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거스님 유식30송 > 제 18 강
제 27 송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전(現前)의 경계에 어떤 소견[少物]을 세워 이것을 유식성(唯識性)이라고 여기면 이는 이미 소득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유식에 정주(定住)함이 아니다.
전 송(頌)에서 이미 수행자가 발심하여 결택식(決擇識)을 일으켜 유식성(唯識性)에 주(住)하고자 희구함을 자량위(資糧位)라 했으며 이 송(頌)에서는 발심을 더욱 분발하여 증진수행(增進修行)할 것을 설명하여 이를 가행위(加行位)라 한다.
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여 가행정진(加行精進)할 것인가를 안다면 이미 수행의 바른 길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수행의 도상(途上)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이라는 관법(灌法)을 닦아 소취(所取)인 경계(境界)가 공(空)함을 깨닫고 거듭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 : 마음경계)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함을 깨닫는다.
이렇듯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증득(證得)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4선근(四善根)의 위(位)를 체험하게 되는데 4선근(四善根)이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 등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향상된 도[見道]로 취향(趣向)해 감으로써 4선근(四善根)을 체험하면서 점차 무루지(無漏智)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먼저 4심사관(四尋思觀)을 말하자면 제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함을 말한 것으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명심사관(名尋思觀) :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중생(衆生)·축생(畜生)·사물(事物)은 모두 명칭이 있으나 명칭은 본래 가립(假立)된 것일 뿐 사물의 본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은 이미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가령 책을 책이라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였으면 다른 이름이 되듯이 모든 명칭은 가립(假立)했을 뿐 실(實)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항상 명(名)으로 인하여 집착을 일으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생기고 서로 다투고 모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직 가명(假名)일 뿐 실(實)이 아닌 명(名)에 대해서 응당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필경 공(空)임을 깨달아 명상(名相)에 동하지 않고 실(實)에 주하는 것이 명(名)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는 명심사관(名尋思觀)이다.
사심사관(事尋思觀) : 사(事)는 작사(作事)의 뜻으로 일체 사물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5온(五蘊)·12처(十二處)·산(山)·하천(河川)·사람·짐승·집 ·가구·결혼·상례(喪禮)·농업(農業)·공업(工業) 등이 모두가 사(事)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이나 형식 등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유식에 의해서 발현(發現)되므로 인연과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찰나에 변멸(變滅)하므로 당체가 곧 공(空)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허망하게 변현(變現)된 사(事)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그 외형적 가상(假相)에 미혹되지 않음을 사심사관(事尋思觀)이라 한다.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 : 자성(自性)이란 매1법(每一法)과 1신상(一身上)의 자체성(自體性)이며 독립성(獨立性)이다. 각각의 법(法)과 개체(個體)마다 그 독립성이 존재한다면 이 독립성은 다른 법[他法]의 자성과는 공통되지 않는다. 반면에 각각의 법에 모두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이 보편성은 서로 같아서 타법(他法)의 자성(自性)과 공통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성은 본래로 무소유이며 필경공(畢竟空)이므로 오로지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허환의 집착을 여의는 것을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이라 한다.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 : 차별이란 명(名)과 사(事) 갖가지 차별상(差別相)을 말한다. 명(名)의 차별(差別)에는 음(音)과 의(義)가 있고, 사(事)의 차별(差別)에는 대소(大小)·방원(方圓)·고저(高低)·선악(善惡)·유루(有漏)·무루(無漏) 등이 있으며,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부동(不同)함과 무량(無量)한 차별(差別)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할 때 제법(諸法)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차별상(差別相)의 실상을 깨닫는 것을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이라 한다.
이상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서 얻어지는 지혜를 4여실지(四如實智)라 하는 바 여실(如實)이란 실성(實性)과 같다는 뜻으로 제법(諸法)의 실성(實性), 곧 진여(眞如)를 말한다.
모든 법(法)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지혜를 얻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실로 진여실성(眞如實性)과 같아 공(空)이며 무소유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을 여의므로 근(根)·진(塵)·의 경계가 아니요,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일 뿐이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음으로써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고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4관(四觀)·4지(四智)는 유식(唯識)을 수행하는 기본방편이다.
수행자가 열심히 심사(尋思)하지만 아직 결택(決擇)되지 않았을 때를 관(觀)이라 하며 이러한 과정을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 지(智)가 생(生)하고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요해(了解)하여 성공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을 과위(果位)라 한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모두 유식(唯識)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識)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무상지(無上智)라 하며 무상지는 모든 법의 실성(實性)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실지(如實智)라 한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어서 일체 허망분별심을 여의는 것으로 불도(佛道)의 본분(本分)을 삼는다.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수행함에 반드시 위차(位次)가 있으니 이를 4선근(四善根)이라 한다. 4선근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이다. 이 4위(四位) 중에서 난위(暖位)와 정위(頂位)는 4심사관을 닦아 일체만법의 경계인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관(觀)하고 인위(忍位)와 세제일위(世第一位)는 4여실지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임을 관(觀)하는 것이다. 4선근을 약설(略說)하면 다음과 같다.
난위(暖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하품(下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난위(暖位)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 네 가지가 모두 분별식에 의해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위(位)는 광명난법(光明暖法)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난위(暖位)라 한다.
정위(頂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상품(上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정위(頂位)라 한다고 했다. 관(觀)이 더욱 깊어져서 광명이 증장되고 지혜가 향상됨을 말한다. 이 위(位)는 명상(明相)의 광염(光炎)이 더욱 치성하기 때문에 정위(頂位)라 한다.
인위(忍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인순정(印順定)에 의해 하품여실지(下品如實智)를 닦아 소취(所取)가 없는 곳에 정념(定念)을 이루고 능취(能取)가 없는 가운데 또한 정념(定念)을 즐기므로 인위(印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정념(定念)을 이루고 즐기므로 아직 인력(忍力)이 더 필요하므로 인위(忍位)라 한다.
세제일위(世第一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여실지(上品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깨달아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견도위(見道位)에 이르러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을 이루었고 이를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이미 상품여실지를 발하여 능취와 소취가 모두 공(空)임을 인지(印持)했으나 세간법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세제일(世第一)위라 한다.
송(頌)에 입소물(立少物)이라 한 것은 소견(所見)을 말한다. 마음은 원래 언설·심연(心然)·형상(形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소물(少物)을 세워 유식성이라 여긴다면 유식실성(唯識實性)일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글은 월간 '불광'지에 연재 된 혜거스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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