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적적(惺惺寂寂)>
고요함과 깨어있음, 이 두 단어는 새의 양 날개처럼 선(禪) 수행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이루고 있다. 날개 하나만 잃어도 새가 날지 못하듯 선에서도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결핍되면 제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고 깨어 있는 가운데 고요해야 수행자의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고요함과 깨어 있음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 전개되는 것을 성적등지(惺寂等持)라 일컫는다. 여러 선어록에서는 이 말을 달리 표현해 ‘성성적적(惺惺寂寂)’ 혹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함이 옮겨가서 성리학에선 전일(專一) 혹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한다.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상태가 성성(惺惺)이다. 성성이란 반짝이는 별의 모습처럼 영롱하고 또렷하게 마음에 와 박히는 것이다. 그리고 참선수행을 할 때, 고요하고 고요한 것을 적적(寂寂)이라 한다. 그리하여 고요한 호수에 맑고 청명하고 청량한 생명이 숨 쉬는 상태가 성성적적이다. 그렇게 맑고 고요한 호수에는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 주변의 나무들이 고스란히 와서 잠긴다.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 청정하고 시원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우리 마음 역시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으면 밝고 또렷해져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투영돼 온다. 고요하고 밝으며 활달하게 살아 있는 생명력이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이런 것이다.
중국 원나라 몽산(夢山) 선사는 법문에서 성성적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한 정(靜)과 맑을 정(淨), 이 두 글자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고요함이 지속되면 곧 깨닫게 되고, 맑음이 지속되면 광명이 통달하게 된다. 기상이 엄숙하고 풍채가 맑아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고비이니 이때를 잡아타고 더욱 나아가야 한다.
마치 가을 들판의 맑은 물 같이,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이, 고요하고 초롱초롱해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게 되고, 다만 화두만 면면히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 이르면 번뇌는 바로 쉬고 광명이 터질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고비다. 여기에서 만약 깨달았다는 마음을 내면 순일한 공부의 묘가 끊어지고 말 것이니 크게 해로울 것이다.“
따라서 참선수행을 함에 있어서, 멍함[혼침(昏沈)]에 빠지지 말고, 항상 또렷하게 깨어 있어, 산란함[도거(掉擧)]에도 빠지지 말라고 한다. 즉, 지[止(定-사마타수행)]와 관[觀(慧-위빠사나수행)]을 함께 닦으라는 것이므로, 성성(惺惺)은 혜[慧-관조(觀照-사방으로 비추어 보는 것)]에 해당되며, 적적(寂寂)은 지(止-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함)에 해당 된다고 하겠다.
마음이 고요하기만 하면 차츰 흐릿해지다가 자칫 혼침(昏沈)에 빠지기 쉽다. 적적(寂寂)이란 고요하고 고요해 어떤 번뇌도 일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물결이 잠잠해진 고요한 호수와 같이 평화로움이다. 시끄럽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마음 역시 고요하고 고요해지면 번뇌 망상은 물론 어떤 잡념의 물결도 일지 않는다. 망상과 잡념의 물결이 자니 평화롭고 고요하다. 고요 속에는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번진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지 못하면 그 고요는 적막이나 어둠 속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빠지기 쉽다. 호수가 고요하기만 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내 흐름이 단절돼 썩은 물이 되거나 생명이 살지 못하게 된다. 마음도 고요하기만 하면 흐릿하고 캄캄한 혼침에 빠져 아무 생각도 없는 무기(無記)에 잠들어버리기도 한다. 아무 생각도 없다면 무지몽매한 것이다.
해서 영가 현각(永嘉玄覺 665-713) 선사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지만 성성망상(惺惺妄想)은 그르고,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옳지만 적적무기(寂寂無記)는 그른 것이다.”라고 했다. 망상과 잡념에 성성하게 깨어 있으면 온통 시끄러울 뿐이요, 적적한 반면 아무 생각도 없다면 무지몽매한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성성적적은 깨어있되(惺) 번뇌가 없는(寂)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결코 어떤 실체적인 의식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의식하는 상태가 있다면 주객이 분리되기 때문이고, 주객을 인정하는 것은 무아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성성적적은 그냥 연기(緣起)의 상태일 뿐이다.
“참선수행을 함에 화두가 분명한 것, 의심이 분명한 것을 ‘성성하다’고 하고, 번뇌가 없으니까 ‘적적하다’고 한 것이다. 적적한 가운데서 적적(寂寂)에 치우치면 무기(無記)에 빠진다. 무기에 빠지면 화두를 들기가 싫어지게 된다. 그래서 다시 적적한 가운데서 성성하게 화두를 들어야 하므로 성성적적(惺惺寂寂)이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잘 들어서 성성하면서 적적해야 하고, 다시 적적한 가운데에서 성성하게 들고 나아가야 한다. 적적한 것만 지키면서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진제 스님
그러면 청화(淸華)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유식불교(唯識佛敎)의 수행 5위(修行五位) 중 가행위(加行位)에 4선근(四善根)이 있다. 그 4선근 가운데 처음이 난법(煖法)이다. 이것을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얻을 득(得),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둠이 깔려 무겁다가 마음이 훤하게 밝아 와서 마음이 시원해 온다는 말이다. 수행에 처음에 들어가면 어두움이 갔다 왔다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 그러나 깊이 공부하다가 보면, 맑아져서 몸과 마음이 개운하며 가볍고 또한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며 수마가 와도 별로 피로도 못 느낀다.
그리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는데, 이때는 혼침(昏沈)도 안 오고 그야말로 어떠한 분별망상도 줄어드는 것이다. 분별망상이나 혼침은 다 맑지 못하니까 오는 것이지 우리가 개운하고 쾌적하고 상쾌할 때에는 그게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르르해지고, 전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온다.
이런 때가 난위(煖位), 이른바 명득정(明得定)의 밝음을 얻었다는 경계이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이고, 난법의 단계까지만 가도 그 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그 명득정의 맑음을 얻었어도 말 많이 하고 남하고 싸우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공부를 해서 명득정이라는 밝음을 얻었으면 그 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소중하게 아끼면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해야만 더욱 정화가 된다.”
말하자면, 화두에 성성하게 깨어 있어 착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 때 화두가 마음의 중심에 걸려 화두에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것을 화두가 성성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것을 달리 말해서 성성착(惺惺着)이라고도 한다. 화두에 성성하게 깨어 있어 화두에 착 붙들려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화두에 깨어 있으면 화두 이외에는 어떤 망상이나 잡념도 일지 않는다. 화두 의심 하나만 순일해지고 깊어지니 마음은 그저 고요하고 고요할 수밖에 없다.
화두에 깨어 있지 못하고 그냥 고요하다면 무기에 빠져 목석처럼 된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내는 것이다. 또는 컴컴한 귀신굴에 빠져 신기한 현상에 붙들린 결과, 거기에 빠져 잘못된 길로 들어설 우려가 크다. 화두를 들다가 화두 삼매까지 간 것은 좋은데, 그만 그 상태에서 화두를 놓친 결과 의식의 빈틈으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환청이 들리거나 신기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특해서 그 마(魔)의 장난에 빠진 결과 거기에 붙들리면 비정상적인 길로 들어서기 마련이다. 해서 그 순간 다시 화두를 잡아 챙겨야 한다. 그렇게 화두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염불 역시 마찬가지다. 염불에 오롯하게 깨어 있어 염불이 순일하게 전개돼야 고요한 삼매의 상태에 이르며 그렇게 될 때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거나 부처님의 본성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염불뿐이겠는가. 순간순간 일어나는 현상에 오롯하게 깨어 있으면 고요한 가운데 당황하거나 노심초사하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현재를 살아가는 활달한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 고명석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어떤 대상에 집중을 하든 그 대상에 대해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으면서 집중하게 되면 분별망상이 사라지고 잡념이 그친다. 잡념이 그치는 것을 사마타(Samatha)라고 하여 지(止)라 번역한다. 잡념이 쉬니 고요하고 고요하다. 선정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선정의 상태에 들면 마음이 절대로 이리저리 날뛰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선정의 상태는 고요하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다. 오롯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성적적한 마음은 의식(제6식), 자아의식(제7말나식)인 망념(무명)에 가리어 작용되지 못하고 있는 아뢰야식(제8식)에 있는 불성의 씨앗[(여래장(如來藏)]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저장(감추고 있는)하고 있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다 갖추고 있기에 우리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한다.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아뢰야식(마음)이다. 그 아뢰야식에 있는 불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선정이고, 선정에 들되 성성적적해야 불성이 제대로 드러난다.
다만 참선할 때에 유의할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또 다른 번뇌가 돼, 수행이 점점 더 멀어질 수 있다. 번뇌 망상은 내가 과거 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익혀온 모든 알음알이(지식, 습관, 고정관념, 내 생각)이다.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바로 내 생각[아상(我相)]을 버리라는 말이다.
이것을 착각해 아무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것에만 집착하게 돼 망념은 점점 더 일어나고 만다.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것은 죽은 사람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삼매(三昧-禪定)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성성적적한 삼매의 마음이 생활화돼 끊어지지 않은 상태(삼매관성)인,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因]에서 어떠한 바깥 경계[대상-緣]에 부딪힐 때에 문득 깨치게 된다[果]. 그래서 돈오(頓悟)라 한다. 이와 같이 오매일여의 경지까지는 내가 만들어야 시절인연(時節因緣-알맞은 때)이 되면 깨치게 되므로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리고 딱히 수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맑고 고요한 가운데 정신 똑 바로 차려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이 얽혀 있으면 그런 잡념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따라서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할 때, 바로 그런 상황이 삶에서의 성성적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귀(耳)라는 근(根)으로 누가 엄청나게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눈(眼)이라는 근(根)으로 남이 토해놓은 오물이 내 옷을 더럽혔다고 해도 내 본질, 내 근본(根本) 마음에는 모함당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력하게 보고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육진(六塵)은 육진이 아니라 깨달음의 작용이 된다. 그렇게 되면 육진은 본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한다.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천번만번 일어났다 꺼졌다 하더라도 바닷물 자체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일이 본래 없는 이치와 같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거품 자체가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生)하고 멸(滅)하는 사실 자체가 그림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볼 때 내 안에서 육근, 육진을 통해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인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너다, 나다 하는 모든 분별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육진불오(六塵不惡)를 우리 삶에서 살펴보면 내 단점, 내 못된 성질이라는 물거품을 어떻게 다스려나가야 할지 그 길이 보이게 된다. 각자 자기 자신의 단점이나 모자란다고 느끼는 그 생각을 자신의 본질이라는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보고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으면 그 길이 곧 길 없는 길이다. 길 없는 길이란 말길이 끊어진 길이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길, 대자유의 길이다. 그러나 대자유니, 생각의 한계니 말의 흔적이 있으면 이미 길 없는 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스승들은 말길을 끊어주고 마음길이 멸(滅)하게 하기 위해 길 없는 길을 할(喝)과 방(棒)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본마음에서 보면 나의 모든 단점과 못된 성질까지도 모두 내 마음 본질에서 일어나는 파장일 뿐이요, 습관 일뿐이다. 자기단점이라는 물거품은 싫어할수록 더 강해진다. 바닷물을 휘저으면 물거품이 더 일어나는 이치와 같다. - 혜국 스님
성성(惺惺)은 인지기능자인 조심(照心)이 "깨어있는 상태" 또는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 알아차리는 정도는 뚜렷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서는 흐릿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도 그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또는 그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이 조심(照心)을 뚜렷하게 또 계속해 깨어있게 함으로써 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성성법이다.
조심(照心)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을 회광반조(回光反照)라 한다. 따라서 조심(照心)의 능력이 어떤 정도 이상으로 강화되면 육신(肉身)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육안(肉眼)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육이(肉耳)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본성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즉, 그 본성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선입관 등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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