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95칙은 장경혜릉 화상과 보복종전 화상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장경화상이 어느 때에 말했다. ‘차라리 아라한에게 탐진치 삼독(三毒)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여래에게 두 종류 설법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래께서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 종류의 말씀이 없었을 뿐이다.’ 보복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장경화상이 말했다. ‘귀먹은 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는가?’ 보복화상이 말했다. ‘ 그대가 제이의(第二義)에서 말했음을 알겠노라.’ 장경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보복화상이 말했다. ‘차나 마시게!’
擧. 長慶有時云,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不道如來無語, 只是無二種語. 保福云. 作生是如來語. 慶云, 聾人爭得聞. 保福云, 情知爾向第二頭道. 慶云, 作生是如來語. 保福云, 喫茶去。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19권 보복전에 전하고 있다. 장경혜릉(長慶慧陵:854~932)과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은 설봉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선승이다. 장경화상에 대한 자료는 <조당집> 10권, <송고승전> 13권, <전등록> 18권에 전하고 있으며, <벽암록> 8칙을 비롯해 운문, 조주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설봉 문하에서 12년간 7개의 방석이 닳도록 수행하여 깨닫고,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 사람들 스스로가 수긍해야 친해진다. 예전에는 잘못하여 길에서 찾았는데, 오늘 보니 불 속의 얼음과 같다”고 게송을 읊고 설봉과 현사의 인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오후(悟後)의 수행을 53살까지 하였고, 천우 3년(906) 천주자사 왕연빈(王延彬) 초청으로 소경원(昭慶院) 주지가 되면서 법당을 열고 출세했다. 뒤에 민왕(悶王) 왕심지의 초청으로 복주 장락부 서원의 주지가 되어 크게 법당을 열었고, 왕은 장경(長慶)이라고 쓴 칙액(勅額)과 초각(超覺)대사라는 호를 하사했다.
종전화상의 약전은 <조당집> 11권, <전등록> 19권에 전하고 있는데 15살에 설봉 문하에 출가하여 오랫동안 스승을 시봉했으며, 항상 고금의 방편법문을 제시하여 장경선사에게 질문하니 장경이 퍽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장경과 보복, 두 사람이 나눈 선문답은 <벽암록> 8, 23, 76칙 등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항상 서로가 문제를 제시하여 경각시키며 정법수행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탁마했다. 본칙도 장경과 보복이 평상시의 대화로 나눈 것이다.
‘차라리 아라한에게 탐진치 삼독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여래에게 두 종류 설법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은 소승불교에서 4종류의 깨달음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라는 최고 경지를 이룬 성자로 생사윤회의 원인인 번뇌를 단멸하고 육도 윤회를 벗어났기 때문에 무생(無生) 혹은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또한 수행력이 뛰어나 인천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기에 응공(應供)이라 하고,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완전히 체득했기 때문에 배우고 익혀야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또한 일체 번뇌의 도적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살적(殺賊)이라고 하는데, 번뇌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탐진치 삼독도 있을 수 없다. 장경화상은 ‘가령 아라한에게 삼독이 있다고 할지라도’ 라고 말하고 있으며, 여래는 두 가지 종류의 말이나 설법이 결코 있을 수가 없는데, 여래에 두 가지 말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아라한의 삼독을 끌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래의 두 가지 말이란 진실어(眞實語)와 방편어(方便語)인데, <법화경>에 “나는 지금 진실어를 설한다. 그대들은 일심으로 확신하도록 하라”라고 하며, <금강경>에도 “여래는 이와 같이 실어자(實語者)이며 진어자(眞語者)이다”라고 하고, 〈열반경〉에도 “정어(正語), 실어(實語), 진어(眞語), 헛된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부처님 설법은 모두 진실어이다. <유마경> 등 대승경전에 부처님은 일미(一味) 평등의 진실을 설하기에 일음(一音) 설법이라고 강조한다. <화엄경>에도 “여래는 법음(法音)을 설하니 시방에 두루하여 듣지 못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능엄경>에는 부처님 설법을 원음(圓音), 묘음(妙音)이라고 했다. 사실 여래의 설법을 진실어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두 종류의 말이 없다고 하는 것도 여래 설법을 비방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능가경>에 여래는 49년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중생구제를 위한 팔만사천의 방편설법을 했다. <유마경>에 “부처님은 일음으로 연설했지만, 중생은 근기에 따라 법문을 이해한다”고 한 것처럼, 여래의 설법을 듣는 중생은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방편설법이 된 것이다.
장경화상은 또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여래께서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진실어와 방편어라는 두 종류 말씀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주석을 붙였다. 보복화상은 장경에게 여래는 두 가지 말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데, 도대체 ‘여래의 말이란 어떤 것이라고 알고 있는가? 과연 여래의 말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다그치자, 장경화상은 ‘여래는 여래의 말이 있지만, 그대와 같이 귀 먹은 사람이 들을 수가 없지’ 라고 말했다. <벽암록> 88칙에 현사가 봉사, 벙어리, 귀머거리 삼종병인(三種病人)에게 어떻게 불법을 설해야 하는가? 라고 문제를 제시한 것처럼, 여래의 진실어를 귀가 먹었다고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문제가 있다. 여래의 진실어는 오관의 감각기관을 통해 분별의식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通身)으로 듣고 보고 체득할 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복화상은 ‘그대는 불심의 지혜작용에서 벗어나 상대적인 차별경계인 제이의(第二義)에서 여래의 말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불법의 안목과 지혜 작용이 없다고 힐책했다. 그러자 장경화상은 ‘그러면 그대는 여래의 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보복화상은 ‘자, 여기 차나 마시게!’ 라고 말했다. 보복이 ‘차나 마시게!’라는 말이 여래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래의 말은 사량분별하거나 망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원오는 ‘알았다(領)’고 하고, ‘또 말하기를, 알겠는가?’ ‘빗나갔다’라고 착어했다. 원오가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는 말인데, 만약 ‘차나 마시게!’라고 말한 보복의 말이 여래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분별해 버린다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기에 곧바로 ‘잘못된 것’이라고 경계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제일의(第一義), 제이의(第二義)라고 하네.’ 설두는 먼저 보복화상이 장경의 말에 대하여 제이의(第二義)라고 평한 말을 제기하여 읊고 있는데, 진실과 방편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제일두(第一頭)나 제이두(第二頭)라는 숫자에서 여래의 말을 찾으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용이 있는 곳(有處)과 없는 곳(無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와룡(臥龍)은 썩은 물에 나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용(와룡)이 썩은 물과 같은 제일의나 제이의라는 언구에 있을 수 있는가? 여래의 말을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자는 썩은 물에서 사는 인간이다. 보복화상이 ‘차나 마시게!’ 한 말은 마치 산 용이 승천하는 자세라고 칭찬한 말이다.
‘용이 없는 곳에는 맑은 파도에 달빛 어리고.’ 이 말은 장경화상이 불심의 지혜작용이 결여된 점을 읊은 것이다. 무처(無處)란 용이 없는 썩은 물로 파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달빛이 맑게 비추고, 맑은 파도에 물이 청명하다고 한 것이다. ‘용이 있는 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결이 일어났다.’ 보복화상이 ‘끽다거(喫茶去)!’라고 말한 불심의 살아있는 지혜작용을 읊은 말이다. 유처(有處)란 용이 살고 있는 물에는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하얀 물결이 일어나 물결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설두화상은 ‘혜릉선객이여! 혜릉선객이여!’라고 불러내어, 당신은 선불장에서 합격하지 못한 낙제생이라고 선포한 말이 ‘3월 우문(禹門)의 폭포에서 이마만 다쳤구나’이다. 장경화상이 보복에게 여래의 말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시해 불법의 안목을 체득하는 등용문을 설치했는데, 보복이 ‘차나 마시게’라는 한마디로 용문의 폭포에 밀어버려 상처를 받고 말았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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