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조선의 수행 - 지관타좌(只管打坐)
묵조선 수행은 본증을 자각하는 방식으로 좌선이 근본이다. 이 본증자각이 터득된 방식이 곧 좌선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속에서 번뇌와 분별을 여읜 작용으로 현성하는 것이 비사량의 심리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좌선은 단순히 앉음새만의 형태가 아니라 전시각(全是覺)의 현성으로서의 좌선이다.
당연히 가부좌로서의 몸의 자세[只管打坐]와 함께 자각으로서의 마음의 자세[非思量]이다. 그래서 가부좌라 해도 두 다리를 겹쳐 앉는 몸의 형식으로서의 앉음새만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의 형식에 이르는 가부좌이다.
묵조선의 수행은 좌선이다. 곧 가부좌의 수행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묵조선 수행의 전부이다. 곧 지관타좌이다. 바로 그 가부좌는 수행의 형식이면서 본증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부좌는 묵조선의 수행의 형식임과 동시에 깨침의 내용이다. 이와 같은 가부좌는 언제나 자각된 가부좌이다. 따라서 묵조선에서의 가부좌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가부좌의 첫째 의의는 앉음새의 형식이다. 형식을 떠나서는 좌선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형식을 떠난 좌선이란 단순한 형이상학의 철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묵조선에서의 좌선은 달리 지관타좌라고도 한다.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가 좌선이고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현성으로 간주된다.
좌선의 형식에 대해서 여러 <좌선의(坐禪儀)>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비단 초심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자의 경우야말로 그 숙련의 경지가 올곧게 좌선이라는 형식으로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이것을 불법즉위의(佛法卽威儀)라 하였다. 이 좌선의 가부좌라는 형식은 좌선의 실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실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앉지 않고 깨침을 얻는다든가 좌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3세제불이 와서 설법한다 해도 혀끝의 희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천을 무시하고는 어떤 선종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묵조에서의 좌선은 묵(默)과 좌(坐), 조(照)와 선(禪)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라서 좌선이라는 앉음새 자체가 묵조이다.
다음 가부좌의 둘째 의의는 관조하는 것이다. 단순히 앉아서 묵묵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앉아 있되 이 묵좌는 3천대천세계에 두루하는 묵좌이다. 곧 조(照)가 수반되는 묵(默)이고 좌(坐)가 수반된 묵(默)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묵(默)과 조(照)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하여 조중실묵편견침릉(照中失默便見侵凌)이라 하였다. 곧 묵조의 좌선에서 조(照)가 묵(默)을 상실한 조(照)라면 그 조(照)는 허상으로서 사마(邪魔)와 같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위의 조중실묵(照中失默)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보경삼매(寶鏡三昧)에서 말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침릉(侵凌)은 사마(邪摩)가 얼굴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묵좌(默坐)는 묵조(默照)의 좌(坐)이지 단순한 침묵만의 좌(坐)가 아니다. 이것은 몸의 좌(坐)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좌(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첫째 형식은 여기에서 바로 내용의 관조(觀照)로 이어진다. 관조가 없는 형식의 좌(坐)는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묵중실조혼성잉법(默中失照渾成剩法)이라 하였다. 곧 이 묵중실조혼성잉법(默中失照渾成剩法)은 앞의 조중실묵편견침릉(照中失默便見侵凌)한다는 것과 같은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곧 묵조 가운데에서 조(照)가 없는 묵(默)이라면 그것은 바로 대혜종고가 비판한 묵조사선(默照邪禪)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묵(默)과 조(照)의 좌선에서 묵(默)과 조(照)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묵조에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중실묵과 묵중실조(默中失照)는 좌선에 있어서 서로 완전한 방제(傍提)의 관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좌선에 있어서 묵(默)과 조(照)가 일합(一合)하게 되면 수(修)와 증(證)의 합일이 나타난다.
이것은 가부좌의 형식이 그 내용으로서의 관조에까지 이르른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정전(正傳)의 삼매에 안주하여 곧 위없는 깨침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가현각이 말하는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가부좌의 셋째 의의는 묵조가 완전의 작용으로 현성된 모습이다. 완전이란 본래 조동종의 조산본적의 접화방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산은 바로 8요현기(八要玄機)라는 것을 통해서 교화를 폈다. 이 8요현기라는 것은 조산에게 있어서 여덟 가지의 현묘한 기관을 의미한다.
기관은 공안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공안의 체계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여덟 가지의 현묘한 기관에 대하여 조산은 회호(回互), 불회호(不回互), 완전(宛轉), 방참(傍參), 추기(樞機), 밀용(密用), 정안(正按), 방제(傍提) 등을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완전은 피(彼)와 차(此)가 회호하기도 하고 불회호하기도 하는 자유자재의 경지로서 피(彼)는 피(彼)이면서 동시에 차(此)이고 차(此)는 차(此)이면서 동시에 피(彼)가 되는 도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묵(默)과 조(照)의 완전이란 가부좌의 형식으로서의 의의와 내용으로서의 관조라는 의의가 완전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묵(默)과 조(照)가 상대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상대성을 뛰어넘은 입장으로 바뀌며 분립(分立)의 입장에서 전일(全一)의 입장으로의 사고전환이다.
전일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아직보지 못한 대활저(大活底)의 현성(現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법의 자기에 투철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본래면목의 자각이며 본지풍광(本地風光)에의 체험으로서 하등의 새로운 곳을 밟아가는 것이 아니다. 본가(本家)에로의 귀향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특별한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엄밀하게 존재한다고 규정해 버리면 깨침은 필연성이 아니라 목적성이 되어 버린다. 가부좌는 본래의 자기가 현성하는 것일 뿐이다. 일상의 모든 사사물물이 다 가부좌의 구조 속에서 본래의 자기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주변의 어느 것 하나 가부좌의 현성 아님이 없다. 그래서 가부좌는 부단한 깨침의 체험으로 연속되어 간다. 과거의 깨침의 체험과 미래의 깨침의 체험이 따로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의 깨침이다. 깨침에 전후가 없다.
전일적인 입장이라서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서의 고매한 깨침과 진리를 통한 각자의 입장에서의 일상적인 깨침에 구분이 없다. 여기에서는 벌써 돈오점수가 문제되지 않는다. 일체처 일체시가 깨침의 현현이므로 미오(迷悟)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으므로 깨침의 횟수가 없다.
묵조의 완전이 가부좌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깨침의 다른 이름이다. 깨침은 일회성의 특수경험과 동시에 그 이후의 생활경험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에 더욱더 묘용을 발휘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가부좌의 완전한 작용이고 가부좌의 일상성이다.
다음 가부좌의 넷째 의의는 수행과 더불어 깨침의 의의를 함께 나타내준다. 굉지는 이에 대하여 오가저사중규중구(吾家底事中規中矩)라 하여 가부좌의 의의를 묵조의 속성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곧 묵조의 가풍은 목전의 당사(當事)를 중시하는 것이라 하여 묵조의 가풍이 주도면밀함을 중규중구(中規中矩)라 말한다.
그래서 묵(默)으로서는 구(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조(照)로서는 규(規)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규(規)와 구(矩)는 묵(默)과 조(照)이고, 정(正)과 편(偏)이며, 공(功)과 덕(德)이요, 진여와 수연(隨緣)이다. 이것이야말로 가부좌를 통한 묵조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구원의 본증임을 설파한 말이다.
일체의 양단을 떠나 있어서 묵(默)의 근본인 추기(樞機)에만 떨어지지도 않고, 조(照)의 작용인 방참(傍參)으로만 현성하지도 않는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의 완전이다. 이것은 가부좌가 지니고 있는 깨침의 속성이 일상성과 함께 지속성임을 말한다.
가부좌 자체는 곧 깨침의 현성으로서 깨침을 증상(證上)의 수행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부좌의 모습은 깨침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행하는 좌선수행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그대로 깨침의 현현으로서 나타난 몸의 구조이고 마음의 구조이다. 이러한 가부좌야말로 묵조가 나타내는 일상성이고 본증성이다.
그래서 굳이 깨침을 얻으려고 목적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의 필연성이 구현되어 온다. 그래서 올바른 수행은 올바른 가부좌이고, 올바른 가부좌는 올바른 수행이며,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깨침이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작용이므로 일시좌선은 일시불(一時佛)이고 일일좌선(一日坐禪)은 일일불(一日佛)이다. 즉 좌선즉불(坐禪卽佛)이요, 불즉좌선(佛卽坐禪)이다. 이것이 지관타좌로서의 가부좌가 나타내는 본래 의의이다.
<묵조선의 본질과 그 수행의 원리/ 김호귀 동국대 외래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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