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94칙은 <능엄경> 제2권에서 부처님과 아난이 나눈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을 때, 어째서 그대는 내가 보지 않는 곳(不見處)을 보질 못하는가?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고 아는 모습이기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 모습(不見相)이 아니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그 곳(不見地)을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불견(不見)은 상대적인 대상의 사물이 아니다.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인 것이다.
擧。楞嚴經云。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 云何非汝。
본칙은 <수능엄경> 제2권에 세존과 아난이 견(見)에 대한 문답의 일부를 인용한 것으로 <종용록> 제88칙에도 똑같이 제시하고 있다. <수능엄경>은 강원 교재로 많이 읽는 경전으로, ‘중인도 나란타 대도량경(大道場經)’이라고 하며, 본래의 제목은 『대불정 여래밀인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경(大佛頂 如來密因修證了義 諸菩薩萬行 首楞嚴經)』이라고 한다. 송대 장수자선(長水子璿)의 해석에 의하면 <대불정(大佛頂)>은 이 경의 법체(法體)로 교법, 도리, 수행, 불과를 포용하여 그 기초가 되는 여래장의 교의는 법계에 두루하고 있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고 지극하여 무상한 경지이기에 ‘정(頂)’이라고 한다. <기신론>의 용어를 빌리면 여기에 체상용(體相用)의 삼대(三大)를 포함하며, 더군다나 그것이 일심(一心)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대불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래밀인수증요의(如來密因修證了義)>는 불과를 증득하고 스스로 심원한 수행 성과에 의거해 불법을 설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다. <제보살만행 수능엄경(諸菩薩萬行 首楞嚴經)>은 성불의 원력과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수행을 거듭해 자신과 일체 중생들이 구족한 보살행을 나타낸 것이다. <수능엄(首楞嚴)>은 일체 사물에 대하여 그 근원을 밝히고 절대로 파멸되지 않는다는 ‘일체구경견고(一切究竟堅固)’라는 의미로 어떠한 법에서도 자유자재하며, 아무리 미세한 번뇌나 무명도 타파하여 그 법력으로 무애자재한 법을 설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경은 오염과 청정의 차별경계를 여의지 않고 지혜를 나투며, 오염된 번뇌 망념을 그대로 청정한 지혜작용으로 전환하여 불생불멸한 법계를 밝게 비추는 여래장 경전이라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이 경전의 성립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데, 많은 대승경론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경전이다. 당나라 신룡 원년(705) 5월 23일, 중천축 사문 반자밀제(般刺密帝)가 광주 제지사에서 번역하고 방융(房融)이 필수하였다고 한다. 본경의 발단은 아난이 걸식하는 도중 마녀 마등가의 요술에 유혹되어 파계하기 직전에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명하여 부처님 처소에 데려와 애욕을 여의도록 하기 위해 세존은 본래 청정한 진심과 정심의 당체를 깨닫도록 7문 7답을 설하고 있다. 이것이 유명한 ‘칠처징심(七處徵心)’인데, 주객, 내외에 관계없이 마음을 고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생각을 타파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은 전도와 착각, 무명으로 생사의 근본과 보리 열반의 당체, 이 두 종류의 근본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불법의 근본대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수행을 쌓아도 효과가 없고 윤회하는 중생이 되고 있다. <수능엄경>은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나툰 것임을 제시하여 청정한 불심을 체득하도록 설한다. 본칙에는 짧게 인용하여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수능엄경>에는 석존이 아난의 망견(妄見)을 타파하기 위해 나눈 대화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난이여! 가깝고 멀리 있는 사물은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한결같이 그대의 청정한 본성으로 분명히 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사물이 각자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 사물을 보는 시각의 본성은 다르지 않고, 시각의 미묘하고 청명한 지혜 작용이 진실로 본성이다. 만약 시각의 본성이 사물이라면 (내 시각의 본성도 사물이 되기 때문에) 그대는 내 시각의 본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와 내가 똑같은 대상을 볼 경우 그대는 내가 본 작용을 보았다고 한다면,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았을 때, 어떻게 그 보지 않은 곳이 보이지 않는가? 만약 내가 보지 않은 곳을 그대가 본다고 한다면 (이미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곳이란 있을 수가 없음으로)당연히 보지 않는 상태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이지 않는 곳이 그대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대상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즉 내 시각의 본성은 대상의 경계가 아니며, 그런 점에서 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의 참된 시각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의 다양한 사물은 천차만별의 차별이 있지만, 사물을 보는 주체인 견성은 다름이 없고, 본다는 시각의 본성은 평등한 법성의 진리라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만약 시각의 본성이 사물이라면 (내 시각의 본성도 사물이 되기 때문에) 그대는 내 시각의 본성을 볼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일절은 어려운 말인데, 아난이 보는 사물의 객관현상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주관의 보는 시각의 주체인 본성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보는 시각의 주체인 본성이 객관적인 사물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지금 하나의 사물을 보고 있을 때에 아난 그대도 역시 동시에 그 사물을 본다면 그 사물과 똑같이 부처의 시각적인 본성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보는 주체인 본성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한다면 보지 않는 불견(不見)도 역시 사물에 속한 것이 되어야 한다. 본칙은 이러한 취지의 대화로 연결하여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을 때, 어째서 그대는 내가 보지 않는 곳(不見處)을 보질 못하는가’라고 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본성은 객관적인 사물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세존이 보지 않는 곳을 아난도 볼 수가 없는 도리이다. 견(見)과 불견(不見)에 대하여 <수능엄경>에는 태양과 달과 등불에 의거해 여러 가지 모양을 보는 이것을 견(見)이라고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광명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물의 모습을 비추는 빛이 있고, 사물을 볼 수 있는 시각적인 본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고 아는 모습이기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 모습(不見相)이 아니다.’ 즉 본다고 하는 시각적인 작용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사물을 본다고 하는 견(見)이라는 것도 볼 수 없을 뿐 만아니라, 보지 않는 곳(不見)도 볼 수가 없으며, 만약 그 보지 않는 곳(不見處)를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그 곳(不見地)을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불견(不見)은 상대적인 대상의 사물이 아니다.’ 이미 보지 않는 곳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면 보는 주체인 본성은 객관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밝힌 말이다. 그래서 세존은 아난에게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고, 사물을 보는 주체이며, 참된 불심이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이라고 설하였다. 본칙은 ‘일체의 사물을 보고 듣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해 <수능엄경>의 일절을 제시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온전한 코끼리(全象)와 온전한 소(全牛)를 보았다고 해도 눈병 탓이다.’ <열반경>에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온전한 코끼리를 본(見)사람과 <장자> 양생주편의 칼로 소를 잡는 유명한 이야기를 토대로 온전한 소를 보지 않은(不見) 명인을 제시하여 이들 모두 도의 경지를 말했지만, 견(見)과 불견(不見)은 공중에서 꽃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보았거나 보지 않았다고 해도 사물에 대한 차별적인 사고이기에 마찬가지이다. 견과 불견을 모두 함께 초월해야 한다. ‘예로부터 모든 작가가 껍데기만 더듬었네.’ 역대의 부처나 조사들의 이름과 껍질 모양에만 집착되어 여래 진실의 당체를 체득하지 못했다. ‘지금 황두(黃頭)노인을 보고 싶은가?’ 여래의 진실 법신을 체득하고자 한다면, 멀리서 찾으면 안 된다. ‘시방세계 일체의 곳곳에서 보았다고 해도 반 밖에 안된다’라고 말하리라.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벽암록 해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碧巖錄] 제96칙 趙州三傳語 - 조주화상의 삼전어 법문 (0) | 2018.10.28 |
---|---|
[스크랩] [碧巖錄] 제95칙 長慶二種語 - 장경화상과 여래(如來)의 말씀 (0) | 2018.10.21 |
[스크랩] [碧巖錄] 제93칙 大光作舞 - 대광화상이 춤을 추다. (0) | 2018.10.21 |
[스크랩] [碧巖錄] 제92칙 世尊陞座 - 세존의 설법 (0) | 2018.10.21 |
[스크랩] [碧巖錄] 제91칙 鹽官犀牛扇子 - 염관화상과 무소뿔 부채 (0) | 2018.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