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89칙 運巖大悲千眼 - 관음보살의 천수천안(千手千眼)

수선님 2018. 10. 14. 12:18

관련 이미지 <벽암록>제89칙은 운암화상과 도오화상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운암화상이 도오화상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이 수많은 손과 눈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요?” 도오화상이 말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 운암이 말했다. “나는 알았소.” 도오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운암이 말했다. “전신(遍身)이 손이요 눈입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을 잘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 운암이 말했다. “사형은 어떻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

 

擧. 雲巖問道吾, 大悲菩薩, 用許多手眼作什. 吾云, 如人夜半背手摸枕子. 巖云, 我會也. 吾云, 汝作生會. 巖云, 遍身是手眼. 吾云, 道卽太殺道, 只道得八成. 巖云, 師兄作生. 吾云, 通身是手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5권 도오장과, <전등록> 제14권 운암장에 전하고 있는데, 질문자가 운암이 아니라 도오화상이다. 도오원지(道悟圓智:769~835)는 이미 <벽암록> 제055칙에,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제70칙에 등장한 선승인데, 모두 약산유엄선사의 제자이다. 원오는 ‘평창’에 “운암은 도오와 함께 약산선사를 참문하고 40년 동안 눕지 않고 정진하였다.

 

약산선사는 조동종(曹洞宗)이라는 한 종파를 출현하게 했는데, 거기에 3인이 있어 법도가 성행했다. 운암선사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도오선사 문하에 석상경제(石霜慶諸), 선자덕성(船子德誠)선사 문하에 협산선회(夾山善會)가 배출되었으니 바로 그들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도오와 운암은 약산문하를 대표하는 뛰어난 선승들이다.

 

원오는 또 “대비 관세음보살은 8만 4천 모타라비(母陀羅臂:印相:mudra)가 있고 수많은 손과 눈이 있다. 그대에게도 있느냐? 백장선사는 ‘일체의 언어 문자는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로 귀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공안의 사유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천수경>에서 대비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자비 손과 천개의 지혜 눈으로 다양한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지혜작용을 제시하고 있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미묘한 지혜작용을 단순히 경전에서 설한 말씀이라고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서 안 된다. 백장선사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관음보살이 되고 천수천안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임제록>에도 ‘대비보살의 천수안(千手眼) 가운데 어떤 것이 정안(正眼)인가?’라는 질문으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본 공안도 운암화상이 도오선사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데, 그렇게 많은 손과 눈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즉 도오선사여! 그대는 관음보살의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체득했는가? 체득했다면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를 어떻게 체득하여 활용하는지 말해보라고 도오선사의 경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낚시 바늘이다.

원오는 운암의 질문에 “그대는 평소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면서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그대는 일상생활의 행주좌와 모든 행동이 그대로 천수천안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대비보살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이라고 지적한 말이다.

 

운암의 질문에 도오선사는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즉 잠자리에 몸부림 많이 치는 사람이 잠시 잠에서 깨어나 목침이 없어졌음을 알고, 깜깜한 밤중에 손을 더듬어서 목침을 찾아 처음 잠잘 때처럼, 다시 목침을 베고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이다. 운암이 “나는 알았소.”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군요. 도오선사가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며 물었다.

 

운암은 “신체 중(身)에 손이 있고 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불법 사상과 맞지 않고, 지혜작용이 없는 말이며,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라고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도오선사는 “이치로는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라고 비평했다. 운암이 “사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자신의 견해에 대해 도오선사는 8할 정도 인정하였기에, 10점 만점의 안목은 어떤 경지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도오선사는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通身是手眼)”이라고 대답했다.

 

운암이 ‘편신(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8점이고, 도오가 ‘통신(通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10점 만점이다. 편신(身)은 눈과 손의 움직임과 같이 몸의 일부가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통신(通身)은 온몸 전체가 눈이 되고 손이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작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굳이 다른 점을 논해 본다면 편신(身)은 평면적, 외연적이라면, 통신(通身)은 입체적 내포적이라고 할까?

 

그러나 <조당집> 제5권 도오전에는 신산(神山)이 “혼신(渾身)이 바로 눈”이라 대답하고 있다. 또 10권 경청장에는 “어떻게 처처에서 그를 상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경청은 “온 몸(遍身)이 눈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통신(通身), 편신(身), 혼신(渾身), 편신(遍身)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벽암록> 제18칙과 ‘수시’에 “온 몸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손이 되고 눈이 된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나 머리도 눈이 되는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원통하고 무애자재한 지혜를 펼치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의 묘용이다. 손이 1000개, 눈이 1000개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마음이 쏠리고 머무르면 999개의 손과 눈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무심의 경지에서 1000개의 손과 눈이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백족(百足, 지네)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무심의 경지에서 온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할 때 편안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데, 괜히 번뇌 망념을 일으켜 중생심으로 분별 의식을 일으키면 불심의 지혜로운 생활이 죽어버린다.(死人)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전신(身)이 옳은가. 온몸(通身)이 옳은가?” 본칙의 공안에서 운암의 대답이 옳은가, 도오의 대답이 옳은가?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 분별하면 10만 리나 멀어진다.”나 설두는 편신(身)이나 통신(通身)은 같은 말로 그러한 언어문자를 시비로 삼으면 천수천안 관음보살의 지혜와는 멀어진다. “나래치는 붕새는 천지 사방(六合)의 구름위에 날고,” 운암의 지혜작용을 <장자>의 붕새에 비유하여, 한번의 날개짓에 천지를 뒤덮는 것과 같았다.

 

“회오리 바람은 깊은 바다(四溟水)를 들끓게 하네.” 도오의 견해는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일시에 동요시키는 큰 역량을 갖춘 안목이다. 두 사람 견해의 우열은 논한다는 것은 어렵다. “웬일로 먼지가 갑자기 생기는가?” 운암의 지혜가 대붕과 같이 웅대하지만, 관음보살의 천수천안 활약에 비교하면 한 점의 티끌이 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다. “무슨 일로 가는 털은 어찌 멈추지 않는가?” 또한 도오의 지혜도 훌륭하지만, 관음 대비의 광대무변한 원력에 비교하면 미세한 터럭이 불과하다. 전신이니 온몸이라는 차별심으로 대비관음의 천수천안을 친견할 수가 없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제석천의 구슬로 법을 드리우니 겹겹이 그림자 쌓이는 것을.”

 

<화엄경>에 도리천에 구슬로 엮은 주련이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에 수천 수만의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어 전부 하나의 구슬 가운데 비춘다는 중중 무진의 법계를 비유하고 있다. 온 시방세계가 하나의 구슬이며, 천수천안의 무애자재한 경지이다. “주장자 끝의 손과 눈이 어디에서 일어날까?”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지혜는 덕산이 주장자를 휘두르는 것과 같고, 임제가 고함치는 것 같이 일체의 모든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며, 밤중에 목침을 찾아 편히 잠자는 것이다. “쯧쯧…” 말이 많았군!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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