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96칙 趙州三傳語 - 조주화상의 삼전어 법문

수선님 2018. 10. 28. 12:48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96칙은 조주화상의 삼전어(三轉語)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조주화상이 대중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하는 세 가지 획기적인 법문을 하였다.

 

擧. 趙州示衆, 三轉語.

 

조주화상이 대중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설한 획기적인 세 가지 법문(三轉語)의 내용을 본칙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원오의 ‘평창’과 설두의 ‘게송’에 읊고 있는 것처럼, <조주록> 중권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조주선사가 법당에 올라 대중들에게 법문을 제시했다. ‘쇠 부처(金佛)는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나무부처(木佛)는 불에 타 버릴 것이고, 진흙 부처(泥佛)는 물에 녹아 풀어진다.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 속에 있다. 보리나 열반, 진여 불성이 모두 몸에 걸친 의복과 같고, 역시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궁극적인 실제 이치라도 어디에 둘 수가 있으랴!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다. 단지 불법의 이치를 구명하기 위해 참선하라. 그렇게 수행하여 만약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다면 노승의 머리를 잘라버려라!’”

 

설두화상은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나무 부처는 불에 타 버릴 것이고, 진흙 부처는 물에 녹아 풀어진다”는 법문을 조주의 삼전어로 제시한 것이다. 전어(轉語)란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말이다. 전미개오(轉迷開悟)라는 말과 같이 중생의 몸과 마음을 부처의 몸과 마음으로 전향시키는 전신(轉身)의 의미인데,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한 마디 법문으로 깨달음을 체득해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심기일전(心機一轉)하도록 하는 선승의 법문을 일구(一句)라고 한다. 선에서 말하는 일구는 일전어(一轉語)이며, 삼구(三句)는 삼전어(三轉語)이다. 조주화상은 금불(金佛)과 목불(木佛), 니불(泥佛)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청정한 법신인 진불을 깨닫고, 한 생각의 망심(妄心)이 없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는 〈신심명〉의 일절을 깨닫도록 한 법문이다. 그런데 설두는 금불과 목불, 니불(泥佛)은 인연가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필경 불가득(不可得)이고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단하천연선사가 목불을 쪼개어 군불을 지핀 이야기처럼, 목불은 불에 타 버리고 인연이 흩어지면 본래 공(空)이 된다. 중생은 목불, 철불, 진흙 부처에 관계없이 등신불로 모시면 미신적인 우상으로 인정하고 집착해 버리고, 법계에 충만한 진불 법신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범부의 망정(妄情)을 타파해 버리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조주의 삼전어에 각각 게송을 읊고 있다. 첫번째는 “진흙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이다. 진흙이나 부처라는 차별심 뿐만 아니라, 물을 건너고 건너지 않는 생각조차 없어졌을 때, 조주가 말한 것처럼, 마음 속의 진불인 자성 천진 법신불이 신령스러운 지혜광명을 천지에 비추게 된다. 운문선사가 ‘사람들은 각자 광명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본래 구족한 진불의 지혜광명을 2조 혜가의 이름에 맞추어 “신광(神光)이 천지를 비춘다”고 읊고 있다. 본 게송은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깊이 사유하여 자성천진불의 지혜광명을 체득해야 한다. “눈 위에 서서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면.” ‘평창’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신광이 달마를 찾아 신명을 돌보지 않는 구도심으로 한쪽 팔을 자르고, 눈 속에서 제자의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달라는 법문을 청한 고사를 읊고 있다.

 

달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하자,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신광이 2조 혜가가 된 선문답인데, 불법은 스승이나 남에게서 찾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을 깨닫고 불법의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광(神光)은 사람들 모두 각자 구족하고 있는 광명이지만, 혜가가 눈 속에서 불법을 구한 것처럼, 결사적인 구도심과 수행으로 철저한 깨달음을 체득하지 않았다면 진불의 광명이 천지를 두루 비출 수 있는 대기 대용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설두가 ‘휴(休)’라고 읊은 말은 크게 비우고 불안한 망심을 몽땅 비우고 쉬워버린 대휴대헐(大休大歇)의 깨달음을 말한다. 각자의 본분상에 구족되어 있는 신광도 수행하고 체득하지 않으면 지혜의 광명으로 작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허위의 무리가 되었으리라.” 앞의 게송을 이어받아 혜가가 눈 속에서 구도심으로 진정한 불법을 실참하여 확실히 본성의 진불을 깨달았기 때문에 불법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혜가가 허위로 거짓 수행한 선승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고 흉내내는 허위의 선승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한 말이다.

 

두 번째는 “쇠 부처는 용광로를 통과 할 수 없다”이다. 쇠부처가 용광로 속에서 녹아 고정된 형상과 모양도 없이 자기의 법성과 하나가 된 평등의 경지가 진불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찾아와 자호(紫胡)선사를 방문했네.” 자호이종(子胡利: 800~880)선사는 남전보원의 제자로 〈전등록〉 10권에 “자호선사는 산문에 하나의 팻말을 세우고 글자를 썼다. ‘자호에게 개 한 마리가 있다. 위로는 머리를, 가운데로는 허리를, 아래로는 다리를 물어뜯는다.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는다’”라는 고사를 인용했다. 나를 찾아오는 구도자가 사량분별하면 자호의 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경고문이다. 산문은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는 문이다.

 

그래서 이 문에 들어오는 사람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누구라도 쇠 부처라는 분별심을 일으키면 본분과는 어긋나고 불심의 지혜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호선사가 팻말에 적은 언어 문자의 경고문에 일체의 사량분별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쇠 부처에 대한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도록 주의하라는 말이다.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한다거나, 자호의 개에 물리지 않는 것은 언어 문자나 사량 분별심을 비우는 것이다. 사량분별심이 끊어진 경지는 시방 삼세의 일체 처에 깨달음의 지혜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풍(淸風)은 지금 여기 서 있는 이곳에 상쾌하게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호선사는 그러한 경지를 제시한 선승이라고 읊은 게송이다.

 

세번째는 “나무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이다. 원오는 목불이 불을 건너기 전에 그대로 “완전히 소각해 버렸다”고 착어했는데, 진흙 부처나 쇠 부처처럼, 나무부처라는 분별적인 사고를 완전히 텅 비워 버렸다는 의미이다. 설두는 “항상 파조타(破墮)선사를 생각나게 한다”라고 하며, <조당집> 3권, <전등록> 4권에 전하는 혜안국사 제자인 파조타선사의 고사에 맞추어 게송을 읊고 있다. 즉 숭산 혜안국사의 제자가 마을 사람들이 부엌 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주장자로 부엌을 세 번 치면서, ‘그대는 흙과 기왓조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신령함이 어디서 왔으며, 성스러움이 어디서 일어났다고 이렇게 짐승의 생명을 삶아 죽이는가!’ 라고 말하고, 또 주장자로 세 번 치자 솥이 저절로 깨어지면서 갑자기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사람이 앞에 나타나 절을 한 뒤 말했다. ‘저는 부엌 신입니다. 오늘 선사의 설법으로 깨달아 이곳을 벗어나 천상에 태어났기에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선사가 ‘그대에게 본래 있는 성품이지 내가 억지로 한 말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두 번 절을 하고 사라졌다. “나를 저버렸다는 걸 알겠네.” 부엌신이 오랫동안 업보로 자아를 등지고 있었는데, 선사의 법문으로 깨닫게 되었다. 목불이나 부엌이나, 자기 또한 인연소생이니, 부처나 마음을 구해도 불가득이라는 불법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부처나 법에 집착하여 자아를 등지고 있으면 업을 짓고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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