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참단계(공부단계)
화두의 결택 단계
화두란 무엇인가?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참선이란 조사의 관문을 뚫는 것이다. 묘한 깨달음은 모든 생각의 길을 끊어야 한다.
조사의 관문이 뚫리지 않고 생각의 길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대는 풀잎이나 덤불에 붙어사는 허깨비나 다름없다.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 『無門關』
조사가 되려면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어진 조사의 관문을 뚫고나가야 한다. 선에서는 이러한 조사관을 화두話頭라고 한다. 화두라는 꽉 닫힌 문 없는 관문을 뚫고나간 뒤라야 생사를 벗어나 조사가 될 수 있다. 이 조사관을 뚫지 못하면 홀로 우뚝 서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허깨비 인생을 살게 된다.
화두, 공안의 정의
화두라는 말의 ‘화話’란 말 또는 이야기라는 뜻이며 ‘두頭’란 접미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화두란 그저 ‘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선사들이 쓰는 특별한 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화두란 모든 사유와 분별의 통로를 막는 선사들의 독특한 언어이다.
이러한 말은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화두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유 분별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화두를 일상적인 격을 벗어났다 하여 격외어格外語라 한다.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 붙을 수 없는 절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있다·없다, 나다·너다, 가다·오다, 좋다·나쁘다 이런 식의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무엇이 진리냐?” 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다” “마른 똥막대기다”라고 대답하는 격외어는 상대적인 말을 초월한 절대적인 말이다. 이것은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도 끊어진 진짜 말이다. 이러한 화두를 바로 깨달으면 된다.
‘화두’할 때의 ‘두’는 단순한 접미사로 쓰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화두는 ‘말 머리’라는 뜻으로 말이 나오기 이전의 세계를 일컫는다. 화두에 대한 이러한 정의도 일상적인 말 이전의 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화두는 스승인 선지식이 제자에게 제시한 것으로 제자는 이 화두를 들고 한바탕 생사를 건 씨름을 해야 한다.
화두를 공안公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모두 같은 뜻이다. 공안도 공과 사를 초월한 공公, 고칙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고古, 화두도 말을 초월한 말話이다. 다시 말하여 고칙이란 공정한 법칙, 고덕古德들이 인정한 법이다. ‘말씀으로 된 법칙’이요 ‘옛 조사들의 법칙’이다. 그것은 공정하므로 추호도 분별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공公이라 한다. 그 법에 따라 정진하면 반드시 견성할 수 있다. 공안이란 그렇게 양변을 초월한 법에 따라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표준안(案)’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렇듯 공안은 참선 수행에서 절대적인 규범과 판단의 기준이다.
이러한 화두·공안·고칙을 통하여 바로 깨달으면 된다. 그런데 보고 깨치라고 제시하는데도 못 깨치니 어쩔 수 없이 화두를 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도 깨치는 방법이니 그냥 놔두는 것이다. 화두는 그냥 의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고봉 선사는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라고 했다. 숙맥은 콩하고 보리도 못 가르는 사람, 노낭은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를 못 가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숙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한 칙의 화두를 들어 그대들로 하여금 바로 깨닫도록 해도 벌써 오물을 뿌려 그대들의 머리에 붙이는 격이며, 설령 머리털 하나를 집어 들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한순간에 밝히더라도 좋은 살결에 흠집투성이를 만드는 꼴이 된다. 비록 이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바로 이 경지에 실제로 도달해야만 한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그나마 남의 말을 훔쳐서 꾸미지 말고, 모든 분별을 끊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살펴보라. 진실로 이렇게 함에 그대가 분별을 짓거나 의혹을 짓는 것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擧一則語 敎汝直下承當 早是撒屎著?頭上也. 直饒拈一毛頭 盡大地一時明得 也是?肉作瘡. 雖然如此 也須是實到者箇田地. 始得 若末 且不得掠虛 却須退步 向自己根脚下 推尋看 是什?道理. 實無絲髮許 與汝作解會 與汝作疑惑. - 『雲門廣錄』 卷上. 大47
화두의 생명
선은 철저히 상대적 개념의 세계를 떠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화두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때부터 의심해 들어가게 된다. 왜냐 하면 앞서 말했듯이 화두에는 이성의 사유작용이 따라 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풀려지지 않은 미궁과도 같다. 무문 선사의 말씀대로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모색할 흔적과 자취조차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 ?~902) 선사는 말한다.
그대들은 영양을 찾는 사냥개가 영양의 발자취만 �아 헤매는 꼴과 같다. 만약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면 사냥개는 영양의 발자취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양의 숨소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영양이 뿔을 가지에 걸고 숨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6 곱하기 6은 36이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종적이 없다는 뜻을 모르는가?”
汝等譬如獵狗 但尋得有?跡底. 若遇羚羊掛角時 非但不見?跡 氣息也不識. 僧便門. 羚羊掛角時 如何. 答曰 六六三十六. 曰 會?. 僧曰 不會. 曰 不見道無?跡. - 『禪林寶僧傳』 권6 『道膺傳』 卍137
이렇게 화두를 들 때는 종적조차 없어 생각으로 모색할 길이 완전히 끊어져야 한다. 여기서 사냥개는 각종 관념과 사유의 자취를 더듬으며 분별하는 인식 작용에 비유한 것이다. 간화선 수행의 핵심은 말과 생각의 자취가 끊긴 화두를 참구하여 종적이 사라진 곳에서 자유자재 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는 참선 수행자에게 모든 사유의 길을 끊게 하고 몸과 마음을 의심의 열기로 가득 차게 하여 마침내 그 의심의 둑이 툭 터지는 경지로 이끌어 준다. 이쪽도 허용하지 않고 저쪽도 허용하지 않고 부정해서도 안 되고 긍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 화두 수행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것을 배촉背觸이라 한다. 조사관을 배촉관背觸觀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이렇듯 화두를 들면 온 천지가 하나의 의문덩어리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한다.
화두를 들 때는 평소에 영리하고 총명한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헤아려 분별하면 십만 팔천 리도 아직 먼 곳이 아니다.
看時 不用將平昔 聰明靈利. 思量卜度 擬心思量 十萬八千 未是遠. - 『書狀』 答徐顯模 雉山
화두는 의식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 알음알이의 한자말은 지해知解이다. 우리나라 절의 일주문에는 보통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일주문을 들어설 때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야 한다. 비단 일주문에 들어설 때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그 의미를 간직하고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몰입하고 나아가 그 화두와 하나가 되어 마침내 화두를 타파했을 때 활발발한 한 소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사관을 타파해야 온 천하를 홀로 거니는 대장부가 될 수 있다. 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대도는 문이 없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으리라.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 『無門關』 自序
지도자의 역할
간화선에서 스승의 역할과 지도방법
선 수행에서 스승의 역할이란 한 수행자의 생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선문에서 바른 공부 방법은 발심한 뒤에 스승을 찾아가 법을 묻고 그 법에 대한 참구 과정을 통해 의단을 풀고 다시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스승은 제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며 제자를 바르게 이끌어주다가 근기가 익었을 때 깨달은 바를 시험하고 그 안목을 일깨우는 법거량을 하여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발심이 사그라질 조짐이 보이면 문답을 통해 다시 발심을 불러일으킨다. 몽둥이를 휘두르고 고함을 쳐서라도 제자의 공부를 점검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제자가 화두 수행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적절한 가르침을 베풀어 다시 화두를 간절하게 참구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렇게 스승은 제자가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발심이 지속되고 있는지, 제대로 공부 길을 가고 있는지, 깨달음이 확실한지 등을 점검하여 제자를 마지막으로 인가까지 해 주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가 화두를 들면서 어디엔가 매달리고 의지하면서 조금이라도 분별을 내면 그 분별의 근거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그것을 박탈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스승은 제자가 어떤 분별과 미세한 알음알이에도 속지 않도록 화두를 들고 은산철벽에 들어가게 이끌어 준다. 그러다가 적절한 기연으로 오도悟道의 계기를 마련해 주며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 제자에게 법을 전한다.
『벽암록』에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어록에 등장하는 경청鏡淸 선사는 후학들에게 근기에 따라 법을 열어 보여주는 방법으로 ‘줄탁茁啄’이라는 방법을 썼다. 이 줄탁이란 줄탁동시茁啄同時를 말한다. 줄茁이란 병아리가 밖으로 나올 때가 다 되어 알 속에서 톡톡 쪼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탁啄이란 어미 닭이 병아리를 맞기 위해 껍질을 쪼는 것이다. 병아리의 줄과 어미 닭의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는 알에서 ‘탁’하고 깨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선수행에서 대단히 중시하는 부분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이 성숙해가는 제자를 스승이 빈틈을 주지 않고 지도하여 마침내 깨침의 세계로 인도할 때 깨달음의 ‘줄탁동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벽암록』을 보자.
무릇 수행자는 반드시 줄탁동시의 눈을 갖추고 줄탁동시의 이치를 잘 쓸 줄 알아야 납승이라 할 수 있다. 어미가 밖에서 탁하고 쪼아줄 때 새끼는 톡하고 응대해야 하며, 새끼가 안에서 톡하고 쪼을 때 어미는 밖에서 탁하고 쪼아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줄탁의 기연은 모든 고불古佛의 가풍인 것이다.
大凡行脚人 須具?啄同時眼 有茁啄同時用 方稱衲僧 如母欲啄 而子不得不? 子欲? 而母不得不茁 … 所以茁啄之機 皆是古佛家風. - 『碧巖錄』 제16칙.
어미 닭은 스무하루 쯤 정성껏 알을 굴려가며 따뜻한 체온으로 알을 품는다. 그러다가 알의 체온이 어미 닭과 하나가 될 때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부리로 알을 쪼아댄다. 바로 이 순간 어미 닭은 밖에서 껍질을 톡톡 쳐 준다. 만약 이 때 어미닭이 알 품기를 게을리 하면 알이 곯는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이렇게 서로가 한 마음으로 일체가 되어야 병아리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이렇게 서로 내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서 공부하고 마음을 내 보이고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은 화두에 대한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은 제자를 정성스레 품어준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어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제자의 마음을 싸고 있던 무명의 껍질이 ‘툭’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부처님처럼 연꽃을 들어 보일 때 제자가 가섭 존자처럼 미소로써 화답하는 감격적인 이심전심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자리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전 우주가 충격에 쌓일 정도로 긴장과 전율이 감도는 순간이다. 이것은 화합과 일치, 존경과 믿음, 자비와 간절한 마음이 교통하는 스승과 제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시간 밖의 시간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이 피어나는 순간으로 그 꽃이 피어날 때 온 우주도 함께 피어난다.
물론 역대 선지식들이 모두 이 줄탁의 방법으로만 제자를 지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는 이러한 줄탁동시의 방법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야만 제대로 된 공부라 하겠다. 이것이 바른 공부 길이다.
깨달음의 세계
점검과 인가
스스로 공부를 점검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공부 점검은 선지식에게 받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사정이 마땅치 못할 때는 조사어록에 실려 있는 기준에 따라 스스로 점검해 보는 방법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결코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하며 자기 공부에 대해 냉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자세만 확고하다면 조사 스님들의 어록에 따라 자기 공부의 옳고 그름과 깊고 낮음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혜 선사의 『서장』, 태고 선사의 『태고어록』, 나옹 선사의 『나옹어록』, 그리고 서산 선사의 『선가귀감』 등에 나와 있는 점검법을 소개한다. 선지식을 모시고 수행할 수 없는 수행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공부를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서장』에서 말하는 공부 점검법
『서장』에서 대혜 선사는 여러 가지 공부 점검법을 제시하고 있다. 선사는 한 거사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늘 다음 사항을 점검해 보라 했다.
① 유유히 한가롭게 소요 자재할 때에 온갖 마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가(不審 燕處悠然 放曠自如 無諸魔撓否).
② 행주좌와 일상생활 속에서도 화두가 잘 들리는가(日用四威儀內 與狗子無佛性話 一如否).
③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헤아려 분별하지 않을 수 있는가(於動靜二邊 能不分別否).
④ 꿈꿀 때와 깨어 있을 때가 일치하는가(夢與覺合否).
⑤ 이理와 사事가 회통되는가(理與事會否).
⑥ 마음과 경계가 모두 한결같은가(心與境皆如否).
-『서장書狀』 』답유보학答劉寶學』
태고 선사와 서산 선사의 공부 점검법
서산 선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태고 선사의 공부 점검법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일상에서 자신의 공부 정도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자기 점검법으로 수행자들은 스스로의 수행 향상을 위해 이것을 점검 기준으로 삼아 나날이 자기 공부를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①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還知四恩深厚?).
(여기서 네 가지 은혜란 부모, 나라, 스승, 시주의 은혜를 말한다.)
② 지수화풍 사대로 된 더러운 몸이 순간순간 썩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還知四大醜身 念念衰朽?).
③ 사람들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달려있는 줄을 아는가(還知人命 在呼吸?).
④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서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生來値遇佛祖出世?).
⑤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聞無上法 生希有心?).
⑥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不離僧堂守節?).
⑦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不與隣單 雜話?).
⑧ 분주하게 시비나 일삼고 있지 않은가(切忌鼓扇是非?).
⑨ 화두가 어느 때에나 또렷또렷하여 어둡지 않는가(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
⑩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對人接話時無間斷?).
⑪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화두가 한결같이 한 조각을 이루는가 (見聞覺知時 打成一片?).
⑫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返觀自己 捉敗佛祖?).
⑬ 이생에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룰 수 있겠는가(今生決定續佛慧命?).
⑭ 앉고 눕고 편안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
⑮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此一報身 定脫輪廻?).
모든 경계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當八風境 心不動?).
이 몸을 이생에 건지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건질 것인가(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서산 스님이 소개한 점검 사항 이외에도 태고 선사는 다음을 더 제시했었다.
① 상중하의 자리를 불문하고 서로 공경하는가(上中下座 互相恭敬?).
② 남의 허물을 보거나 남의 허물을 말하지는 않았는가(不見他過不說他非?).
그리고 아래 사항을 스스로 점검해 보기 바란다.
① 정견이 바르고 확고하게 섰는가.
② 수행과 삶이 일치하고 있는가.
③ 화두에 대한 신념이 날로 증장되고 있는가.
④ 물질에 대한 욕구가 조복되어 가고 있는가.
⑤ 확철대오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서있는가.
⑥ 결제 해제 없이 항상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가.
⑦ 시비심과 승부심이 날로 적어지고 있는가.
나옹 선사의 공부 점검법
나옹 선사는 공부의 점검을 열 가지 단계로 나누어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이다. 공부를 열 단계로 나누어 점검한 것이다. 이를 구성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색초월聲色超越, 하개정공下介正功, 정숙공正熟功, 타실비공打失鼻孔, 의식불급意識不及, 오매항일寤寐恒一, �지경절?地更折, 수연응용隨緣應用, 요탈생사要脫生死, 지거처知去處 등의 열 단계를 순차적으로 물어 그 수행의 단계를 평가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부 점검은 단계별로 자신의 수행 정도를 판단할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를 벗어날 수 있는가(盡大地人 見色不超色 聞聲不越聲 作魔生超聲越色去).
② 이미 소리와 모양에서 벗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그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旣超聲色 要須下功 作魔生下?正功).
③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旣得下功 須要熟功 正熟功時如何).
④ 공부가 익었으면 나아가 자취를 없애야 한다. 자취를 없앤 때는 어떠한가(旣能熟功 更加打失鼻孔 打失鼻孔時如何).
⑤ 자취가 없어지면 담담하고 냉랭하여 아무 맛도 없고 기력도 전혀 없다. 의식이 닿지 않고 마음이 활동하지 않으며 또 그 때에는 허깨비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줄 모른다. 이쯤 되면 그것은 어떤 경계인가(孔打失 冷冷淡淡 全無滋味 全無氣力 意識不及 心路不行時 亦不知有幻身在人間 到這裏 是甚時節)
⑥ 공부가 지극해지면 동정動靜에 틈이 없고 자나 깨나 한결같아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없어져도 잃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포기하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나니, 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가(動靜無間 寤寐恒一 獨不散蕩不失 如狗子見熱油?相似 要?又?不得 要捨又捨不得時 作?生合殺).
⑦ 갑자기 백이십 근 되는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아 단박 꺾이고 단박 끊긴다. 그 때는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인가(驀燃到得如放百二十斤擔子相似 ?地更折 曝地便斷時 那?是?自性).
⑧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본래 작용은 인연을 따라 맞게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본래의 작용에 맞게 쓰이는 것인가(旣悟自性 須知自性本用 隨緣應用 作?生 是本用應用)
⑨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벗어나야 하는데, 안광이 땅에 떨어질 때에(죽을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旣知性用 要脫生死 眼光落之時 作?生脫).
⑩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는 각각 흩어지니 어디를 향해 가는가(旣脫生死 須知去處 四大各分 向甚處去).
이렇게 『서장』이나 『태고어록』,『선가귀감』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자신의 수행을 점검해 볼 수 있고, 나옹 선사의『공부십절목』에 따라 공부를 단계별로 점검할 수가 있다.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가?
화두를 타파하여 깨치게 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고 하늘에 백천 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그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도 없고, 친소도 없고, 시비도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또 모든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에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된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내게도 남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우며, 모든 순역 경계에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 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전히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급해 놓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혜 선사는『서장』에서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확철대오하면 가슴 속이 환히 밝음이 마치 백천의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요달하며 가는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으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된다. ……모름지기 당사자가 스스로 볼 수 있고 깨칠 수 있다면 자연히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도리어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
廓徹大悟 胸中皎然 如百千日月 十方世界 一念明了 無一絲毫頭異想 始得與究竟相應. … 須是當人 自見得自悟得 自然不被古人言句轉 而能轉得古人言句. - 『書狀』
이렇듯 깨치면 환하게 밝아진다.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정확하고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불안해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고 앉는 자리 자리마다 완성된 삶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인다. 또한 홀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 이것을 독탈무위獨脫無爲라고 한다. 그는 의존할 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대혜 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의 본래면목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바른 깨달음이며 이 무심무념의 경지가 바로 견성성불이라 하였다. 그는 깨달은 사람을 대요사인大了事人이라고 했다. 대요사인이란 모든 일과 현상을 남김없이 요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오 선사는 이 대요사인의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 이르러 근원을 사무쳐 꿰뚫으면 흘연히 본체가 허공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지라 삼라만상도 그것을 가두지 못하고 성인과 범부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한다. 언제나 남김없이 드러나고 어디서나 숨김없이 드러나니 본래면목이 바로 이것이며 본지풍광이 바로 이것이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것이니, 오는 시간이 다하도록 깨달은 이를 얽어 멜 생사윤회가 어떻게 있겠는가? 이와 같은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가르침은 참으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거뜬히 실증하게 된다. 본래의 현묘한 마음을 바로 꿰뚫으면 옛과 지금을 꿰뚫어 담연히 움직이지 않으니 만년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만년이다. 영원히 세어나감이 없이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뒤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을 가리킴에 자성을 보고 바로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대도를 체득한 이는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이다. 그러니 만 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 마치 바보 같고 천치 같으나, 문득 일에 부딪치면 회오리바람 돌고 번개치듯 하여 깨달음의 기틀에 합당치 않음이 없다.
到一念不生處 透徹淵源 忽然自得 體若虛空. 莫窮邊量 亘古亘今 萬像羅籠不住 凡聖拘碍不得 淨裸裸赤灑灑 謂之本來面目 本地風光. 一得永得 盡未來際 更有甚生死 可爲滯碍. 此箇無心境界 無念眞宗 要猛利人 方能著實. 直透本來妙心 亘古亘今 湛然不動 萬年一念 一念萬年. 永無?漏 一得永得 無有變易 乃謂之直指人心 見性成佛. 得道之士 徹證無心 雖萬機頓赴 豈撓其神干其慮哉. 只守閑閑地 如痴似兀 及至臨事 風旋電轉 靡不當機. - 『圓悟心要』
깨달은 이는 허공과 같아 어떤 사물도 그를 가두지 못한다. 깨달은 이는 범부에도 성인에도 구속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이렇게 깨달음은 크나큰 자유로 어떤 경계에도 구속 받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마음이 쉬고 무심한 일 없는 도인인지라 만 가지 일들이 함께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인은 일이 없는 세상 밖에서 노니는 한가한 신선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은 이는 그 한가한 마음, 일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바르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는가?
간화선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이다. 간화선 수행의 목적은 깨달아 생사를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실현하는데 있다.
예부터 재가자로서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록을 보면 방거사龐居士를 비롯해 벼슬살이했던 백낙천, 배휴, 소동파 같은 이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은 재가자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설浮雪 거사 같은 분이 재가자로 깨달음을 얻은 대표적인 분이다. 『설봉어록』을 보고 깨달은 청평거사 이자현은 춘천 소양강변 오봉산에 문수원(文殊院, 청평사)을 세우고 이곳에서 좌선 수행을 지도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 간화선이 소개되고 진각 선사나 보우 선사, 나옹 선사가 활동하던 시절에 그 분들의 문하에서 간화선을 참구하고 법을 청하는 재가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방거사(?~808)는 마조 선사의 재가 제자로 성은 방龐씨이고 이름이 온蘊이다. 거사는 원래 큰 부자였다고 한다. 어느 날 거사는 “집문서 땅문서는 물론 집에 있는 온갖 보석들을 동정호洞庭湖에 버리겠다”고 부인과 딸 앞에서 선언했다. 그러자 딸이 묻는다.
“아버님,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버리시려 합니까?”
“재산은 탐욕을 부른다. 그러니 재산이 원수가 아니겠느냐. 진정한 보시는 탐욕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 딸이 되묻는다.
“재산을 주는 것이 탐욕을 주는 것입니까.”
“그렇다. 나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까 망설였다만 나에게 원수가 된 재산을 남에게 널길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방거사는 재산을 모두 호수에 버리고 난 뒤 고대광실과 같은 집에서 나와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집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 조리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거사는 청빈한 정신으로 탐욕과 잡념을 멀리하고 수행하여 마조 선사를 만나 깨닫고 이렇게 그 경지를 노래했다.
시방에서 함께 모여들어
저마다 무위법을 배우네.
이곳은 부처를 뽑는 곳이니
마음이 텅 비면 급제해서 돌아가리.”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배휴(裴休 791~870) 거사는 절도사 지위에까지 오른 고위 관료로 규봉 종밀 선사에게 화엄과 선을 배우고 끝내는 황벽 선사 밑에서 깨달았다. 그리고 황벽 선사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뒷날 『전심법요(傳心法要)』와 『완릉록(宛陵錄)』이라는 어록을 발간하였다. 거사가 자신의 서문까지 넣어 정성껏 이 어록들을 간행하였기에 황벽 선사의 선법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배휴 거사가 깨달은 기연을 소개한다.
한때 황벽 선사는 대안정사大安精舍에서 이름을 감추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배휴 거사가 이 절을 찾아와 부처님께 참배한 뒤 벽화를 감상하다가 문득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저 그림은 누구의 초상입니까?”
“고승의 초상입니다.”
“영정은 여기 있는데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
주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배휴가 물었다.
“이 절에 참선하는 스님이 없습니까?”
“요즘 어느 스님이 와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참선하는 스님인 듯합니다.”
거사는 그 스님을 보자 한눈에 비범함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영정이 여기 있는데 고승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받자 황벽 선사는 크게 소리쳤다.
“배휴!”
거사가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하자 황벽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 순간 거사는 마음 법의 참된 도리를 깨닫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스님께서는 참으로 선지식입니다. 이토록 분명하게 사람들을 이끄시거늘 어찌하여 몸을 숨기고 계십니까?”
이렇게 배휴 거사는 황벽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깨닫게 된다. 거사가 아침저녁으로 스님을 찾아뵙고 도를 물어 기록한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전심법요』와 『완릉록』이다.
대혜 선사의 『서장』을 비롯하여 여러 어록에는 간화선을 실참한 많은 재가자들이 등장한다. 『서장』에서는 장구성, 유보학, 진국태 부인 등이 깨달음을 얻었거나 그 직전까지 이른 재가자들로 언급되고 있다. 이 가운데 진국태 부인은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렇게 스님께 전한다.
광겁 이래로 밝히지 못한 일이 확연히 앞에 드러났습니다. 이는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닌지라 비로소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이 세간의 쾌락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대혜 선사는 “너무 기뻐서 며칠 동안 침식을 잊었다”고 했다. 진국태 부인은 아들을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참선 정진했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렇듯 화두를 통한 깨달음은 출 재가를 구별하지 않으며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 선법 속에는 모든 것이 차별 없이 회통되어 있다. 모든 중생들은 본래 부처인 까닭에 본래 소식을 알리는 기연을 접하는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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