 마지막 결승벽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주로 죽음의 현상학적인 간접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그 누구나 모든 사람이 맞아해야 하면서도 돌연이 예고없이 찾아 올 수있는 것이다.죽음이 가까워 오면 모든 과정이 의사, 장의사,성직자등 전문인들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통과제의로서의 죽음이 낯선 사람의 손에 양도되어 버린다.
둘째, 죽음은 집단학살의 경우일지라도 죽는 순간만은 홀로 맞이해야 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나 �편이나 아내일지라도 대신죽어줄 수 없고 함께 죽어갈 수 없다. 죽음에서 인간은 홀로되는 엄숙한 시간을 맞는다.
셋째, 죽음이 주는 아픔은 죽음 그 자체라기 보다는 모든 의미있는 관계와 성취물과 삶의 의미연관구조를 일시에 잃어버리고 해체당하는 의미상실의 고통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픔, 혼신의 힘을 쏟았던 일로부터 단절되고 쌓아온 모든 생의 업적으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이다. 죽음의 아픔은 곧 근원적 소외가 주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넷째, 죽음의 두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녔던 구체적 몸으로서의 생명이 추하게 먼지와 물로 분해되고 해체된다는사실, 거역할 수없는 물리적 안트로피현상에 내던져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감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매우 비인간적일 수있는 현상을 내보이면서,인간성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독재적인 비정함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의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랑하던 가족의 시신을 병동의 냉장고 속에 안치해 둬야하고, 며칠전까지 서로 몸을 비비고 만지던 친지의 몸을 차거운 땅 속에 매장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죽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죽음의 두려움은 죽음이후의 생명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무지한 상태일만큼 모른다는 사실이며, 삶의 시간을 한줌 부끄러움없이 살았다고 자신 할만한 당당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터부시 된 이유
죽음이 이렇게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의 최대의 관심거리이며, 모든 철학과 삶과 문학과 예술의 가장 깊은 신비적 대상이면서도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려하지 않으며 죽음을 터부시 한다. 그동안 현대 문명사회, 특히 서구 문명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하여서는 가급적 말을 않으려고 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장례식은 지극히 제한된 식구나 친지의 일부가 모여 성직자의 종교의식에 따라 진행할 뿐이다. 아시아의 문화처럼 죽음의 장례가 삶의 커다란 통과의례가 되지 못하는 감이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도 근대 이전 까지는 죽음이 삶과 긴말한 관계 속에서 운위되어 왔다. 그런대, 현세적 삶에 인간의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된 근세 계몽주의 시대 이후, 죽음의 문제는 삶의 변두리문제로 몰려나게 되었다. 인간이 죽음을 그의 전체 삶에서 도외시하고 소외시키면, 삶 그 자체도 비인간화되고 소외된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분이며, 인간사회를 보다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로 조성하는 인간의 근본문제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모두 종교적 인간이 됨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각각의 종교가 지니는 구원패러다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종교가 생사를 극복하거나 초월하여 유한한 생명의 덧없음과 그 죄나 업보가 지닌 파괴성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 절대생명, 불생불멸적 생명으로 고양된다는 신념을 지니는 점은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죽음의 극복, 죽음에 대해 보통사람들이 지니는 두려움과 편견을 극복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의미있게 살려는 목적을 지닌다.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회피하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요,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하려는 종교는 죽음에 대하여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분이라고 종교는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터부시하고, 현생과 현세 일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시간과 정력을 쏟는일은 균형감각을 상실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무엇을 구원이라고 하는가의 문제는 종교가 지니는 구원패러다임에 따라서 그 설명방식과 강조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해석학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고하고 행동할 때에도 항상 그가 지닌 세계관과 종교적 구원관에 의하여 그의 행태(行態)가 제약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이해나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종교적 구원관, 영생관, 생사초월관이 조금씩 독특하게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이기 때문에 각자가 귀의하는 종교에 따라서 각각의 죽음이해와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영생관이 있다. 크게보면 무교, 유교, 불교, 기독교등 네가지 영향력 있는 종교의 사생관이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네가지 종교인들이 죽음과 삶을 이해하고 대하는 태도사이에는 각각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서로의 사생관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무궁성 이해에 빛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강연자는 위대한 우주적 보편종교인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종교가 죽음을 어떻게 보고 , 그 극복을 어떻게 성취함으로써, 현세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며, 생사를 초월한 자유인으로서 자비행과 사랑의 봉사를 실천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강연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이야기 해보려 한다.
[2] 원시불교에서 죽음의 극복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바 처럼, 유교는 주검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여 예학(禮學)을 발전시켰으나, 죽음 그 자체의 근본 문제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임을 알고 일찍부터 죽음의 문제나 신령한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태도를 취한다. 죽음과 귀신문제에 대해 "경이원지"한다는 말은 관심을 갖지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말은 아니다. 글자그대로 그런 문제는 공경하는 태도로서 신중하고 경건하게 다루되 가까이는 하지않고 거리를 두겠다는 자세이다. 여기에 유교의 종교적 실재문제에 관한 인간이성의 겸허한 인식론적 한계인식, 현실적 삶의 문제에 일차적으로 성실하려는 진지한 인본주의적 태도, 그러면서도 예(禮)로서 그런 문제에 전지하게 대함으로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유교의 종교로서의 특성이 잘 나타나 보인다.
사실 유교가 한국인의 사생관과 삶의 윤리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 할수 없으나, 유교자체가 지니는 사생관의 형이상학적 본질상 거기엔 적지않은 갈등과 모호성이 발생하게 되것이다. 한국인의 유교적 제사제도는 한편으로서는 유교적 예학(禮學)이 가르치는 바에 충실하려는 의례중심주의(儀禮中心主義)에 기울고, 죽음 그자체에 대한 이해문제는 무교적 혼백사상이나, 아니면 신유학(新儒學)의 서화담에서 보는바처럼 일기장존적(一氣長存的) 우주론에 멈춤으로서 평범한 일반사람들에게는 죽음이해에서 모호성이 발생하게 되었다. 다시말하면, 유교제사정신은 훌륭하되 일반서민들은 유교적 사생관으로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적 귀신숭배사상과 쉽게 종교습합되거나, 종교적 차원의 갈증은 불교로부터 개인적으로 취하거나, 아니면 불가지론자로서 입장을 취할 밖에 없었다.
유교가 주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독교는 죽음의 쏘는 가시와 권세 곧 "죽임의 세력 "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대하여 불교는 죽음 그자체의 정체와 정면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 시켜버리려는 방향을 취한다. 다시말하면, 불교는 죽음이라는 실체(實體)를 인정하고서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것인 가라는 방향을 걷지않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죽음이란 없는 것이라고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이다.
인간의 생노병사라고 하는 근본적인 한계상황적 문제를 해결하고 말리라는 큰 뜻을 세우고 출가한 고다마 싣달다가 보리수 아래서 등정각하여 해탈함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해탈했을 때, 무슨 초자연적인 계시적 지식에 의거하든지 초자연적 신령들의 도움을 얻어 등정각에 이른 것이 아니다. 불교는 엄밀히 말하면 영지주의적 "그노시스"를 부정한다.
싣달다가 확연하게 보고 깨달은 진리(法, 다르마)는 다름아니라 삼라만유란 인연생기적(因緣生起的) 현상이며, 한 큰 마음(一心) 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의 바다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파문이라고 본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여러가지 개념적 지식과 경험적 인상을 가지고 있다. 예들면 죽음이란 우선 죽음의 임계상황에서의 심신적 고통, 주검과 연결되는 생의 종말, 죽은자의 말없음과 생기없음, 의식의 종결과 굳어지고 차거워진 신체의 경직화, 사체의 부패과정과 아름다움을 상실해버린 생명체의 추한 모습, 매장과 화장에 따르는 소멸성과 이별의 고통, 죽은자가 추구해온 의미와 가치의 붕괴에 따르는 허무성, 죽음 이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등등 죽음이라는 구체적 현상이 실존인간의 범부중생에게 주는 두려움과 부정성은 이루 말로 다 열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상과 경험적 개념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독립적 실체로서 사실적으로 항존한다는 대 전제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경험이요 개념들이며 인간의 심리작용과 의식작용이 만들어 낸 표상작용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라는 것"이 실체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생기하는 우주적 대 생명의 한 변화와 창발적 계기에 불과하다고 깨우침으로서, 죽음에 연계된 일체의 두려움과 부정적 인상이 극복된다면 어떤 마음 상태가 될가? 인간의 유한한 자아도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칠 때,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적 대립개념이나, 대립상이 살아지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밝은 참지혜, 반야공(般若空)만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상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공(空, Sunyata), 열반적정(涅般寂靜, Nirvana), 중도(中道,Madhyamaka-dharma)라고 부른다.
근본불교에서 본다면 불교(佛敎)란 "깨닫은자"(佛)의 "가르침"(敎)이다. 불교라는 말 뜻자체가 지시하듯이 깨달음이 그 본질일 터인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역사적 종교집단의 종교의례, 종교경전, 종교적 상징물과 절의 건축물등을 자꾸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본래적 시원에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불교란 "깨달은자"의 "가르침"을 참고삼아 나도 처음 "깨달은자"와 같이 깨닫자는 것, 그것 이외 다른것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깨닫자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라는 그 방대한 경전의 문자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깨닫자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일체만유의 존재하는 방식, 일체만유의 본래적인 창발(創發)방식, 불교식으로 말해서 "일체만법의 본원(本源)자체"를 바로 깨닫자는 것인데, 일체만법의 본원자체를 불교적 용어로서 "법성"(法性)이라 기호화하고, 그 법성을 나의 본래적 마음속에서 스스로 파지한 것을 일컬어 "자성"(自性)이라 부른다. 법성과 자성이 둘이면서 하나인데 그것이 삼라만유를 창발적으로 스스로 지어가는 인연생기하는 실상을 환히 깨닫자는 것이다. 자성이나 법성은 "不生不滅 不來不出 不一不異 不常不斷"이라는 저 나가르쥬나의 중론송(中論頌)이 노래하는 바로 팔불게(八不偈)가 지시하는 그것인데, 그 자리에서 볼 때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근원에서 그 실체성이 부정되고 철저하게 인연생기하는 법성의 한 계기에 불과하게 된다. 의상대사가 노래하듯이 법성(法性)은 본래 두개의 상(相)이없고 부동하고 고요하며 이름도 형상도 없어 오직 반야지 상태에서만 이해되는 만유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성(法性)에 가장 가까운 기독교의 기호는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에 해당하고 인간의 본래의 마음 곧 자성(自性)은 순수영혼에 해당한다. 불교의 법성과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자성과 기독교의 순수영혼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일부는 같고 일부는 다른 것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불교적 또는 기독교적 색과 향이 베인 종교적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언어적 표현인 것이다. 불교의 법성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아마 가장 분개하는 사람들은 불교도들과 기독교들일 것이다. 불교의 승려들과 기독교 성직자들은 더욱더 분노할런지도 모른다. 강연자는 믿음도 없고 신앙도 없는 종교혼합주의자 쯤 되는 것으로 매도 당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정직한 지성은 그렇게 말 할수 밖에 없다. 강연자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으나, 다만 자기 종교에 사로잡힌 독단적 비판은 어느 종교쪽이든지 사양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낳고 죽고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 총체로서의 현상적 자아로서의 나"인 것이지, "진여자성"(眞如自性)으로서의 본래적 인 나, 곧 불생불멸하는 법성의 내면적 실재로서의 "眞我"로서의 나가 아닌 것이다. 진여자성으로서의 나는 낳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심의식 총체로서의 나"를 벗어버리고 "진여자성으로서의 나"를 되찾아 생노병사를 극복하려는 종교이다.
불교의 종지(宗旨)를 실재관으로 말하면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이요, 중도사상(中道思想)이다. 중도란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거룩과 세속, 영원과 시간, 본질과 현상, 선과 악등 이분법적 도식구조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그 양자를 동시부정하고 동시긍정함으로서 전체를 생동적인 진여의 계기적 모습으로서 파지하는 것을 말한다. 삼라만물을 상호인대적관계(相互因待的 關係)로서 파악하는 것이요, 인연생기적 현상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중도사상에서 볼 때, 죽음이란 삶의 대립적 실재가 아니라 삶과 더불어 존재를 구성하는 인대적 변화계기에 불과하게 된다. 죽음이 없이는 삶이 없고, 죽음이란 더 크고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의 계기요 전환에 불과하다. 우선 불교에서는 육체의 몸으로서의 생명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머무르는 자연소재물의 집합체이므로, 죽음이란 우선 육신으로서 몸이 거기에서 빌린 자연에로 다시 되돌려주는 환원작용이므로 좋은 죽음이란 자연으로부터 빚진 육신의 몸을 자연에로 돌려주는 순환행위이어야 한다. 가장 불행한 죽음행위는 죽음이후에도 자기의 시신을 자연에로 환원하기를 거부하면서 방부재로서 보존하는 인간 우상들의 비참함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들이 살아있을때 이룬 업보에 대한 죄값을 그렇게 치룸이다. 걸출한 선승(禪僧)들이 그들의 죽음이후 시신을 그들이 빚졌던 동식물에게 공양되기를 바랬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중도사상에서 볼때, 삶과 죽음은 대립개념도 아니고 독립적 실체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진여자성과 법성의 대 생명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물결의 높낮음, 산봉우리와 계곡, 양지와 음지를 확대하여 기호로서 표지한 허구적 그림언어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이 한 인생의 처음과 종말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인간은 살고 죽는다. 날마다 탄생하고 소멸한다.그러나 날마다 탄생하고 죽는 인생은 "심의식(心意識)총체로서의 자아"인 것이지 "진여자성"으로서의 "참 나"는 탄생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그것을 확연하게 깨닫고, 진여자성을 회복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불생불멸하는 대 생명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참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이 해탈이요 불교적 죽음의 극복이다.
업보사상과 윤회사상의 본질
불교에서는 진여자성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임을 가르치며, 심의식(心意識)의 총체로서의 가변적 자아상을 부정한다고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어떤 근거아래서, 왜 인간의 윤회사상이 끈질기게 불교사상 속에는 살아남아 잇는가? 윤회사상은 불교 본래 사상이 아니라 전통 인도인의 민속신앙이 불교안으로 습합하여 들어온 결과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Karma)사상은 물론 불교만의 독점적 사상은 아니고 인도에서 일어난 자이나교나 힌두교사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불교의 업사상은 따지고 보면 불교의 근본종지인 만유의 "인연생기설"의 논리적 귀결이자 인생관이요, 세계관이기도 하다. 업보사상, 윤회사상이 일반 불자들의 대중교화적 설화형태를 빌어 권선징악하려는 목적으로 과장되고 탈선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현생에서 악업을 많이 짓고 못된 짓을 많이 한 인간은 죽어서 구렁이나 미물 축생으로 태어날 수있으며, 반대로 미물축생의 형태로 업보를 치루는 어느 생은 업보를 다 치루고 착한 선행을 쌓아서 귀한 가문에 태어 날 수도 있다는 설화등이 그렇다. 그러나 업보사상은 그렇게 비약하지 않는다. 업보사상과 윤회사상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두리라"는 사도 바울의 말뜻대로 심는대로 거둔다는 생명의 진리를 불교적 언어로 섬세하게 다듬어 놓은 것이다.
가장 고전적인 원시불교의 근본교리 중에 십이연기설은 단순한 물리화학적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인과관계도 말하며, 단순한 직선적 연쇄고리의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그것들 상호간의 구조적 상승작용과 복합적 상승작용도 말하고 있는것이다. 여기에 한송이 국화꽃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씨앗과 토양관계만이 아니라, 전우주적 역학관계, 씨앗의 생명력을 지속시켜온 전우주적 진화과정, 태양광선과 우주중력과 습도와 곤충과 바람 , 그리고 그 꽃의 색갈과 향기, 꽃의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감상하는 인간의 시각 후각구조와 감각작용과 심미적 이해작용 등등 억천만가지 요소들의 집합적 결과로서 지금 우리 눈앞에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활동이 인간의 되뇌구조및 그 활동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순수정신의 자기초월적 기능및 활동 그 모두를 인간의 대뇌피질의 회백질 안에서만 일어나는 전자기적 생화학적 반응구조라고만 보는 생물학적 인간관은 인간 정신현상의 전부를 모두 설명해 낼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은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인간마음은 인과율적 법칙만이 아니라 동시성의 원리지배 아래에 있으며, 시공을 넘어 직관, 예지, 텔레파시, 정신감응, 미래예측, 과거기억등등 다양한 비인과율적 현상을 나타내 보인다.
윤회 또는 환생하는 주체는 인간의 진여자성이 아니라, 심의식(心意識) 복합체로서 인간의 경험적 자아인데 그것이 일으키고 남긴 정신적 심인적 잠재력과 그 영향력이 바로 카르마(業)이다. 십이연기설에서 무명이 일으키는 행(sankhara)은 삼라만유를 지어나갈 잠재적 가능성과 그 힘을 말하는데, 업보(業報)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이 행(行)이다. 모든 業들은 곧바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 業이 결실로 나타나기 위하여는 인연생기법이라는 우주적 근본법칙에 따라서 외적 내적 제반조건과 시공간적 인연으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업은 축적되어 어떤 성향으로서 나타나지않고 축적된 업으로 지속한다. 업의 힘은 일종의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요 경향성이며 의지적 힘이다.
불교의 업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우리는 현대 유기체 철학이라고 말하는 화잇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현실적 존재들"(actual entities) 또는 "현실적 계기들'(actual occasions)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무한한 상호 합생과정과 관계성 이론을 참작하는것이 좋겠다. 세계란 하나의 창발적 과정(emergent process)으로서 무수한 가능한 질료에 해당하는 이 현실재들의 창발적 사건이며 생기(生起)이다. "현실적 존재"들이란 "경험의 방울들"(drops of experiences)로서 매우 역동적인 성격을 지닌 에너지의 흐름이며, 느낌 감정 사유체의 흐름이다.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악(prehension)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하면서 다른 무수한 현실재들과 함께 유기체적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어떤 실재적 개별자로서 나타난다. 업사상과 업의 윤회사상은 이러한 화잇트헤드의 유기체 철학구조 안에서 어느정도 불교적 설화형태를 떠나서 현대철학적 시각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불교의 구원론에서 보면 인간이 살아있을 때, 그 자신의 행업과 그가 태어나기 전 그 조상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행업의 결과물로서의 "심의식(心意識) 총체로서의 자아"는 윤회할 수 밖에 없고 그 업보를 남길 수 밖에 없으므로, 그 윤회의 고리를 탈출하여 법성 곧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윤회의 업보와 윤회의 연쇄고리에서 탈출하자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법성 그 자체는 모양도 색체도 없고 그 어떤 속성도 없는 순수존재의 빛이지만, 그 스스로 묘유로서의 만유충만한 존재의 바탈이므로 무한한 존재의 층을 그 안에 스스로 지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 지구인이 살고 있는 이러한 행성에 갇혀있는 존재만 전재하는 것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들어남의 여러가지 다양한 존재의 층은 매유 유기체적인 것이어서, 마치 유기체 몸 안에 횡경막 아래층의 여러 장기들이 있고, 횡경막 위에 심장과 폐가 있고, 두개골 속에 사유하는 뇌세포가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받듯이, 법성의 들어남인 법계(法界) 안에는 다양한 존재의 층이 존재할 수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귀계 - 아수라계 -
지옥계 - 축생계 - 인간계 - 천상계라는 여섯가지 차원의 존재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업보사상이 흔히 잘못 오해되는바 같은 숙명론이나, 결정론이나, 소극적 체념사상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도 퇴돌: 사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
<티벳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고 번역된 티벳 탄트라 불교의 비의적 (秘儀的) 경전의 본래 이름은 <바르도 퇴돌> ( Bardo Thosgrol)이다. 본래 책 이름의 의미는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 이라는 뜻이다. "바르도"는 둘 사이를 의미하는데, 낮과 밤사이, 황혼 때의 어스름한 시간, 이승과 저승의 사이 곧 사람이 죽은 다음 또 다른 다음 세상에 환생하기 까지의 머무는 중간시기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그 기간을 49일간이라고 하며, 그 동안 "심의식 총체로서의 자아"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남는 업보의 주체로서의 개체생명을 중음신(中陰身) 또는 사념체(思念體)라고 부른다. "퇴돌"이란 듣는 것만으로 자유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바르도 퇴돌>의 저자는 지금부터 1,200년전 티벳왕의 초청으로 인도에서 와서 신비불교 경전들을 티벳어로 번역한 파드마삼바바(Padma Sambhava)라고 전한다. 이 경전을 티벳 설산의 동굴 속에서 발견해 낸 사람은 릭진이었고, 발견된 이 경전을 1919년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세게에 최초로 알린 사람은 카지다와삼둡(Lama kazi Dawa-Samdup)과 에반스 웬츠(Evans Wentz) 였다. 칼 융이 말한대로 이 책은 단순한 탄트라 불교의 한 경전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깊이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위대한 정신과학의 책이다.
이 책은 인간 의식의 다양한 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그려내는 온갖 환영과 환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그려내는 허상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의 총체로서의 인간의 의식체"를 넘어선 본래적 "진여자성" 곧 순수한 인간영혼은 눈부신 질리의 빛으로 가득한 진리자체이고 자유자체 이며, 영원한 것 이라는것을 보여 준다.
<바르도 퇴돌>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진여자성" 곧 참된 영혼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아서 환생의 고해를 되풀이 방황하지말고 영원한 자유의 빛을 누리도록 하려는 죽은자를 위한 깨달음의 교훈서이자, 동시에 산자들을 위한 위대한 종교적 작품이다. 현대 인류가 갖고있는 기계론적 생물학적 인간이해나, 개인적 무의식 층만을 인정하려는 프로이드 심층심리학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성의 저 깊은 차원을 열어 보인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프로이트와 그 제자집단이 인간의식의 심층차원을 최초로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분석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전이해적(前理解的) 편견을 비판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하나의 고도로 진화발전한 생물학적 고등동물 이상이 아니라고 보면서 정신적 실재의 영원성을 믿지않은 유뮬론적 정신과 의사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무의식이란 탄생이후 의식에 의해 억압된 비생산적인 심리적 층일뿐이며 치유받아야할 것이라고만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칼 융이 말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층, 곧 무한한 잠재능력과 창조성을 지닌 정신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간영혼의 중심부에서 빛나는 신성의 실재성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르도 퇴돌> 곧 <티벳 死者의 書> 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한 후 겪게 되는 중간상태 기간에 크게 3단게로 정신적- 심리적 의식체가 겪게 되는 경험현상을 들려 주면서 죽은 자로 하여금 바른 "진여자성"을 따라 진리의 참빛으로 나아가 자유와 행복을 얻기를 권하는 죽은자를 위한 책이다. 티벳에서는 마지막 숨이 넘어가면, 승려나 가까운 정신적 스승이나, 또는 가족 친구 중 연장자가 죽은 사람의 귀에다가 이 <티벳 死者의 書>를 읽어주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이 사후에 곧바로 시작되는 정신적 사념체(思念體) 또는 중음신(中陰身) 또는 일종의 유체(幽體)가 겪는 세단계 또는 세가지 차원의 경험을 설명한다. 이 책은 사후세계의 중간상태에 있는 영혼이 겪는 체험을 불교적 패러다임에 담아서 설명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영혼을 정화하여 본래적 영혼의 모습 즉 불교적으로 말해서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영원한 법성(法性)에 일치함으로서 법계(法界) 곧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진리 세계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첫단계: 치카이 바르도 .....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 ... 광명한 흰 빛으로 둘러 싸이는 경험이다. 흰빛은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의 지혜의 빛이며, 인간의 진여자성에서 나오는 빛의 경험이다. 그러나 치카이 바르도 상태에서는 사념체(shepa)가 아직 뚜렷한 의식상태가 아닌 정신이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겪는 천진난만한 낙원상태와 같은 빛의 경험이다.
마음, 영혼, "지켜보는 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사념체 쉐파가 텅빈 충만과 투명한 희빛을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경험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때 죽은자는 그 빛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과 자기자신의 진여본성이 하나인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때, 최초의 투명한 빛 안에서 텅빈 충만의 백색광명을 자신과 합일시키고 그 안에 머물 때 그는 자유하게 된다.
둘째단계: 초에니 바르도 ....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게 되는 바르도 ... 백색광휘, 황색광휘, 적색광휘, 녹색광휘의 빛을 동반하면서 나타나는 네명의 위대한 불교적 보살들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이 각각의 빛들은 지혜, 평등, 분별력, 원만성취를 상징하는 "진여자성"과 "법성"의 내면의 빛이다.
그러한 황홀한 빛과 보살님들의 현현을 체험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실재라고 말한다면 객관적 실재이지만, 죽은자의 정신적 내면적 "진여자성"이 자신의 내적 본질을 객관화하여 투영하면서 나타나는 정신적 환영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만약 죽은자가 기독교인이라면 불교적 보살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성자들이나 가브리엘이나 미카엘등 천사장을 체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에니 바르도의 상태에서는 死者는 심령체이지만 좀더 뚜렷하게 빛과 색과 소리를 경험하게 된다.
셋째단계: 시드파 바르도 ....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 ... 치카이 바르도와 초에니 바르도 상태에서 각종 빛에 조명받아 영혼이 자신의 본래적인 "진여자성"을 깨닫고 진리자체와 하나됨으로서 자신을 해탈하면 되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中陰身 곧 사념체는 보다 본능적이며 감각적이며 성적 쾌감과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나 고통을 경험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물론 이 경험도 마음 곧 죽은자의 사념체가 스스로 정신의 내면에서 집단적 무의식이 경험하는 환영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육체를 입고 환생하려는 욕구에 이끌려 인연이 닿은 새로운 생명탄생체와 결합하여 육체를 입고 새로운 생명의 윤회를 탄생과 함께 계속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개관 해본대로 <티벳 死者의 書>는 티벳불교의 한 경전으로서 특히 죽음을 맞이한 가정에서 죽은자로 하여금 인간자신의 "진여본성"이 곧 영원한 법성이요, 불생불멸하는 실재임을 깨달게 함으로써 윤회의 고해를 벗어나게 하려는 책이다. 죽은자의 해탈을 돕는 안내서요 불생불멸의 길을 가도록 돕는 죽은자를 위한 안내서이다. 물론 이 책은 불교적 경전이기 때문에 불교적 용어와 불교적 이미지로 가득 체워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위대성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는 "진여본성"으로서 불생불멸하다는 것과, 인간의 심령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이미지와 개념들은 그것 자체로서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마음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신적 환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기신론의 근본주제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대승불교의 실재관에서 보면 궁극적 실재인 "하나의 마음" (一心)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존하고 비움과 충만이라는 역설적 통전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一心은 인간에게 체험됨에 있어서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진여문(眞如門)과 변화하는 현상계로서의 생멸문(生滅門)으로 두 측면에서 파악되는데, 전자는 반야심경에서 공(空)이라고 하고 후자는 색(色)이라고 기호화 한다. 공과 색, 진여문과 생멸문을 깨달은 자리에서 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실재가 아니라 법성의 양면성이다.
삶과 죽음도 그렇게 현상계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관계 속에서, 중도에서 파악해야 한다. 상대적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하나의 본래적 큰 생명, 영원한 진여본성의 양면성에 불과함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불교는 그렇게하여 죽음을 정면대결함으로서 죽음의 실체가 사실은 허깨비인것을 �힘으로서 다시 말해서 죽음이라는 현상에 붙은 개념과 경험적 이미지를 죽임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죽음관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3] 기독교의 죽음이해
예수도 석가모니처럼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하여 자세한 논리적 설명을 남겨놓지 않으신 것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 현세의 삶이 끝난 뒤에도 영원한 생명이 삶이 실재한다고 믿으시고 또 그렇게 가르치신 교훈은 여러곳에서 나오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념을 지니신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의 관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것이였지만 그 영원한 생명이란것이 반드시 사후의 생명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한 생명, 큰 생명, 본래적인 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한 강도의 간청에 대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라고 말씀했으며,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고,산자의 하나님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누가20:38)라고 말하면서 죽은 뒤의 생명은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이생의 그런 상태의 연장세계가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자신의 숨을 거둘때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라는 표현들을 보면 예수도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신앙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을 가지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주음에 대한 신념은 도리혀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해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26)라고 말했을 때, 무슨 육신의 몸둥이가 영원히 불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속 생명, 영혼, 진아(眞我)에 해당하는 참생명은 겉모습으로 사람의 육신의 생명이 유한하여 부셔지더라도 영원히 산다는 신념이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도, 내 속에 참 생명, 죽음이 죽일 수 없는 참 생명이 영글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본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경이 말하는 사생관은 삶과 죽음문제에 관한 종교철학적 사색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고, 땅위에 엄존하는 생명을 살리려는 힘과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려는 힘과의 겨룸이 문제인 것이다. 죽음이 관심이 아니고 죽임의 문제이고, 삶 일반이 관심이 아니고 살림의 문제이다. 사랑, 정의, 진실같은 근본 생명의 질을 중심으로 해서 매우 역동적인 살림과 죽임의 세력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죽이는 세력과 연관시켜서 이해한 것이고, 그러므로 죽음은 마지막엔 극복되고 정복되어야 할 세력으로서 초대 기독교들은 이해하였던 것이다.
죽음체험 이후의 생명의 지속 가능성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로스의 죽음 이후의 신비한 몸에 관한 이야기가 의미있게 들린다. 그 분이 "죽음 이후의 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이다"라고 말 할 만큼, 의사로서 또 학자로서 강조하고 있다. 그 분의 그런 신념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삶과 죽음 이후의 신념에 관한 내용과 내적으로 많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목회서신 속에 다음과 같은 그의 신념이 피력되어 있는 점과 몹시 통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 후서 5:1-3)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름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몸을 입은 것 같이, 또 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상을 입을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40,4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후 생명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히브리적 전통에 선 바울과 헬라적 전통에 선 후자의 영생신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 본성 속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불사체로서 영혼이, 순수 정신적 실체로서 영원하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신념에서는, 인간존재를 순수히 사멸하는 흙덩이 곧 장막적 존재라고 보는 것이고, 속 사람이 영생하거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 것은 인간자기자신 속에 있는 스스로 자존하는 불사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덧입혀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순수 정신적 실체의 불멸성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몸"을 갖추는 불멸신앙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물론 이 땅 위에서 가지고 살던 혈과 육으로 구성된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몸이 그대로 지속하는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니, 요사이 표현으로 하면 그 생명체의 존재방식과 구성원리와 구성체의 소재가 다르다는 말이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나 사도바울이나, "영혼이 불멸한다"는 명제적 신념은 동일하지만, 그 불명성의 근거와 "몸"에 대한 신념이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인간 영혼자체가 지닌 불멸적 속성 때문에 불사하여 영존한다는 철학적 신념이지만, 바울은 모든 생명의 근원자이시며 지탱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영적 생명체를 선물처럼 벌거벗는 무와 같은 인간영혼에 덧입혀주시기 때문에 불멸적 영생의 생명을 지속한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신앙이다.
위에서 말한 사도 바울의 사후에 덧입혀지는 새로운 선물로서의 "영적 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은 엘리지베스 로스박사가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가 수많은 임사체험자들을 상담하고 난 후 연구결과 말한 내용과 몹시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 위에서 장님이었던 사람이나,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나, 어떤 형태이든지 지체불완전한 사란도, 사후 생명체 경험을 한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온전한 몸"을 구비한 자기생명체를 보았다고 했다.
순전히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 인관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로스박사의 이러한 임상증언이 지체불구자들의 무의식적인 자기소망의 투영이거나 사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사후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신념은 단순한 희망적인 심리의 투영이거나, 개인의 육체성에 관한 집념에서 해탈하지못한 중생들의 카르마 결과가 아니다.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로스 박사는 그것은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지식의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후 생명현상과 죽음이해의 패러다임이 다른 이유
한국인으로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적 종교의 위대성을 늘 느끼면서도,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 생명에 관한 너무나 대조적인 두가지 패러다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학문적 관심이 된다. 자연과학자들에게 있어서 "빛의 본질"을 밝혀보려는 과학적 실험방법과 실험도구에 따라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그것을 "빛의 이중성" 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처럼 "궁극적 실재", "삶과 죽음", "영혼"등을 이해 할 때도, 기독교는 입자형태의 패러다임으로서 그것을 이해하려하는 유형적 종교라면, 불교는 파동형이라고 설명해 볼 수 있는것이다.
입자형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주체적 인격간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파동형은 빛이 온누리에 파동치는 원융회통성이 강조된다. 그것이 기독교를 지나치게 인격적종교, 영혼의 불사성에 집차하는 듯한 종교로서 오해하기도 하고, 불교는 비인격적 공(空)이나 무(無)의 종교로 일방적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빛이라는실재 안에 입자성과 파동성이 함께 존재하듯이 깊이 신앙체험의 단계로 들어가보면 기독교 안에도 파동성이 있는것이고, 불교 안에도 입자성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방식에 의하면, "몸"의 개념은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리적이 통일체로서 나타나는 생명의 총체성에 대한 이름이다. 사람은 몸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몸의 개념을 중요시 한다. 몸에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기능과 영광이 다른 다양한 몸의 존재방식이 있을수있다고 보는 것이 바울의 견해였다. 말하자면 천사들도 몸이 있는 것이고, 사후의 망자도 단순한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신비한 몸"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전생에 내가 만든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다양한 인과적 영향이라고 이해하는 "업보사상"을 갖지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총체적 책임체로서 "몸의 부활신앙"을 갖는 것이다. 바울의 해설에 의존하지만, 사후의 신령한 "몸을 덧입는 일"에 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가지 견해가 혼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된다고 봐야하겠다. 여하튼 죽음이후에 덧입는 새로운 몸, 새로운 생명의 형태변화에 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단계의 결정적 계기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한번은 각자의 생을 마감 할 때, 덧입는 "영적 몸"으로서의 영혼의 불사체이고, 또다른 하나는 만물의 종말적 완성의 날에 만유가 하나님의 영광안에서 변화하고 온전한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이다. 기독교에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자연의 질서로 보지않고 극복되어야 할 것, 심지어 "마지막 원수"라고 까지 본것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불의한 죽음의 세력이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독소와 죄의 권세" 때문인 것입니다.
사후 빛의 체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로스박사가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렇게 증언하고, 수많은 죽음체험을 하고서 깨어난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적 경험은 환한 빛을 경험했다는 증언이 있다. 죽음 직후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나 염라대왕 앞에 끌려나 간다는 한국 민담의 부정적 이야기 보다 우선 밝아서 좋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사후의 빛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표상화 할수 없도록 금지되어있는데, 오직 하나님의 실재를 "빛 의 근원, 또는 "존재와 생명의 빛 그 자체"로서 상징하고 또 빛체험을 하는곳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후의 영혼이 환한 빛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 자기 생명의 근원자와 대면하는 경험, 다시 은총의 빛에 감싸이고 용납된다는 경험, 자신의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노출된다는 경험이나 신념을 상징하고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절대자 하나님과 천상의 신령한 존재의 현현경험엔 항상 빛이 동반된다.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험이랄지,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경험한 것등이 그 예이다. 하나님은 빛으로 상징된다.(요한일서 1:5, 계시록 22:5) 로스의 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한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들은 "제눈에 제 안경"이라고 하는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붓대롱을 통하여 하늘을 보지만, 다른 사람이 쓴 색 안경도 있을 수있고, 다른 사람의 붓대롱도 있으니까, 내가 본 하늘이 전부라는 독단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작은 하늘도 분명히 하늘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람의 모든 인식과 관념과 사상은 그가 몸담고 자라난 문화, 역사, 전통,언어, 지질기후풍토에서 형성된 '마음의 스크린'을 통하여 경험된다는 일종의해석학적 깨달음이 중요한 인간성숙도의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기독교는 죽음의 이해를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죽음을 생물학적 한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인간생명의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원창조 질서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의 빛 앞에서 볼 때 극복되어야 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 둘째,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안에서 볼 때, 단순히 생물학적-정신적 한 개체가 종말에 이르고 해체되는 중성적 과정이 아니고 하나의 엄연한 생명에 대한 횡포, 가차없는 지배권세, 공격적인 세력, 죽임의 독화살, 쏘는 가시로서 파악되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는 인식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분리하는 그런 자연적인 분리현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인간의 영혼(soul)은 육체(body)와 통일체를 이루어 살아있는 생령으로서의 몸(SOMA)을 이루며,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여 숨을 거둘때, 그 육체는 자연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잠정적으로 남아 어떤 사후의 생명적 경험을 한다고 보지만, 그 영혼이 플라톤의 철학에서처럼 본래부터 천상에 있었던 신적존재이거나 전생(前生)을 지닌 윤회하는 영혼이라고 보지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이 잠정적으로나마 보존하시고 변화시키시고 궁극적으로는 영적몸을 덧입도록 하지 않으면 언젠가 살아져 버릴 것, 그림자같이 덧없고 힘이 없는것, 잠정적인 정신적 실재라고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의 속생명은 혼백(魂魄)일 뿐인데,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혼(魂)은 영혼(靈魂)으로서 속성을 지니며 하나님 앞에 존재하고 영혼으로서 기능한다.
기독교 복음을 증언하고 있는 신약성경자체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지평융합하는 삶의 토양 속에서 증언, 전승, 편집되었기 때문에 죽음이후 인간생명의 상태에 대한 언설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예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사에서 처럼 죽은자는 잠들었다가 마지막 종말의 날에 깨어날 것이라고 믿는 마리아의 고백(요11:1-24)이 있는가하면, 죽음이후에 곧바로 낙원에 들어간다는 신앙도 있다(눅23:42-43). 바울자신에게 있어서도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의 영향으로서 임박한 종말의 날에 죽은자의 홀연한 부활신앙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후 주와 함께 있을 것을 믿는 천국신앙이 있다.(고전 15:31,살전 4:14-18, 고후5:1-2,12:2-4)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생관에 관한 기독교신앙의 기본적 입장은, 하나님만이 영원 자존하시는 창조주이시요 영존하시는 전능자이시며, 그 피조물에게 긍휼과 지비를 베푸시고 피조물중 특히 그의 형상을 닮아 지음받은 인간을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생명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영원한 불멸성과 영원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고, 영원하신 자존자의 선물이며 초청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성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이 지닌 가장 깊은것,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것마져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땅에 속하고 혈과 육에 속한 것이지 그것 그대로 영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 이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속 생명의 질적변화와 영적생명으로서의 형태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않된다고 본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피조물의 한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피조된 것이기에, 영원은 시공간적 삶의 연장이거나 무시간적 영원이 아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고 모든 피조적 시간의 창조적 모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묵시문학적 종말신앙이 지배적이었던 1세기에 신약성경이 완결되었고, 종말과 만물의 성취, 그리고 죽은자의 부활이 임박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후 생명에 관한 섬세한 가르침이나, 종말이전의 죽은자의 중간상태에 관한 자세한 목회적 서신이나 교육지침을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은 사후 곧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나아가 그의 땅위에서의 언행과 믿음의 유뮤에 따라 영생과 영원한 죽음을 판가름해야하는 단순하고도 단조로운 사후생명에 관한 패러다임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교부시대 이레네우스 교부의 만유회복구원론(Recapitulation Theory)이 좀더 발전하지 못하고, 중세 로마카토릭의 연옥설 교리로 굳어져 버리게 된것이 아쉽다. 그래도 기독교 교파중에서 죽은자를 위한 어떤 구체적 목회신학적 의례를 베푸는 교회는 카토릭교회 뿐이다. 개신교에는 인간삶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에 관한 신학적 이론과 예배학적 의식이 매우 덜 발달된 종파이다. 여기에 개신교신학의 영성위기가 있다.
죽음이라는 엄숙한 현상을 사실그대로 받아드리는 자세가 우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너무나 자명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때, 죽음의 심각성도 살아지고 삶의 진지성도 약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죽음이 모든 인생의 마지막이고 끝이라고, 그 이후엔 개인적 생명으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해도 삶의 진지성과 신비로움이 손상 당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는 그것을 '역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는 죽음을 먼저 진지하게 받아드릴 것을 요청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부활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기독교의 이해
칼 바르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고린도전서 전체의 근본주제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과 초대 그리스도교 케류그마의 핵심적 멧시지라고 보았다. 그리고 15장에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어휘들, 예들면, "죽은자의 부활", "영적 몸" ,"육체적 부활" , "변화된다","하늘에 속한자의 영광"등등이 기독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어휘임을 말하고 고린도전서 15장의 바른 이해야 말로 기독교가 헬라철학의 영혼불멸설, 영육이원론, 정신적 영적 영생론, 윤회 환생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기독교의 근본멧시지라고 보았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 증언하려는 복음의 근본멧시지는 인간이 지니는 불멸성에 대한 종교적 희구나, 철학적 변증이 아니다. 여기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역사와 존재세계의 영속성이나 불멸성이나 신성성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다스림과 영광의 성취를 말하려는 엄숙한 그러나 기쁜 증언이다. 기독교가 말하려는 영원한 생명은 어떤 형태에서 말하든지 단순한 이생의 연장으로서의 영생이 아니다.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복음의 세계와 이 세상의 종교적 윤리적 철학적 세계가 충돌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아름답게, 자연스런운 현상으로 볼수 없다. "죽음의 횡포"와 "죽음의 쏘는 가시"와 "죽음의 파괴적 힘과 그 추함과 죽음의 세력"을 바로보고, 극복되어야 할 마지막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엄숙한 사실과 죽음 그 자체의 횡포와 협박이 얼마나 무겁고 절망적인 것인 가를 똑바로 진지하게 인식해야 한다. 부활신앙은 이 세상과 자연적 생명의 영생과 진리를 밝히는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행하신 놀라운 개입과 일으키신 사건과 약속과 승리를 증언한다. 죽은자의 부활에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고 행동을 취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지 인간이나 자연이나 존재 그 자체나 막연한 무한자가 아니다. 하늘과 땅을 지은 자, 주 하나님이다.
바울은 부활생명의 이해를 위한 유비로서 씨앗이 죽고 새로운 형태와 속성을 입으면서 씨앗으로부터 나오는 식물의 출현속에서 불연속적인 연속성, 임계점을 거치면서 전혀다른 존재를 덧입는 생명의 형태변화를 본다. 물론 부활생명은 식물의 씨앗이 죽고 그 속에서 새싹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존재의 유비"로서 설명 될 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할 수없이 사용하는 유비요, 비유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 유비가 말하려는 촛점은 변화, 불연속적인 연속성, 새로운 몸의 덧입음, 새로운 속성의 출현과 존재의 다양성과 각각에 걸맞는 영광의 질적차이 등이다. 바울은 말한다.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않을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44)
칼 바르트는 부활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를 입을 때, 비육체적인 신령한 정신적 실체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가 믿는 부활생명은 땅 위에서 몸안에 살던 영혼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영혼의 그자리에 하나님의 영(pneuma)이 직접 임재함으로서 "영적인 몸"(soma pneumatikon)으로 질적변화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유한한 생명의 榮化"가 이루어 지는것을 말한다.
"영적인 몸"은 처음 아담이 창조받았던 생기에 의해 만들어진 흙으로 된 몸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받은 몸이고 새롭게 덧입은 몸이다. 그것이 기독교가 마지막으로 대망하는 종말적 영생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기다리는 영혼들도 아직 이 영적몸으로 부활의 몸을 덧입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모든 만물과 산자와 죽은자들은 십자가에서 상처받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 몸이 덧입었던 "영적인 몸" 곧 처음열매로서 나타난 부활의 그 영적 몸을 덧입기를 기다리며 아직도 시간 안에서 신음하는 나그네 삶 속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벌써 그 부활생명의 빛 안에서 생동하는 생명의 빛과 능력을 맛보며 성령의 위로와 약속 안에서 산다. 그 희망은 막연한 약속이나 근거없는 소망이 아니라, 이미 처음 익은 열매를 맛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 생명 안에 감추인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챤 신앙의 본질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도 모두 '은총의 선물'로 보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하려는 인생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살게된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생명을 감싸고 있는 두 괄호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괄호이지만, 하나님은 그 괄호를 또 감싸고 있는 더 근원적 괄호이고 존재와 생명의 본래적 가슴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자기 생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귀중한 생을 알차게 영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기실현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4] 에필로그
불교가 불생불멸하는 속성을 지닌 진여자성(眞如自性)을 회복함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구원 패러다임이라면, 기독교는 생명의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주(主) 하나님 신앙 위에 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켜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첫열매 위에 굳게 선 "영적 몸을 덧입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불교와 기독교 그 두 종교의 영생관은 같지 않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적인 마음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곧 그대로 불생불멸하는 것이며, 그 회복은 종말의 날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나 깨달음을 통해 곧바로 회복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의 지성소의 속 사람 영혼은, 그것자체가 불생불멸하는 영원자가 아니고 궁극이전의 신령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변화받고 영적인 몸을 덧입어야 할 것으로 파악 된다. 죽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극복되어야 할 인간존재의 규정성이라고 파악하는 점은 불교와 통하지만, 불교와는 다르게 죽음이 갖는 독소와 쏘는가시 곧 죽음이 휘두르는 죄의 권세를 감지한다. 죽음은 없는것이 아니고 극복되어야 할 심각한 원수로서 파악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무시할 수 없는 두 종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이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된 불교신자와,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지금 성령의 은총 안에서 맛보며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펼쳐내는 삶의 열매와 삶의 행태는 놀랍도록 서로 통한다는 점이다.
그 통하는 모습은 자유한 모습, 생사를 초월한 모습, 감사하고 봉사하는 삶, 삶의 현실성을 더욱 뚜렷이 느끼고 성실하게 사는것,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삶등으로 나타난다.
왜 종교의 유형적 특성은 그렇게도 다른데, 위대한 세계적 보편종교에 귀의하는 참 신앙인의 삶의 구체적 열매는 그렇게 닮고 서로 통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하나 아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은 역사적 종교로서의 불교나 기독교보다 더 크고, 그 양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분이며, 빛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나타내면서도 하나의 빛이듯이 , 진리 그 자체이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는 불교적 표현으로서 법성이나 진여자성으로서 이해되기도 하고, 새로움을 창조해 가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삼위일체 주(主) 하나님으로서 이해되기도 하는, 곧 모든 역사적 종교와 신학과 경전을 넘어서는 신비자라고 밖에 달리는 이해 할수 없다.
세계관적으로 말하더라도,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가 지난 300년간 풍미해 왔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관 인생관이 이제 어느정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세계와 생명현실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 보려는 발상법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신과 물질과 영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열린 마음, 그리고 그런 새로운 사상에 대한 철학, 물리화학, 의학, 심리학, 종교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간의 학제간 교류와 공동연구등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죽음이후의 생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현세적 삶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책임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긍정적으로 보며, 생과 사를 동시에 포괄하는 더욱 넓은 의미에서의 참다운 큰 삶을 회복하려는 성숙한 현대인들의 자기성찰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죽음을 외형적인 면에서 보면 유한생명의 끝이지만, 내면적인 면에서 보면 자기 생명의 옹근 열매가 알곡으로 영글어 껍질을 깨트리고 나오는 것이고, 알로 말하면 알을 깨치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문제는 각자 자기생명의 속알이 진실과 사랑과 자비와 어짐으로 옹근열매로 익어가는가의 여부이다. 장지(葬地)문제나 상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죽음이후까지 이 세상의 권세와 부를 연장해 가지고 갈 수있기라도 하는양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 딱한 사람들이다. 이 땅 위에서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이웃을 외면하고 살다가, 죽음에 임하여 억울하게 그 모든 소유를 두고 가는 것이 아까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보다는 소박하게 살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고 위대하게 살고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기의 죽음뒤 시신을 화장시키지 못하게 하고, 평소 빚지고 살았던 산속의 생물들에게 먹이가 되도록 공양하는 선승(禪僧)들의 초연한 자세, 의학발전을 위해 해부학 자료로 시신을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들, 장기 이식자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여 수많은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시신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기념관 속에서 항구보존하려는 작태는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날 뿐아니라, 매우 역겹고 추해보인다.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어려운 종교나 철학적 논리를 운위하는 것보다 삶의 실천을 통하여,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여 두려움없이 죽음을 넘어서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 그들이 귀의하는 종교가 다를 수 있고,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신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의 삶과 생명은 죽음으로 다 끝나는것이 아니며, 죽음을 능히 극복하고도 남는 죽음보다도 더 강한 능력이 이 우주에는 존재한다는 것, 그 힘은 어쩌면 진리, 사랑, 자비, 어짐, 진실, 정의, 우정 등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322651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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