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
이 마음은 사실 아주 헷갈리게 혼용되어져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둘째는 근원이라는 뜻이로 쓰이입니다.
하나는 근원이고 하나는 작용으로 반드시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데,
근원과 드러난 작용이 혼용되어져서 매우 사람들이 헷갈려 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란 단어는 크게.......
하나는 불성, 하나는 고통의 근원으로 쓰입니다.
완전히 극과 극입니다.
이러니까, 너무 헷갈리는거지요.
이 마음이란 것을 잘 이해하고,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과연 마음이란 뭘까?
부처님은 이 생각하는 이 것을 나 자신으로 알고 사는게 중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수능엄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맞습니다.
이 생각하는 마음..즉 이 정신을 나 자신이라고 알고 살아가는게 대부분의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화가 치밀면 절대 못참고 싸우고 난리가 나는거지요.
또 기쁘면 바로 즐거워하고..
이 마음을 나 자신이라고 알기 때문에,
윤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셨지요.
이 생각하는 이 마음, 이 정신....이걸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근데 부처님은 이게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거지요.
여기서 많이 놀라게 됩니다.
그럼 내 마음이란 뭔가...
아난 존자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주 황당하고 놀래서 입이 헤 벌어질 정도였다고 경에 나옵니다.
울먹거렸다고 나오지요.
우리가 자존심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그 마음...
온갖 생각을 하는 그 정신....
그게 내가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첫부분과 뒤부분에 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음은 항복받아야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강제로 억지로는 항복을 못받겠지요.
그 본질을 알아버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안다라는게 중요하지요.
수많은 종교인들...그리고 수많은 도 닦는 사람들...
모조리 이 생각하는 이 마음을 나 자신이라고 알고 종교생활을 하고, 도를 닦습니다.
근데 이게 완전히 틀렸단 뜻이지요.
절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을 나 자신으로 알고 도를 닦는다는 것이 바로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이거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그게 아니란거지요.
나라고 알고 있는 그건 고통의 뿌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이 마음을 나 자신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종교, 구도란 뭔가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맨날 쓰던 이 마음..
여전히 거기서 못벗어나는 채로 종교생활 해봐야 뭔 변화가 있겠습니까?
남에게 뭘 의지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그것처럼 바보같은 것도 없는 거지요.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야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남에게 구원을 의지한다는 것도 너무 바보같은 짓 입니다.
해탈이란건 불교에서만 가능합니다.
자아..나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가르침은 불교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럼 이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이 나가 아니라면, 나라는 것의 참 모습은 어떤 걸까요?
그걸 깨닫는게 돈오겠지요.
그러니 참 황당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럼 도데체 나라는 건 뭐냔 말이지요.
감도 잡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계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하라고 하신거지요.
또 육바라밀 수행을 해서 복덕을 많이 지어야만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을 수 있다고...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이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없는거지요.
왜냐면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정말 황당한거지요.
이 생각하는 이 마음을 나라고 여기고 살았는데...이게 나가 아니란걸 알면...
그게 도 닦는 첫발이라고 합니다.
이걸 알기 전에는 도를 닦는게 아니지요.
모래로 밥짓는 것과 같습니다.
밥이 안되는거지요.
왜냐면, 근본 자체가 틀려먹었으니까요.
그럼 마음의 정체는 뭘까요?
자신의 참 모습...
그건 비어 있습니다.
창공과 같이...
그래서 空이라고 하지요.
비어 있음..
그게 본래 모습입니다.
생각이란 것도 거기서 나오는거지요.
근데 주객이 전도돼서..........이 생각하는 이 마음을 나라고 알고 살아가니까.. 고통이 생깁니다.
나라는 건 결국 생각입니다.
생각의 흐름
이게 유위법이지요.
또 이게 相이고...
본래 모습인 진여를 바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이 마음을 파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거지요.
그래서 무상합니다. 근본이 비어 있으니까요.
닭 홰치는 소리나, 종소리..등을 듣고 깨달았다는 것은, 그걸 알았다는 얘기겠지요.
그 소리를 듣는 주체를 알아낸 겁니다.
주체라고 하지만, 텅비어 있는 그 상태를 알아버린거지요.
텅빈게 소리를 듣습니다.
텅빈게 보는거지요.
텅빈게 냄새맡습니다.
텅비어 있음..................
空
불교의 목적, 도 닦는 목적은 뭘 이루려는게 아닐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비워가는게 목적이겠지요.
무목적의 목적입니다.
본질과 점점 더 가까워지려면,
계속 비워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 닦을 때,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요.
무념상태.. 그게 가장 본질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들의 근본은 다 텅비어 있다..라는 것..
이게 일체중생 실유불성... 누구나 다 불성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모든 것이 다 텅비어 있어서 부처님께서도 제도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라고 까지 하십니다.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했지만, 그 실체는 모조리 텅 비어 있으니..
결론적으로는 하나의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는거겠지요.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괴롭습니다.
버릴수록 행복해지는거지요.
움켜쥘려고 할수록 불행해집니다.
실제 소유한게 많은게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많은거지요.
가난뱅이도 실제 소유한게 없는게 아니지요.
이것도 다만 생각일 뿐이지요.
이게 전도몽상이지요.
자기가 자신에게 속고 삽니다.
뭘 가졌다라는 것..
원래 뭘 가질 수 없습니다.
그냥 생각을 가진거지요.
생각도 가질 수 없지요.
잠시 그때일 뿐......맨날 바뀌는 생각이니 뭐....가질수 있나요?
소유란 생각을 소유한 것이고,
무소유란 생각을 안해버리는 겁니다.
생각을 하던 안하건,
생각이란건 본래 실체가 없는거지요.
생각과의 전쟁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나"지요.
생각과의 전쟁에서 그 마음을 항복시켜버리면, 즉 자아를 극복하면....다시 말해 생각을 극복하면..
마음이 보물로 변한다지요.
마음을 항복받기 전에는 고통의 근원이였으나,
마음을 항복받고 나서는 행복의 근원이된다나........
의반야바라밀다...
의지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즉 空에 의지하는 거지요.
비어 있음에 의지한다.
의지할데 없는데 의지하는 것.....
비어 있음과 생각 있음
삼매란 비어 있음의 연습일 겁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마음을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텅 비워놓을 수 있는 연습과 그 능력 !
그 마음을 항복받으려면,
금강경에 나와 있듯이 보리심밖에는 방법이 없는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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