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의 금강경 강설
청담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정리하여 역은 청담 설법집이다.
1. 청담스님의 금강경 설법은 재세하신 동안 여러 차례 거듭하셨는데 그 가운데 1955년 전국승려대회 때 근 사 칠일 동안 연일 설법하신 금강경대법회와 열반하시기 일 년 전 1969년 1970년의 두해에 걸쳐 매주 토요일 하신 설법만이 완전 녹음되어 있었으므로 이 두 녹음 설법을 원본으로 하여 정리 편찬한 금강 대강좌를 여러불자님의 불도수행에 첩경이 되므로 여기에 올립니다.
청담(靑潭)큰스님 약력(1902∼1971)
1902년 10월 20일 : 경남 진주에서 출생
1927년 : 고성 옥천사에서 남규영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0년 : 개운사에서 박한영 스님 사사. 대원불전 대교과 졸
1955년 :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1956년 : 조계종 종회의장
1966년 :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
1970년 : 조계종 총무원장
1971년 11월 15일 :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도선사에서 입적
저서 :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저 푸르른 하늘을 보면 갈대가 흔들리는 모습이 등등..
해제(解題)
경제목 해설
불법 전체의 핵심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생략하여 [금강경]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소승경을 비롯한 많은 경을 설법하신 뒤에 말씀하신 중요한 최고의 경입니다.
그러니 당시 부처님 제자들은 금강경을 말씀하시기 전에 부처님을 40년 동안 모시고 다니며 아함경. 방등경전등 금강경을 제외한 다른 대반야경을 다 들은 이들이었으므로 금강경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기초 법력[지식과 수도력)을 갖춘 이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마음을 깨달아 큰 지혜를 밝힌 십대 제자와 천 2백 대중을 비롯한 많은 대중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설법을 하실 적에 국민학교부터 대학원 과정까지의 순서를 따라 불법의 깊은 진리를 체계 있게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므로부처님의 마음의 법문을 49년간의 교육기간을 통해 다 설파하시는 가운데 아함경은 국민학교 과정으로 12년간 걸렸고, 방등부는 중학교 과정으로 8년 걸렸으며 반야 육백부는 고등학교. 전문학교 과정으로 21년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8년 동안에는 법화열반부라고 하여 대학의 최고학부에 해당합니다.
그 가운데 금강경은 육백부의 반야사상 뿐만 아니라 불교의 아니라 불교의 전체 사상의 골수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조사님들도 이 금강경을 특히 존중해왔던 것입니다. 말과 문자를 버리고 교 밖에서 직접 마음을 깨치려는 선종에서까지 존중하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는 가운데 그 반이나 되는 시간을 기울여 반야경을 말씀하신 것은 이 반야사상이 불교 정신의 핵심이며 중심이 되기 때문인데, 특히 그 가운데 금강경은 반야경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대문으로서 반야 육백부를 거의 다 말씀하신 577부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반야사상의 핵심을 결론적으로 천명하신 경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깨치는 요체로서 중생이 이것을 의지하여 마침내 불타의 지혜인 반야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강한 것은 없다 - 금강
금강이란 요즘 말로는 다이어먼드입니다. 다이야어먼드는 모든 자연 물질 가운데서 가장 강한 물질입니다. 쇠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옛날에는 돌로 연장과 무기를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그것은 돌이 흙이나 나무보다 더 강했던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쇠가 발견되면서부터는 쇠가 돌을 대신하게 됐으니 쇠가 돌보다 훨씬 강했던 때문입니다. 또 쇠 강철보다 더 강한 물질이 있는데 그것이 금강석입니다. 금강석에 의해서 깨지지 않는 물질은 없고 다이어먼드를 당할 물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 와서는 금강석 보다도 더 강한 물질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연물질 가운데서는 그 이상 굳센 물질은 없으므로 금강은 강한 것 중에 강한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진리는 인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완전하고 가장 강하여 다른 어떤 지혜에 의해서도 견줄 수 없는 진리이므로 여하한 물질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을 부처님 법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자리가 물질도 허공도 아니므로 불로 태울 수도 없고 원자탄이 터져서 온 지구가 녹아 없어진다 해도 우리 마음자리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는 때문입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물질. 허공. 에너지등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우리의 생각. 감정까지도 다 변하지만 오직 우리의 마음자리 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금강이라 하고 금강경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금강은 물질 가운데 경도가 가장 강한 최고의 강청로 된 철퇴를 뜻합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이것에 맞으면 다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물건으로도 이 금강은 부술 수가 없는 것이므로 금강을 우리 마음자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온 우주 모든 현상계를 창조한 근본 바탕이고 동시에 우주를 다 거두어 들여서 없앨 수도 있습니다. 금강 철퇴와 같은 이 마음자리는 내가 지금 말하는 이 마음자리이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그 마음자리인데, 자기스스로나 남이 부술 수도 없는 영원불멸의 존재이면서 우주 만유에 자유자재하는 그런 거룩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체 그 자체를 나라 생각하기 때문에 금강처럼 이렇게 위대한 실재인 자아를 망각해 버려서, 웬만큼 설명을 들어 봐도 이런 마음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금강경 법문을 통해 이런 마음자리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듣게 되었으니 다시없는 공덕이라 할 것입니다.
마음 밝으면 반야 - 반야 1
금강경을 자세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는데, 반야는 지혜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지혜와는 크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간의 지혜와 구별하기 위해 번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간의 지혜는 객관세계에 대한 지식, 논리와 개념에 의한 지식, 이런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말 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깨쳐서 육체가 [내]가 아닌 시간 공간이 버려진 이전의, 주관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 곧 마음의 근원에 돌아간 지혜를 말합니다.
[마음]은 곤 [나]입니다. 허공도 물직도 배설하는 기계인 이 육체도내가 아니고 [나]는 오는 오직 순수한 [나]라는 생각까지도 아니며, 글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며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면서 살아 있어서 얘기할 줄 알고 얘기를 시켜 놓고 그것을 다시 비판도 하는, 이 만사의 주체, 생각의 주체, 우주의 핵심이 곧 [나]입니다. 이것이 생각을 내서 과학. 철학.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마음대로 뒤집어 엎기도 합니다, 이것이보다 앞서는 사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뭄뚱이도 아닌 [나], 일체가 다 아닌 [나], 이것이 우주의 핵심이고 실재이며 곧 우주와 인생의 근본을 아는 것이 지혜 과학도 만들고 철학도 만들고 현상, 즉 R꿈속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고 다 압니다.
그런 걸 [반야]라 합니다.
가령 [신심명을 들었다.] [금강경을 듣는다.] 또 [경을 듣는 이른걸 로 해서 부처님 말씀을 배운다.]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설명 듣는 것이 되고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듣는 것이 되는데, 그래서 그 법문을 듣고 [나]를 확실히 깨쳐 [마음]열리면 이때는 전체가 [반야]지혜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깨칠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금강경 법문의 핵심을 그대로 들어서 따라가 보면 결국 마음을 깨치게 되고 반야를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가운데 마음 깨친 법을 찾아 정통으로 이어 받은 분이 우두머리 제자이신 마하가섭존자입니다. 또 이 어른의 마음 법을 정통으로 전해 받은 분이 이조 아란존자이고, 이렇게 내려가서 28대의 조사가 되는 분이 바로유명한 달마대사입니다. 이 달마대사는 중국에 오셔서 선종의 초조가 되셨고 마음 깨치는 법을 혜가스님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 부처님의 마음 깨치는 법을 크게 일키신 분이 육조 혜능대사 이신데, 이 어른은 본래 글도 모르는 무명의 나무장수 였습니다. 육조스님이 마음을 처음 깨치게 된 동기가 바로 이[금강반야바라밀경]에 있습니다. 시장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가던 길에 어느 스님에게 금강경 가운데[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경문을 마음을 활짝 깨쳐서 반야지혜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은 본문을 해설할 때 자세하게 소개 되겠지만, 그 대의를 우선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싫다. 좋다. 내 것이다. 네것이다. 주관이다. 객관이다. 나쁘다. 착하다 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본연의 마음 자세 그대로의 마음을 지니고 오직 중생제도를 위해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 더하기 둘은 세이 된다는 수학의 기본 원리를 두 살 세 살 된 어린애들은 해결 못하지만 어른들은 듣자마자 알게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는 하나 둘을 들어도 곧 잊어버릴 정도로 지혜가 아직 밝아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이가 들어서 곧 알게되다 것은 지적 능력이 열리고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을 많이 넓히려면 설법을 듣고 경전을 많이 익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널리 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참 지혜는 말과 글을 따라 뜻을 파악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과 글 밖에 나에게 있는 마음을 밭 깨쳐야만 반야지혜를 성취하게 됩니다. 그동안 신심명. 반야심경을 들었으니 여러분들은 짐작으로나마 [아, 이런 것이 마음이구로나. 마음은 불생불명이란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판단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지혜]가 지식이며 판단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며 이것은 인식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싫다 좋다 없어야 - 반야 2
[마음]의 반야지혜는 일반 경전을 읽거나, 과학이나 철학을 알고 객관의 원리를 짐작하는 것과는 만니 다릅니다. 일반 지식은 객관을 아는 것이고 논리와 개년을 세우는 것이지만, 이 마음은 주관이니 객관이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옷입고 밥먹고 싸우고 좋아 하는 것이 다 내 [마음]이 하는 것인데, 그 마음이 어디있느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 [마음] 곧 [나]를 어떻게 찾느냐. 그 해명을 먼저번에 우리가 공부한 [신심명]첫 구에서 잘 풀이해 주었습니다.
[지도는 무난이니 유혐간택이라] 지극한도, 곧 [마음]을 개쳐서 부처가 되는 길이 어렵지 않다 쉬운 일 강운데 가장 쉬운 일이다. 밉다. 곱다. 싫다 좋다 하는 간택만 없으면 된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가리키는 속 뜻은 무엇인가. 그 말의 조리를 알야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의 조리를 놓치기 때문에 그 속 뜻이 막연 해지고 확실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처가 되는 길이 어렵지 않다는 마음 다름 아닌 이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선악도 아니며, 지식이거나 사상은 더욱 아니고 예술도 정치도 물론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것은 수정보다도 더 깨끗하고 망상과 잡념이 없는 순수한 상태로 살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이 천당 가려면 천당 가고 지옥 가려면 지옥 가고 사생육도를 돌아다닙니다. 알듯알듯한 소리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기 위해 [네 마음을 깨쳐 부처되기란, 곧 생사 해탈하기란 제일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쉬운 일이 왜 쉽지 않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꼭 마음을 깨쳐서 부처가 되어야하겠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이다. 그것이 장애가 되어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삼조 승찬 스님께서 간절히 일러주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눈을 껌벅껌벅하다 깨칠 것이고,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도 더 쉬운 일입니다. 이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이고 학문의 주체이며 온 우주의 주체이요 인류 문화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마음]을 깨쳐 부터가 되고 생사를 초월하여 우주에 자유하기란 참 쉬운 일 가운데 쉬운 일입니다. 이 깨치려는 마음만 집어 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심심명]의 149구절이다 이것을 되풀이한 것입니다.
신심명은 계속해서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이니라]했습니다.[이것은 좋고 다른 것은 나쁘다는 이분별만 내 버리면 툭 트이어 환히 명백해진다.]는 것입니다 깨치려는 마음 이것이 최후의 장애이니 이것만 버리면 진짜 마음 밖에 남을 것은 없습니다. 눈을 세 번만 깜짝깜짝하면 탁 드러날 텐데 그것을 또 바라면 틀립니다. 그래서 옛날 도인들이 선지식을 찾아다닌 것도 전부 이 때문입니다. 알듯알 듯 한데 알수 없으니 선지식을 천 만명 찾아다니면 무슨 말 한마디 눈짓 손짓 한 번의가르침 가운데 깨치려는 것입니다.
선재동자 - 반야 3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닌 것도 구경은 이 속을 모르기 때문에 어린 것이 맨발로 수백 수천리를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한 선지식을 만나 한 가지를 배우고 또 물으면 다른 선지식의 다른 곳을가리켜 주면서 거기 가면 백천삼매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 선지식을 또 찾아가서 온갖 지식을 더 배워 보면 마음 새김이나 부처님 법을 좀 더 깨닫게 되는데 그러나 아직은 무엇인지 미진한개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다닌 선지식 가운데는 음녀 탕녀도 있고 사람을 하루에도 몇 명씩 죽이는 폭군도 있고 목사도 있고 신부도 있어서 선지식이 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행세를 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또한 선지식을 찾아 배우고 깨달음을 얻고 나면 한 결 같이 그 선지식은 나는 아는 것이 이것뿐이다. 그러니 어디어디에 가서 아무 선지식을 찾으라는 것이었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스님 세 분을 만났고 마지막으로 53번째 선지식을 만났을 때, 문수보살을 만나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달으면 그때 밝은 지혜가 생기는데 그 지혜가 [반야]입니다. 그런데 그 반야를 깨달으려면 깨치고 싶어 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따져서 알 수 있고 언어로 통할 수 있지만 생각을 내는 모든 생각의 주체인 마음, 곧 자성은 이렇게 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따져 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이 금강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반야를 성취하는 방법이 금강경에 자주 되풀이 해서 설명됩니다. 부처님의 반야지혜는 객관적인 사리를 지식이거나 지식에 의한 그런 지혜가 아니고 모든 것은 마음인 이 마음, 아무 생각이 아닌 청정 본연한 본 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열반이니 보리니 반야니 화엄이니 법화니 하는 온갖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반야지혜는 청정한 자기마음의 경계, 부처도 중생도 다 끊어져서 일체를 상대하지 않는 주객 이전 피아의 대립 이전의 밝은 지혜 그것을 가리 킵니다. 이런 반야는 금강석처럼 파괴되지 않는 지혜이고 영원 불멸하는 광명이며 본래마음 그대로의 고행이며 생사 고해을 내버리고 자기 본래의 낙원에 돌아온 지혜입니다.
알줄 아는 마음자리 - 반야 4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는 옷을 입는 사람 몸에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 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 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걷어 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 놀음하는 범부 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덜 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은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 넣어서 짠 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 가지 입니다.
그런데 알 줄 아는 이 성품은 분별을 하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거울을 엎어 놓으면 아무 그림자도 없이 깨끗한 거울의 바닥뿐이지만 바로 젖혀서 물건을 갖다 대면 무엇을 대하든지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만일 빨간 옷감을 대면 거울 전체가 빨갛게 물든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울이 실상 빨갛게 물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거울은 빨간 헝겊을 댔을 때나 아무 물건도 안 비췃을 때나 깨끗해지고 더러워질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마음자리도말하고 듣고 죄를 짓고 선을 행하고 온갖 짓을 다하지만 알 줄 아는 마음자리는 항상 그대로입니다.
육체는 산채 그대로 송장입니다.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지각성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으로 체계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줄 아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범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 보고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사진을 찍듯이 사람이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렌즈에 찍혀 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는 것이 아니라 알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 맡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허공 그것이 무엇을 보고 듣고 할 수 없고, 물질이 본래 원자 전자 시대부터 에너지 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무엇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알 줄 아는 능력이 본래 없는 무정물질로 조직된 이 육체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알줄 아는 마음자리를 성품이다. 불성이다. 보리다, 진여다, 한 물건이다. 하지만 제일 가깝게 말하면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줄 아는 힘이 있는 성품을 유정이라 하고 동물이라 하는데, 돼지. 고양이. 개의 형상을 뒤집어쓴 몸뚱이를 유정이란 뜻이 아니고 그것을 뒤집어쓰고이리저리 다니는 운전수를 동물이라 하고 유정이라 합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물질이고 말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무정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알아지는 인식의 대상이 있고 아는 자신, 곧 주관이 있어 서 아는 것은 분별심으로 아는 망상 이고, 있다 없다. 하는 생각아닌 자리,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온전하고 오롯한 자기 마음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과학이니 종교니 심지어는 발심하느니 성불하느니 생사를 해탈하느니 하지만 다 잡된 생각입니다 본 마음자리를 미해서 생사의 보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긴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 부처가 되기 전, 내 마음을 돌이키기 전의 일이고 제 정신을 똑똑히 제대로 찾은 사람에게는 일체의 생각을 다 벌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하겠다. 이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 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어져서 온갖 생각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이 이렇구나, 내가견성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 번 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아차!]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구나!]하는 생각도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대상, 곧 산보고 높은 줄 알 듯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알 때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 없고 아무 허물없는 알 줄 아는 마음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일체 생각이 아닌 이것이 온갖 사상이 되고 인과의 업을 지어 육도에 생사윤회 하는데 이 한 놈이 한 짓이고 이 한 놈은 절대적인 초절대의 실재이고 실상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마음자리 이것이 있다는 것을 [금강반야 바라밀경]이라 경 제목의 해설을 들음으로써 짐작이라도 하게 되는 것은 마치 담너머 쇠뿔이 움직은 것을 보고 확실히 담너머에는 소가 있겠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들 자신에게도 시방제불 이 깨치신 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짐작하는 것을 경학에서는 해오라 합니다. 깨달아서 그 경지에 들어가서 아는 게 아니고 생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알 줄 아는 이 마음자리는 지혜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초절대도 아니고 하나 조차도 아닌 자리입니다. 굳이 말하자니 실상이라 하고 반야라 하는데 이것이 금강반야 입니다. 그런데 반야에도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이 반야의 본성이 미해서 종소리 하나를 가지고도 한국 사람은 땡땡으로 듣고 일본사람은 강강으로 듣고 서양 사람은 딩동으로 들으니 이것은 다 업보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업에 따라서 지옥을 천당으로 보고 천당을 지옥으로 보고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착각하며 온갖 고생을 하기 마련인데, 이것도 지혜이므로 반야는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바른 반야, 잘못된 반야가 있고 깊은 반야도 있고 얕은 반야도 있습니다.
세 가지 반야 - 반야 5
앞세서 말한 마음자리인 나 자신을 깨달은 것을 실상반야라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실상반야를 깨달으신 뒤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아함경. 방등반야. 열반 등이 초. 중. 고 대학 같은 과정의 체계를 세우셨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아니면 하나님도 공자님도 구상할 수 없는 내용이고 체계입니다. 이런 지혜를 관조반야라고 합니다. 실상반야가 체이고 관조반야는 용. 작용 곧 활용입니다. 비유하면 실상반야는 물이고 관조 반야는 수분의 작용인 이슬. 파도 얼음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관조반야는 무엇을 따져 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실상반야로 대보면 그냥 알아집니다. 마치 거울에 비치면 대상물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산을 보고 높다고 직관적으로 아는 것처럼 환하게 전지전능하게 다 아십니다.
발심수행을 해서 참선을 하든지 염불. 진언을 하든지, 경을 보든지 , 기도를 하든지 용맹정진하다가 견성한다 해도 번뇌의 깊은 밑바닥까지 뿌리째 뽑아 없애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을 때에도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아주 미세하게 잔잔한 물결이 남아있어서 이것이 모여 가지고 어느 때인가는 큰파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최후의 잠재의식인 제팔장식도 정신을 통일해서 닦아 들어가면 차차 없어져서 마지막에는 현상계도 없어지고 육체도 없어지고 시간과 공간도 없어지고 자기 마음하나 실재만 오롯하게 나타납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고 정신 마음 하나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런 정도만 되어도 오래 있으면 신통이 납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견성해서 부처가 다 된 줄 알고 아무런 행동이나 해도 괜찮고 막행 막식을 해도 좋다고 하다가 잘못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지식을 못 만나면 이 몸뚱이가 없는 것인데 불을 지른다고 탈 것이냐, 도끼로 친다고 부서질 것이냐 하면서 계율을 안 지키고 육바라밀을 안 닦아서, 만행공덕을 쌓는 거룩한 대승의 보살도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경을 자세히 공부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 참선하다 이렇게 잘못 되면 그 사람 말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이 영특해져서 한마디 들으면 열. 백을 알기는 아는데 자기가 부처가 다 된 줄 아는 고집이 생겨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큰 도인 못 만나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능엄경 같은 데에 이런 잘못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젖먹이 아기 정도의 반야가 있고 유치원 생의 반야, 초등학교. 중학교 정도의 반야, 대학교. 석사. 박사 정도의 반야가 있어서 견성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번뇌의 깊은 뿌리까지 뽑혀진 완전무결한 실상반야의 경계를 참선을 하기 전에 다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반야를 중생에게 정도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고 육백부의 대반야경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금강경은 대반야의 육백부를 총결산한 반야의 핵심으로서, 앞에서 말한 아공. 법공. 구공(俱空)의 도리를 잘 설파한 경이므로 이것을 공소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의 소식을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40년 동안이나 인과의 도리를 말씀하셨고 계행과 바라밀법과 대소승의 온갖 수행법을 말씀하시고난 뒤였으므로 그 당시의 천이백 대중은 이 공의 도리를 잘못 이해할 이치가 없겠지만, 이런 도리를 천혀 모르고 불교사상이 이것뿐인가 보다, 이만 하면 부처가 다 된 것이로구나 하며 구경각에 도달하지 못햇으면서 굵은 번뇌 망상만 없어진 것을 가지고 다 된 줄 알고 방심 하여 마음을 풀어서 술. 고기 먹고 오입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다 보면 깊은 잠재의식 속에 미세한 허물이 차차 도로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태산을 무너뜨릴 큰 파도로 됩니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인과의 도리. 삼법인 . 사제법. 37조도품 . 계정혜 삼학 과 육바라밀. 반야경 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잘못이 없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에 대해 부처님의 이런 말씀을 문자반야라고 그럽니다. 실상반야의 그 자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지만 문자반야는 중생을 하여금 마음을 닦아서 실상반야에 들어가게 하기위한 안내서로서 말과 글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정말 부처가 되려고 원을 세운 사람이면 경을 자세히 봐서 반야가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을 정말 견성이하고 성불하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촌사람 금강산 구경하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금강산 구경을 제대로 하자면 적어도 일 년은 걸려야 하는데 촌사람이 남 따라갔다가 바쁘다고 2. 3일 둘러 보고 오면 누가 물어 봐도[아아, 굉장하더라.]
하는 말 밖에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경을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가 정진해서 얻은 정도가 어디쯤 왔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반야경을 [고름 닦아 놓은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구경각에 들어가서 부처가 다 된 뒤에 경이 소용 없을 적에하는 말이지,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야경을 걸머지고 다녀야 합니다. 오조 홍인 스님도 육조 혜능에게 금강경의 뜻을 친히 풀어서 말씀해 주신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설사 부처가 되었다 해도 부처님께는 필요 없지만 중생에게는 역시 필요하게 됩니다. 유치원 교과서와 마찬가지이고 어린 아기를 가르치는 그림 책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조국사. 서산대사 같은 조사님들께서 선교(禪敎)가 둘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뜻]이 하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육체는 나 아니다 - 파라밀 1
우리는 육체를 [나]라 하고 오온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 합니다. 만날 돌아다녀 봐도, 시집을 천만 번 가 봐도 소용없고 장가가도 별 수 없고 세계 갑부가 되어도 별 수 없습니다.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업소 반야 지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물질 문화가 더욱 진보하여 10년 20년 후에는 우주여행을 하루에 다녀올는지 모릅니다. [아포로]가 발달해서 달 나라 뿐만 아니라 화성. 금성에 서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다 보고 올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래봐도 육신을 [나]라고 하는 이상, 옛날 물질문명 미개 시대에 먼 길의 여행을 두 발로 꼬박꼬박 걸어 다녔고 좀 확? 한다면 가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 그 때 와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계는 발달을 했지만 사람은 다 그대로입니다. 원시인 야만인인 때와 근원적으로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그 때도 밥 먹고 지금도 밥 먹고, 밥 먹으면 똥 싸고 오줌 누어야 하고 밤엔 자야하고 그밖에 무엇이 또 다른 게 있습니까. 인간 자체는 아무 것도 진보된게 없고 다만 물질문명과 악한 수단, 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일시에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발달했을 따름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고 예수니 공자니 어떤 종교도 저만 옳다는 자기중심으로만 살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인간 세상에 전쟁이 없을 수 없고, 이 혼란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가 나오고 원자탄이 나오고 아폴로가 나와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서 거기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게 되어 달이 이제는 사람 죽일 한 개의 무기장치 곳간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육체를 [나]라고 하는 사고가 횡행하는 이상 이런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불안과 공포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어딜 가나 무엇을 해도 설사 이 우주를 다 내 것으로 차지해놓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거지로 돌아다니면 하루가 참으로 긴 것 같고 오래 산 것 같지만, 돈이 좀 많거나 권리가 높아지면 하루가 일년 같이 지나갑니다. 이런 것은 다 육체가 [나]라는 유물적 사조에 의한 인생관에 얽매여 살기 때문인데, 이 사상은 인류가 저희 끼리 서로 잡아 죽여 전멸하게 하는 화의 근원이 됩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인데,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 부자다 하지만 그 날의 제일 부자집 아들 딸들이요 새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인물도 다 잘나고 재주도 천재이며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청소년들이 히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것은 부조리이고 허무하고 뚜렷한 인간이 목표가 없지 않으냐. 도대체 [나]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자아상실, 윤리기준의 상실, 생의 의에 대한 욕구불만 등으로 몸부림치는 그들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욕망을 채우면 인생은 행복하다는 수박 겉핥기 식의 피상적인 인생관으로는 이미 이들의 허탈을 해결해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병적으로 난동을 부리다시피 하니 미국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이들은 전쟁도 반대하고 삶에 대한 애착도 집착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전쟁한다고 이익 될 것이 뭔가, 전쟁에 죽는 사람만 원통하다 , 전쟁에 희생당하고 나면 엉뚱하게 딴 놈이 호강한다, 결국 인생은 부재다. 무엇하는 것이 나 인지 모르겠다.] 이런 등의 실망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죽기는 싫어서 자살은 못합니다. 환각제를 먹든지 술이나 마시든지 아편을 맞든지 하여 송장처럼 쓰러져갑니다. 희망도 없는 내일이지만 그해도 또 만나보고 싶고 죽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덴마아크 총각처녀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합니다. 도의적인 구속도 없고 성대 하게 많은 청년들이 자살을 한다는 것입니다. 먹고 배설하고 죽는 것보다는 좀 통쾌하게 죽자해서 오토바이를 타고가 다 수십 길 도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택시를 타고 가다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물이나 꼴딱 꼴딱 먹다 죽자, 그래봤자 하나도 억울한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물사상으로는 아무리 고도로 진보해 봤자 먹고 똥 싸는 것 밖에 인간을 만족시킬만한 이상이 없습니다. 결국 자살할 길 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부정하는 인간의 말로 는 결국 비참하게 끝납니다. 그중에는 머리는 좋은데 나쁜 사람들이 인간사회를 한 개 도박장으로 만들어 갑니다. 머리가 우수한 권력자들은 강력한 조직을 갖고 전 국민이 한 사람도 반대를 못하고 최후 일인까지 싸우게 만듭니다. 뒤에서 호령 한 마디하면 전쟁에 나가 죽으라면 죽습니다. 말 안 들으면 당장 죽겠으니 적을 만나는 동안이라도 살아 있고 싶어서입니다. 생의 애착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이 부쩍 늘어난다면 정말 이것은 생의애착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백년 다 살아 봐도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죽어도 아깝지도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면 다 끝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소수에 한한 일이고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싣달태자의 - 바라밀 2
싣달 태자께서도 3천년 전에 이것을 걱정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를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고 쳐부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상대적인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원리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 잤습니다. 마침내 싣달태자는 궁전가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 천지에 있는 도인들을 다 만나 물어 봤지만 몇 백년 몇 천년 살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나 아주 안죽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게 생각한 싣달 태자는 개 닭 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눠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가만히 자꾸 따집니다.
“이제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싣달 태자는 선정삼매에 들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습니다. 싣달 태자의 생각은 아버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면해야 하겠다, 영원히 죽지 않는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생각을{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으로 되었고 일차적인 결론 이었습니다.
“허공의 아는 능력이 없으니 생각을 내 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지구나 바위나 땅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러니 확실히 무엇을 생각하는 이 주체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로구나. 이것들은 생명이 없으니 무엇을 생각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닌 것이 생각을 내고 그것이 바로 {나}로 구나. 또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생사가 없겠구나. 육체가 {나}라고 하지만 육체도 따지고 보면 결국 물질임에 틀림없고 지식이라는 것도 생각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 지식 또한 {나}는 아니다 육체와 지식을 초월한 모든 생각의 핵심이 {나}이니 이 {나}야 말로 죽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 뒤부터 싣달 태자는 6년 동안 가속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말이 가속도로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라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해도 안 됩니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 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아 있게 됩니다. 날 만 새 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정신통일. 주의 집중의 힘을 가속화하여 인생 일대의 생사문제를 앞에 놓고 일념부동(一念不動) 깊은 마음의 바닥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는데 싣달 태자는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쳐 부처를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하고 번뇌. 생사의 구속으로부터의 행방을 얻었습니다. 생각의 주체인 {아}, 우주와 인생을 핵심인 {마음},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참나}를 깨달아서 저절로 바르게 아는 지혜를 {반야지혜}라 하고 {보리설법(菩提說法)}이라합니다.
욕심 끊어야 큰 복 - 바라밀 3
어떤 집념 이 강한 생각은 우리를 구속하게 되는데, 소위지식이 하나하나 늘어나서 학문이 한 가지 한 가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명을 구속할 상대가 그 만큼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옳다 하면 꼼짝 못하고 공산주의 의에 구속당하고, 자본주의가 옳다고 해도 구속되고, 기독교도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대자유. 대해방을 얻으려면 이 세상 학문을 다 초월해야 하고, {나} 아닌 다른 외부의 지식이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구속 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한테 꼼짝 못하고 마음이 끄달려서 뿌리치고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남을 미워하는 것도 구속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구속 됩니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때가 비로소 자유뿐이고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천하가 다 우리 집이 됩니다.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고, 붙들어 쥐려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돈 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고독 해지고, 권리가 높아지면 놓아질수록 적이 많아집니다. 권리와 돈 다 버리고 나면 천하 물건 다 내것이 됩니다. 아무욕심 없이 농사짓고 장사하면 무슨 사업을 해도 잘 되지만 욕심 장이는 혼자 돈을 벌어서 남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으니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증오하게 됩니다. 그런 욕심버리고 돈을 모으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식구고 재미가 날 것이며 욕심을 떠나면 내가 없어도 하난 걱정 안 됩니다. 욕심 없는 처녀 시집가면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고 위해 주니 이런 아내는 다시 없다고 업고 다니며 좋은 물건 다 사다 줄 것입니다. 욕심 없는 총각이 장가들면 자기의 모든 것 다 희생해서 아내만 위해 줄 것이니 그 아내는 우리 남편 제일이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 남편이 조금만 다쳐도 큰일 납니다.
모두 제 욕심만 채우려니 첫날 저녁부터 남의사정 하나도 안 봐 준다고 싸우고 원수가 됩니다. 욕심을 가지면 자유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욕심 없는 대자유의 맛은 안 가져 본 사람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내 마음을 깨쳐야 그것이 반야이며 참다운 지혜를 얻습니다. 이런 법문을 듣고 “그런 것이 깨달음이로구나.”하고 알아들은 정도를 가지고 반야지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개의 지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 소식을 듣고 마음을 깨쳐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모든 욕심을 버려야겠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위 되는 것이 아니라 허공 되는 것이니, 불교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줄거움은 깨닫는 것 - 바라밀 4
“욕심버리고 일하라. 남을 위해 할 일 밖에 없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닌 완전히 내버리고 나면 육체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정신으로 다만 내 이 본 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지니고 간직할 뿐, 오직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살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쉬운 말로 {정신을 차려야}하는데, 정신을 다 차릴 것이 아니라 {기분을 내지 말라} 부정이나 긍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본연 자세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것은 즐거움도 아집입니다. 그것은 돈 푼이나 모아 가진 즐거움이 아니라, 우주를 다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생의 환희이며 누구한테 애기도 못하고 혼자 웃는 정말 통쾌한 즐거운 입니다. 지구가 녹아서 이 마음의 창고에 들어오고 저 태양이 녹아들어 오고 일월성신 온 우주가 다 녹아 나의 마음 가운데 들어옵니다. 그러니 모르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다 알고 다 모르고 나서 우주가 일체가 됩니다. 사람이 아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아는 것 때문에 고통인데 불교를 알아 놓으면 하나도 모릅니다. 하나도 모르면서 다 아는 그곳에 참으로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 근심 걱정이 없고 원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반야이고 지혜입니다.
남만을 위해 살 때 - 바라밀 5
이렇게 해서 불생불멸(不生不滅) {{현진. 본래 물질로 이루어진 나란 없다. 사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육체는 부모에 의해 일시 적으로 인연에 의해 태어난 것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본래 없다. 나라고 한다면 소리 내고 있는 의식일 것이다. 의식은 원래 나고 죽는 법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하는 내 마음을 깨쳐야 하는 노력, 그것이 {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를 도피안 이라 번역하는데, 그 뜻은 저 언덕을 건너 갔다. “이 세상에 살다 저 세상에 갔다. 이 중생 세계에 살다 저 불보살세계에 갔다.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갔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현세에 비유해 말한다면, 가난하여 고학을 한 끝에 부처님 법대로 일도 잘하고 아껴 모어고 저축해서 부자가 됐다. 나중에 병들어도 약 먹을 때 돈 염려 없다.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피안이라 할 수 있으며, 자기가 발전하는 모두가 도피안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살이에서 보면 도피안이란 말이 되겠지만, 우리가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된다는 의미의 도피안은 아닙니다. 우리 범부가 천당. 지옥 . 귀신세계로, 동물세계로, 인간세계로, 아수라세계로 육도윤회(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하는 것은, 내 마음 “참나”인 줄 모르고 육체를 나라하여 육체의 생존을 위해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 없의 인과에 따라 개도 되고 소도 되고 합니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사상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나”를 찾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로 돌아다니다 도인을 만나 마음이 “나”니,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언정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부터는 참 마음을 단속해야겠구나, 지식이나 학사. 박사. 노오벨상 다 필요 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도 필요 없다고 결심하여 육체 본위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갑니다. 하루 세 끼에서 두 끼만 먹고 두 깨에서 한 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됩니다. 정신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이 커져서 이 마음이우주도 창조할 수 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집착이고 구속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도 부정. 긍정의 아무 생각 없이 대합니다.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해 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나는 망하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나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 갑니다. 온 우주가 전부 다 내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도피안은 돌아온 것 환차안(還此岸)
도피안이란 결국 인도말로는 저 언덕에 간 것이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말의 뜻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의 뜻대로 하자면 환차안, 곧 이리로 돌아온다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만일[도피안]이라 하여 어느 딴 곳에 가는 것이라 하면 나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어디까지나 마음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고 자기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 도피안의 길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할 수 있고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피안]이라 번역했는데, 이곳이란 뜻을 저쪽이란 말로 표현했다면 부처님의 뜻과 다르지 않지만, 참말로 저쪽 어디로 멀리 가서 보살이 되고 성불하는 것이란 뜻으로 알고 그렇게 번역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뜻과 크게 어긋납니다. 이 도피안을 보통 한문대로 알다가는 진리가 자기 마음자리인 [나]한데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여 어디로 가려고 하게 되니 큰일 입니다.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하며 청정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닌 그러한 금강 같은 내 본 마음으로 돌아온다. 모든 객관 사물에서 모든 비판을 버리고, 소위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모든 학문, 일체의 지식을 안 따라가는 내 마음자리로 돌아온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도피안]입니다.
경 중의 경(經)
경(經)이란 성인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이야기한 [말씀]. [글]. [이야기]란 뜻입니다. 이 경자(經字)을 [날경]. [법경]이라 하고 글경이라고도 합니다. 옷감으로 쓰는 베를 짤 적에 요사이는 방직기계로 짜지만 원리는 다 한가지어서 날이 있어야 그 날 사이로 실을 감은 실톳이 왔다 갔다 하면서 길쌈을 짜게 되므로 날이 무명을 짜는 데 핵심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성인의 말씀이 모든 이치의 핵심이 되므로 [경]이라고 한것입니다. 또 [經]자 대신 [徑]자를 쓰기도 하는데 [徑]자는 (지름길경). (빠를 경)자이니, 빠르게 지름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중생들은 삐뚤어진 길로 꼬불꼬불 돌아다니지만 성인이 말씀한 진리는 인생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지름길로 빠르게 가게 한다는 뜻으로 [徑]자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에 [徑]자의 뜻이 있다는 정도이지 실제로는 [經]자로 그 뜻을 포함하여 표시합니다.
그래서 경전(經典). 경교(經敎). 경률(經律). 경서(經書). 장경(藏經). 성경(聖經)이란 말이 있고, 유교에서도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는데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중생들의 근기와 정도에 맞추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렇게 설명하셔서 마음을 깨치도록 하신 8만 4천 법문이경 가운데, 실려 있다고 해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합니다.
이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멸도 하신 뒤 그 교법이 흩어지지 않고 후세에 잘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의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 내어 부처님의 정법을 비로소 경으로 체계 있게 결집 함으로써 완성된 것입니다.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법문을 청함으로써 묻고 대답하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깨쳐서 참 나를 완성하고 부처를 이루어 반야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 이 [금강경]이니 이[금강반야바라밀경]은 경 중의 경니 것입니다.
구마라습삼장(鳩摩羅什三臟
구마라습삼장은 인도 구자국스님의 이름인데 법역하여 동수라 합니다. 어린이 면서 노인처럼 학문이나 모든 것이 대성해 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어린이면서 마음 쓰는 거나 생각하는 게 팔십 늙은이처럼 속에 영감이 들어앉아 있어서 사람 대하는 법이 실수를 안합니다. 어려서부터 천재이어서 학문이 밝고 덕이 있으며 하나를 들어면 열을 알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선생님] 소리를 들은 분입니다. 일찍이 어려서출가하여 소승교를 배운 뒤에 대승불교에 능통했으며 다시 율장을 통하여 경률론 이 삼장을 두루 통달했으므로 삼장법사로 존칭되었으며, 이래 구자국에서 대승불교를 널리 전포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진왕 부견 이 구자국을 정벌했을 때 구마라습 삼장을 중국으로 묘셔 왔던 것입니다.
그 뒤부터 장안에 있으면서 [대품반야경]. [묘법연화경] 등 많은 [경률론]을 번역했는데, [금강경]도 이때 구마라습 삼장이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제일 많이 유행했으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이 [금강반야바라밀경]도이 구라마습삼장이 번역한 것입니다.
법회산림 - (法會山林)
불경을 강의하는 것을 절에 가면 산림한다 그럽니다. 이 말은 파인아산(破人我山)하고 양공덕림(養功德林)한다고 하는 두 글귀의 끝자 둘을 합해서 만든 말입니다. 너니 나니 하고 집착하는 착각을 두드려 부수는 것이 불교 공부하는 것이고, 태산처럼 높은 나(我)라는 감정을 앞세우는 아상. 인상을 없애는 말씀을 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므로 파인아산한다는 뫼산(山)자를 떼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아상. 인상만 부수는 것이 아니고 중생상. 수자상. 도 두드려 부수는 것이니, 결국 말은 [인아산]이라 했지만 뜻은 아상산(我相山). 인상산(人相山). 중생상산(衆生相山). 수자상산(壽者相山)을 다 부수어 없앤다는 말로 봐야 합니다. [인상]은 [나]에 대한 상대적인 존재, 곧 남을 뜻하며 객관을 뜻합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살림살이하는 것, 좀 잘 살아 보자 남과 같이 살아 보자는 생각이며, 수자상[壽者相]이 몸뚱이로 타고난 백년 목숨을 살려니 하고 좀더 오래 살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사상(四相)이라고 하는데 역시 금강경의 중요한 사상(思想)입니다. 이 사상만 끊어지면 보살의지위에 나아갈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사상에 대해서는 본문을 공부할 때에 많이 나오게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합니다.
수풀림(林)자를 쓴 것은 숲은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고 재목이나 화목(火木)으로도 쓰고 과일도 있고 온갖 짐승들이 길들고 또 무성하는 것을 뜻하며 사람에게 덕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공덕의 숲을 기른다는 뜻으로 양공덕림(養功德林)이라 했는데 그 끝자인 임(林)자를 따라 산림(山林)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설법을 하고 법문을 듣고 하는 것은 모두 산림을 시작한 것이며, 인아산(人我山)을 부수고 불보살님과 같은 완전한 인격을 성취하는 공덕의 숲을 기르는 사업이 됩니다.
금강경 대강좌
법회인연분 제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이란 절에서 비구 천이백 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진지 잡수실 때가 되어, 가사 입으시고 바리들으시고 사위 서울에 들어가시와 성 안에서 차례대로 비시었다. 그리고 절로 돌아오셔서 진지잡수시고는 가사와 바리를 거두시고 발 씻으신 뒤 자리 펴고 앉으시었다.
제1 법회인연분 -법회가 열린 인연
과해 - 재목해설
법회인유분은 이 금강경을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게된 동기를 아란존자께서 설명하신 대문(大文)입니다. 법회가 열리게 된 인유라 하여 법회인유라 했고 과목장절이란 뜻으로 분이라 했고 제일장 또는 제이과 란 뜻으로 제일 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사이 말로 고치면 [제일장 법회가 열리게 된 인연]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은 어느 경이나 대개 삼분으로 나누어 그 뜻을 이해합니다. 처음이 서분이고 다음은 정종분 마지막은 유통분이라 합니다. 서분은 서론 이란 뜻이고 정종분은 본론이란 뜻이며 유통분은 결론과 아울러 후세에 길이 전해져서 인류사회에 큰 인인이 되도록 널리 펴라고 당부하신 대문입니다. 이 가운데 서분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문입니다. 이 가운데 서분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문이 아니고 정종분과 유통분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유통분 가운데도 [맨 끝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고 나니 누구누구가 어떻게 듣고 기뻐하며 받아 지니었다. 하는 이 경문 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고 역시 아란존자의 말씀 입니다.
경문의 내용을 장절(章節)로 나누는 것을 과목(科目). 과판(科判)이라 하는데, 중국 위나라 때 위제가 대덕법사들을 초청하여 경 강의하는 것을 듣고 묻기를 [공자의 유교나 노자의 도교는 경문에 장단이 있는데 불경에는 왜 과단(科段)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대덕 스님네가 경 가운데 과목 나누는 것을 대답을 잘 못했는데, 양양에 계시던 대안법사가 이 말을 듣고 경문에 서(序). 정종(正宗). 유통(流通)의 삼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경문에 삼분으로 과판(科判)하는 것이 통례가 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문을 삼분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 경이든 거의가 다 이렇게 분석하여 공부할 수 있는 공통의 과판법(科判法)일 뿐이지 그 이상은 나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도 32분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나누어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법회인유분도 삼분 가운데 서분 이면서 32분 가운데 제일분이 됩니다.
원문 : 여시아문(如是我聞)
해석.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엮어 낸 것인데, 그 때 아란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외워내는 중역을 했습니다.
아란존자는 부처님께서 아침에 샛별 보고 마음 깨쳐 도통하신 그 시간에 태어났다 하여 아란을 한문자로 경희(경사스럽고 기쁘다)하고 번역합니다.
이 아란존자가 수무살이 되어서 부처님께 왔습니다. 그때 아란존자는 자기가 중이 되는데 세 가지 조건을 [첫째 부처님은 당시 최고의 대접을 받는 분이었으므로 임금도 못 먹는 음식을 대중들이 갖다드리고 하는데 부처님 잡수시다 남은 음식을 나에게 먹으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위신에 관계됩니다. 둘째. 부처님은 옷을 해다 드리는 이들이 많아서 당신 입던 옷을 제자에게 주고 또 부자들이 사서 입고 하는데 나에게 부처님의 헌 옷을 입으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째, 제가 출가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20년동안 설법하신 것을 새로 한번 낱낱이 개인 교수해 주셔야 합니다.]하고 사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주고 그의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여가 나는 대로 밤이고 낮이고 아란존자 출가하기 전20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을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아란존자는 한 번 들은 것은 무엇이나 기억하는 좋은 기억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란존자는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문제일(제일 많이 들었다는 뜻)이 되셨습니다.
이 아란존자가 부처님 열반하실 때 [경전 맨 첫머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하라]고 하셨으니 ,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내가 들은 대로 쓴다.] [이렇게 쓰라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 첫머리에는 어느 경에나 [여시아문]이 있는데 이것은 곧 부처님이 만드신 제도입니다. [누구도 이 제도를 어기지 말고 경전에 찾아보라.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다 있다.]는 뜻입니다.
원문 : 일시불(一時佛)
해석 [불법은 역사가 없다. 역사를 무시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실제로 불교 사상이 그런 경향이 있고 경에도 그렇게 되어있기도 합니다. 한평생 걸어온 것을 내가 기억할 필요가 없으며 구태여 삶 이름도 기억하려하지 않고 장소도 사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애착해보았자 마음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까닭입니다. 박 누구라고 하지만 참말로 그런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역사서을 전연 수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 수행에 있어서는 장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고찰을 한다든지 하는 때에는 불편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일시(一時)에 어느 때, 각설이 때 그런식으로 돼 있고 아무 날 아무 시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없는 거다. [서기(西紀) 몇 해다 불기(佛紀) 얼마다 해 봤다 그것은 어림없고 말도 안 된다. 왜냐 하면 시간은 그 자체가 본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중생 따라 시간이 다다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당이 스물 여덟 하늘이나 되는데 맨 아래 천당인 사왕천(四王天)의 하루가 우리 인간의 50년이 되고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면 그 하늘 1주야가 우리의 백년이나 되며, 또 더올라 가면 우리 2백년. 4백년이 거기 하루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역사적인 시간을 말해 봤자 천당 사람에게는 안 맞으며 도 다른 세계에도 역시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한국의 열시는 유럽에서는 밤 한 시가 되고 인도의 아침 열 시는 미국에서는 역시 밤이 될 것입니다. 또 다라나라의 시간이 다르고 하루의 시간도 다릅니다. 자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나라의 1년, 수성(水星). 금성(金星)의 1년은 지구의 1년과 크게 다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가다 시간이 다르므로 완전한 시간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인간계 뿐만 아니라 전 중생계를 구제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셋째, 불타(佛陀)의 경지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시간 관념에 얽매이는 것은 경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다는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서 나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노인들이 바위 위에 앉아서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은 수염을 날리면서 얼굴이 하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신선 같은 거룩한 풍채에 마음이 끌린 나무꾼은 정신을 잃고 영감들을 쳐다보는 동안에 바둑 한 판이다 지났습니다. 그래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생각한 나무꾼은 자기 지게 있는 데로 가보니 그동안 벌써 몇 백년이 지나갔는지 지게도 없어지고 도기 자로도 다 썩어서 조금 남았더라는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꿈에 한 이십년 삼십년 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들 딸을 다섯 여섯 낳고 온갖 사업을 다 하고 한국 갑부가 되어 태기를 여 나무대 놓고 밤이나 낮이나 재미나게 호강을 하면서 살았는데 깨고 보면 꿈입니다. 그러나 깨어서 시계를 보면 채 일분도 안 되었는데 꿈에 들어가서는 20년의 생활이 지난 것입니다.
이렇게 꿈에 들어가 몇 십년 살았다는 것도 우리 생각일 뿐 사실 20년이 아니며 손목시계가 1초가 안 됐다고 하는 것도 우리 생각일 뿐 역시 일초는 아닙니다. 일 초란 생각 그것이 꿈에 이십년이란 생각으로 된 것이며 아들 딸 놓고 살림 산 그것도 내 생각이 그렇게 나타나 보인 것뿐입니다.
꿈이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창조된 것이듯 시간과 공간은 우주와 인생의 근본인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진 현상이며 그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공을 완전히 초월한 부처님 세계에서는 반드시 어느 나라 몇 년 갑자년 을축년 등을 기록하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 법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 한 때 어느 때...]그렇게만 기록했던 것입니다.
원문 :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해석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고 했는데, 사위국은 가비라국 옆에 있던 나라 이름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이란 그 나라 서울에 남산공원. 탑곡공원 같은 큰 공원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기수와 급고독원의 두 말이 합해진 말입니다. 사위국의 기타태자가 본래 참 좋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방 한 50리 쯤 되고 큰 정원에 온갖 나무와 꽃이 다 있고 온갖 정자가 있고 온갖 시설이 다 있는 정원 중의 정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타태자가 자기 공원에 심은 나무를 뜻하여 기수라 한 것입니다. 또 급고독이라는 장자는 부처님을 만나 불법을 듣고 세상에 없는 거룩한 법임을 알고 나서는 그는[만일 이 부처님과 같은 이가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영원히 고민과 번뇌를 해탈하지 못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뻔 했구나, 내가 이제 부처님을 만나서 생사를 초월 하고 진리를 배우게 됐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일이냐.] 하고 환희심을 내면서 부처님 거처를 하나 만들어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한 끝에 기타태자가 가지고 있는 공원이 인도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하여 그 공원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기타태자는 온 정성을 다해서 가꾼 정원이고 보니 매우 애착하여 팔지 않을 뜻으로 [그렇게 꼭 사고 싶으면 손바닥 두께의 순금을 내 정원에 꽉 채우시오, 그렇게 깔아 주면 내가 팔겠고.]했습니다.
본래 급고독장자는 불쌍한 이 도와 주기를 좋아하는 큰 부자였으므로 고독한 사람이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잘 준다고 하여 급고독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밥이 없으면 밥을 갖다 주고 옷이 없으면 옷을 대 주고 병이 났으면 병을 낫게 해 주고 불우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도와주는 큰 자선사업가 였고 큰 부자였습니다. 급고독장자는 인도 천지의 금이란 금은 다 모았습나다. 그래서 절 지을 자리를 깔아 들어가고 금이 모자라 한쪽을 못 깔았는데 급고독은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기타태자는 이 광경을 보고 [왜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인도 천지의 금을 다 사들었는데도 이렇게 못 다 채워서 부처님 계실 정사를 세우지 못하게 됐으니 이 소원을 어떻게 이루나 하고 슬퍼서 웁니다.] 하였습니다. [서가여래가 어떤 분입니까. 나도 듣기는 있지만 얼마나 거룩하기에 그렇게 지극정성을 다해서 받드십니까.] [제가인도의 모든 도인 철인을 다 만나 보았지만 부처님에게는 지혜로나 수도력으로나 무엇으로나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 중에 진리이고 완전 무결한 인생을 처음으로 밝혀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재산뿐 아니라 이 몸뚱이까지 다 공양을 바친다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타태자는 [그렇게 위대한 도인이 나왔습니까. 그러면 나머지는 동산에 모든 나무들과 함께 재가 시주하겠습니다. 장자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 다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의 두 힘으로 이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절을 [기수급고독원]이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누가 개인으로 절을 지으면 그 사람 개인의 이름으로 절 이름을 지어 기념하는 예가 많습니다. 도선사도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인데, 이것이 비석 보다도 더 큰 기념이 됩니다. 고려 때 조성한 팔만대장경은 다 목판인데 경책가운데에 시주 이름을 함께 새겨둡니다. 가령 돈을 만량 냈다면 만 장에다가 이름을 하나씩 다 적어서 영원히 그 경전의 법문과 함께 기념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 이름을 창건 공덕주의 이름으로 짓는 예는 일본이나 중국. 인도에도 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기수급고독원]은 부처님 재세시에 있었던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원문 : 여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與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해석. [큰 비구 천 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셨다.]함은 부처님 당시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큰 스님네를 일컫는 말입니다. 계지키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비구대중의 모범이 될 만하고 부처님의 제자다운 도인 이란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제도하신 제자는 사실은 오비구입니다. 이 오비구는 세존께서 싣달태자의 몸으로 몰래 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하시자 부왕이 다섯 사람에게 명하여 태자를 잘 보살피도록 하였던 아야교진여 등입니다. 이 오비구는 석존의 초전법륜이라고 하여 유명한 녹야원에서의 첫 법문하실 때 제자가 되므로 비로소 불법승의 삼보를 갖추에 한 인연 깊은 제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또 중인도의 비사리성의 선각장자의 아들로서 그 일족과 친구들 오십인이 함께출가한 야사장자가 있으니 이렇게만 해도 오오인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섭존자가 네분인데 첫째는 부처님의 심법을 바로 전해 받은 제일 상좌인 마하가섭과 삼가섭이라고 하는 삼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녹야원에서 부처님 제자가 된 오비구 중에 십력 가섭이란 분이 계셨으므로 이분까지 합하면 다섯 분의 가섭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삼형제의 삼가섭은 가야성이라는 지방에서 천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불을 숭상하는 외도로서 맏형인 우루빈나 가섭은 오백인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둘째인 나제가섭이 이백 오십인, 막내인 가야가섭이 이백 오십과 함께 수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삼형제가 부처님을 한번 만나서 그 위대한 인격과 법력에 귀의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사리불과 목건련 이 각각 자기의 제자 일백인씩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했으므로 천이백오십오 비구가 되는데, 야사비구와 함께 출가한 대중도 자세히는 오십사인이라고 하므로 이렇게만 해도 천이백오십구인의 비구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분들 말고도 마하가섭존자나 수보리존자나 우바리존자, 아란존자 같은 십대제자와 또 십대제자의 제자가 있고 그밖에도 많은 비구가 있으며 비구니 만 해도 부처님을 길러주신 부처님의 이모 대애도비구니는 많은 여인과 함께 출가하여 여비구니의 시조가 되었으며 부처님이 태자로 계실 당시 태자비였던 야수다라 비도 오백의 여인을 늘 모시고 다니며 처음부터 사십구년간 법문을 들은 제자 가운데 큰 수만을 따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경의 처음에 대개 이 천이백 오십인이 나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많은 것을 뜻합니다.
원문 : 이시 세존 식시 착위지발(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해석.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번씩만 공양 식사를 하시는데 그 시간은사시(오전 9~11)로 됐습니다. 사시에서 일분 전도 안 되고 일분 후에도 안 잡수십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누가 부처님께 음식을 바치고 드시라고 하면 이것은 부처님을 욕 뵈는 것입니다. 때가아닌데 식사를 하라고 하면 이것은 죄가 되면 됐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도들은 밤중 새벽을 가리지 않고 음식만 차려 놓고 빌고 하는데 부처님은 허기져서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사시 이외에 불공하는 데는 한국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한국불교는 부처님 욕 뵈는 불교로 됐습니다. [내가 음식을 많이 드렸으니 나한테 복을 많이 주시오]하는 식의 무식한 미신불교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식시(食時)라 함은 부처님이 하루 한 끼 사시(巳時)에만 공야하시는 그 시간이 되었다 뜻입니다.
[착의(着衣)]는 큰 가사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마을에 외출하거나 유명한 학자를 만나거나 점잖은 사람을 대한다든지 국왕 대신을 만난다거나 법문을 할 때는 꼭 큰 가사를 입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입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큰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때를 가지시고 사위성 가운데에서 밥을 비십니다.
원문 : 입사위대성 걸식어이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入舍衛大城 乞食於已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해석. 사위성은 사위국의 수도 서울입니다. 부처님은 복잡한 시내를 피하여 교외에 계시는데 그렇지만 시내에서 아주 멀게 떨어지지 않고 성안의 출입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성안으로 들어 가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질서정연하게 밥을 비시는 이것이 곧 법을 행하시는 것이 됩니다.
차제걸이란 부잣집만가고 가난한 집을 빼어 놓아서도 안 되고 가난한 집만 다니고 부잣집은 빼어 놓아서도 안 되며 꼭 순서대로 다니며 일곱 집만 얻어먹게 돼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똑 같이 일곱 집을 얻어 가지고 기원정사로 돌아와서 적게 얻어온 사람이 많이 얻어온 사람이 나누어 주고 반찬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이 많은 노장도 드리고 젊은 이는 아무렇게나 먹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고 아란존자는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므로 부처님이 아란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느냐]고 하니 부잣집에 가면 밥 얻기가 좋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먹을 것도 모자라니 딱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가섭 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가난한 집만 다녔느냐] [가난한 집은 가난해서 복을 복을 못 짓게 되므로 그래서 가난한 집을 골고루 다닙니다.]
이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불교를 믿고 자기 마음을 믿으면 이것이 부자다 장차 우주을 다 차지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그것도 차별 말고 똑같이 불법에 인연 맺어 주고 똑같이 복을 짓도록 해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무엇을 주고 좋은 일 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니까 가난한 집일수록 빼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골고루 평등하게 일곱 집씩 빌게 되었습니다. 다만 기생집이나 창녀. 음녀가 있는 집에는 가지 않도록 했는데 여기 에도 연유가 있습니다.
아란존자가 한번은 밥을 빌려 나왔는데 기생 딸이 반해서 아란존자에게 최면술을 걸어서 불러 들여 가지고 옷을 벗고 끌어 안고 누워서 막 음행을 하려는 찰나에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두 남녀를 잡아들였습니다. 수천명 대중 가운데 끌어내어 놓았더니 아란존는 얼굴이 빨개가지고 고개도 못 들었고 그 기생 딸도 결국은 참회 발심을 해서 불법에 귀의한 일이 있었는데 아란존자가 비록 최면술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하튼 그런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술집 같은 곳에 밥 얻으러 갔다 여럿이 끌어들여 술도 자꾸 먹이고 여자도 데려다 놓으면 술기운에 또 파계할 위험이 있으니 애당초 그런 이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동남아시아에는 한 집만 얻어먹어도 배가 터질 정도로 많이 줍니다. 시주들이 미리 준비를 잘 해가지고 있다가 주니 지금은 한 집만 해도 먹습니다. 그것은 저만 복 짓고 나만 복을 많이 달라는 욕심이니 복을 고루 나누어 짓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시주할 기회를 주어야 더 큰 복이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주석. 1
사위국 : 부처님 당시에 인도 가비라국의 서북쪽에 있던 교살라국의 수도. 지금의 중인도 콘다주의 세트마헤트 지대에 있던 바사익왕 유리왕의 나라. 본래는 코살라국의 서울을 사위라 했지만 그 수도를 가시고 나라 이름으로 삼아서 [사위국]이라고도 하는데. 이 [사위성] 남쪽에 당시에 부처님의 유명한 절인 기원정사가 있어서 유명하게, [사위]라는 말은 실라벌이라 고도 하니 물자가 풍부하다는 뜻. 범어로(sravasti)
기수급고독원 :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신 유적지. 부처님 당시 이사위국왕인 바사익왕의 태자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가 함께 세워서 부처님께 바쳤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음 범어로
(jctacanaha pindadasyarama)
창건 공덕주(創建 功德主)
절이나 탑 같은 불사를 할 때에 화주로서 공덕이 크든가, 시주를 많이 했든가 특히 처음부처 그 불사를 주선하고 주관함 사람.
정사(精舍) : 수도한 이가 거주하는 집 곧 절 수도도량을 뜻한다.
시주(施主) : 보시하는 사람. 음식 돈 물품을 교단에 바치는 사람. 범어도 단월이라 한다.
육조구결(六祖口訣)과 더붙어 함께 했다 함은 부처님이 비구들이 금강반야의 상 없는 도량에 함께 머물러 계시다 뜻으로 더불어 라고 한 것이다. 큰 비구라 함은 큰 나한이란 뜻이며 비구는 범어인데 당나라 말로는 여섯 가지 도적을 능히 깨뜨리므로 비구라 한 것이다. 무리는 많다는 뜻이며 천이백 오인은 사람 수를 말하고 한 가지 했다 함은 평등한 마음의 법회에 함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원문 : 반식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해석. 밥을 얻을 때는 바리때를 잡는 법이 군대 무기 다루듯 일정한 법칙이 있어야 하고 밥먹을 때는 대중이 함께 단체행동을 해야 하는데 지금 동남아시아에서는 식당이 따로 있어 가지고 가끔 얻어다 먼저 오면 먼저 먹고 하니 불교의 방법은 무너진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는 또 큰 가사를 꼭 입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양을 제공한 시중께 복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마시는 소리, 수저소리 하나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런 데 요새는 모두 벗어버리고 맨몸뚱이 러닝 바람으로 모두 공양을 하고 있으니 시주한 사람에게 복이 안 갑니다.
대중들은 서로 음식을 똑 같이 하고 의식주을 절대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대신 지식과 수행은 어디까지나 계급을 찾아서 아는 것이 많고 수행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부처님 같이 섬시고 절하고 그 지식 앞에 꼼짝 못하니 그것이 정말 이상적입니다. 부처님께서 만든 이 대중 사회제도를 소위 원융제도(圓融制度)라 합니다. 네 것 내 것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고 꼭 평등하며 좋은 개성을 인정하면서도 평등을 유지하고 평등사상을 가지고 개성을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밥도 한 그릇 가지고 안 될 사람에겐 좀 더 주어라, 그래서 똑같이 나누어 먹고 절대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철저한 수련을 합니다.
이렇게 찌는 삼복더위에도 화로를 피워 놓고 경루 옷을 서너 벌 끼어 입고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수련도 요사이 같이 안일한 생활만을 찾는 세상에는 필요합니다. 몸뚱이 훈련이 아니라 마음 훈련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결정하면 더운 줄도 모르고 몸에 병도 안납니다. 이런 훈련이 특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합니다. 한국 사람같이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고 믿을 수 없어서는 큰 탈입니다. 우리나라는 화랑정신이 다시 부활해야 민족혼이 살아나지 지금 이대로는 게을러 빠지고 욕심만 꽉 차 있어서는 나라가 안됩니다.
공양을 끝내신 세존은 대중과 함께 가사를 벗어 놓고 발을 씻고 선상(앉는 자리)에 좌선하는 자세로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 당시 수행하는 비구들은 맨발로 다니게 돼있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발을 씻었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고 선상에 올라 앉아 참선을 하는 데까지 말을 했으면 이것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가부좌하고 앉으면 이제부터는 일체 정신에 들어가는 것이 참선을 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 정사에 대중을 거느리고 계시다가 때가되니 밥을 얻어와 가지고 선상에 올라 앉으 시더라,] 여기까지가 이것도 금강경 법문에 큰 문제가 됩니다. 금강경 가운데 어느 구절이 가장 중요한 구절인가가 첫째 문제이겠지만, 금강경은 이 구절까지에서 일단은 다 설법해 맞춘 것입니다. 부처님과 스님들은 하루 생활은 밥한 기 빌어서먹는 생활이니 그날 한 끼 먹으면 하루 다 마쳤고 다른 일 없으니 대소변 볼 것 제외하면 선상에 가만히 가부좌 틀고 앉아서 설법 듣고 하는 것으로 마친 것입니다.
천 이백 대중이 마음을 깨치신 부처님을 따라 질서정연하고 장엄 거룩하게 내일도 모레도 죽을 때까지 이 육신이 죽은 다음 내생까지도 계속될 것입니다. 부처님 이 천여명 대중을 거느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참선하고 사시(오전 9~11시)가 되면 부처님이 맨 앞에 바리때를 들고나가 거지대장이 되어 수천명이 질서 장엄하게 밥을 빌어다가 나누어 먹고 참선하며 불법으로 사는 생활은 정말 멋진 생활입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고 친하고 먼 것도 없고 자유스런 생활. 평등한 생활. 이상적인 생활입니다. 육체를 초월하여 여자 걱정 남자 걱정 없고 풍년 들어나 흉년 들거나 아무 상관 없고 굶어 죽는다 해도 걱정이 안 되며 배가 터져 죽을 걱정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술적인 생활과 신성한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불법의 진리를 실현하는 일과는 곧 불법의 설명을 맞춘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석 2.
비구 : 20세를 넘은 남자승려로서 사미의 견습 수련을 거처서 2백 5십계를 받은 사람. 여자승려는 비구니라 하는데 여기서는 비구라는 한 말 가운데 비구니 남녀신도, 하늘신. 보살등 일체 대중을 포함하고 있다.
법력 : 불법을 닦아서 얻은 공덕의 힘 또는 불법의 위신력을 말한다.
녹야원 : 석존께서 성도 3일 뒤에 처음으로 설법하시어 아야교진여 등을 제도하신 곳. 중인도 바라내국 왕사성의 동북 쪽에 있음. 지금의 베나레수시의 북쪽에 있는 사라나이드의 유적지.
삼보 : 불교의 삼대 신앙대상 곧 부처님은 불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보. 부처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의 세 가지 보배이니 세 가지 보배란 듯으로 삼보라 했다.
비사리성 : 중인도에 있던 나라 이름이니 항하를 사이에 두고 남방으로 마갈다국과 대치 했던 발기인의 도성.
상좌 : 상좌(上佐) 상자(上資)상자라고도 하니 우리나라에서 도제제자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 혹 상족이라고도 하는데 법을 배운 법상좌. 계를 받을 수계상좌. 출가를 시켜준 은상좌. 선을 전해준 참회상좌가 그것 이다.
가야성 : 중인도 마갈다국 파트나의 서남쪽 62마일 지점에 있으며 지금도 가야라 부른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는 여기서 남으로 6마일지점
설의(說義) 1
중생은 죽기 싫어 한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합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 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줍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이 생명이지만 그러면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안 나옵니다. 요새 무슨 가치, 가치하고 떠들어나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다운 가치를 논합니까. 속담에 [살기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짓기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용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삽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문제입니다. 다른 것은 다 아나 마나입니다. 알아 보았자 별 수 없고 철학박사 돼 보았자 별 수 없습니다. 먹고 똥 사고 늙고 병들고 죽은 것은 똑같습니다. 착하다고 더 나은 것도 아니고 악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미련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먹고 똥싸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기는 똑같습니다. 그걸 누가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되었을 따름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경전입니다. 석가여래는 49년 동안을 꼭 이 문제를 다루었고 글자 한 자도 딴 목적을 가르쳐 보이신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철학이니 과학이니 뭐니 해 보아도 깊은 내용을 파 보면 속이 비어 있습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걸 껍데기로 싸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자기로 똥싸 놓은 것과 같습니다. 파초 대를 까보면 꼭 그 안에 기둥이 있을 것 같은데 껍데기 뿐이지 알맹이도 기둥도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그 근원을 캐고 보면 파초 껍데기 까 놓은 거나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에게서와 같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누가 사느냐.] 하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느 한 글자도 이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된 글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들이나 모두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만약에 내가 못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라도 제혼자지만 제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합니다. 만약에 내가 못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라도 제혼자지만 저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네가 무엇인데 그렇게 잘났단 말이냐.]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 못합니다.
설의(說義) 2. 나는 일체가 아니다
<나>라는 말은 첫째[네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객관이 없으면 <나>라는 생각 안납니다. 상대가 있으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나라는 행동을 합니다. 이 법당 안에 있는 물건을 낱낱이 열거해 봐도 나는 아니고 서울 시내 사람 다 대보아도 내가 아닙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 모든 동물을 다쳐들어도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하는 말은 일체가 다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일체를 부정하는 <나> 이 자체는 무엇입니까. 다음 문제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일체가 아니란 말은 일체를 부정하다 보니 결국 나는 일체를 초월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나>는 우주 이전부터 있었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설의 3. 나는 육신이 아니다
셋째는, 나는 살았다. 우주도 아니다. 모든 걸 초월한게 나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다들어 봐도 아니다. 선과 악을 초월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나다. 물질도 허공도 아니다. 허공이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왜냐 하면 허공은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렇게 보면 나란 생각을 뚜렷이 내가지고 모든 것을 구별하고 일체를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판도하고 주재하는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이냐 하는 뜻은 살았다 이 소립니다. [모든 것이 아니고 다 초월 했으면서 살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공간이 크지만 생명이 없어 생각할 줄 모르고 또 지구. 태양과 저 많은 별들과 같이 엄청난 물질이 뭉쳐 있지만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우주는 커다란 한 개의 송장입니다. 따라서 우주에서는 어디에서고 생각이 나올 데가 없습니다. 생각의 주체는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나는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일체가 아니지만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공간이 죽어 있고 한 없는 물질의 현상계가 죽어있고 그러니 허공도 물질도 아닌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산 것일 것이다. 그것은 생명일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나>나. 즉 말을 듣는 이것이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허공이 애기할 줄 모르고 지구덩이가 애기할 줄 모릅니다. [오늘 오후 네시 반부터 설교를 한다. 우리가 약속을 했으니 그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그 약속을 지킬 줄 아는 것도 허공. 물질은 못합니다. 육체도 물질적 요소들이 모인 것뿐이므로 그걸 못합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허공도 물질도 아닌 쉬운 말로 생명이고 우리말로 마음입니다. 육체의 오장육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신경이나 모든 세포(細胞), 뇌신경까지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물질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그 신경 자체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의 경우와 같아서 엔진이 스스로 가고 바퀴가 알아서 구르고 서는 것이 아니라 운전수가 세우고 발동시켜서 가고 오고하는 것과 한가지 입니다. 육체는 자동차와 같고 마음은 운전수와 같은 것입니다.
설의 4.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생각이 아닙니다. 지식. 사상. 정치.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 조차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할 줄 아닙니다. 애기하다가 하기 싫으면 집어치우고 하는 이런 자유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이<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입니다. 그런 것이 일체를 부정하고 모두를 초월했으며 우주의 태초이전, 지구이전부터 실재한 것이라고 긍정하며 동시에 영원불멸의 긍정체로서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나>라는 글자 한자로 말한 것인데 그러므로 <나>라 하는 것도 결국 한 개의 생각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객관을 상대로 하여 <나>라는 생각의 주체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과학의 주체, 종교의 주체. 온갖 학문. 사상의주체는 될지언정 생각 그것이 본래부터 과학. 철학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 까닭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필요 없이 만들면 자꾸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석
귀의(歸依) 범 : 귀입 귀투라 하는데 돌아가서 의지하여 구원을 청하는 것을 뜻함.
사리불 :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인 제자. 사리자. 추로자. 신자라고 번역하는데 아버지가 실사이기 때문에 별명을 우바실사라고도 한다.
목건련 : 부처님의 10대제자중에 신통이 제일이며 목건나야나. 목가야자. 목련존자이라고도 하며 왕사성 근방의 바라문의 아들. 처음에는 사리불과 함께 외도를 배웠으나 부처님의 제자 5비구 가운데 아설시를 만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비구니 필추니라 음역하며 걸사녀. 근사녀라 번역한다. 여자로서 출가하여 348계를 받아 지니고 수행하는 이 (부처님의 이모인 대애도 비구니가 비구니의 처음.
대애도 비구니 : 마하파사파제라 음역하며 부처님의 이모로서 부처님을 직접 길렀으며 부처님 교단에서 맨 처음으로 부처님 허락을 받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다.
야수다라 : 구리성주 선각왕의 딸로서 석존의 외사촌이며 석존 출가전 태자 당시 태자비로 아들, 나후라를 낳았고 그 이모 대애도와 함께 5백의 석가족 여자들과 함께 출가했다.
공양 : 공급하여 자양한다는 뜻. 음식. 옷 따위를 삼보. 부모. 스승 죽은 이들에게 드리어 공경하는 것.
가사 : 출가수도 하는 이가 입는 법의이니 적색 . 부정색. 염색이라 번역한다. 시주에게서 얻은 낡은 옷으로 조각 조각 꿰매어 만드는데 5조. 7조. 9조. 11조 21조 등의 구별이 있으며, 안타회. 울다라승. 승가리의 삼의 삼의가 그것이다.
제2의 가아(假我)
<나>라는 이것이 한 개의 생각이라면 <나>라는 생각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는 본체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생각도 아니고 <나>라는 생각을 내기 전부터 <나>라는 말입니다. 생각을 낸 주체인 <나>는 <나>라는 생각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아무 생각도 아닌 이것이 <나>라는 생각을 냈다면 <나>라는 생각은 이것은 제2의 가아(假我)입니다. 거짓 <나>이기 대문인데 그러나 우주의 삼라만상이 다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우주의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이 한 생각 때문에 전체가 다 생긴다. 생각의 나. 육체의 나. 우주 현상계 이 모든 것이 가아인 한 개의 생각으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이것은 제1의 진아(眞我)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나>라는 생각을 낼 수는 있지만 <나>라는 생각은 아니니까 이것은 진짜 자기입니다. 모든 망아(忘我), 가아를 건설하기 전에 가아를 건설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에 진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 이전에 진아 이전에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런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란 이름을 지으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런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란 이름을 지으면 그것은 벌써 생각뒤가 되고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 해봤자 다 생각 이후가 되는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아 이것은 현상이 아닙니다. 빈 것도 진공조차도 아닙니다. 진공도 산소도 공기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진공인데 그것이 진아일 수 없습니다. 진공은 아무 생명이 없는 것이고 <진아>인 <나>는 살아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니어서 진공조차도 초월한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 조차도 아닙니다. 유무를 다 초월한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이것 오직 살아서 말하고 듣고 있는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환인. 하느님. 일본의 가미사마. 이수라엘의 여호와 하느님. 인도의 옥황상제 중국의 천(天) 등등 나라마다 자기네 민족 고유의 신앙대상이라고 하는 신이 있지만 이것들이 모두<진아> 밑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교도 그렇고 정치. 과학. 사상이 전부 생각 뒤이고 생각 이하에서 벌어진 것이 모든 학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학문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가.] 하는 것을 찾자는 것입니다. [살아도 내가 살아야 하고 또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느냐.] 이것을 밝히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입고 자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육체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사람이 백 년의 명을 타고 났다면 오늘 하루 살았다 하는 것은 24시간 목숨을 짤라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산삼 하나를 달여서 쭉 들이마시는 그 시간도 자꾸 죽어 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워서 자는 것도 죽어가는 것이고 오면서도 죽어가고 가면서도 죽어가고 사는 것이 다 죽어가는 것뿐입니다. 아무 사정도 없이 만분의 일초도 정지함이 없이 자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간다 소리는 죽어간다 소립니다. 농사를 뼈가 빠지도록 지어도 자구 가는 것이고 장사를 해서 한국 돈을 다 모아 놓아도 그것도 자꾸 가는 것이니 하루 하루 백원, 백원 돈을 모으는 것이 가는 것일 뿐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지만 빈손도 갖고 가지 못하고 통째로 다 버리고 내버릴 것도 없이 갑니다. 차라리 본래 죽어간다고 말이나 바로 했더라면 그렇게 각오라도 하고 사니까 죽어도 섭섭한 마음이 덜 했을 터인데 살아간다 해놓으니까 별수없이 시집가고 장가가려고 죽기 살기로 애를 써서 시집. 장가가고 첫날 저녁부터서로 맞지 않아서 속고 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파초 껍데기 벗기는 것과 한가지 입니다. 살아봤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았다는 우리나라 말의 어원도 옳은 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간다 하는 소리는 곧 태워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살았다 하는 말은 오늘 하루 태웠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죽어간다는 소리와 같은 뜻입니다. 한국 사람의 말은 진리에 꼭 맞는 말이 많습니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그리고 종교적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자살할 마음이 안 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 청소년들이 전부 히피족으로 돼 가고 미쳐서 날뛰는 것도 까닭이 깊은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걸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개. 돼지처럼 살면 백년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먹고 또 싸고 늙고 병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살 수 있겠지만, 본래의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으려 하고 동물과는 다릅니다.
현재 서양의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가다가 마침내 벽에 부딪쳐서 이제 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청년들이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전부 히피족이 되는 것인데 히피란 환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머리는 뒤집혔고 알맹이 없는 거품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발견할 수 없고 자기를 발견할 수 없으니 히피족이 안 되고 어떻게 합니까. 히피족이라도 되는 사람들은 똑똑 한 사람이고 히피족도 못되는 것은 비 맞은 쇠똥 한가지의 썩은 청년들입니다. 비 맞은 쇠똥은 거름도안 되기 때문입니다. 히피족도 못 되는 그것은 개만도 못합니다. 개는 보신탕이라도 하지만는 히피족도 안 된 인간은 곰탕도 못됩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그만큼 밝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청년들은 무언가 생명의 애착이 있어 환각제를 먹을 지언정 자살은 하지 않습니다. 죽기는 뭔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덴마크 청년들은 미국사람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육도 완전히 의무교육이고 교통도 무료. 의료기관도 무료고 전부 공짜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고 지상천국입니다. 성도 개방을 해서 여자로 생긴 것은 전부 친척이건 누구건 다 자기마누라고 남자는 전부 영감이고 자기 남편입니다. 성을 개방 해서 법률에 저촉되지 않도록 돼 있으니 그렇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 놓고나니 지극히 고독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내 남편 내 아내가 결속되고 임자가 있어야 할 터인데 개방을 해 놓고 나니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 다녀도 어디가 죽어도 아무도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덴마아크 처녀 총각은 처녀 총각도 아니고 옛날 우리 습관대로 하면 잡년, 잡놈들이 되어 버려서 이 사람들은 삶에 염증이 난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직 삶에 대한 염증은 안 났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습니다. 덴마아크 청년들은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여러 백길 되는 데 막 떨어져 죽기까지도 합니다. 병들어 죽고 똥만 싸다죽으면 남도 괴롭고 나도 괴롭고 할텐데 통쾌한 처녀들, 통쾌한 총각들이라 할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이상 무엇 때문에 병이나서 죽도록 기다릴 게 있느냐, 맹렬하게 한번 죽어보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유물사상이 찾아 가는 생의 말로라 할 것입니다. 전쟁할 필요도 없지만 전쟁하고 싶으면 한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미국 히피족들 월남 가서 싸우면 제일 잘 싸웁니다. 그것도 미친 히피족들의 행각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사우는 그것뿐이기 때문에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20세 이상 사람 다 죽고 나면 이 지구상은 뭐가 되고 인간 세상은 뭐가되겠나, 온 인류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이 걱정은 똑 같습니다. 다행히 서양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동양의 정신문화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정신문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불교인데, 불타의 정법인 대승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입니다. 그런데 또 중국은 공산당의 유물 교육을 받고 있으니 불교는 없고 지금 한국과 일본만 남았는데 또 일본 불교는 학문적. 형식적인 내용으로 전락했고 대승불교의 참 골수를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불교뿐입니다.
내가 이번 에 일본에 가서 요지를 밝혔습니다. 일본 불교는 껍데기고 우리 한국 불교는 알맹이라고 내가 그런 증거를 되더니 자기들도 긍정을 했습니다. 한국에 태어난 것을 가장 행복스럽게 생각하고 불교의 정신으로 언젠가 인류를 한번 지도할 때가 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손으로 인류평화를 건설할 때가온다는 말입니다. 불교정화 한다고 근 20년 동안 애쓴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비구 비구니가 잘 살아 보려고 절 뺏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약소민족이 강대국에 압제를 당하는 36년간을 절실히 느껴 본 사람입니다. 독립만세 운동을 했다고 왜병 에게 고생을 치르고 나서 헤매다가 마침 불교를 만나 중이 된 것입니다. [인류가 불교에 돌아오면 전쟁이 없어지고 약소민족들은 완전히 해방이되어 영원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사상이 불교에 있다]고 기뻐하여 불교에 귀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사상을 바로 한다, 불교정화 한다는 말은 한국독립이요 동시에 인류의 해방 이다, 그래서 시간이 모자라면 내생에 또 와서 하자.] 이것이 우리의 뜻입니다. 실제로 죽어도 또 한국에 태어납니다. 이 좋은 이론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류평화를 위해 약소민족이 일어나는 횃불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 허공은 허공
나라고 하는 가아(假我)를 상대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생각도 아닌 나라는 생각이전의 진아(眞我)를 말했지만 사실 이것도 부득이해서 이걸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설(假設)한 것 뿐입니다. <참마음 참 내>가 이런 생각을 일으킨 것인데 <진아>니 <가아>니 하는 분별도 다 떨어진 그 이전의 <나>, 나도 아닌 내가 이걸 상대해서 <진아>니 <가아>니 하는 가짜를 부쳤을 뿐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참 피눈물 나게 서러운 말입니다. 유물사상으로 찾아 봐도 자기가 없으니까 <나>라는 생각 이것이 <나>가 아닌가 해서 한 말입니다. 이것이 소위 동서의 철학을 대표했다 하니 참 불쌍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도 살도 못해서 자살하기는 무언가 아깝고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해서 위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니, 마치 한강 건너에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데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요사이 실존철학이란 바로 이 <잠깐만> 철학인데 이런 법 가지고는 이번엔 안 죽을는지 몰라도 다음엔 죽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이것 가지고 안심입면(安心立命)하는 철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미 생각조차도 아닌 <나> 이것이 실재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물질도 아닌 허공도 아니다.] 그것들을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허공이 바위로 될 수 없고 진공이 바위 돌로 될 수는 영원히 없을 겁니다. 바위 돌은 고사하고 모래도 안 될 것입니다. 모래뿐 아니라 산소나 수소도 안 될 것이고 전자도 에너지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허공은 태초부터 없는 것으로 영원토록 없을 것입니다. 없는 것까지도 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처 에너지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대문에 생명이 없는 물질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생명으로 변할 수 없고 거기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요새무기물질 유기물질로 화 했다는 소리를 하지만 무지물질이 유기물질로 화했다는 소리는 [새 물질의 세포가 이루어져서 이것이 생명으로 된 것이다.] 이런 뜻을 한 말인데, 그러나 세포 아니라 세포 보다더 정밀한 조직이 된다. 해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여하한 고조가 된다 해도 생명으로 변화 할 수 없는 것은 허공이 바윗돌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허공이 바위로도 되고 바위가 허공 됐다 한다면 허공이라 할 수도 없고 바위 돌을 바윗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말도 못 만들고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허공은 영원히 허공이고 물질은 영원히 물질입니다. 생명은 영원히 생명이고 죽음은 영원히 죽음입니다.
마음이 보고 듣는다
그런데 요사이 현대사조(現代思潮)의 영향을 따라 누구나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거의가 서양의 유물적인 사상만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확실히 상식으로는 육안(肉眼)이 성하고 신경이 성해야 하고 대뇌가성해서 이 세 가지 구조가 건전할 때 비로소 뭐가 보입니다. 눈을 감아도 안보이고 눈이 탈이 나도 안보이고 신경이 조금 고장이 나도 안보이고 대뇌가 조금 고장 나도 판단을 못합니다. 중생들은 꼭 그런줄만 알지만 부처님은 이걸 반대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나 마음이 본다. 어째 마음이 보나. 네 마음이 보고 싶은 생각을 할 때는 보이지만 네 마음이 딴 생각만을 하고 보려는 생각을 안 하면 눈을 똑바로 뜨고 있고 아무리 건전한 신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육체적인 구조가 무엇을 보는 것이라고 하면 마음이 아무리 딴 것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눈만 뜨면 안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카메라와 한가지이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20시간, 한달 동안 고박 밤새우며 책만 보려는 마음만 먹으면 책을 꼬박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딴 생각을 골돌 하게 하면 한 시간도 책속에 글자가 한 자도 안 보입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하루 열 번씩 그것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쳐보는 영화라도 딴 걱정을 크게 하거나, 어떤 사람을 생각하든지 원수를 생각하면 금방 안 보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마음이 보는 것이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눈을 감으면 안 보이는 가. 그것은 내가 눈이 본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려 할 때 이제부터 안 보인다는 확정을 내렸으므로 눈 감기 전에 벌써 볼려는 생각을 없앴다는 것입니다.
생각 잡념이 허트러진 실처럼 복잡한 망상을 네 마음에서 다 없애고 오롯이 마음만 남아있으면 눈을 감기는커녕 두 눈 다 빼 버린다 해도 뒤 꼭지로도 보입니다. 네가 마음만 어지럽지 않아서 마음만 순수하면 그래서 본심 그대로 <참 나>만 드러나면 땅속의 밑바닥까지 투시가 되고 여기서 아폴로 타고 달나나까지 갈 것 없이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라서 눈을 감았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았다고 하는 것은 안 보기로 마음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과 같이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뭘 들으려 할 때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확실히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딴 걸 골똘하게 생각할 때는 시장, 복판에 저물도록 서 있어도 사람소리 하나 안 들립니다. 또 들어려고 하기만 하면 세상 분주한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 옵니다. 또 금방 안 들으려고 하면 심할 때는 옆에 대포가 터져도 안 들립니다. 큰 대포가터지면 목조건물 같은 것 여간 잘 지어놔도 무너지고 두꺼운 유리창도 가루가 되지만 마음이 딴 걸 생각하기 때문에 고막도 안 터집니다. 소리는 못듣더라도 고막은 터져야 하는데 고막 조차 안 터졌다는 말은 물질이 진공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오관도 똑같습니다. 코도 냄새롤 맡고 싶어 해야 냄새가 마음이 딴 걱정을 하거나 깊은 연구에 몰두할 때는 똥을 갖다 코밑에 발라 놔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독한 냄새가 두 코에 가득 찼는데 아무리 딴 걸 생각했다. 해서 모른다면 말이 안 됩니다. 냄새는 모르지만 두통이라도 나야 할 게 아닌가. 육체는 한 개의 기계니까 확실히 두통이 나야 할 텐데 두통도 안 납니다. 그것도 물질이 진공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통이 대번에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맛을 알려는 생각을 안할 때는 또 큰 걱정 튼 기쁨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즐겨먹는 음식 열 가지 백 가지를 입에 넣어 주어도 아무 맛을 모릅니다. 씹어서 꿀떡 넘기기는 넘겼지만 나중에 물어 보면 씹은 것도 넘긴 것도 모릅니다. 혓바닥이나 목구멍이 맛을 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 됩니다.
주석
참선 : 선법을 스스로 참구하는 것, 주로 앉아서 좌선을 일컬게 되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화두선을 하게 된다.
결가부좌 : 부동좌(不動坐)라고도 하며 앉는 법의 한 가지다. 먼저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것.
파초 : 잎은 긴 타원형이고 꽃은 화갈색이고 따스한 곳에서 나온다.
마음 : 지각작용. 사고 감정 등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감정이나 생각을 초월한 생각 이전. 주관. 객관 이전의 본체자리를 뜻한다.
옥황상제 : 욕계 제이천의 천주 제석천을 가리킨다.
극락세계 : 안양. 안락. 묘락이라고 하며, 극락정토라고도 한다.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서 있는 아미타불의 원력정토 즐거움만이 있고 생사의 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태어난 이는 누구나 다 성불하도록 되어 있다.
유물사상 : 우주 만유의 실제가 물질이라고 보고 우리의 정신까지도 물질적 소산으로 보는 유물론 내지는 물질 본위의 사상 빛 황금만능주의 까지도 광의(廣義)의 유물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정화(佛敎淨化) : 한국불교의 본지를 잃고 이조의 배불 정책과 일체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퇴폐적으로 속화된 교풍을 바로 잡고 구세의대도사를 양성하는 청정본연의 수행종단을 세우고자 하여 일어난 불교계의 정화운동.
실존철학(實存哲學) : 우주와 인생의 실재인 실존을 주제로 하고 또한 그것을 자기 문제로 삼아 나가려는 주장. 불교에서 인생과 우주의 실재를 마음으로 보고 마음 자체의 바탕을 깨닫는 것을 근본 명제로 삼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철학이 잘 진전되면 불교와 현대사상은 쉽게 접근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심입면(安心立命) : 본래 생사가 없는 마음자리의 자성을 깨달아 우주에 대 자유 함으로써 정말 안심할 수 있는 것이며 비로소 설 땅을 얻은 것이라는 뜻.
무기물질(無機物質) : 생활의 능력이 없는 물질. 물 . 공기. 광물 같은 무기물질이니 곧 생명이 없는 죽은 물체를 일컬음.
유기물질(有機物質) : 생활 기능을 가진 생명 있는 물체를 일컬음.
오관(五官) : 눈. 귀 . 코. 이.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
무정물(無情物) : 생명이 없는 것, 물질적인 것. 무기물. 식물 같은 것은 무정물이고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 동물은 유정 이라고 한다.
인욕(忍辱) : 육바라밀의 하나. 욕됨을 참고 안주하는 뜻. 온갖 모욕 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
생각이 아프다
오관과 우리 마음은 서로 관계는 있을망정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오관은 물질로 구성된 기계이므로 마치 전자계산기가 사람보다 억만배나 정확한 성능을 갖고 있지만 전자계산기는 맞게 했는지 빨리 했는지 그걸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정물로 만들어진 기계이므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이 발달하여 아주 치밀한 인조인간을 만들어서 이 육체인간보다 억만 배나 훌륭한 인간이 나오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 가치 없는 기계인간 때문이니 우리에겐 이용가치가 있겠지만, 기계 그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는 무기물질로 구조한 한 개의 기계고 이 마음은 살아 있는 운전수입니다. 육체는 죽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옛날 말로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까진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송장인 무기물질입니다. 그런데 손톱 끝에 가시가 들어놓으면 참 아픕니다. 다른데 아픈 것보다도 손톱 밑에 가시가 조금 박혀놓으면 마누라도 귀찮고 남편도 싫고 자식도 돈도 싫고 다 귀찮아집니다. 아무리 대통령 하라 해도 육체가 요것 하나뿐이다 이것이 나의 전 생명이라고 이걸 애착하고 아끼기 때문에 아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것만 생각하면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마치 이놈의 세상 더러운 세상 안 살겠다고 크게 결심하고 이 몸뚱이 딱 버리고 나면 도끼를 가지고 이 몸뚱이를 끊더라도 아픈 줄 모릅니다.
기미년 삼일운동 독립만세운동할 때 그런 청년 많았습니다. 그때 고등보통하교 졸업하면 나이가 많아서 요새 대학 다니는 처녀 총각보다 더 컸습니다. 그런 청년들을 옷을 발가벗겨 가지고 유치장에 갖다 넣습니다. 밤 열두시만 되면 하나씩 하나씩 불러 내서부젓가락을 뻘겋게 달구어 가지고 전신만신을 쑤십니다. 사람이 참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고함지르는 소리에 오장이 다 녹아 버립니다. 그래서 한 청년이결심하기를 [저렇게 두들겨 맞다가 내가 병신이 될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니 이렇게 살면 뭘하느냐. 그러니 개자식들한테 매 맞는다 해서 다리가 부러져도 아프다고 고함지르면 내가 항복하는 것이나 다름 없구나 나는 나가서 소리 지르고 하지 않겠다. 너희야 나를 죽이든지 가루를 만들든지 톱으로 썰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 차례가 되어 나갔습니다. 이짓 저짓 다 하고 마지막으로 부젓가락으로 여기저기 쑤십니다. 처녀들한테도 가슴 양쪽에 젓가락을 뻘겋게 달구어 허벅다리고 어디고 안 쑤시는 데가 없습니다. 별것을 다 해도 나는 결심을 한 것이 있어서 눈도 깜짝 안하고 눈물도 안 흘립니다. 그 당시는 죽을 작정하고 몸을 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취재하는 사람은 더 미칩니다. [이 자식 입을 딱 다물고 상도 안 찌푸리니, 에라 요놈의 자식 네가 참으면 얼마나 참나 두고 보자, 조센징(조선 사람) 요놈의 자식.]하고는 이를 갈며 별짓을 다 합니다. 그래도 눈하나 깜짝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나중에는 일본 순사고 한국순사고 겁이 나서 곁에 보지를 못하고는 세상에 독하다 독하다 이렇게 독한건 처음이다. 만일 죽어 귀신이 있다면 이 귀신한테 다 죽을게다.] 그러면서 먼저 그 사람을 내놨습니다. 다른 사람 일년 내내 고문한 것보다 더 했으니 그만하면 독립만세 부른 값을 치뤘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뼈가 다 부서지고, 살이 다뭉게져서 거의 못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료도 안했기 때문에, 다친 데가 없어서 쉽게 나은 것입니다. [이거 크게 다쳤다] 이거 큰일 났다 하면 금방 신경이 죽기 때문에 한 달 갈 게 일 년도 더 갑니다. 그러니 아픈 것을 못 참을수록 인욕을 하지 않을수록 병은 오래가게 마련이고 겁을 낼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입니다.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병이 쉽게 낫고 뼈가 부서져도 그게 갑작스러이 나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몸뚱이를 버리고나면 그렇게 됩니다.
몸뚱이를 버리면 아픈 줄 모릅니다. 그러니 몸뚱이를 챙긴다든지 하는 수양이 필요합니다. 애착하기 때문에 내가 살을 잡으면 아프지만 사실 몸뚱이 제가 생명이 없으니 아플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또 본래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살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아니고 육체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아프냐. 마음으로 생각을 내서 아픈 것뿐입니다.
오직 <마음>이 <나>입니다.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나는 순수한 <나>라는 생각조차 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고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면서 살아 있어서 얘기할 줄 알고 얘기를 시켜 놓고 저게 된 소리인지 안 된 소리인지를 비판 할 줄 알고 그러고도 아무 생각 없는 이것이 만사의 주체인 <나>입니다. 이 <나>가 생각으로 과학을 만들어 내고 철학을 만들어 내고 뒤집어 엎어버리려면 엎어 벌릴 수 있고 이것이 만사의 주체이며 우주의 핵심입니다. 이것보다. 아파서는 사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여기서 나왔고 진리 해도 그것은 생각 밑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앞설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사람이 우주의 주체입니다.
이걸 발견한 이가 싣달태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나오면서 제일성으로 부르짖은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는데, 그 뜻은 온 우주에 <나> 곧 <자아>가 오직 위대한 생명임을 외친 것입니다.
육체를 정리하는 생활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버려보자.] 다시 말하면 [육체생활을 좀 정리해 가지고 하루 밥 세끼 먹던 것을 노력하여 두 끼 먹고 수양하자. 더욱 더 자아완성을 위해 노력하자]는 젓입니다. 우리마음의 본래 자세에서 보면 무슨 지식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흙탕물처럼 된 것이고 헝클어진 실같이 번잡한 망상입니다. 도서관의 서적을 다 마음에서 떨어놓으면 사람의 제 생명. 본 면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무슨 귀중품이다, 보불이다, 잘 보관하자, 이 사람 무슨 병이냐, 어려서 애들과 장난을 하다 피가 많이 날 정도로 피부가 상했어, 그 때 균이 들어가 지금 파먹고 있다.] 이 생각이 병이 된 이 관념이 몸뚱이를 지배합니다. 이런 관념이 절대원리라 믿고 중생심으로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마음을 탁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고 육체의 주인공. 우주의 핵심. 생각의 주체를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자꾸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구 들어가서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우주에 모를 일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내 목전입니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내 눈이 한나가 아니라 오관이 다 눈이 되고 귀가 됩니다. 귀라면 귀고 코라면 코고 거리가 없어 집니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관 객관이 통일됐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주관 객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지만 마음도 아닌 이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살 기분이 생깁니다. [나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구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다. 세계의 수소탄이 다 내 몸에 맞는다 해도 육체는 죽을지 모르고 지구는 다 녹아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수 없구나.] 하는 진리를 환하게 보게 됩니다.
이렇게 불교를 알고 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 시간부터 없어집니다. 동서 어디에도 구속된 데가 없고 이것 이전에 어떤 진리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을 구속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모두 이렇게 앉아서 말 듣고 있습니다. 절대자유인 이것이 마음입니다. 내가가령 어떤 사람을 일어서라 해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사람 몸뚱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일으킨 것도 아니며, 오직 그 사람 마음이 정한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의 마음에 그런 결정이 안나면, 일어설 생각이 안나면 칼로 목을 쳐도 안 일어섭니다. 절대 자유 인게 생명입니다. 아무리 시집가라해도 안 가고 장가를 오라 해도 안 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며 절대 자유인 것이며 그리고 남녀노소 똑같이 평등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내놓고는 상대가 다 있고 대조(對照)가 다 있으며 완전한 게 없습니다. 가령 이 막대기는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데 긴 것이 나타나면 짧아지고 짧은 거이 나타나면 길어집니다. 저 혼자는 자유롭게 뜻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내 놓고는 모든 것이 완전한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이 뜨겁고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일 태양 가운데 살고 전 우주가 태양을 돼 있다 하면 뜨꺼운게 없습니다. 뜨겁지 않는게 있기 때문에불이 뜨겁지 불 그놈 자신은 뜨거운 걸 모르고 태양도 제가 뜨거운 걸모릅니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고 불교의 연기의 원리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있고 여자 때문에 남자가 있고 나쁜 놈 때문에 착한 놈이 있습니다. 모두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사람 없고 모두 착하면 착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모든 것은 연기의 원리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이런 상대성원리로 이루어진 현상계를 초월하고 육체본위의 생활을 포기하여 오직 남을 위해 아무 조건 없는 생활을 하는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과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천이백대중의 수행생활을 보인 것이 이 일장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교단도 부처님의 정신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지계하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실천하는 교단이 되어야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서 나 홀로 높다]는 말 인데, 그 뜻은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현상계는 상대적인 것이고 죽은 것이며, 우리의 마음자리만이 정말 위대한 것으로서 이 마음을 깨치고 보면 우주는 자유롭게 되고 현상계는 한갓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
중생심(衆生心)
<기신론>에서 중생의 근본마음, 곧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여심(眞如心)을 말한다. 이것은 보편 평등한 실체로서 일체 만유와 전 우주를 포용하는 근본진리 제법에 있어서는 법성. 진여라 하고 중생에 있어서는 불성, 여래장, 자성청정심이라 한다. 여기서는 중생들이 번뇌 망상에 이끌려서 제잘난체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부처를 배우는 수행 생활
마음을 깨친 부처님은 무슨 조건부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합니다. 인생의 최대문제인 생사대사를 초월했고 지식으로도 부족한 게 없이 완전하며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없이 전능하고 또 그리고 의식주가 필요 없으니 그야말로 원자탄이고 뭐고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 위에 누가 있을 수 없는 분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자기 기분에서 보고 들은 판단력이 아니라 그건 완정하고 깨끗한 마음이 사실 그대로를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깨친 정각 그대로입니다. 바리때를 들고 밥을 얻어 먹으러 나가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합니다. 그것은 복이 없어서 얻어 먹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진리를 모르는 사람. 삐딱 걸음으로 걸어가는 인간들을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앞서서 시범을 하는 것입니다.
[비구승은 반드시 거지가 되라. 얻어 먹어라, 왜냐 하면 많은 중생을 고루 대해야 하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나 국왕이나 어떤 권리 층도 어떤 천한 사람도 조금도 차별 없이 대하려면 얻어 먹어야 한다 꼭 얻어 먹어라,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균등히 주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 고루 듣게 하기 위해서 평등하게 빌어 벅어라.]한 것입니다. 한 군데 장소를 따로 정해 놓고 [쌀 가져 오너라, 돈 가져 오너라, 불공 가져 오너라.]하면 부자나 오고 권리 층이나 오지 가난한 사람은 오지 못하니 그런 짓하지 말고 나르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운수생활을 하라 하셨습니다.
인도는 나무 밑에서 참선하고 비만 안 오면 거기서 자고 거기가 집입니다. 그런데 또 부처님은 [한 나무 및에 사흘 저녁을 계속자지 말라.]하십니다. 그러면 거기 정이 생긴다, 애착이 생긴다, 사흘 밤 자고는 다른 나무 및 으로 옮겨가라. 이게 다 공동소유물인데 이게 내거라고 생각 말라는 것입니다.
전에 윤보산 스님이라는 분이 중되기 전후해서 그가 나와 2년 꼬박 같이 있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이어서 집에 가면 붙들릴 것이 뻔하므로 나에게 글을 하나 써 달라면서 편지 쓸 용지를 내놓는데 보니 윤가용전(尹家用箋)이라 윤가집에서만 쓴다는 글이 인쇄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천지의 공공물로 있는 종이를 너희 윤씨네만 쓰려고 도장을 찍어 놨는가. 인쇄를 했는가. 천지만물이 다 공공된 공물인데 윤가는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글쓸 자격이 없다]하고 농삼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이 왜 내것 네것을 가리여 그러는가하고 한탄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먼저 먹어야 할게고 [배부른 사람 나중에 먹어야 할게 아니냐.]이것이 불교의 공한 진리로 사는 생활원칙입니다.
공양하는 법
불교의 대중생활제도는 원융제도이며 내 것 네 것이 없고 서로가 위하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제도 도 아닙니다. 신도들이 어떤 물건을 고양하는데 있어서도 가령 [양말 몇 켜레 가져왔습니다. 스님 나누어 신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요새는 잘 못 타락되어 가지고 [이것은 큰 스님부터 신고 이것은 아무스님 이것은 아무스님 신으십시오]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불법을 아는 신도가 아닙니다. 누구누구 신도라 하는 것은 그 양말 신은 사람도 죄가 됩니다. 대중평화도 깨집니다. 대중평화도 깨집니다. 그것은 내 신도다, 그것은 네 신도다, 하고 사우게 됩니다. 쌀이나 돈을 가져와도 옷을 가져왔어도 어쩌고 어쩌고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소리 말고 들여놓고 가는 것이 참 공양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중이 먼저 된 사람은 먼저 앉고 나중 된 사람은 나중 앉는 순서가 다 있고 모든 것을 다 평등하게 합니다.
그런 의식주는 절대 평등을 주장 하지만 지식이나 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간 먼저 중이 된 사람과 한 시간 나중에 된 사람과의 차이를 엄격히 하고 앉는 차례까지 순서가 정확하지만 먼저 도통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라도 그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최고의 대우를 하고 그의 지도를 따라 법을 배웁니다.
주석.
지계(持戒). 계를 받아서 지니고 지켜 나가는 수행을 말함. 육바라밀 가운데 두 번째 수행 덕목, 계에 오계. 십계. 250계. 48경계. 삼취정계 등이 있다.
정각(正覺)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하고 부처님의 열 가지 호 가운데 하나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최고무상의 깨달음 이어서 어느 누구의 깨달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깨달음이며 보편타당성이 있는 두루하고 원만한 깨달음이므로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하는데, 마유의 실상을 바로 깨달았다는 뜻으로 정각이라 하며 정등각의 준말이다.
운수생활(雲水生活)
선승들이 물이나 구름처럼 한군데 집착하지 않고 정처 없이 행각하는 것을 일컫는데, 아무 뜻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는 생활이 아니라 선지식을 찾아 또는 만행을 위한 구도의 행각 생활을 뜻한다.
공(空)
범어 순야라 음력하며, 물건이 없는 곳 보통 말하는 공간. 공허. 공무의 뜻으로 쓰인다. 또 유가 아니란 뜻이니,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종류는 매우 많으나 이를 크게 나누면 실답지 않은 육체의 자아를 실재라고 인정하는 미집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아공과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요소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 되는 미집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법공의 두 가지가 있으며 또 아공하고 법공했다는 생각까지 없는 경지, 공도 아닌 구공(俱空)이 있다.
도통(道通)
도통 통했다는 말이니 외도에서는 귀신을 보거나 이상한 경지를 얻으면 그것을 도통이라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아무 잡념이 없는 적멸아공(寂滅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경지를 지나서 마음의 본성을 깨달은 것을 도통이라 한다.
탐진치(貪嗔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셋은 수행인을 해롭게 함이 가장 심하므로 삼독이라 한다.
과보(果報)
인과응보의 준말이니 선악의 행을 따라 선악의 과보를 받게 되므로 일컫는 말.
내가 없는 구도 생활
금강경은 실재의 나, 얘기하고 얘기 듣는 마음자리, 실재의 자기, 쉽게 말해서 육체가 지닌 영혼,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을 깨우쳐 줍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의식주가 필요 없고 만 가지 소원을 한꺼번에 성취해 버리는 것입니다. 돈도 밥도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승려도 절도 집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절은 중이 거처하는 곳인 줄 알지만 지나가다 하룻밤 자고 가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구름 같은 운수생활이 곧 수행자의 생활입니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게 수행자이지 남에게 대우나 받고 호강이 필요하든지하면 그 시간 부터 그 사람은 타락하는 것이고 탐진치의 업보에 떨어지는 것이며, 종교는 멸망하는 것입니다.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第二
그때 대중 가운데 계시던 장로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끓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그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자 보살펴 주시고 잘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녀야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너희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지니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니라.
제이 선현기청분 - 선현보살이 법문을 청하다
제목해설
선현기청분은 선현이 법을 청한 대문이란 뜻입니다.
선현이란 수보리 존자를 가리키는데 금강경은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묻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이므로 수보리존자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 설법 가운데 제일 어려운 법문인 공의진리, 곧 아공(내가 없다는 아공). 법공(법 또한 없다는 법공).을 지나서 구공(아공과 법공이 모두 없어진 자리 구공)의 경지인 실상반야(현실자체가 반야)를 가장 잘 체득하고 있기 때문에 해공제일 수보리라고 합니다. 아공은 우리가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가 아니라 이것은 공하여 없는 것(空無)이란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하며, 법공은 물질적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 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의 본체가 본래 공무한 것이란 진리를 말하며, 구공은 아공. 법공을 다 초월하여 공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공의 진리를 잘 깨달았다고 해서 해공제일 또는 혜명수보리하고 하는데, <수보리>란 말은 본래 인도의 고대어입니다. 그 말이 세 가지 있어서 어느 한 가지 뜻을 따라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 뜻은 묻혀 버리게 되므로 인도말 그대로 <수보리. 수보리>하고 부릅니다. 세 가지 뜻은 선현(善現). 선길(善吉). 공생(空生)이니 출생할 때에 창고. 상자. 그릇들이 텅 비어서 공의 도리를 잘 알고 상서를 보였었고, 그 뒤 상보는 이가 [오직 착하고 오직 길할 것이라.]고 예언 했으므로 그렇게 이름했던 것입니다.
이 수보리존자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일어나셔서 금강반야의 법문을 청하셨으므로 선현기청분이라 한 것입니다.
제2선현분 원문
시 장노 수보리 재 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이 백불언
해석. 수보리존자는 없는 것도 없고 없는 것 없다는 것도 없는 공의진리를 제일 잘 알아듣는 제자이므로 10대 제자가운데 해공제일이십니다. 그래서 공의 진리인 금강경은 수보리존자 먼저발기해서 법을 청합니다. [그때부처님께서 대중과 함께 공양을 마치시고 발을 씨고 자리에앉아서 정진하실 시간이 됐습니다. 수보리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웃옷을 벗어 메어 어깨를 드러내고 공경한 뜻으로 합장을 합니다. 우리는 가사를 입을 때 도포 입듯 막 입는데 그러나 인도의 승려나 달마대사는 그대로 뒤집어 써서 입습니다. 부처님이나 국왕 대신을 만나려갈 때는 오른 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입는데 왼쪽 어깨는 그대로 걸쳐 입고 오른 쪽 어깨만 드러냅니다. 이것은 편단우견이라 합니다. 그리고 오른 쪽 무릎을 땅에 꿇고 왼쪽 무릎을 세웁니다. 또 열 손가락을 모아 가지고 합장하고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옛날에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경에 이 백불언이 자주 나오니까 이것을 우습게 새긴 일화가 있습니다. 백불언(白佛言)을 <흰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새기면서 부처님도 흰 부처, 누런 부처가 있다고 해석한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부처님께 어떤 말을 묻든지 대답할 때를 가리킵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0) | 2018.12.23 |
---|---|
[스크랩] 金剛般若波羅蜜經 (0) | 2018.12.23 |
반야심경(般若心經) 금강경 사구게와 오온개공 (0) | 2018.10.07 |
[스크랩] 마하(摩訶)란? (0) | 2018.09.16 |
[스크랩] 반야란 (0) | 2018.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