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옛길
올바른 주시 (正念)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생물이든무생물이든 자신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불가사의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즉 의식이다. 인간을 자석에 비유사자면 인간의 마음은 지각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놀라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자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로 그와 유사하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지배적이며 탁월하다. 그래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힘들을 무색케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물리, 화학의 법칙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도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
자신을 잘 다스리려면
자신을 잘 주시(注시)해야 한다. (법구경 157)
붓다의 다음과 같은 설법이 이 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비구들아, 옛날 어떤 곡예사가 대나무 막대기 위에 올라서서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애야, 막대기로 올라와서 내 어깨 위에 올라서거라.'
제자가 그렇게 하자 그는 말했다.
'애야, 이제 네가 나를 지켜라. 그러면 나는 너를 지켜주마. 서로 이렇게 하면서 묘기를 보여 주고 안전하게 내려가자.'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스스로를 지키십시오 저는 저 스스로 지키겠습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면서 묘기를 보여 주고 안전하게 내려가면 됩니다.'" (상응부 v.168)
붓다는 계속해서 말한다.
"비구들아, 너희들도 제자가 스승에게 '저는 저 스스로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주시(念.염)해야 한다. (즉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주시해야 한다는 의미). 또 스승과 같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라고 생각하며 주시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주시해야 한다는 의미).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킨다. 또한 다른 사람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비구들아,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을 지키게 되는가? 주시를 반복함으로써, 주시를 닦음으로써, 주시를 자주 행함으로써 그렇게 되느니라.
그러면 비구들아,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어떻게 자신을 지키게 되는가? 자제에 의해서, 무해(無害), 자애, 연민...에 의해서 그렇게 되느니라.
비구들아, 너희들은 '나는 스스로를 지키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주의 깊은 독자들은 이 설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 것이다. 이것은 주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주시하라고 충고한다.
자제, 무해, 자애, 연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미덕들이다. 이 미덕들 가운데 어느 것도 주시 없이는 계발될 수 없다. 주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자각하고 있다.
올바른 주시는 사람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살펴 주고 선행을 하도록 격려해 준다. 이와 같이 주시를 반복해서 자주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지키게 된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이기주의나 이기적인 방위가 아니라 자기 수양이자 자기 훈련이며 또한 도덕적. 정신적인 수양이다. 우리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강하고 확고한 만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스스로가 약하고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도울 수 없다. 이타주의의 행동 원리가 우리의 인격과 정신적 발전의 토대이다.
'자신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는 말은 근본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이중의 오해를 없애 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닦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수행자들 즉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당하지 않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닦고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이 과묵한 사람들은 종종 남몰래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어떤 사람이 인정은 많더라도 사생활이 의심스럽고 선(善)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자신에게 매우 소홀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봉사를 할 수 없다.
그는 사회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지킨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열중해서도 안된다.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두 부분을 동시에 취해야 한다.
경전에서 볼 수 있듯이 보살(붓다를 지칭함)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자신을 수행하고 바라밀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설한 가르침의 두 가지 기본적인 덕목인 지혜와 자비를 닦아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진정한 인류의 조력자가 되었다. 보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손길을 뻗치면서 그는 자신을 도왔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동시에 결코 우리 자신을 잊지 말고 주시를 통해 자신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와 안녕을 가져다 주는 올바른 방법이다.
붓다는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자기 자신을 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남을 가르쳐라. 이와 같이 현명한 사람은 번뇌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거이다.)" (법구경 158)
경전 속에서 우리는 주시를 의미하는 사티(sati.念.염)라는 단어와 매우 밀접한 '압파마다(appamada. 항상 깨어 있음. 不放逸. 불방일)'라는 단어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압파마다를 적절히 번역하기는 어렵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주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의 반대말인 파마다(pamada)는 '태만'을 의미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마음이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 사이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압파마다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늘 방심하지 않음 즉 '항상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주시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붓다가 마지막 유훈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라고 말하며 '항상 깨어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붓다의 상수 제자이면서 붓다보다 먼저 입멸한 사리풋타(Sariputta)도 마지막 유훈에서 '항상 깨어 있음'에 대해 충고한다.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이것이 나의 충고이다."
주시 즉 완전한 인식과 분명한 이해, 이 두가지에 의해서 명상이 완성된다. 항상 자신을 관찰하고 주시하는 사람은 이미 불사(不死)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명상이 불교의 원동력이듯 나태(放逸.방일)는 죽음의 원동력이다.
붓다는 말한다.
"항상 깨어 있음(不放逸.불방일)이 불사(不死. 열반을 말한다)로 가는 길이다. 나태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이것은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이것은 불사 즉 열반을 실현한,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생사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나태해서 항상 깨어 있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생사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나태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차이를(이는 깨어 있으므로 윤회에서 벗어났고 나태하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해한 현명한 사람은 '항상 깨어 있음' 속에서 기뻐하고 성자의 목장(행이 일어나는 곳으로 주시의 기초가 된다)을 즐기리라.
늘 명상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현명한 사람은 속박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열반을 성취하리라."
(법구경 21.23)
붓다는 '항상 깨어 있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강조 한다.
"땅 위를 걸어다니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가장 큰 코끼리의 발자국 속에 모두 들어가듯이, '항상 께어 있음'은 사람들이 현재와 미래의 이익을 모두 얻는 단 한가지 방법이다." (상응부. i, 86)
항상 깨어 있음에 의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또한 이미 일어난 악한 생각들이 약해지도록 한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생각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악한 생각들이 약해진다. (증지부. i, 11)
평정한 마음을 지니고 늘 마음을 살피는 사람, 용감하고 성실한 사람은 경주마가 늙을 말을 앞서 가듯이 혼미한 사람들과 나태한 사람들을 앞서 간다.
게으른 사람들 가운데서 부지런하고
잠자는 무리들 가운데서 깨어 있는 현자는
경주마가 늙은 말을 앞지르듯이
그들 모두를 앞질러 간다. (법구경 29)
지속적인 주시와 경계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필요하다. 우리들이 생각과 감정을 청정의 길고 끌고 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정신적인 진보가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지속적인 깨어 있음을 통해서이다.
자신이 배운 것을 주시하여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없다면, 많이 배운다고 해서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주시하지 않으면 배운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도 없다. 주시라는 이 중요한 자질이 부족하면 학식있는 사람들조차도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경솔하게, 그 결과를 잘 생각해 보지 않고 해 버린 말 때문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종종 심각하고 변명할 수 없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뱉어 버린 말과 잃어버린 기회 그리고 쏜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겨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주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모든 선하고 건전한 행위들의 주된 특성이다.
이제 붓다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비구들아, 나는 나태만큼 큰 손실을 가져다 주는 다른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나는 항상 깨어 있는 것 만큼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다른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항상 깨어 있음은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느니라." (증지부.A. 3)
붓다는 그를 따르는 사람드에게 나태와 게으름에 대해서 경고한다. 나태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발전이나 정신적인 발전에도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붓다가 성실하지 못한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충고는 "조심하라, 깨어 있어라."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 한 마디의 충고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인생을 변화 시켰다. 경전에는 그러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붓다의 충고는 다음과 같다.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라
잘 수행하라, 비구들아
생각을 잘 집중해서
항상 너희들의 마음을 주시하라 (장부. ii. 120)
또한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비구들아,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는 번뇌를 소멸해서 아라한이 된 비구들, 해야 할 일을 다 끝냈고 번뇌의 짐을 내려 놓아 청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비구들, 단계적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파괴한 비구들, 완전한 지혜에 의해서 자유롭게 된 비구들, 그와 같은 비구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항상 깨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된 그들은 나태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중이며 정신적인 완성을 이루지 못해서 속박에서 벗어난 최상의 안온을 열망하며 살아가는 비구들, 그와 같은 비구들에게 나는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라고 말한다.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이 비구들이 적당한 거처에서 감각 기능들을 잘 제어하면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출가한 목표인 저 비할 데 없는 청정한 수행(梵行.범행)의 완성을 현세에서 스스로 이해하고 증득하고 성취해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아, 나는 비구들의 이러한 항상 깨어 있음의 성과를 알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라고 말한다. " (중부 70)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명상은 팔정도의 마지막 세 요소들인 올바른 노력, 올바른 주시, 올바른 집중의 결합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엇들은 새끼줄의 세 가닥과 같다. 즉 이것들은 한데 꼬여 있고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주시가 가장 강한 가닥이라고 여겨진다. 주시는 고요함과 통찰력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아채는 주시는 마음의 어떤 기능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적인 요소이다. 주시라는 매우 중요한 이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감각 대상들을 인식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알 수도 없다. 이것은 빗나간 주의력을 제거하고 사물을 잘못 관찰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올바른 주시'라고 한다. 주시는 청정과 자유로 가는 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
올바른 주시는 인간이 하는 모든일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
걷거나 서거나 앉는 일, 말 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일, 먹거나 마시거나 생리적인 욕구를 아는 일 등 그러한 모든 활동들은 우리는 주시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비구들아, 주시는 어디에서나 어떤 일에서나 꼭 필요한 것이다." (상응부 .v.115)
이러한 점에서 경전에서는 종종 주시(sati)라는 말이 '분명한 이해(sampajanna,正知.정지)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사티삼파잔냐(sati-sampajanna)라는 복합어가 자주 쓰인다. 주시와 분명한 이해는 서로 돕는다.
밖에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점차 방 안에 있는 물체들을 식별 하듯이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주시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점차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 본성을 깨닫는다.
사물의 본성은 무지에 의해서 가려지고 위장된다. 그러나 이 장에서 다르게 될 올바른 주시는 사람들이 올바른 견해와 마음의 해탈을 얻도록 도와 준다.
"비구들아, 누각에서는 어떤 서까래도 대들보 위로 모이고 한결같이 대들보를 의지하고 대들보에 고정되어 거기서 함께 결합되듯이, 어떠한 잘못된 상태도 무지를 근거로 하고 무지에 고정되어 거기서 함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너희들은 '우리는 항상 깨어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수행해야 한다." (상응부. ii 263)
무지는 경험할 가치가 없는 것 즉 좋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지는 오온의 결합이라는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의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사물의 상대성 즉 공성(空性)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감각을 통제하는 기능들과 사성제의 주된 특성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Sammohavinidani, p. 134)
그리고 오개(五蓋. 수행의 다섯가지 장애)가 무지를 키운다. 오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면 오개를 키우는 것은 무엇인가? 세 가지 잘못된 삶의 양식인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잘못된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이 세 가지 잘못된 행위들은 감각들을 통제하지 않아서 생긴다.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주시와 분명한 이해가 부족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점에서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표류하는 대상과 존재의 특성 (무상, 괴로움, 무아) 즉 사물의 본질을 잘못 생각하고 잊어 버리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과 행동을 멋대로 하고 악한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치는 것은 바로 사물의 본성인 무상, 괴로움, 무아를 명심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분명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은 '목적', '적합성'.'의지','미혹이 제거된 상태'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목적 없이 어떤 일을 할 때, 선한 일을 돕지 않거나 발전을 저해하는 것들을 생각할 때, 수행자들의 진정한 의지처인 법을 잊어 버렸을 때, 미혹으로 즐거워하고 영원하며 실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물들에 집착할 때, 자제력을 잃게 된다.
주시와 분명한 이해의 부족 뒤에는 현명하지 못한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가 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바로 진로를 벗어난 주시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무아(無我)를 아(我)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가 많아지면 무지를 낳고 또한 생존에 대한 갈망을 낳게 된다. 이와 같이 현명 하지 못한 사람은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를 하는 사람은 윤회의 수레바퀴를 따라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마치 표류하는 배나 마차에 묶인 황소처럼.
주시를 의미하는 사티(sati)라는 말은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눗사티(anussati, 기억을 떠 올리는 것), 파팃사티(patissati. 기억)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깨어 있음'이라는 의미의 주시가 가장 중요하다. 팔정도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주시에도 올바른 주시와 그릇된 주시, 두 가지가 있다. 올바른 주시는 선한 쪽으로 향하고 반면에 그긋된 주시는 악한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팔정도의 올바른 주시는 사념처(四念處)로 설명된다.
염처(念處)는 팔리어로 사티팟타나(satipatthana)인데 우팟타나(upatthana)의 생략형인 팟타나(patthana)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마음) 가까이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즉 '주시를 하고 나서(satim upatthanpetva)'라는 표현에서처럼 '의식이 남아 있음', '확립' 또는 '깨움'을 의미한다.
염처는 한 대상에 대해서 날카롭게 알아 차리는 수준까지 사람들을 끌어 올려 억제 능력, 힘, 깨달음의 요소, 주시의 방법적인 요소를 작용시키고 불러 일으키며 분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몸(身), 감각(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에 대한 '염처(깨어 있는 주시)'는 통찰로 가는 첫 걸음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깨어 있음'이 '출발점'이 된다.
나아가 사람들은 '염처'로써 항상 깨어 있음(불방일), 집중(定), 조심스러움을 일깨운다. 그래서 그는 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염처에는 많은 대상이 있지만 열반으로 인도하는 통찰로 가득차 있는 적정(寂靜)이라는 한 측면에서 보면 그 대상은 하나이다." (Bhikku Soma, The Way of Mindfulness. 1949) 정신적인 계발 즉 명상에 대해서 붓다가 설한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티팟타나 숫타(Satipatthana-sutta)]는 팔리 원전에 두 번 등장한다.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의 10번째 경과 디가 니카야(Digha-nikaya)의 22번째 경에 나오는 것이다. 디가 니카야에 나오는 [마하사티팟타나 숫타(Maha-satipatthana-sutta)]는 맛지마 니카야와는 달리 사성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전체 경들 중에서 [사티팟타나 숫타]를 가장 존중하고 높이 평가한다. 스리랑카에서는 팔계를 지키는 매월 보름에는 일반 신도들이 이 경을 독송하면서 절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비록 경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붓다의 말씀에 마음을 집중한 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주의 깊게 듣는다. 또한 죽어 가는 사람 곁에서 비구가 이 경을 독송하는 광경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죽어 가는 사람의 마음이 붓다의 말씀으로 향하고
거기에 집중되어 그의 마지막 생각이 청정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경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주시는 깨어 있는 동안 항상 어느 곳, 어떤 것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이 경이 좀 진부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환경에 매달려 비굴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격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갈망과 충동에 좌우된다. 또한 올바른 생각과 이해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습관적인 구조(업)를 제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리들의 습성에 좌우된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 신도들은 '바쁜 사람이 어떻게 경전에 묘사된 그대로 염처를 행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경전에서 언급된 몇몇 주시를 계발하려먼 시간이 필요하고 은둔적인 환경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일상 생활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행의 장애물들을 피해 굳이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필요는 없다. 유해하고 악한 생각드을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광경이나 소리들을 접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사회 속에 있을 때이다. 바로 그때 그러한 생각들을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억제하는 주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일을 하는 동안 감각적인 욕망, 악의, 질투, 자만 따위의 악한 생각들이 일어나 마음의 균형을 흩르려 놓는다. 바로 그때 이러한 유해한 요소들을 점검하는 명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번뇌의 노예가 되지 않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자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명상을 하느라 써 버린 시간은 결코 낭비된 것이 아니다. 명상은 우리의 정신력을 강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한 명상에 잠겨 하루나 이틀을 보넬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일과 발전을 위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현실 도피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과 정신적 자질을 강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또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내적인 관찰이다. 바로 자신의 생각과 감각(느낌)들을 조사함으로써 사물의 내적인 의미를 깊이 탐구할 수 있고 내적인 힘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쁜 생활에서 초연하고 탈속한 마음을 갖는 일이 정신 건강에 필요하다.'
올바른 주시를 통해서 사물을 더욱 날카롭게 바라보고,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체계적인 생각과 반성은 인간의 올바른 주시 즉 깨어 있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우리들의 생각은 의지적인 마음이 받아들인 다섯 가지 감각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음식이 적합한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들의 주시에 달려 있다. 만약 이 음식이 그릇된 주시와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종종 우리들을 미혹에 빠지게 한다.
경전들은 인간이 선하거나 악한 것, 유익하거나 무익한 것 등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생각에 주의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또한 우리들에게 게으름과 백일몽에 대해 경고하고 정신적으로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고 촉구한다.
사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이 경을 읽는 것 자체가 자신을 깨어 있게 하고 성실하며 진지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각 있는 사람은 올바른 주시를 함으로서 경멸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균형 감각을 잃어 혼란한 오늘날, 주시는 진실로 필요한 것이다.
올바른 주시는 집중적인 고요함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생활을 촉진하기도 한다. 이것은 세속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들의 모든 행위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주시는 카레에 소금과 같은 것이다." (Satipatthana Com)
악한 생각들이 집중을 방해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올바른 노력이 그와 같은 악한 생각들을 밀어 내고, 선한 생각들을 일으키고 유지 시킨다. 그러나 지속적인 올바른 주시가 부족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올바른 주시와 올바른 노력은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선한 생각들을 계발하고 촉진하는 데 함께 작용한다. 붓다가 이 경의 서두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사념처는 해탈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밝고 지나간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제나 계율을 지키고 지혜로우며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자신을 살피고 주시하는 사람은
건너기 어려운 거센 강을 능히 건넌다. (숫타니파타 174)
이제 저 유일한 길로 가 보자.
염처에 관한 설법(근본적인 내용은 삭제하지 않은 채 설법을 약간 압축시켰다. 그러나 비유에 해당하는 부분은 생략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붓다는 쿠루족의 상업 도시인 캄마사담마에서 쿠루족들과 함께 계셨다.
붓다는 비구들아 "비구들아!" 하고 불렀다. 비구들이 "예, 세존이시여."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아, 이것은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니 바로 사념의 길이니라. 그러면 사념처란 무엇인가?
비구는 몸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몸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써 (몸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감각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감각에 대한)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감각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마음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법(마음의 대상)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법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1. 몸에 대한 주시(身念處. 신념처)
1)호흡에 대한 주시
그런데 비구들아, 비구는 어떻게 몸을 주시 하면서 생활하는가? 비구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 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마음을 긴장 시킨다. 그리고 주시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주시하면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있다.'고 알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숨을 길게 내쉬고 있다.'고 안다.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 있다.'고 알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숨을 짧게 내쉬고 있다.'고 안다. '(숨쉬는) 과정 전체를 주시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자신을 수행하고, '(숨쉬는) 과정 전체를 주시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고 자신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주시 하면서 생활한다(자신의 호흡을 주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흡을 주시 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호흡을 둘 다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참으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2)몸의 자세
그리고 다시 그는 가고 있을 때는 '가고 있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고 알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다.'고 안다. 그는 몸의 어떤 자세라도 잘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모든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해
그리고 또 그는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를 분명하게 안다. 앞을 보거나 뒤를 볼 때를 분명하게 안다.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대변이나 소변이 마려울 때를 분명하게 안다. 걷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을 지킬 때를 그는 분명하게 안다.
(잠자리에 든 후와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잠자는 동안 존재했던 육체적.정신적인 것들은 바로 잠자는 동안 끝나게 된다.'고 주시하는 사람은 잠자고 깨어나는 데에 분명한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 불리운다. 행위(업)를 만들거나 행위로 구성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잠이고 일어나는 것이 깨어남이다. (Bhikkhu Soma, The Way of Mindufulness))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몸의 부정함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이 몸은 피부로 싸여 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주시한다.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등의 내장들이 있다.'고 주시한다.
이와같이 그는 몸에 대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5)물직적인 요소(사대.四大)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몸을 주시한다. 즉 이 몸에는 견고성의 요소(地.지), 유동성의 요소(水.수), 열성의 요소(火.화), 운동성의 요소(風.풍)가 있다고 주시한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6)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몸을 주시한다. '이 몸도 저 시체와 같으니, 저 시체처럼 썩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이 설법은 시체가 썩어 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각 단계에서는 수행자는 '이 몸도 저 시체와 같으니, 저 시체처럼 썩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자신의 몸을 주시한다)
2. 감각에 대한 주시(受念處. 수념처)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감각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즐거움을 느낄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알고, 괴로움을 느낄 때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낄 때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낄 때는 '비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낄 때는 '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낄 때는 '비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을 때는 '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을 때는 '비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고 안다.
(세속적인 감각들은 '가정 생활과 관계된' 감각들이고 비 세속적인 감각들은 '출가 생활과 관계된' 감각들이다. 비세속적인 즐거움은 명상으로 인해 생기는 행복을 말하고 반면에 비세속적인 괴로움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해탈로 가는 팔정도의 수행이 더딤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비세속적인 감각은 통찰의 결과로 생긴 평정함이다.
(중부, 137))
이와 같이 그는 감각에 대해서 내적으로, 최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며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 마음에 대한 주시(心念處.심념처)
그리고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비구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탐욕스러운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스럽지 않은 마음을 '탐욕스럽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고, 성내지 않는 마음을 '성내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은 마음을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지 않은 마음을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마음의 무기력한 상태)'이라고 알고,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이라고 알고,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상태)'이라고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욕계의 일반적인 의식)'이라고 알고, 초월적인 마음을 '초월적인 마음(색계와 무색계의 의식)'이라고 알고, 비초월적인 마음을 '비초월적인 마음(욕계의 의식)'이라고 알고,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고,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 법(마음의 대상)에 대한 주시(法念處.법념처)
그리고 비구는 어떻게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1)오개(五蓋.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주시
비구는 오개라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오개라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자신 안에 1)감각적인 욕망이 있을 때 그는 '내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고 알고, 자신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없을 때는 '내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없다.'고 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일어나는 대로 알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인 욕망이 사라지면 그것을 사라지는 대로 알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인 욕망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일어나지 않은 대로 안다. (2)악의,증오 3)나태와 무기력 4)침착하지 못함과 걱정 5)회의적인 의심의 경우 에도 그렇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2)오취온(五取蘊)에 대한 주시
비구는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이 있고,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의 일어남이 있고,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의 사라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육내입처(六內入處. 인식 주관), 육외입처(六外入處. 인식 대상)에 대한 주시
비구는 눈을 알고, 물질적인 (보이는) 형상을 알고 그리고 이 둘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족쇄(번뇌)를 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그는 귀와 소리를 알고, 코와 냄새를 알고, 혀와 맛을 알고, 몸과 감촉을 알고, 의식과 의식의 대상을 알고이 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족쇄를 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어떻게 일어 나는지,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칠각지(七覺支. 깨달음의 일곱가지 요소)에 대한 주시
비구는 자신 안에 염각지(念覺支. 관찰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내 안에 염각지가 있다.'고 알고, 자신 안에 염각지가 없으면 '내 안에 염각지가 없다.'고 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았던 염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염각지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안다(마너지 여섯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인 택법각지(擇法覺支. 여기서 법은 정신과 물질을 말한다),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 (喜覺支), 경안각지(經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그는 법(마음의 대상)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5)사성제에 대한 주시
비구는 진리에 따라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법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주시하면서 생활하고, 법에서 소멸하는 요소들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이와 같이 비구들아, 비구는 사성제의 법에서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진실로 비구들아,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7년 동안 사념처를 수행 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최종적인 해탈의 지혜(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不還果)를 얻을 것이다. (중부 70)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사념처를 7년이 아니라 6년, 7개월, 6개월, 5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 동안만이라도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를 얻을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만 사념처를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를 얻을 것이다.
비구들아, 이 때문에 '이것은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판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니 바로 사념처의 길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붓다가 이와 같이 말하자 비구들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주시에 대한 이 설법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것이 몸, 감각, 마음, 법(마음의 대상)이라는 특별한 네 가지 대상에만 관계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몸에 대한 주시는 어떤 것지도 없이 궁극점 까지 몸을 완전히 분석함으로써 즉 몸을 그 구성 요소들로 분석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몸의 본성을 깨닫도록 해 준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몸을 머릿속으로 탐구하다 보면 인간의 육체가 어떤 하나의 현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는 영원하고 지속적인, 어떤 실체가 없는 하나의 흐름(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들숨과 남숨은 자발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주시하는 수행)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숨쉬려고 해야 하고 또 그 숨을 알아야 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집중력을 계발하고 길러서 몸과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 수식관이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몸의 자세와 걷기 따위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산만한 생각들을 없애고 집중력을 향상시키며 인식과 불방일(항상 깨어 있음)을 계발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사념처의 두 번째인 감각(느낌)에 대한 주시는 '마음속에서 하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감각을 분석해서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또는 중성적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끼면 의기소침해지고 그러한 느낌을 싫어한다. 그러나 유쾌함을 느끼면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나 주시는 초연한 관점을 가지고 모든 감각들을 경험하도록 해서 감각의 농계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우리는 점차 거기에 단지 감각만이 있고 그 감각 또한 흘러가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감각을 느끼는 자아(주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념처의 세 번째인 마음에 대한 주시는 마음을 연구하는 중요성과 다양한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이 경우 다양한 생각들이란 모든 잘못된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악한 생각을 극복하는, 그 반대의 생각들을 말한다.
마음과 생각들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마음의 진정한 기능 즉 마음의 본질과 마음이 어떻게 무익하거나 유익한 행위를 위해 사용되는가 하는 마음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마음에 대해 주시하는 사람은 마음을 통제하게 되어 마음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마하 풋사(Maha Phussa) 장로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다. 그는 수행하면서 항상 자신의 생각을 주시했다. 걷고 있는 동안 악한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 는 걸음을 멈추고 악한 생각이 제거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그가 길을 잃어 버렸거나 도중에 무언가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주시를 함으로써 후에 번뇌가 사라진 사람인 아라한이 되었다. 이것은 옛 선인들은 특별히 명상 시간에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자신들의 생각들을 주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음에 대한 이러한 주시는 또한 소위 마음이라는 것이 동일하게 번하는 정신적인 요소들도 되어 있는, 늘 변하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고 거기에는 자아나 영혼이라 불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사념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은 붓다의 가르침인 모든 본질적인 법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법들의 대부분은 이 책에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경에서는 사념처의 각각을 묘사하면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 간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목표로 한 성과 즉 성실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의 성과물이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러한 높은 정신적인 삶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거듭해서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생에서 아니라면 미래의 다른 생에서 어느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력한 모든 사람들이 도달한 정상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생각을 심어라. 그러면 행위를 거둘 것이다. 행위를 심어라. 그러면 습관을 거둘 것이다. 습관을 심어라. 그러면 성격을 거둘 것이다. 성격을 심어라. 그러면 운명을 거둘 것이다. 성격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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