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송(頌)의 의미는
스님들 이야기는 재미있다. 속세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스님들의 일상은 ‘궁금증’의 대상인데, 스스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은 글을 보면 세간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물을 긷던 아낙과
스님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도 만들어 졌는데, 그런 이야기중에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다가 걷기 힘들어 하는 제자를 위하여 ‘방편’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경허스님’은 제자인 ‘만공스님’과 길을 걷다가 힘들어하자 제자를 위하여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아낙과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와같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이제 비판받기에 이르렀다.
최근 불교관련인터넷신문의 기사(“표본 삼아야할 한국의 스님상은 漢岩”
‘경허와 한암 비교 세미나’)서 한 목소리)에 따르면 지난 15일 ‘4회 한암사상연구원 학술회의’ 가 열렸는데, 이 때 한 발제자는 경허스님의 방편이 유교적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아낙이 목을 매달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같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일생이 망가져도 괜찮다는 방식은 수행자를 떠나 일반인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나라 일부스님들의 계를 무시한 일탈된 행동과 ‘막행막식’의 풍토가 경허스님의 무해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선사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경허스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최인호가 지은 소설 ‘길 없는 길’에서도 자세히 묘사한 경허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스님의 ‘오도송’으로 귀결된다. 천장사에서 수행정진 하던 중에 ‘콧구멍 없는 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읊었다는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문득 사람이 말하길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몰록 깨치니 삼천세계가 그대로 내 집일세.
유월이라 연암산을 내려오는 길에,
야인이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 오도송)
이 때 스님의 나이가 34세이었다고 한다. 스님이 깨달은 내용은 오도송으로 요약되지만 범부가 오도송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깨달음의 내용은 깨달은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선사들의 깨달음은 스승이 ‘인가’해 주어야만 깨달음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선종의 깨달음은 어떤 계기가 있어서 깨닫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매우 ‘상근기’에 속하는 수행자의 경우에 한한다고 한다. 깨치기 위한 화두를 들어 그 화두가 무르익었을 때, 누군가 지나가는 말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은 오직 선승들이나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경전상에 다 나와 있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불립문자로 전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문자로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선종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
선종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하여 바르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주관적인 깨달음’과 비록 문구로서 표현되어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하게 해주는 ‘객관적인 깨달음’은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가장 큰 차이라 보여진다.
선불교가 ‘불립문자’를 표방하다고 보니 오도송이 모두 다 다르고, 그 해석방법 또한 천차만별이고, 그에 따라 깨달음의 내용또한 모두 다른 것이 특징이지만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정형화’ 되어 있다. 그리고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최근 이웃블로거인 ‘후박나무님’은 자신의 글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 하였다.
깨달음은 크게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 사이에 사다함과 아나함이 있지만 ‘최초의 깨달음’과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으로 크게 대별된다는 것이다.
수다원의 깨달음이란
그렇다면 수다원의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 비구는 티끌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감탄의 말씀을 하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알아들었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상윳따 니까야 56 삿짜니까야 11,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꼰단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이 설하신 ‘사성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꼰단냐가 알아들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사성제를 이해하였다는 말과 똑 같다. 그리고 꼰단냐는 깨달았다고 ‘인가’하신 것이다. 그래서 꼰단냐는 ‘안냐-꼰단냐(Añña Koṇḍañña)’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꼰단냐가 깨달은 것은 결국 ‘연기법’이다. 그런 연기법의 특징은 무엇일까. 부처님이 다섯비구를 위하여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초전법륜경에서 설한 내용은 사성제와 팔정도인데, 꼰단냐가 최초로 깨달음으로서 법의 바퀴가 최초로 굴러가게 된 것이다. 그 법의 바퀴는 지금도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는데, 누구도 이 법의 바퀴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바퀴는 아무도 멈출 수 없다네”
지금 이 순간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였을 때 누군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법의 바퀴는 굴러가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라고 하였을 때 수긍한다면 역시 법의 바퀴는 굴러가는 것으로 본다.
또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저항 없이 받아 들인다면 법의 바퀴는 굴러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셀라여, 나는 이미 왕이네
담마의 최상의 왕이네
나는 담마의 바퀴를 굴리네
그 바퀴는 아무도 멈출 수 없다네.
(맛지마 니까야: 92 셀라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처럼 법의 바퀴는 한 번 굴러가면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은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고통에 관한 것이고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과 고통의 원인고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제시하였을 때 그 법의 바퀴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왔고, 고통이 남아있는한 앞으로도 계속 굴러갈 것이다.
도(道)는 무엇일까
꼰단냐가 사성제를 처음으로 이해하였을 때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은 바가 틀림없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꼰단냐를 칭찬하였는데, 그 때 꼰단냐가 깨달은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초전법륜경에 있는 것과 같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
이것이 꼰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진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진리는 ‘사성제’를 뜻한다. 따라서 꼰단냐는 사성제를 이해한 것이다. 사성제를 이해함으로 해서 수다원이 된 것이다.
위의 짤막한 한 줄짜리 게송을 ‘수다원의 오도송’ 또는 ‘수다원송’이라고 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선사들의 오도송처럼 각기 다른 내용이 아니라, 단지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경전상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제 부터 시작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성제를 이해 하였으니 다음단계는 ‘도(道)’를 닦아야 한다. 그런 도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도 하면 선승들의 ‘선문답’을 떠 올리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 또한 명확하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팔정도’를 말한다. 사성제에서 가장 마지막 부분인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 바로 팔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의 도성제가 바로 팔정도이다.
그런데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성제가 팔정도이고, 사성제가 팔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성제는 진리적 측면이고, 팔정도는 수행의 측면으로 설명된다.
‘구족계’를 받고
꼰단냐가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하여 사성제를 이해 하였다면 다음단계는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수다원이 된 꼰단냐에게 구족계를 주는 장면이 나온다.
“저는 부처님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를 원합니다.”
“오너라,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위하여 청정한 수행을 하여라.”
(율장 마하왁가 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처럼 꼰단냐는 깨달은 다음에 ‘구족계’를 받고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증득한 ‘열반’의 경지로 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을 할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팔정도 수행을 말한다.
결국 ‘괴로운 것’
그런 수행의 결과 이해한 차원에서 머물던 진리를 체험으로 알게 되는데, 그런 내용중의 하나가 ‘오온’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본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상윳따 니까야: 22 칸다상윳따,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해차원에서 머물던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라는 진리가 직접수행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받드시 무너지기 마련인데, 이런 무상한 것들은 결국 ‘괴로운 것’이라는 내용이다.
아라한송(頌)
지금 고통스런 것도 괴로운 것이지만,지금 행복하고 즐거운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아 괴로운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인 것을 수행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소멸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되는데, 그 순간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이는 수다원이 되는 첫번째 깨달음과 내용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렇게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되었을 때 아라한이 되는데, 그 때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images/dhammapada197_1024X768.jpg
이런 게송을 ‘아라한의 오도송’ 또는 ‘아라한송’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제자들의 한결같은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은 위와 같은 ‘정형구’라고 한다.
하지만 선사들의 오도송은 모두 다르다. 아마도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불립문자에 기반하여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結, saṃyojana)’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은 크게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오도송 또한 ‘정형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처님 제자들의 깨달음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스승이 깨달았다고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닌데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경전과 주석서, 아비담마에서는 깨달은 제자들의 특징에 대하여 열가지로 요약해 놓았다.
이는 스승이 인가해 주지 않아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면 누구나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結, saṃyojana)’라는 것이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와 오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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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수다원 (sotāpanna) |
사다함 (sakadāgāmi) |
아나함 (anāgāmi) |
아라한 (arahatta) |
참고 |
10 가지
족 쇄 |
1.유신견 ( sakkāya-diṭṭhi) |
풀림 |
풀림 |
풀림 |
풀림 |
거친마음의 족쇄 (오상분결) |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
풀림 |
풀림 |
풀림 |
풀림 | ||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 sīlabbata-parāmāsa) |
풀림 |
풀림 |
풀림 |
풀림 | ||
4. 감각적 욕망(탐심) (kāma-rāga) |
풀리지 않음 |
옅어짐 |
풀림 |
풀림 | ||
5. 적의(진심) (paṭigha) |
풀리지 않음 |
옅어짐 |
풀림 |
풀림 | ||
6. 색계에 대한 집착 (rūpa-rāga)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림 |
미세한 마음의 족쇄 (오하분결) | |
7. 무색계에 대한 집착 (arūpa-rāga)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림 | ||
8. 자만 (māna)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림 | ||
9. 들뜸 (uddhacca)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림 | ||
10. 무명 (無明 avijjā)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리지 않음 |
풀림 | ||
오도송 |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 |
없음 |
없음 |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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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11-06-20
수다원의 조건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중에 수다원이 되는 조건으로서 ‘유아견’과 ‘의심’과 ‘계금취’의 타파를 들 수 있다. 이 세가지 조건이 만족 되어야만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초기경전에서도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야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īlabbataṃ vāpi yadatthi kiñci, 시-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숫따니빠따의 라따나경-보배경, 10번 게송)
삭까야딧티(유신견), 위찌낏치딴짜(가르침에 대한 의심), 시랍바땅 (계금취)이 소멸되어야 성자의 무리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이렇게 수다원이 되면 4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여섯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경전에서는 일단 성자의 흐름에 들게 되면 머지 않아 해탈하여 열반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한번 수다원이 되면 그 길로만 죽 가면 된다. 그래서 최대 ‘일곱생’이내에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하게 될 것이라 한다.
한 번 수다원이면
하지만 수다원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감각적욕망과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표에서와 같이 욕망(4)과 성냄(5)과 어리석음(10)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요소가 악처로 이끌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때에 따라 잘못을 할 수도 있다. 또 다음 생에 태어 났을 때 전에 자신이 수다원인줄 모르고 사는 경우도 있거나 타 종교에 귀의하여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수다원인 것을 알면서도 이를 피하기 위하여 유일신교로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크게 뉘우치고 참회하여 본래의 길로 갈 것이라는 뜻이 경전에 쓰여 있다.
Kiñcāpi so kammaṃ karoti pāpakaṃ 낀짜-삐 소 깜망 까로띠 빠-빠깡
Kāyena vācā uda cetasā vā 까-예나 와-짜- 우다 쩨따사- 와-
Abhabbo so tassa paṭicchādāya 아밥바 소 땃사 빠띳차-다-야
Abhabbatā diṭṭhapadassa vuttā, 아밥바따- 딧타빠닷사 웃따-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감추지 못하니,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숫따니빠따의 라따나경-보배경, 11번 게송)
사성제의 진리를 꿰뚫어 본 제자는 설령 일시적으로 몸과 마음과 입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것이 악처로 인도할 정도로 큰 것이 아니기에 해탈과 열반의 길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샛말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과도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오도송은 왜 없을까
흔히 “열반이 무엇이냐”라고 말을 할 때 탐진치의 소멸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도표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표에서 감각적 욕망(4)은 ‘탐심’을 말하고, 적의(5)는 ‘성냄’을, 무명(10)은 ‘어리석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표에서와 같이 ‘아나함’이 되어만 없어 질 수 있다. 사다함의 단계는 단지 옅어질 뿐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수다원과 아라한의 오도송은 있지만, 사다함과 아나함의 오도송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데 이 두단계의 성인에게는 특별한 오도송이 없다. 왜 일까? 그것은 이들이 소멸시킨 감각적 욕망과 적의라는 두 가지 족쇄가 '닦아서 없애는 번뇌(수혹)'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은 무지처럼 단번에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번뇌들은 닦음을 필요로 하고 닦음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닦음으로서 성취되는 일래자와 불환자는 견도,수도,무학도중에서 수도의 단계에 해당한다.
후박나무님은 사다함과 아나함의 오도송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닦아서 없애는 번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단계를 ‘수도(修道)’라 하였다. 그리고 수다원의 단계를 ‘견도(見道)’, 아라한의 단계를 ‘무학도(無學道)’라고 하였다.
견도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는 깨달음에 대한 ‘수다원송’이 나올 수 있고, 아라한의 경우 수도단계를 지나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에 대한 ‘아라한송’이 나올 수 있지만, 도를 깨치는 과정에 있는 사다함과 아나함의 경우 즉각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서 오도송이 없다고 한다.
재가자도 수다원이 될 수 있다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 욕망(4)과 적의(5)가 소멸되어 ‘불환자’가 된다. 죽으면 색계 ‘정거천’에 태어나 열반에 들기 때문에 다시 이 욕계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환자가 되면 모든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부부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한 것이 법구경의 ‘담마딘나’비구니이야기에 등장하는 남편 ‘위사까’일 것이다.
하지만 수다원의 경우 표와 같이 감각적욕망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가자중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왓차여, 나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kāmabhogino),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들이고, 의심에서 벗어나, 의혹을 제거했고, 두려움 없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우바새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많다.”
(맛지마니까야, 왓차곳따경-Vacchagotta sutta, M73)
경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은 ‘재가불자’를 뜻한다. 재가불자들이 감각적욕망을 수용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수다원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수다원이 수백명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하였다.
하지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여 아나함이 되었다면 모든 감각적욕망(탐심), 적의(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부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나함이 된 위사카는 부인을 불러 놓고 모든 재산을 다 가져가라 하고, 거기에 덧붙여 시집까지 갈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우리나라에서 깨달음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게 이야기 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깨달음지상주의’가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깨달음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열반’을 추구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보고 있다. 즉 깨달음에는 수다원의 깨달음에서 부터 아라한의 깨달음까지 단계가 있는데, 비평가들은 그것을 모두 깨달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대혼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견도, 수도, 무학도로 구분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견도, 수도, 무학도
구 분 |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
깨달음 |
수다원의 깨달음 |
- |
아라한의 깨달음 |
열반 |
- |
- |
아라한의 열반 |
과정 |
꼰단냐의 깨달음 |
사다함. 아나함 |
아라한의 깨달음과 열반은 동의어 |
탐진치 |
탐진치 남아 있음 |
탐욕과 성냄이 소멸되는 과정 |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 |
표와 같이 꼰단냐가 깨달은 것은 수다원의 단계이다. 이는 10가지 족쇄에서 작으나마 탐진치가 남아 있다. 이런 단계가 도를 본다는 뜻의 ‘견도(見道)’단계이다. 사다함과 아나함은 탐진치가 소멸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수도(修道)라 하고,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되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하여 무학도(無學道)의 단계라 한다.
그래서 무학도의 단계는 ‘깨달음이 동시에 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은 ‘깨달음 따로’ ‘열반 따로’ 인것으로 말하고, 한국불교는 깨달음지상주의에서 이제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깨달음에 대하여 수다원의 깨달음으로 이해한다면,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의 불교가 되어야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깨달음과 열반이 동의어가 되는 무학도의 경우 깨달음과 열반을 따로 분리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혼란이 일어난 배경으로서 경전만 옳다고 하는 주장인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 이는 주석서를 등한시 하는 결과로 보는 것이다.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열가지족쇄의 표처럼 도표화 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음까지 89가지라 하여 도표화 하고 있는데,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공부가 경전과 논장과 주석서를 모두 활용해야 제대로 된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번생에 발판이라도
부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복’을 위해서 부처님을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성불’하기 위하여 불교를 믿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부처님이 가신 그 길로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길은 부처님이 이미 가신 길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길로 죽 가기만 하면 된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차의 핸들만 잡으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따로 길을 찾을 필요없이 부처님의 가르침만 따르면 되는데, 가장 첫 번째 단계가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흐름에 들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마치 벽돌을 쌓듯이 차근 차근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도에 이르는 것도 단계가 있고,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가르침의 종착지라 볼 수 있는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불자들이라면 당연히 수다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감을 말하는데, 과연 나 자신을 버릴 수 있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열반으로 인도한다는데 “정말 그럴까?”하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있는지, 잘 못된 수행방법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탐진치에 절어사는 범부들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생에 수다원이 못 된다면 수다원이 되기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준수다원(cula sotāpanna, 쭐라 소따빤나)’이라고 하였다.
준수다원을 ‘작은 수다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최소한 ‘원인과 결과의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원인없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창조론, 우연론, 숙명론등을 배격한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의 지혜를 갖춘자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발판을 갖춘자’ 또는 ‘태어날 곳이 정해진 자’라고 하였다. 여기서 발판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음 생에 수다원이 될 조건을 말하고, 태어날 곳이 정해졌다는 것은 더 이상 악처(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떨어지지 않을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 수다원이 되지 못할지라도 수다원이 되기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하지 않을까.
2011-06-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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