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自性, 산스크리트 스바하바/svabhava)이란>
불교에서 자성(自性) 혹은 불성(佛性)의 유무 문제는 오랜 쟁점이 돼 왔다.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사이의 논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북전불교 안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자성 ‧ 불성의 존재에 대한 논의는 불교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민감한 일이라서 찬반의 의견이 심각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우리나라에선 자성 ‧ 불성을 지지하는 쪽이 워낙 세가 커서 부정적인 의견은 소극적인 편이다.
산스크리트어 ‘svabhava’는 ‘자신(sva)에게 고유한 성질(bhava)’ 혹은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며,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이르는 말로서,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만유의 독자적 본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本性)이 자성이다. 스스로의 성품은 자신이나 개인의 성품, 개성과는 다르다. 이는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 즉 보편적 속성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병은 깨어지면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존재를 세속적 존재자라고 한다. 인간존재도 육체적, 정신적인 갖가지 요소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세속적 존재라고 한다. 이에 대해 병의 색이 청색이었을 경우 그 청색은 병이 깨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병을 무한히 부수면 최후에는 극미(極微)로 되지만 청색은 그 경우에 존재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 svabhava)이라 한다.
자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자(自)라는 한문 글자를 여기서는 스스로라고 해석하지 말고 원래, 본래, 본디로 해석하면 딱 맞다. 즉, 번뇌 망념이 없는 최초의 마음, 번뇌 망념에 물들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즉, 자성(自性)이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이르는 말로서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 만유의 독자적 본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 본성이 자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성이란 ‘본래 지닌 마음’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진여자성이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서 만상의 근본 체(體)을 의미하며, 모든 수행은 진여자성을 체득(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청정한 진여자성이 오랫동안 세속의 때가 끼어 있으니 자주 닦고 다듬어 본래 순수한 모습(자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 양철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란 ‘본래 지닌 마음’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본성[本性=불성(佛性)]을 지칭한다. 즉, 자성(自性)은 근본 마음자리를 말한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 모든 생명작용을 일으키는 바탕자리이다. 그리고 자성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인간성의 순수한 자리이다. 자성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자리이자, 모든 생명작용을 일으키는 바탕자리인 자아(自我)를 일컫기도 하고, 금생에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세나 현재나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자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무시이래(無始以來)라, 시작도 끝도 없다. 과거에 시작함이 없기 때문에 비롯함도 없다. 이것이 자성의 본질이다. 이상으로 볼 때 자성(自性), 본성(本性), 자아(自我), 불성(佛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이 모두 같은 개념 선 상에 있다.
그러면 자성은 인간에게는 인간성의 본질이요 본래면목이지만, 다른 동물이나 일반 무생물들은 어떨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인간성의 본질인 자성은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본질인 동시에 실상이다. 이러한 자성을 깨달으면 성자고, 깨닫지 못하면 범부 중생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이러한 자성을 깨닫는 것이다.
자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 번뇌 망상(노여움, 증오, 시기, 질투, 분별, 차별심 등)이 없는 최초(본래)의 마음이다. 즉, 자성(自性)은 정신작용의 근원이다. 따라서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은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실체가 없는 현상적인 존재이고, 자성은 조건에 따라 생기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본질적인 존재이다. 자성(自性)은 정신작용을 포함한 모든 생명현상의 근원적인 바탕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 이런 말이 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에 부처를 찾음에 있어서 겉모양으로 찾거나 목소리로 찾거나 여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찾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라고 믿고 있고, 전부라고 믿고 있는 것은 모두가 참이 아니다. 참은 바로 그 가운데 있는 자성(自性)이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니고, 거짓된 ‘나’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사대육신은 언젠가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므로 결코 ‘참나’일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상으로 몸을 바꾸어 가며 나고 죽기를 수 없이 하면서 이 몸통은 항상 없어지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것이 ‘참나’ 바로 인간의 본래모습이다. 이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은 개개인의 성품과는 엄연히 분리돼 있다.
그런데 ‘참나’라고 하는 것은, 형체도 없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편의상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자성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 보여준다고 해서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배워준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수행을 철저히 해서 깨쳐야 한다. 또한 이것은 글자로 알 수도 없는 것이고, 형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본인의 수행정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바로 이 본래면목을 알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법문을 하신 것이다. 참 진리는 말이나 글로는 표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부처님께서 말로써 진리를 설하신 것이 불법(佛法)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늘 “나의 법문은 방편이요 뗏목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성(自性)은 본성 이외에, 법성(法性), 여래장(如來藏), 평상심(平常心) 등 불교적 용어와 뜻을 같이 하는 인간심성을 이르는 이칭(異稱)인데, 그 근본적인 뜻은 단 한 가지 불교적 진리를 말한다.
우선 자성(自性)이란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물(水)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다가 알코올을 넣으면 술이 되고, 간을 넣으면 소금물이 되고, 더 잘하면 간장, 된장이 되겠지만 그 근본 물은 달라진 것이 없다. 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차(茶)도 되고, 술도 되고, 국도 되고, 주사약도 되고, 온갖 것이 다 된다. 사람 몸에 들어가면 사람 몸의 일부가 되고, 짐승 몸에 들어가면 짐승 몸의 일부도 되고, 밥도 되고, 안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이루는 바탕은 물(水)이고, 그것이 진여(眞如)다. 물은 항상 물이므로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한다. 그걸 발견하는 게 불교다. 그리고 그걸 알아채면 견성(見性)했다고 한다.
금(金)은 금이라는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지도 되고 목걸이도 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북이 모양의 장식품도 된다. 이때 반지가 되기 위해 금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바꾸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가 있다. 반지 개개의 특성이 아니라 모든 존재[반지들]들이 가지고 있는 일체 만유를 성립시키는 보편적 속성[금], 그것이 바로 자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밀가루를 활용해서 다양한 먹거리를 만든다. 밀가루가 빵도 되고,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고, 범벅도 된다. 이 여러 종류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작용을 가하고, 변형이 이루어지지만 그 재료는 단 하나 변함없이 밀가루이다. 그 원리를 발견하는 게 불교다. 불교에서는 그걸 자성이라고 한다. 그걸 알아채면 견성(見性)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성(自性)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찾겠다고 애쓰다보면 지식이 개입되고, 말로써 표현하려면 어그러져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오온(五蘊)과 4대(地水火風)가 임시로 가합(假合)한 것이다. 인연의 과정에서 발생한 조형적 특성이니 각자 모양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자성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성, 변하지 않는 만유의 독자적 본질, 우리의 본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성이란 ‘본래 지닌 마음’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자성시불(自性是佛)’이라 한다.
불성(佛性)이란 말은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 속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생명의 본질적인 자성이 곧 불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日)에 비유해 보자. 우리가 낮에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는 해(日)를 자성(自性)이라 한다면, “해는 나만의 해다, 우리나라만의 해다, 내 종교만의 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해는 누구의 해도 아니지만, 우리 모두의 해이다. 그러나 해는 해일뿐이다. 그리고 “나의 해니까 내게만 비치고 너에게는 비치지 말라.”라고 하면 너에게 비치지 않겠는가. 어느 사람이나 어느 곳이나 조건만 갖추어지면 다 비치는 것이 해이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착한 사람에게도, 게으른 사람에게도 부지런한 사람에게도, 산에도, 바다에도, 하늘에도, 달에도, 그 어느 곳에도 다 비친다. 그리고 이 해는 빛이 되고 따뜻한 요소, 즉 불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이것이 해의 자성이다. 이 요소들도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누구에게나 다 같이 주어졌지만,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란 이런 태양의 비침과 같이 이 우주에 하나이며, 모든 인간에게 평등무차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또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이 둘이 아닌 진여(眞如),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성이다. 이런 불성은 인류와 우주를 포함한 평등무차별한 절대 진리, 즉 평화와 사랑과 행복을 다 가질 수 있는 단면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란 태양의 비침과 같으므로 불교에서는 남의 잘잘못을 따져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내 것만이 진리고 너의 것은 진리가 아니란 말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복하는 심판(審判)이란 것이 없다. 불교에서는 싸움이 없고 전쟁이 없다. 어떤 경전을 뒤져도 없다. 진리는 어떤 판단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상(實相)이라 한다.
내가 보는 ‘나’만의 해가 아니고 우리의 해가 아니고, 누구의 해가 아닌,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해의 자성과 같다. 자기라는 생각에 굴절돼 바라보는 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해를 바로 보고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를 불쌍히 여겨, 자비(慈悲)로 다 용서하고 불법을 가르치신 것이다. 즉, 한 사람도 남김없이 부처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불성사상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성(自性)’이라는 단어가 그 개념을 정립하는 데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즉, ‘자성’이 불교사상의 발전과 시대상황에 따라 그 쓰임이나 의미가 상당한 진통을 겪으며 진화해간다.
* 초기불교시대
초기불교시대에는 인간심성을 단지 법성(法性) 또는 불성(佛性)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려오는 과정에서는 아직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에 대한 뚜렷한 구별이 없었다. 단지 막연하게 인간인식의 주체가 법성 혹은 불성 등으로 존재한다고 사유됐을 뿐이다. 말하자면 초기불교에 있어서는 불성과 자성의 구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자성이라는 말이 성숙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무아사상에 근거한 초기불교에 있어서는 연기론(緣起論)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불변하는 영원성의 존재는 철저히 부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존재성’은 인정할 수 없었다. 불성이나 법성에 있어서도 영원성을 배제한 단순히 변하는 인간심성 혹은 인식주체의 일종으로 봤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붓다가 바라문(Brahman, 婆羅門)들이 주장한 아트만(atman)의 영원불멸설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기가 불가능한 가공망상이라고 철저히 부정함의 영향이 컸다. 바라문의 아트만은 자아사상(自我思想)이다. 고대 바라문들이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의 존재요, 지옥의 불에 들어가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영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불교는 기본적으로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붓다는 이러한 아트만의 영원성을 부정하기 위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주장했다. 따라서 자성(自性)이 발붙일 근거가 약했다.
* 부파불교의 등장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잠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으로써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소위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 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아론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선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개아(個我, 人相,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부파불교시대 최대의 부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모든 것에 실체(實體)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즉, 설일체유부의 법체설이란 현상계의 일체법을 실체론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실제 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불변의 자성(自性)을 가진 일체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논하는 방대한 교리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교리의 바탕에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는 기본개념이 있었다. 즉, 모든 법은 우리의 삶을 유지 보존하는 근거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존재하는데, 이러한 법들이 3세에 걸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현상에 고유한 성질인 자성(自性; 혹은 自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부가 일체를 유(有)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치 않는 성질인 자성이 있어 서로 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다고 본 것이다.
* 중관(中觀, Madhyamaka)사상의 입장
AD 2세기 후반~3세기에 걸쳐 부파불교 아비달마교학에서 유부의 법체설, 독자부의 개아설 등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들고 나가르주나(龍樹, Nagarjuna, 150?-250?)가 등장해서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 등을 저술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부파불교의 자성론(自性論)을 뒤집었다. 즉, 용수는 유부의 법체설이나 독자부의 개아설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아체(我體)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자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이라고 주장했다.
따지고 보면, 공(空)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 독자부의 개아설(pudgala)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즉,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체, 또는 독립하고 있는 실체를 자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부정하기 위해 용수는 공을 설했고, 무자성을 설했다. 특히 용수는 일체의 현상(法)이 존재한다[법체설]는 입장을 취하는 부파불교 유부학파를 비판하면서 일체의 현상에 스스로의 성품이 없음[無自性]을 주장했다.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중론>에서 대부분의 논증은 자성이 있다고 가정할 때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논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공성(空性)은 자성(自性)의 부재[무자성(無自性)]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유식불교(唯識佛敎)의 입장
4세기 무렵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이 정립한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중관파의 입장을 방편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는 유식삼성(唯識三性-心性, 마음의 성품)은 존재한다고 했다.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세 가지 심성[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관학파에서는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주장했음에 비해 유식학에서는 「자성(自性) - 공(空)」을 주장했다.
여기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중생의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작용을 하는 6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이렇게 8가지 식(識), 즉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는 원성실성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고 한다고 했다.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인 것이다.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온갖 그림자는 인식작용이고, 거울은 그림자를 비추면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를 자성이라고 했다.
유식학파에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기’라는 고집스러운 견해를 내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중관학파에서 ‘무자성(無自性)’이라 설했다고 봤다. 따라서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무자성의 논리는 궁극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방편적 가르침인 속제(俗諦)라는 것이다. 즉, 유식불교에서는 중관파의 입장을 방편적인 관점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유식의 삼성은 존재한다고 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명을 말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그곳에 고착돼 증상을 악화시킬 수도 있으므로 의사가 방편으로 말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중관파의 주장이 방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심각한 논쟁의 주제가 됐다. 각자의 주장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의미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했다.
* 선불교(禪佛敎)의 입장 - 체(體)와 용(用)의 구분
6세기경에 이르자, 유식불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마저도 점점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처럼 경전 문구 해석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교의가 번쇄해져서 대중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불교는 점차 힌두교화 돼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실망한 제27대 조사 반야다라(般若多羅: ?~457) 존자가 그의 제자 달마(보리달마/菩提達磨, 산스크리트어 Bodhi Dharma, ?~528)로 하여금 중국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라고 한 것도 이제 인도에선 불교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혜안이 있었기에 6세기 이후 불교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일대에 선불교(禪佛敎) 형태로 찬란하게 번성했고, 밀교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됐다.
초기불교시절에는 인간의 심성을 단지 법성(法性), 또는 불성(佛性)으로 불렀다. 이것이 부파불교시대에 자성론이 등장해서 체성, 개아 등의 주장이 있었고, 이후 중관학파의 무자성론, 유식학파의 자성론 등이 등장하다가 본격적으로 대승불교로 접어들어서는 진여(眞如) 등으로 불렸고, 이것이 점차 발전해서 여래장(如來藏)으로 불렸다. 그러나 법성 ․ 불성 ․ 진여 ․ 여래장 등으로 불려오는 과정에서는 아직 본체와 작용에 대한 뚜렷한 구별이 없었다. 단지 막연하게 인간인식의 주체가 자성 혹은 불성 등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사유됐을 뿐이다. 이러한 불교의 인간심성론에 있어서 체(體)와 용(用)이 아직 불분명한 때에 이를 깨뜨리고 나선 것이 선불교(禪佛敎)였다.
선불교는 인간심성이 체와 용이 하나로 된 불성(佛性)이 아니라 체와 용이 나누어진 것이라는 자각을 한 것이다. 이 자각의 상징으로 불성의 체가 아닌 용(用)의 작용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그 작용에 대해 따로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자성(自性)이다. 말하자면 인간심성의 체(體)가 불성이고, 용(用)이 자성이라는 것이다. 그 자성의 의미를 처음으로 깨닫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육조 혜능(慧能) 선사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선불교에 있어서는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합해 불교용어로 체용(體用)이라고 부르고, 그 의미를 확대해, 즉 체(體)와 용(用)을 개별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체를 일체만법의 본성으로, 용을 본성이 일체만법 곧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체를 본질로, 자성을 본질이 구체화된 모습인 차별적 현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선불교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불성과 자성은 어떻게 다른가. 불성의 작용이 자성이란 것이다. 불성(佛性)은 모든 법(法)이 갖추고 있는 변하지 않는 본성(本性) 혹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성(體性)이 불성이다. 이에 비해 차별적 현상, 즉 불성의 작용인 자성(自性)은 우리 개개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이 개개 인간의 자성은 원래 청정한 것인데, 대개 오랫동안 세속의 때가 끼어 있으니 자주 닦고 다듬어 본래 순수한 모습(자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물론 자성의 본질, 근본 성격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시작도 끝도 없다.
이로써 불교는 이제 더욱 분명해지고 깊어진 종교가 됐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체와 용이 미분이던 것이 체와 용이 분명해지고 수행의 중심이 확실해진 것이다. 불성의 작용인 자성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것이 곧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자신의 성품 즉 자성(自性)의 본래면목을 바로 본다는 말이다. 막연한 불성을 향하던 것이 확실한 불성을 향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제는 이 작용으로서 자성을 목표로 해 이 자성을 닦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불교는 폭발적 발전을 했다. 확실한 수행의 길이 나타난 것이다.
* 결론 -
불교에서 성품(性品)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성(自性), 본성(本性), 법성(法性), 불성(佛性) 등 성(性)에 관련된 용어가 매우 많다. 진성(眞性), 견성(見性)도 있다. 그런데 자성과 본성은 둘이 아닌 하나이나 굳이 표현을 달리 하자면 본성은 체요, 자성은 용이라 할 수 있다. 본성은 바다요 자성은 파도이다. 그리고 불성(佛性) ․ 법성(法性) ․ 자성(自性)이 어떻게 다른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마음이 불성이요, 진리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마음이 법성이며, 본래의 근본을 갖추고 있는 마음이 자성인데 나누어 셋일 뿐 근본은 하나인 마음이다.
그렇다면 절대성품이 있는가. 만일 절대성품을 봤다고 하면 이는 아트만(atman)이 돼 외도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흔히 절대성품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연기법에 맞지 않고 중도법에도 맞지 않는다. 연기법은 중도법으로서 있되 없음이요, 없되 있음인 즉색즉공(卽色卽空), 있는 그대로 색(色)이면서 바로 공(空)이요, 공이면서 바로 색이다. 절대성품을 말한다면 피조물이 돼서, “하나님, 하나님”을 외치고 있는 이교도와 다르지 않게 된다.
자기를 한번 반조해보자. 나한테는 과연 탐심이 없는 것인가, 또는 기분 좋지 않을 때 불룩거리는 진심을 안 낼 수가 있는 것인가, 또는 내가 과연 모든 존재의 성상, 존재의 성품, 존재의 현상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는 중생이고, 번뇌에 칭칭 얽매여 있는 것이다. 인연 따라서 선업(善業)을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 자성을 되찾는 것이 곧 해탈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했고, 여기서 견성이란 중생이 자성을 깨달아, 불성(佛性)을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성품을 절대성품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만일 공에 집착하면 허무주의에 빠져 버리게 되고, 상(相)에 집착하면 사바세계의 혼돈과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이 돼 버린다. 물질이란 것은 불교에서 볼 때는 간단하게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空)이다. 그런데 그냥 공이 아니라 공의 실상은 그야말로 만공덕을 갖춘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이다. 천지우주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존재의 성품자리이다. 섭섭하게도 우리 중생들은 성품자리를 볼 수가 없다. 탐 ‧ 진 ‧ 치 삼독심의 번뇌에 가려 보지를 못한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 제 성품자리[자성(自性)]를 볼 수 있을 때 드디어 불성도 볼 수 있고, 해탈도 맛볼 수 있다.
* 자성론(自性論)에 대한 비판
그런데 문제는 자성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선불교(禪佛敎)는 인간심성이 체(體)와 용(用)이 하나로 된 것이 아니라 체와 용이 나누어진 것이라는 자각을 했다. 그리하여 체와 용을 개별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체를 일체만법의 본성으로, 용을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불성의 작용이 자성이란 것이다. 불성은 모든 법(法)이 갖추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성(本性)을 이르고,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성(體性)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곧 자아, 영원불멸의 아트만(atman)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열반경>에서 ‘불성은 자아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해서는 ‘불성’이라는 용어는 엄격히 얘기해서 아트만(atman)과 구분할 수 없는 반불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성(體性)이라고 하는 불성은 도저히 무아사상과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아인데 불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청정하게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아트만과 어떻게 다른가.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트만 사상이지 불교사상 아니다. 때문에 독자적 체성을 가진 불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불성이 없다면 자성도 없다. 불성사상 자체가 반불교적인 사상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성이 무너질 경우 자성도 덩달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불교계는 명확한 입장을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1998년 전남 장성의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百羊寺)에서 무차법회(無遮法會)가 열려 “불성(佛性)의 실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는 불성실체론을 집중적으로 다뤄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2012년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와 중국 런민(人民)대학 불교와 종교학이론연구소, 일본 도요(東洋)대학 동양학연구소 등이 공동주최하는 “동아시아에서 불성. 여래장사상의 수용과 변용” 세미나가 열려 그간 인도불교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사상에 대한 토론이 행해졌다. 그러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이와 같이 불성사상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서 한국불교의 발전방향을 모색해야 하겠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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