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의 체계(사성제) -괴로움! 그리고 벗어나기 (3)
이 두 가지 실천이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진정한 참선은 가부좌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항상 마음을 흩트리지 않으며[정정],
일체경계를 대함에 항상 비추어 볼 수 있는 자세[정념]를 의미합니다.
이럴 때에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 모두가
참선이 되 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활참선, 생활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념, 정정의 구체적인 수행법이 바로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 수행법은, 요즈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를 말합니다.
즉, 신(身), 수(受), 심(心), 법(法)
이 네 가지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에서든지 관을 하면 그 경계를 객관적으로 관조하게 되므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다.
즉, 화가 나서 싸울 때
그 순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관하는 것은 그 싸움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관[알아차림]하지 않는다면 그 싸움에 흠뻑 빠져들어 흥분하게 되므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습니다.
즉, 관을 하면 집착을 놓을 수 있게 됩니다[방하착(放下着)].
이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 또한 그 핵심은 무집착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위빠사나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조견’을 수행법으로 제정립한 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이것이 근본불교의 ‘정념’에서 온 것임은 앞에서 미리
살펴보았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신, 수, 심, 법에 대해 관찰을 할 때
올바른 반야의 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편견과 고정관념이 전혀 배제된
올바른 진리의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올바른 궁극의 관찰이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량 분별심과
분별의 대상을 가만히 비추어보고 관찰하는 것이 ‘정념’이며,
그 결과 올바른 안목이 열리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혜안이 열리는데,
그것이 바로 ‘정견’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의 ‘조견’은, 이 ‘정념’과 ‘정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념’의 수행을 통해 일체의 현상계를 ‘정견’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가 바로 위에 말한 근본교설이며,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진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