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스크랩] 혜거스님 유식 30송 강의 제 24 강 (最終會)

수선님 2018. 9. 30. 12:36

< 혜거스님 유식30송 > 제 24 강

 

 

제 29 송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무득(無得)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출세간(出世間)의 지(智)이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菩提)·열반(涅槃)이라는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이미 28송에서 언급한 자량(資量)·가행(加行)·통달(通達)의 각 위(位)는 아직 수도(修道)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송(頌)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수도과정에 입문(入門)하게 되므로 이 위(位)를 수습위(修習位)라 한다.

수행자가 유식성(唯識性)을 깨달으면 이미 전도지견(顚倒知見)에 속한 번뇌를 깨끗이 소제할 수 있다. 전도지견(顚倒知見)은 10사(十使) 번뇌를 말한 것으로 앞에서 말한 3현위(三賢位)를 거쳐 이미 10사(十使) 번뇌 가운데 5리사(五利使)는 여의었으나 아직 5둔사(五鈍使)가 남아 있는 것을 본송(本頌)의 수습위(修習位)에서 이를 멸진(滅盡)하게 된다.

10사(十使) 번뇌의 5리사(五利使)와 5둔사(五鈍使)는 이미 12송(十二頌)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대략 정리하고자 한다.

5리사(五利使)는 6번뇌(六煩惱) 곧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 중 맨 끝의 악견(惡見)에 속하는 번뇌로서 이치를 미혹하므로 견혹(見惑)이라고도 하는 번뇌이다. 이렇듯 잘못된 견해에 5종(五種)이 있어서 5리사라 한다.

① 신견(身見) : 아견(我見)이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환(幻)인 줄 알지 못하고 아(我)가 실유(實有)한다고 여기는 견(見)이다.

② 변견(邊見) : 인간이 한번 죽으면 모두 멸하여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인과를 믿지 않고 모두를 운명에 맡겨서 방종, 방만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잘못된 계율이나 법을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견해가 너무 강해서 이를 악견(惡見)이라 하는데 수행자가 먼저 악견(惡見)을 여의고 견도통달(見道通達)의 위(位)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본송(本頌) 수습위(修習位)에서는 앞에서 이미 악견(惡見)을 여의었으므로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의 5둔사(五鈍使)는 사상(事上)의 구염(垢染)에 속하므로 끊기가 매우 어려워서 크게 닦아 수습해야 하는 수습위(修習位)에서 멸진(滅盡)할 수 있고 이를 멸진해야 비로소 성불의 문(門)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1구(一句)에서 무득부사의(無得不思議)라 한 것은 번뇌장(煩惱障)을 끊어서 대열반을 증득하고 소지장(所知障)을 끊어서 대보리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습해야 한다. 이 지(智)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며 그 묘용(妙用)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不思議)라 한다.

2구(二句)의 시출세간지(是出世間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18계에 주(住)함이 없고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났기 때문에 세간지(世間智)가 아니다. 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 수면(隨眠)이 세간의 근본인데 이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출세간지(出世間智)라 한다. 이 근본지(根本智)는 지(智)의 체(體)가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증득한다. 이 송구(頌句)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체무득(體無得)이요, 둘째는 용부사의(用不思議)이며, 셋째는 성출세간(性出世間)이다.

3구(三句)에서 조중(粗重)이라 한 뜻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종자 즉 2취습기(二取習氣)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이생사(變異生死)의 근본으로 세(細)도 아니고 경(輕)도 아니므로 거칠고 무겁다는 뜻으로 조중(粗重)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 맨 끝에 전의(轉依)라는 뜻은 전(轉)은 굴린다는 글자인데 여기에 굴려서 버린다는 뜻과 굴려서 얻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이를 전사(轉捨)·전득(轉得)이라 하고 의(依)는 소의(所依)의 뜻으로 곧 제8식의 소의처(所依處)를 말한다. 종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제8식은 그 안에 번뇌와 소지 2종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며 또한 보리와 열반의 종자도 저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8식을 의지하여 번뇌와 소지 2장(二障)의 종자를 버리고[轉捨] 열반과 보리의 종자를 얻으므로[轉得] 두 가지 조중(粗重)을 버리고 보리 열반의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상 2조중(二粗重)을 버리고 2전의(二轉依)를 증득하여 불과(佛果)를 이루기 위하여는 10바라밀을 닦아 10지(十地)에 이르러야 한다.

 

제 30 송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선(善)이며 영원(常)함이며 안락(安樂)이며 해탈신(解脫身)이며 대모니(大牟尼)이며 법신(法身)이라 한다.


이 송(頌)은 유식 30송의 마지막 송(頌)으로서 구경위(究竟位)에 해당되는 송(頌)이다. 구경(究竟)은 최종의 자리를 말한 것으로 지극(至極)이라는 뜻이며 수행자가 지극(至極)에 이르면 이것을 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구경위(究竟位)는 수행자의 최고경지 곧 불위(佛位)를 의미한다.

첫 구의 차(此)의 뜻은 29송에서 언급한 2전의과(二轉依果)로서 번뇌(煩惱)와 소지(所知) 2장(二障)의 종자를 끊어 버리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의 종자를 전득(轉得)한다는 뜻을 이어서 차자(此字)를 써서 이것이 곧 무루계 등등이라 하였다.

무루계(無漏界)는 누(漏)의 뜻이 번뇌(煩惱)이므로 무루(無漏)는 무번뇌(無煩惱)이다. 또 누(漏)는 누수(漏水) 누락(漏落)의 뜻이며 무루(無漏)는 누수(漏水) 없는 마음이 삼계육진(三界六塵)에 누락(漏落)되지 않음을 뜻한다. 어떠한 마음이 그러냐 하면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의 두 장애(障碍)를 멀리 여의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한 이 사람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보리·열반을 성취한 이 사람의 세계는 누(漏) 없는 무루(無漏)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어서 부사의(不思議)하며,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선(善)이며,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상(常)이며, 오로지 고통이 없어서 안락(安樂)이라 하며 탐진치(貪嗔痴)에 얽매임이 없어서 해탈신(解脫身)이라 하며 어떠한 경지에서도 부동(不動)하므로 대모니(大牟尼)라 하며, 심지어는 항구불멸(恒久不滅)의 뜻으로 법(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목적지이며 모든 불보살의 한결같은 경지이다.

무루계(無漏界)라고 한 계(界)는 장(藏)의 뜻으로 그 안에 무변하고 희유한 대공덕이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며 또한 인(因)의 뜻이 있어서 세간법과 출세간의 모든 법(法)이 이로부터 나오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묘(妙)가 이 속에 있으므로 계(界)를 법계(法界)라고도 하는 것이다.

2구(二句)의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역시 보리·열반을 전득(轉得)한 사람의 세계를 무루계(無漏界)라 하므로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궁량이 무궁하여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부사의(不思議)란 심연상(心緣相)을 여읜 것을 불가의(不可議)라 하므로 심연(心緣)의 상(相)과 언설(言說)의 상(相)을 모두 여읜 것을 뜻한다. 선(善)이란 순수하여 때묻지 않은 법성(法性)이 모든 과오(過惡)를 여읜 것을 말하고 상(相)이란 영원한 법성(法性)이 변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句)의 뜻은 보리·열반을 성취하고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마음이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3구(三句)에서 말한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이란 청정법계(淸淨法界)는 고통을 초래하는 번뇌가 없으므로 안락(安樂)이라 하고 모든 장애(障碍)와 속박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해탈신(解脫身)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의 대모니명법(大牟尼名法)이란 모니(牟尼)는 적묵(寂默)의 뜻으로 언설동작(言說動作)과 심연분별(心緣分別)을 여읜 것을 말하고 법(法)이란 법신(法身) 또는 법성신(法性身)을 말한 것으로 이를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또는 대모니신(大牟尼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무상(無相)이지만 무상(無相)이라 말할 수도 없어서 거두어들이면 물러나서 은밀히 숨고 풀어놓으면 묘용(妙用)이 무궁하여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을 체용불이(體用不二)라 하는데 법신의 체(體)는 무상(無相)이요, 그 용(用)은 무불상(無不相)이기 때문이다. 법신(法身)은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은 자성신(自性身)이니 모든 부처님의 진정(眞淨)한 법계(法界)를 말한 것으로 모든 상(相)을 떠난 적멸(寂滅)의 자리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평등(平等)한 실성(實性)의 자리이며 체(體)가 무량(無量)한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다.

②는 수용신(受用身)이니 수용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에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복(福)을 짓고 혜(慧)를 닦아서 즐거움이 충만한 법락(法樂)을 향수(享受)하면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 하고, 만약에 순수한 극락세계인 정토(淨土)에 안주(安住)하면서 10지(十地)에 들어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대신통력을 발현(發現)하고 정법(正法)을 설하여 보살의 의심을 풀어주면 이를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 한다.

③은 응화신(應化身)이니 응화신(應化身)은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계(衆生界)에 응(應)하여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을 뜻한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천상세계와 인간세계 내지는 귀신의 세계와 축생의 세계까지도 유(類)에 따라 화신(化身)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처하는 곳이 정토(淨土)이든 예토(穢土)이든 간에 아직 10지(十地)에 들지 못한 이승범부(二乘凡夫)를 위하여 때와 곳에 따라 설법하여 이익과 즐거움을 주고 해탈(解脫)을 얻게 하는 모두가 응화(應化)에 속한다.

이와 같이 3종(三種)을 갖춘 법신(法身)을 성취하고자 발심한 이는 이전의과(二轉依果)를 명심하여 능장(能障)·소장(所障)의 번뇌 곧 안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밖으로부터 오는 번뇌를 전사(轉捨)하여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전득(轉得)하는 수행을 끝없이 반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전사(轉捨)·전득(轉得)의 뜻을 쉽게 이해하자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을 버리고 참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전사(轉捨)·전득(轉得)이니 이를 수행하는 것은 10바라밀(十波羅蜜)을 닦아 10지(十地)에 드는 것을 말한다.


유식 30송의 대강을 요약하면 상(相)·성(性)·위(位)를 밝히고 체계화한 것이 1송에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혔고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혔다.


유식의 상(相)이란 우주 만유의 현상과 식(識)의 심소(心所)를 말한 것으로 5변행심소(五偏行心所) 등 55심소(五十五心所)와 심소대상인 만법(萬法)을 뜻한다.


그리고 유식의 성(性)이란 모든 법의 으뜸인 진여(眞如)의 실성(實性)·계탁(界度)하고 집착하지 않는 모든 법의 법성(法性)·담담하고 항상 고요한 유식의 실성(實性)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한다.


유식의 위(位)란 수행자의 수행 계위(階位)를 말한 것으로서 수행자가 자량(資糧)으로 지녀야 할 10주(十住) 10행(十行) 10회향(十廻向)의 30위를 닦아 준비하는 자량위(資糧位)와 4선근(四善根)을 닦는 가행위(加行位)와 2공무아(二空無我)의 도리를 닦는 통달위(通達位)와 10지(十地)를 닦아 10성(十聖)의 지(地)에 이르는 수습위(修習位)와 3혹(三惑)이 모두 끊어지고 대각(大覺)이 원만하여 자각각타(自覺覺他)의 공이 이루어진 구경위(究竟位) 등을 뜻한다.


이 모두가 전사(轉捨)·전득(轉得)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니 오직 마음이란 상(相)이 없고 실(實)도 없지만 닦아 깨달음으로써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어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변하고 멸함이 없는 대열반(大涅槃)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글은 월간 '불광'지에 연재 된 혜거스님의 글입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마니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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