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거스님 유식30송 > 제 16 강
제 23 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곧 이 3성(三性 :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에 의지하여 상(相), 생(生), 승의(勝義)라고 하는 3무성(三無性)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설(說) 하시기를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하신 것이다.
이 송(頌)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음을 확고히 드러낸 송(頌)이다. 중생이 나[我]라고 여기는 심식(心識)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3성(三性)의 시작이 경계를 의지하여 생기(生起)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경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본송(本頌)에 3무성(三無性)이라 하여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싯돌이 부딪쳐야 불이 일어나듯 마음도 경계에 의해 일어나므로 3성(三性)의 마음이 본래 없다 한 것이다. 경계에 의해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계에 부동(不動)하고 계탁분별(計度分別)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되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거니와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하여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어 윤회(輪廻)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3무성(三無性)이라면 마음은 왜 존재하는가. 그 근원을 규명해 보면 부싯돌이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존재하지 않지만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자성(自性)에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 하고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마음을 집착하고 계산하는 마음을 변계소집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이 3성(三性)의 소이연(所以然)이 연(緣)이요, 연(緣)은 실(實)이 아니므로 3무성임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집착을 끊을 수 있고 경계에 부동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밀의(密意)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이 의미가 깊어 참된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이 심히 깊어서 입지(入地)하지 못한 수행자가 헤아려 알 수 없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밀의로 설하셨다고 한 것은 경계에 의해 마음이 생기(生起)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지 않는 3성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의 실(實)인 줄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을 위하여 3성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임을 설(說)하시어 일체만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3성을 세워 마음의 생처(生處)를 설(說)하시고 3무성을 세워 3성에 대한 집착을 파(破)해 주신 것이니 이것이 곧 밀의(密意)에 해당된다 하겠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마음의 주처(住處)를 3성으로써 밝히시고 범부가 곡해(曲解)하여 제법의 자성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할까 염려하셔서 3성의 자리가 본래 무성(無性)임을 설하시어 제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무성의 자리는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을 파(破)할래야 파할 것이 없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자리인 것이다.
제 24 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은 일체 모든 상(相)이 무성(無性)인 상무성(相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인 무자연성(無自然性)이요, 최후는 이전에 집착한 아(我)와 법(法)을 멀리 여읜 실성(實性) 곧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다.
3성(三性)에 의해 3무성(三無性)임을 이미 전송(前頌)에서 설명했고 본송(本頌)에서는 3무성의 구체적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의식이란 밖에서 주입되어 존재하게 되는 바 이를 계탁(計度)하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고 계탁하지 않으면 원성실(圓成實)이 되는 것은 3성이 본래 무성이기 때문이다.
1구(一句)의 상무성(相無性)의 뜻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하여 변계소집성 자체가 상무성(相無性)임을 드러낸 구(句)이다. 변계소집성이 왜 상무성인가?
변계소집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보리열반(菩提涅槃)이 법계(法界)에 충만하지만 그 실(實)을 보지 못하고 보리열반을 따로 찾는 것 등이 모두 변계소집이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을 상무성이라 한 것이다.
제2구(第二句)의 무자연성(無自然性)은 생무성(生無性)의 뜻으로 의타기(依他起)의 마음이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생무성임을 밝힌 구(句)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뜻은 만법은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다른 갖가지 반연을 의지해서 생기(生起)하므로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따라서 의타기의 성(性)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인연생(因緣生)이 되는 것이다.
무자연성(無自然性)의 자연은 천연(天然)의 뜻으로 모든 법은 천연생(天然生)이 아니라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연(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生)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가 되고 의타기에 자성이 없으므로 무자연성 또는 생무성이라 하는 것이다.
끝으로 3·4구(三·四句)에 이전에 집착한 바 아법(我法)을 멀리 여읜 성(性)이란 승의무성(勝義無性)을 말한 것으로 승의무성이란 원성실(圓成實)이 무성임을 밝힌 송(頌)이다. 원성실은 의타기로 생기한 마음을 계탁(計度)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찰나생멸(刹那生滅)의 이치에서 불변부동(不變不動)하고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성(性)이기 때문에 제1의제(第一義諦)에 속하며 이를 승의제(勝義諦)라 한다. 승의제란 본래 공(空)하여 무소유이므로 유와 무를 초월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제(世俗諦)를 수순(隋順)하므로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무자성(無自性)의 성(性)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후유원리전(後由遠離前)이라 한 이 구(句)에서 후(後)라고 한 자(字)는 원성실성을 말한다. 그것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다음이라는 뜻이 되고 전(前) 자(字)는 다음 구(句)의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의 전(前)이라는 뜻이 된다.
이 구(句)의 뜻은 변계소집하여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에 집착하던 마음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이며 원성실이 곧 제1의제(第一義諦)이며 승의(勝義)인 것을 이해해야 되는 구(句)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름지기 연생무성(緣生無性)임을 깨달아 의타(依他)하여 생기(生起)한 제법(諸法)이 가(假)인 줄 알아서 망령되이 변계소집한 아(我)·법상(法相)을 멀리 여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승의무성(勝義無性)의 실지(實地)를 인식하여 원성실의 진성(眞性)을 구명(究明)하는 것으로 본분(本分)을 삼아야 한다.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誠實性
이것을 모든 법의 승의(勝義)라 하며 또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항상 모든 법의 실성(圓性實性)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유식(有識)의 실성(實性)인 것이다.
이 송(頌)은 전 송에서 말한 상무성(相無性)·무자연성(無自然性)·아(我)·법(法)을 멀리 여읜 승의무성(勝義無性)을 이어서 유식의 실성(實性)을 밝힌 것이다. 유식의 실성(實性)을 승의(勝義)라 하는 것은 만법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면할 수 없지만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 곧 진여법성(眞如法性)만이 영원하기 때문에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다. 승의란 세간세속(世間世俗)의 어떠한 이치보다 깊고 오묘한 이치를 말한다. 이러한 승의(勝義)는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세간승의(世間勝義) : 5온(五蘊)의 이치·6근(六根) 6경(六境)의 이치를 가르친 12처(十二處)·6근(六根) 6경(六境)과 6식(六識)의 이치를 가르친 18계(十八界) 등의 법(法)을 말한 것으로 초발심(初發心)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요체(要諦)이지만 모두 세간법(世間法)에 속하므로 이를 세간승의(世間勝義)라 한다.
도리승의(道理勝義) :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도리(道理)를 수도(修道)하는 승의(勝義)이므로 이를 도리승의(道理勝義)라 한다.
증득승의(證得勝義) : 이는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말한 것으로 수행자가 아·법(我·法) 이공관(二空觀)을 닦아 아·법(我·法)에서 벗어나는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게 되는데 그 의(義)가 수승하므로 증득승의(證得勝義)라 한다.
승의승의(勝義勝義) : 이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승의(勝義) 중의 승의라는 뜻이다. 말을 여의고 상(相)을 끊었으므로 성자(聖者)가 안으로 증득(證得)하는 경계이다.
이 수행의 경지는 앞에서의 3종승의(三種勝義)보다 수승하므로 승의를 반복하여 승의승의(勝義勝義)라 한 것이다. 세 번째의 증득승의(證得勝義)는 아·법(我·法) 2공관(二空觀)을 닦아 진여(眞如)의 경지(境地)를 증득(證得)하므로 수승하기는 하지만 아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승의승의와는 같지 않다. 승의승의의 참뜻은 더 이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경지(修行境地) 가운데 최상이라 하겠다. 송(頌)에서 제법승의(諸法勝義)라 한 것은 바로 이 승의승의를 말한다.
제2구에 즉시진여(卽是眞如)라고 한 진여(眞如)에 진(眞)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뜻하고 여(如)는 여상(如常)의 뜻으로 바꿀 수 없는 불변(不變)을 말한다. 이러한 뜻을 합하면 진실여상(眞實如常)이 되고 진실여상이란 항상 모든 법의 본성(本性)과 같으므로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묘처(妙處)이다.
제3구에 상여기성(常如其性)이라 한 기성(其性)은 제법의 본성 또는 법성(法性)이다. 이는 곧 제법의 승의는 담연항적(湛然恒寂)하여 법성(法性)과 상응(相應)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4구의 유식의 실성(實性)이란 변계(遍計)와 의타(依他) 두 성(性)은 모두 실성(實性)이 아니며 오직 원성(圓性)만이 제법의 실성임을 말한 것이다. 본송(本頌)에서 승의(勝義)·진여(眞如)·유식실성(唯識實性)으로 표기한 것은 모두 한가지 같은 뜻이다.
이전의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송(本頌)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힌 것이다. 성(性)은 상(相)이 의지하는 내적 본체(內的本體)요 상(相)은 성(性)에 의해 현출(顯出)되는 외적 작용(外的作用)이다.
송문(頌文)의 제1송으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히고 다음 26송으로부터 제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혀 수증(修證)의 경계를 설명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먼저 이치를 깨닫고 이치에 부합한 실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이 유식30송이다.
-이글은 월간 '불광'지에 연재 된 혜거스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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