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이란
공(空)’이라는 용어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sunya’라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용어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공은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에 현장(玄奘) 법사가 처음으로 빌 공(空)자로 번역을 했다. 이는 나름으로 탁월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공(空)이란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한다. 이러한 공론자는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이후 중관파(中觀派)를 형성해 공사상을 전개해 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공성론자(空性論者)라 불렀다.
용수는 공의 개념이 불타가 깨달은 연기법의 이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또한 부파불교 중의 하나인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한 법체설(法體說)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인 것을 분명히 밝혔다.
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이 <반야경>으로 이 <반야경>은 후에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으로 집대성된다. 이러한 반야경계 경전에 공통되는 중심사상이 공관(空觀)으로, 공관이란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반야경계 경전의 공관은 대승불교 자체의 기본적인 교설이 되고 아울러 대승불교도의 실천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공사상(空思想)이 성립된 시기는 대체로 기원 전후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의 반야계통 경전들이 모두 공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성립시기를 기원 전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사상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중론(中論)>부터인데, <중론>의 저자 용수(龍樹)는 서기 200년경의 사람이다. 그러니 공사상은 기원전후에 성립되기 시작해 3세기 이전에 정립됐다고 하겠다.
불교에 있어서 ‘공(空)’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기설(緣起說)의 일차적 변신이요, 재해석으로서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의로 현상계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하는데,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우리는 ‘공’ 혹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공(空)>이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정해야 한다. 그리고 공을 이해하려면 딱딱한 논리적인 사고보다는 낭만적이며 유연하고 폭넓은 사고를 필요로 한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 비어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공은 불이(不二) 즉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또한 부증불감은 불생불멸과 더불어 현대물리학의 등가원리(等價原理)에 의한 질량불변의 법칙에 비유되는 말로서,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한다.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평등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해 현정(顯正)하는 데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 설한 18공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으로 우선 사물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간의 육근(六根)이 공하고(內空),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공하며(外空),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空空)을 설하고 있는 바,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며, 더 나아가서 부정하는 실체로서의 공조차도 부정하는데, 이는 또 다른 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은 <대반야경> 문승품 제18에 나오는 말이다.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空空)이라 부른다.”
즉, 공 역시 공한 것이므로 공을 집착해서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공성(空性)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분별망상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이런 것이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 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써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고 하며,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진공묘유라고 하고, 이에 반해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공은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礙自在)한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공은 적멸(寂滅, Nirvana)의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것이 열반이고, 의역한 것이 적멸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가 적멸이고, 곧 공(空)이다. 공은 오온(五蘊-五取蘊-번뇌)이 사라진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오온이 사라지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적(寂)이라 하며, 모든 게 사라졌기 때문에 멸이라 한다. 이때 공(空), 적(寂), 멸(滅)은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용수(龍樹)이다.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점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으로써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소위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Abhidharma) 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아론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에선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또한 설일체유부는 모든 요소를 법(法)이라 부르고 그 법을 5위75법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일체 존재를 다양한 법의 이름을 분류하고 그리고 그 각각의 법에는 파괴되지 않는 법의 고유한 자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색법, 심법, 심소법, 심불상응법, 무위법의 5위로 구분되는 일체 존재와 그 각각에 속하는 75개의 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야경계 경전은 각각의 법에는 그와 같은 실체, 자성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이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 아비달마교학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중관학파의 개조 용수(龍樹)였다. 그는 그의 명저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저술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야경> 계통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부파불교의 법체설이나 개아설을 뒤집었다. 용수는 법체나 개체, 이런 말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아체(我體)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서 자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 - 공(空)」이라고 주장했다.
즉, 공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과 독자부의 개아설(pudgala)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空)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svabhava)’, ‘실체(dravya)’, ‘자아(atman)’ 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 그리고 용수 이후 공사상을 기반으로 해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 대승불교는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불교경전을 보면 공이란 말을 심(心),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 이(理) 등의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어 공이란 마음(心)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으니 공한 것이다. 그 불성의 실체는 공하지만 우주에 꽉 차 있다. 그것이 불성의 특질이다. 그리고 불성이 작용하는 원리를 진리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이 우주 어디에나 통하듯이 불성 즉 본래 성품, 본래 모습은 공하지만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것에 상즉해 있다. 그러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불생불멸인 것이다.
즉, 공사상을 발전시킨 <중론(中論)>이 법의 고찰만 추구한 것과 달리 새로운 사상들은 공사상에 입각해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두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여래장사상’과 마음의 현실적 기능의 분석에 중점을 둔 ‘유식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이고, 유식설이 아무리 뛰어난 논설이라고 해도, 공의 개념을 이론으로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만 닿은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문자로 어느 정도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중생들의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범부들의 중생다운 행위이다.
공(空)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영리하다ㆍ어리석다, 착하다ㆍ악하다, 재산이 많다ㆍ가난하다, 미남이다 ‧ 추남이다, 남ㆍ녀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그렇지마는 여기엔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한 면이 있다. 또 일체의 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변한다고 하는 그 변하는 과정에는 어떤 준거(準據)의 틀, 곧 순서가 있다. 예컨대 봄 다음에 반드시 여름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가을이 온다. 이어서 겨울이 온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를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ㆍ허망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色)’이란 모양을 뜻하며, 곧 차별을 뜻한다. ‘즉(卽)’은 떨어지지 않음(不離)을 의미한다. ‘공(空)’은 평등, 즉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언하면 차별이 있는 것, 곧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를 일관해 있는 평등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천지간의 만물이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분별하는 장점을 갖춘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을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모양이나 실체가 없지만 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몸뚱이도 움직인다.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라면 마음이라는 말도 없어야 하며, 없다는 표현 또한 붙일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그 원래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그 자리가 공이다. 그렇다고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빈자리에서 또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니 무(無)는 아니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이란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空)한 그것도 공한 것을 공공(空空)이라 하고,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의 공(空)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공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비어있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다. 그러니 비어있어 공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없는 듯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산스크리트어 ‘sunya'에 해당하는 공의 참뜻에 더 가까운 말이다. 허공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우리 중생은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 시간, 정성을 쏟아 붇는다. 그리하여 예뻐져라… 멋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마라… 하고 갈망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이 몸뚱이는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들고… 기억력이 줄어들고… 노쇠하고… 추해지고… 하다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내 몸이 이 모양이니 이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고,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내(남편)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어느 것을 내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이 세상에 늙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영원한 권력이 있을 수 없으며,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건물도 없다.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산천(山川)도 없다. 사람이나 자연, 모든 것이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찰나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 - 무아(無我)라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이다. 무아(無我)란 그 스스로의 자아(自我)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 한다.
이처럼 우리 중생은 내 것이라 할 게 하나도 없고,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여기면서 가지고 지키려고 발버둥 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고집도 욕심도 사랑까지도 모두 탁 놓아버려야 한다. 그게 바로 공이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서,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이 만물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依他起性) 하는 제법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까닭에 공(空)이다. 존재를 존재하게 한 근원이 소멸될 때 만물은 공(空)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와 같이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고 공(空)이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질 뿐이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해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화합해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했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진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인연소멸하는 것일 뿐이므로 무상(無常)이다. 무상이란 ‘변화’를 말하며, 이는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거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인 것이다. 무(無)란 없다는 뜻이고, 상(常)이란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찰나의 짧은 시간 속에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이 무상이다. 이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허무감 내지 공허감 등의 그런 니힐리즘(nihilism)이나 감상적인 감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진공을 흔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알지만 20세기 초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락(Paul A M Dirac)은 진공이 실제로 텅 빈 것이 아니라 아주 약한 에너지(Zero-point energy)로 채워져 있고, 이 에너지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한국의 연구진이 이 사실을 영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물리학에서 공의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듯이 불교에서도 본래 무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다. 만약 무(無)라 한다면 그것은 유(有)의 상대적인 개념인 무이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공은 무상, 무아, 비어 있다, ‘흐른다’고 표현한다.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은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 비어 있는 곳을 채우기 위해 흐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가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운다.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고, 채워지면 넘쳐서 다시 흐른다.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것이 공의 속성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적 차원에서 이렇게 실체가 없음을 이름 하여 공(空)이라고 한다.
우리 몸을 한번 보자. 우리 몸은 분자의 합성이다. 그리고 분자가 분해되는 과정 속에 있다. 단백질이라고 하는 분자가 합성됐다가 분해되는 것이다. 이 분자의 분해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생로병사의 흐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다.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상하다는 말은 흐름 속에 있다는 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을 근원으로 해서 존재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를 말한다.
「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공적(空寂)이란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공공적적해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했다. 즉,
• 우주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비어 있어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텅 비어 매우 고요하다는 말이다.
연어는 강(江) 상류의 개천에서 산란을 한 후 작은 새끼 연어가 넓은 바다에 나가 몇 년을 있다가도 성어가 되면 모천에 회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진도에서 백구 한 마리가 몇 백리 밖 대전에 팔려나갔다가 원래 집으로 되돌아 찾아와서 진도엔 그 백구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모두 중생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데,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짐승에게 어떤 능력 있어 그런 일을 해낼까?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공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초심자에게는 공(空)에 관해 말해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공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공에 관한 이 책 저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공이란 이런 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 책이 없다. 이 글도 그렇지만 기껏해야 공의 특징을 나열하는 정도이다. 왜 그런가.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을 이론적으로 혹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불법 최고 지혜인 진여지혜(眞如智慧)는 언어나 문자로 분별하고 헤아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즉 반야지혜를 무분별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진여(眞如)의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알 수 있다고 해서 무분별지라고 하며, 그것이 곧 공(空)을 뜻한다.
타 종교에서는 신(神)을 말한다. 그 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신은 텅 빈 상태란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신의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중동은 알라신을 찾아다니고, 서양은 예수를 찾아다니며, 인도인들은 쉬바와 브라흐만을 찾아다닌다. 모든 사람이 다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텅 빈 상태를 찾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주위 어느 곳에서나 공간이 둘러싸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그곳에서 분해되어질 그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불교는 단지 그것을 <공(空)>이란 말로 바꾼 것이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고 바다에서 살다가 그 바다에서 죽어 없어져 버린다. 그 고기는 다름 아닌 바닷물일 뿐이다. 그래서 고기는 공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텅 빈 상태는 우리 주위의 어느 곳에도 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텅 빈 상태가 우리 안에도 있다. 텅 빈 상태가 어떻게 두 종류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텅 빈 상태는 언제나 똑같다. 죄인에 있어서나 성자에 있어서나 텅 빈 공간은 똑같은 것이다. 모두 공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불교의 공사상은 단순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공’이 갖는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성질 즉 이중성(二重性, Duality) 때문이다. 그런데 공뿐만 아니라 자연의 원리가 모두 이중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일차적 의미는 분명히 ‘비어 있는 것’이지만 이 ‘비어 있는 것’은 단순히 비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신묘한 작용을 한다고 불교경전은 설하고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그것을 뜻한다. 이것은 ‘공’이 이중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사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가 공의 이중성을 가리키고 있다. 단순논리로 공을 이해하려 들면 불교를 허무주의로 볼 수밖에 없게 되고 불교가 설 땅은 없어진다.
불교적 실재가 갖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분별지(分別智)로는 진리를 알아낼 수 없다고 본다. ‘공’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고 논리를 초월한 직관적 깨달음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반야지(般若智)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 김성구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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