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般若心經) 금강경 사구게와 오온개공
앞에서 600 권이나 되는 『반야경』의 내용을 짧게 줄여 놓은 경이 바로 『금강경』이며, 그것을 더욱 줄여 놓은 것이
『반야심경』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의 사상과 반야심경의 사상은 결국 동일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반야심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이 부분에서 『반야심경』의 핵심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경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오온개공’이라는 내용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여기에서는『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조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금강경』의 사구게에 등장하는 핵심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반야심경』의 공사상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제 1 권 제 1 사구계, 제 5 여리실견분에,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함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 제 2 권 제 1 사구계 제 26 법신비상분에,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종결 사구게 제 32 응화비진분에 일체 하염 있는 법(유위법)은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또한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게송이 결국 상(相)을 깨라는 그 한 가지 법문인 것입니다. 상이라는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아 그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라는 것에도 상을 지어서는 안 되며, 여실히 상을 깨고 바라보아야지 음성이나 색상으로 부처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기[正見 -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 하면 여래, 부처라고 했는데 그럼 과연 상이란 무엇인가? 상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혹은 무시 이래로 지어온 온갖 고정관념, 선입견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색안경을 쓰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백이면 백 명 모두가 그 대상에 대해서 제각각 다르게 판단, 생각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교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일체를 바라봅니다. 나를 바로 보는 것이 불교이며, 인간 중심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상이라 했을 때 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나다’ 하는 고집], 인상(人相)[나와 너를 구분 짓는 마음], 중생상(衆生相)[육근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마음], 수자상(壽者相)[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상] 등을 이야기하는데, 이 모든 상은 바로 ‘나’라는 상을 근본으로 하여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개인에 적용시키면, 상은 곧 ‘나’라는 상[我相], 즉, ‘나’라는 모양을 제멋대로 설정해두고, 그 모양에 집착해 버리는 아집(我執)이 됩니다. 그리고, 이 상을 일체 대상에 적용시키면 법집(法執)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실하게 보면 그것이 곧 실상인데, 그 실상이란 것에 어떤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법집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의 가르침에 의거해 생각해 볼 때, 아집을 깨고 법집을 깨면 부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런데, 아집이 없는 이에게 어찌 법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법집은 아집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자세히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집은 ‘나다’ 하는 고집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상 타파의 첫걸음이며, 성불하는 첫계단입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말도, 사실은 아집, 아상을 깨는 작업인 것입니다. 모든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無執着)이며 ‘나에 대한 무집착’이야 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근본이 되는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應無所住 而生其心) 라고 한 말씀도, 상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말이니, 아상을 경계하는 말인 것입니다. 마땅히 경계가 부딪쳐 옴에 마음을 내어야 하겠지만, 그 경계에 집착하여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상(相)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우리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슬이며 행복을 차단하는 걸림돌입니다. 명예, 돈, 권력 등의 오욕락(五慾樂)도,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아상의 연장일 뿐입니다. ‘내 돈’ ‘내 명예’ ‘내 권력’ ‘내 사랑’ ‘내 자식’ 하는 등 이 모두가 ‘내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에 갇혀 그 울타리 안에서 바둥거리며, 그것을 얻었을 때 진정 고통을 안게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명예, 돈, 권력’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고질적인 상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행복의 기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고정되고 항상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만들어놓은 상(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고정관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가 통념상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즉, 행복이란 돈 많고, 명예가 있는 등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돈이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이렇듯 ‘나’[반야심경에서는 오온(五蘊)으로 표현]라는 것은 주위의 조건에 의하여 인연생기(因緣生起)한 무상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에 어떤 상을 지어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것은 무아의 이치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즉,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으로써 인연으로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존재이기에 무상하고 무아인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영원한 내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상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상하고 무아인 존재, 다시 말해, 연기하는 존재이기에 ‘나’는 공인 것입니다. 상을 타파한 세계가 바로 공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이라고 한 부분과 일치되는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의 핵심인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과 금강경의 핵심인 제 1 사구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그 내용면에서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고액을 건넜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는 말은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볼 것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오온개공’과 ‘제상비상’이란 가르침 속에서 ‘고정관념을 깨라’ ‘아집을 깨라’ ‘방하착하라’ ‘집착을 버려라’ ‘나를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분별심을 없애라’ ‘있는 그대로 보라(정견, 조견)’ ‘선입견, 편견을 없애라’ ‘무상, 무아를 올바로 보라’ ‘연기법을 깨달으라’ ‘공의 세계임을 알라’는 이 모든 가르침이 궁극에는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아상’의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 실천 수행의 방향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공임을 여실히 보는 것이며, 아상이 타파되어 아공(我空)이 이루어졌을 때 그 기초위에서 법공(法空), 즉, 일체의 제법이 모두 공함을 여실히 볼 수 있다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상 타파’가 수행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 점이 불교 수행의 핵심임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우선, 기본적으로 ‘나’를 버리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irinae19/1376046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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