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나는 누구인가?

수선님 2017. 12. 31. 12:48

나는 누구인가?                                종범스님.


옛날에 큰 스님들께서 ‘나’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근데 인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나’하고 다르게 말씀을 하셨죠.

우리가 보통 나를 부를 때 ‘누구세요?’ 그러면 ‘아무개입니다.’ 이래요.

그것은 명칭 ‘我(아)’ 입니다. 


이 이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 자기를 알리려고 만든거에요.

그 이름 명(名)자를 보면 저녁석 + 입구자입니다. 저녁은 안 보이는 시간이에요.

게 이제 얼굴이 안 보이니까 사람이 왔는데 누군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누구냐? 했을 때 이름 대면 안다. 말이에요.


그래 명칭가지고 살죠. 그리고 누구세요? 그러면 수도검침 나왔습니다. 택뱁니다.

편지 왔습니다. 이 역할이 ‘아’ 에요. 나는 편지 배달하는 사람이다. 뭐 택배하는 사람이다. 누구세요? 앞집인데요. 이렇게. 그러고 어떤 사람은 나는 누구의 아버지, 아들, 남편이다. 이렇게 이런 걸로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아버지 없으면 아들 안될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아들 없으면 아버지 안될거 아니에요. 그래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는 그런 ‘나’ 입니다.


근데 옛날 큰 스님들이 ‘나’에 대해서 자꾸 말씀하신 것은 그런게 아니고,

니가 ‘나’를 보느냐? 이리 묻거든요.

봅니다. 그러면, 뭐가 보느냐?  눈이 봅니다.

그러면, 금방 죽은 사람이 산 사람하고 눈이 같느냐? 다르느냐? 이리 물어요.


금방 죽은 사람은 산 사람하고 눈이 같습니다.

그럼 금방 죽은 사람이 보느냐? 못 봅니다. 왜 눈이 똑같은데 못 보노?

이렇게 법문을 해요.

그게 ‘나’에 대한 법문이에요.


그럼 눈이 보는게 아니지 않느냐? 그럼 눈이 안보고 뭐가 봅니까?

그 보는 놈이 뭔지 그걸 찾아라! 이거에요.

그러고 통도사 경봉 큰 스님이 법문하실 때

내가 몇 일 전에 부산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운전수한테 내가 법문했다. 옛날에는 기사가 아니라 전부 운전수라 불렀음. 그 운전수가 기사로 바뀐지가 오래 안 돼요. 70년대 뒤 같아요.

그래서 어덯게 법문하셨습니까?


택시를 턱 탔는데 내가 운전수한테 한마디 했다. 뭐라 그러셨는데요.

이보슈 운전수 양반, 예, 내가 할 말이 있소. 뭔 말씀이신데요?

이 자동차가 운전수가 운전을 안 하면 못 가지?  그렇지요.

그럼 운전수 양반의 운전수는 누구요? 하하하하 내가 그렇게 법문했다.

이게 인제 ‘나’에 대한 법문이에요. 그렇잖아요? (ㅎ)


자동차는 운전수가 운전안하면 못 간다 이거지. 그러면 운전수 양반의 운전수는 누구냐? 게 법문이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운전수 양반이 뭐라고 대답을 했겠어요.

대답할 수가 없지.


  아 길 가는 나그네가 남의 집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가도 그 이튿날 갈 적에 주인을 안 찾아보고 가면 무례한 사람이다. 아주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이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살면서 이 몸의 주인이 누군지 안 찾아보고 죽는다. 그렇게 무례하게 살수가 있나? 게 이게 인제 ‘나’에 대한 법문이에요.


참 심오하긴 한데, 어렵지요. 뭔 말인지.

그래서 오늘은 이런 나에 대한 법문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첫째. ‘나’는 누구냐? 나는 생멸(生滅)이다.

나라는 건 났다 죽는거에요. 생멸이에요. 생멸은 뭐냐?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동아시아에서는 생일날 보다 제삿날을 중시함)

그래서 우리는(지금 살고 있는) 생일날은 있는데 제삿날은 없는거에요.

생미백년이요. 사후천년이라고.

살아서는 백년이 안 되지만 죽어서는 천년을 간다. 그게 인생관이에요.


  그래서 이 죽을 때 어덯게 죽는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에요.

근데 우리 자신도 제삿날이 언제 돌아올지 이걸 기약이 없어요. 이게 생멸입니다.

근데 이 생멸은 무상(無常)하다. 무상은 뭐냐? 생로병사이다. ‘나’는 이 생로병사 하는 나를 가지고 있는거죠. 그 생로병사는 무상한 거죠.

그래서 열반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체의 모든 세간은 난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一切諸世間 生者皆歸死.)

왕성한 것은 반드시 쇠퇴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夫盛必有衰 合會有別離)


그래 지금 만나서 잘 지내는 사람은 헤어지는 거에요. 이게 생멸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한다. 수명도 또한 그러하다. 이제 인제 생멸하죠.

그래서 나는 첫째로 생멸이다. 생멸은 무상하다. 무상은 생로병사다.

이런걸 가지고 있는거에요.


두 번째, 나는 오온(五蘊)이다. 색, 수, 상, 행, 식.

색(色)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넷이고, 수, 상, 행, 식은 생각 정신작용인데,

수, 상, 행 요거는 심소(心所), 마음의 신하에 해당되는 거고요. 요식(識)은 8식인데 식은 왕이에요. 심소에서 ‘소’는 늘 따라다닌다. 이 뜻임.

그래서 ‘왕’이 가면 신하가 가는 거와 같이 따라다닌다.


8식은 그건 심왕(心王)이다. 식은 심왕이고 수,상,행 세 개는 심소가 돼서 요거는 인제 생각, 정신이다. 이거죠. 이게 인제 오온인데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 반야가 文字(문자), 觀照(관조), 實相(실상)般若(반야)가 있는데 문자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게 문자고, 관조(觀照)는 마음으로 살펴보는게 관조지요. 실상반야가 있어요. 실상의 세계. 그 깊은 실상반야를 실행하실 때에 뭐를 봤는가?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하고 즉, 오온이 다 공함을 꿰뚫어보고,

조견은 꿰뚫어본다. 이 말은 얼음을 얼음으로 보지 않고 물로 본다. 이 소리임.

사람을 보되 태어나는걸 보되, 태어나는 것만 보지 않고 죽는거 까지 본다.

만나 걸 보되, 만나는 거만 보지 않고 헤어지는 것 까지 본다.

이게 꿰뚫어 보는 것임. 생일날만 보지 않고 제삿날까지 본다.


그래서 이 오온을 꿰뚫어 보면 다 공하다.

근데 왜 중생이 고통을 느끼는가?

이 오온이 공함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고통이 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오온이 공함을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게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이거든요. 그러면 이 오온이 공하다는 의미는 뭐냐?


사리자여, 제법공상(諸法空相)은 제법은 오온법이거든요. 오온법이 공한 내용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이요, 부증불감(줄지도 불어나지도 않는)이라. 이게 공상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내용은 불생불멸이다.


근데 우리는 유생유멸(有生有滅) 이거든요.

생일날이 있으면 났다는 거 아니에요. 제삿날이 있으면 죽는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건 유생유멸인데, 반야에 있어서 실상반야를 실행하게 되면

유생유멸에서 불생불멸을 꿰뚫어 보는 거에요. 이게 照見(조견)이에요.


또 우리가 볼 때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지요.

그런데, 공상에는 不垢不淨(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임.

또 인제 우리가 볼 때는 有增有減(유증유감)인데, 불어나는 것도 있고 줄어드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실상반야를 떡 보면 줄어드는 것도 없고 불어나는 것도 없다.

게 인제 이것이 두 번째 나는 누군가? 나는 오온이다.

오온은 뭐냐? 空相(공상)이다. 오온개공이라 그랬잖아요. 그러고 공상은 뭐냐?

불생불멸이다. 이게 두 번째 나에요.


첫 번째 나는 생로병사다. 두 번째 나는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 이게 뭐냐? 이거는요. 이 세상에 말로 생각으로는 불생불멸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불생불멸이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 ‘불생’ 말이 생겼잖아요.

그래서 글자는 불생인데 벌써 말을 했다. 하면 ‘불생’하면, 말이 생긴거잖아요.

그럼 불생 아니잖아요.

또 어떤 말이든지 조금 있으면 사라지잖아요. 이거 불멸 아니잖아요.


그러고, 무슨생각을 일으켜도 불생불멸 아니라 불구부정 아니라 무슨 생각을 일으켜도, 한 생각이 떡 일어난 이상 그건 불생불멸이 아닌거에요. 이걸 알아야 되요. 이게 공부에요.


불생불멸을 말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한다? 이거 아니에요. 행동하나 일어나면 벌써 생긴거잖아요? 사라지면 사라진거 잖아요. 그래서 이건 자기 집에 들어가는 열쇠와 같아요. 이거는 개념, 설명이 아니고 열쇠다. 저 길가는 나그네한테 딱 이렇게(손가락으로 지시함) 방향을 제시해 주는 표지판과 같아요.


그래서 이 불생불멸 속에 내가 탁 들어갈 때 그게 불생불멸이지, 소용도 없어요.

불생이다. 라고 한 생각 일으키면 벌써 한 생각이 일어났는데 어째서 불생이냐 이 말이여. 그래서 생멸, 그 말과 생각으로 생멸 心言(심언)으로, 마음과 생각으로  불생불멸을 논하면 천만년을 논해도 불생불멸에 못 들어간다.


  왜냐? 심언자체가 생각과 말 자체가 생멸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개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고 열쇠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게 열쇠는 열고 들어가야 소용이 있는 것이지 만날 가지고 열쇠 구조, 용도를 설명해 봤자 방엔 안 들어간 거그던요. 이게 부처님 법이에요.


달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손가락을 아무리 잘 알아도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 의미가 있는 거지, 손가락만 안다고 달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거하고 똑 같아요.


그래서 누가 ‘불생불멸’을 체험을 했는가? 바로 실상반야에 들어가야 된다.

실상반야에 들어갔을 때 불생불멸이지 말과 생각으로 하면 생각이 하나 일어나도, 불생불멸이라는 생각을 일으켰더라도 그것도 생각이에요. 어떤 생각을 일으켰더라도 그건 생각이니까 생각과 말로는 불생불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거지요.


그래서 이건 손가락이고, 열쇠다.

열쇠는 열어야 되고,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 의미가 있다 이거지요. 그런것임.

그래서 인제 불생불멸에 ‘나’가 있다.


그 다음에. 나는 佛性(불성)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불성은 즉시 여래다. 불성은 바로 부처님이에요.

불성은 뭐냐?

이건 불생불멸 이거보다도 더 깊이 들어가서 생로병사 여기에서 불생불멸로 불생불멸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常住(상주)에요. 항상 머문다. 이게 불성이에요.


우리가 예불할 때도 상주하시는 부처님께 예불을 올립니다.

‘十方三世 諸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불성은 상주에요. 뭐가 상주인가?

그 실상의 세계가 상주이거든요.

현상이라는 건 유생유멸, 나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는. 이건 현상인데

거기에 실상이 있어요. 불생불멸, 실상이 있다구. 기 그 불성은 상주인거에요.


그럼 나는 불성이다. 불성은 상주다. 상주는 무엇이냐? 常樂我淨(상락아정)이다.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 ‘진아’이고, 늘 깨끗하다.

이게 ‘나’입니다. 이게.


그럼 이 상락아정 참 ‘나’를 설명한 기본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이 소승, 대승열반경이 있는데 대승열반경중에는 40권 열반경이 있고, 36권 열반경이 있습니다.

근데 이제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는 36권 열반경을 많이 읽음.


36권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그 열반경에

我者(아자)는, 나란 곧 여래장이다.(卽是如來藏義), 여래다 이 말이여.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實有佛性(실유불성)이니,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니,

卽是我義(즉시아의)다. 바로 이것이 나라는 뜻이다.


게 나는 불성이다. 이 말이죠.

불성은 뭐냐? 상락아정이다. 이게 참 ’나’ 에요.


從本已來(종본이래)로, 처음서부터

常爲無量(상위무량) 煩惱所覆(번뇌소복)

무량번뇌 속으로 한없는 번뇌가 이거를 덮었어.

是故衆生(시고중생) 不能得見(불능득견) 그래서 중생이 이거를 보지를 못한다.


이게 인제 날씨로 말하면, 해가 뜨면서 동시에 구름 낀, 바람 부는 날도 있고,

또 낮이 있으면 밤도 있듯이, 이 불성에 처음서부터 번뇌가 있었다.

이 소리에요. 그래서 그 번뇌 때문에 못 보는 거지. 저녁이 돼서 해를 못 보는 것처럼 번뇌 때문에 못 본다.

이런 말씀이죠.


또 바다가 있으면 으레 파도가 있듯이 파도 때문에 바다를 못 보는 거와 같다.

이 말이죠. 근데, 번뇌가 아무리 있어서 불성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거에요.

파도가 아무리 쳐도 바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겁니다. 아무리 밤이 돌아와도 그 태양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소리임. 이렇게 불성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열반경에 계속 그런 말씀이 있는데,

‘今日如來所說眞我’(금일여래소설진아)는 ‘名曰佛性’(명왈불성)이다.

오늘 여래가 ‘참나’라고 하는 이것은, 이름을 불성이라 한다.

‘淸淨佛性 常住不變’(청정불성 상주불변)

청정한 불성은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 즉 항상 깨끗해서 늘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고요.


‘佛性者 卽是如來’ 즉 불성은 여래이다.

‘如來 是常住法 不變易法’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고, 변하고 바뀌지 않는 법이다.

‘諸佛世尊 有二種法’ 제불 세존에게 두 가지 종류의 법이 있다.

‘一者 世法 二者 第一義法’ 첫째는 세법(세간법)이고 둘째는 제일의 법이다.

‘진제, 속제, 제일의제’라 하듯이 ‘진속’이 있는데 진속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을

제일의라 함. 그냥 제일이에요.


‘世法可滅 第一義法 ‘卽不壞滅 復有二種’(세법가멸 제일의법 즉불괴멸 부유이종)

세법은 소멸하나(여래에게 있는 세간법은 없어져요. 이 생로병사와 같이), 제일의 법은 없어지지 않는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괴멸하지 않는 제일의 법을 다 가지고 있음. 근데 번뇌에 덮여서 모를 뿐이다. 이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一者 無常無我無樂無淨’ 첫째는 무상(항상함이 없고), 무아(나라는게 없고), 무락,(즐거움이 없고) 무정(깨끛함이 없는)[상락아정]이고, 몸 이거 늙고, 썩을 때보면 깨끗한 게 아니에요. 이게. 그렇잖아요. 이게 이제 부처님에게 있는 한 가지 법이고


또 한 가지 법은 二者 常樂我淨(상락아정)이다.

無常無我無樂無淨  卽有壞滅(즉유괴멸)  무상무락무아무정에는 없어짐이 있으나,

부처님에게는 無常, 無樂, 無我, 無淨 이게 있어요.

그러고 또 부처님에게는 상락아정이 있어요.

常樂我淨 卽無壞滅. 상락아정은 없어짐이 없다. 괴멸하지 않는 상주 법,

이게 불성인데, 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나는 생멸이다, 나는 오온이다, 나는 불성이다.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 죽는거 이 생로병사만 우리가 알고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 깊게 살면 불생불멸을 살 수가 있고 상락아정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법락을 느낀다 그래요. 법의 즐거움을 느낀다.


이 世樂(세락)이라는 것은, 태어나고 만나고 먹고 쉬고, 이게 세락인데요.

중생이 태어나는 것만 좋아했지 이 죽는다는 것이 온다는 것을 몰라요(싫어해요).

만나는 것만 좋아했지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 안해요. 세락은 이와 같이 고와낙이 동시에 따라다니기 때문에 윤회라 그러거든요. 고통이 오면 또 즐거움이 오고, 즐거움이 오면 고통이 오고, 이게 윤회에요. 이게 세락입니다.


  근데 이 법락은 ‘불생불멸의 즐거움’, ‘상락아정의 즐거움’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믿고 닦는게 불자입니다.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을 믿지 않고서는 ‘도’를 닦을 수가 없어요. 공덕을 닦을 수가 없거든요.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그러면 이게 불성이라는게 도데체 뭐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셨는데,

천수경에 보면 ‘願我早同法性身(원아조동법성신) : 절대 평등 진여의 몸 이뤄지게 하옵소서.’이라는 말씀이 있죠?

여기서 ‘법성’하고 ‘불성’하고 어덯게 다르냐? 하고 이렇게 물어요.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 원융한 법의 성품 두 모습이 아니며),

원아조동법성신’ 법성은 법의 본성이란 뜻임. 또 부처의 씨앗 부처의 본성.

그러면 ‘법성과 불성’에 어떤 차이가 있나? 같은 건가 다른 건가?

이건 같다고 해도, 다르다고 해도 친절한 예기가 아님. 왜 그러냐?

 

‘진성’이란 말이 있어요. 법성게에 ‘眞性甚深極微妙(진성신심극미묘)’라고 있음. 진성은 참 성품, 이 진성은 만법의 근원이에요.

그래 만법의 근원이라고 할 때 법성이라고 그래요. 그래 용도, 그 설명하는 범위가 틀려요. ‘불성’이라는 것은 제불 ‘만덕’의 근원이에요.   부처님이 그냥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 하면 불성을 다 중생처럼 가지고 있다고 부처님이라고 안 해요.


지혜와 자비와 온갖 덕행, 제불 만행을 갖추었다 이거죠. 그래서 부처님이라 함.

그럼 이 진성(참 본성)은 부처님의 만덕의 근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만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불성’이라 그러지 ‘법성’이라 그러지 않음. 그러니까

진성으로 볼 때는 불성과 법성이 같은 거에요.


  그런데 표현하는 범위와 개념으로 볼 때는, 만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법성, 부처님 만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불성, 이런 (구분 하는)걸 교학이라 함.


그리고 또 이 진성은 선과 불선의 근본이다. 이럴 때는 여래장 ‘장식’이라 함.

이게 인제 중생이 선도 짓고, 악도 짓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진성은 선, 불선의 근원이 되요. 그래서 이 진성이라는게 순전히 선법만 만들어 내는게 아니에요.


  ‘불수자성수연성이라’ 인연에 따라서 진성이 자성을 지키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악하려 들면 별별 악을 다하게 되는게 그게 ‘불수자성수연성’임.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악하다’ 이건 말이 안 되고요, 선하다 이거 말이 안 되요.

그럼 왜 선과 악이 나타나느냐? ‘수연성(인연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하기 때문에

‘인연을 잘못 지었다.’ 이건 말이 되지만, 악하다 이건 말이 안 되요.


진성은 악한게 아니거든요. 악하다 하면 자성이 있는거그던요. 진성은 또 선한게 아니거든요. 선하다 그러면 자성이 있는거에요. 불수자성이 아니라 자성을 지키는 거그던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불교공부 하는 사람이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 라고 할 때,

거기에 딱 걸리는 게, 불성을 가진 중생이 왜 저렇게 못된 짖을 할까?

이거에서 딱 걸림. 불교 믿는 사람이 왜 인간이 저모양일까?

근데 그 진성에는요, ‘不隨自性(불수자성 : 선성, 악성만 지키는 것도 아니고, 선악 없이 수연성 해버려. 즉 인연 따라서 일어나 버림. )‘이에요. 이래요. 이러니까.


그 법당에 와서는 절 잘해도 싸움판에 가서는 싸움 잘하는 거에요.

이게 ‘不隨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그것이

사돈집에 가서는 얌전해도 친구 만나면 안 얌전해요. 이것임.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가는 것을 수행이라 함.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 가면 그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제불만덕이 갖추어져요. 그래서 여래장 장식이라 그러면, 선과 불선의 근원이에요. 그때는 여래장(또는 장식)이라 함.


또 心地法門(심지법문, 마음 땅 법문)이 있는데요.

이것은 ‘보살만행의 근원이다.’  그럴 때는 심지라 그래요. 이렇게 부르는 용어가 다릅니다. 인제 이런거를 설명하는 것을 敎學(교학)이라 함. 차원이 다르잖아요.

덮어놓고 다르다고 하는 거와. 그렇습니다. 이게.


자, 그러면, 이런 애기를 전부 뭐하자고 그러는 건가?

이게 전부 손가락인데요.(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심) 이런 애기만 배우자는게 불교가 아닙니다. 정말로 인제 그 세계에 가는거. 손가락을 봤으면(달을 가르키는)

달을 봐야 잖아요. 근데 중생은 손가락만 보고 달을 못 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능가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하면

如愚見指月(여우견지월)  어리석은 이 손가락으로 달 가르킴 보되,

觀指不觀月(관지불관월)  손가락만 보고 달 안 보는 것처럼.


상락아정 불성이 있다 이것은 손가락인데, 불성을 내가 찾으려고 자꾸 공덕을 닦아야되는데, 이게 불성을 못 보는 것도 ‘불수자성수연성’이라. 수연성으로 인연따라서 못 보는 거지, 이게 뭐 못 볼 수가 없는 거그던요. 그래요. 그래서 인제.


計著名字者(계착명자자)는  이름에 생각으로 집착하는 자는

不見我眞實(불견아진실)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다 경책을 해놨어요.

그래서 상락아정의 나를 믿고 상락아정의 나를 이룰려고 다 공을 드리고 이렇게 자꾸 닦아가는 걸 그걸 신심에 의한 수행이고 정진이다. 이렇게 애기함.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도인이 나왔는데, 도인이라는 것은 다른게 아닙니다.

이 ‘생로병사’의 나에서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의 나를 찾아가지고 거기에 아무 구애 없이 무가애 무가애 無碍自在(무애자재)한 삶을 사신 분을 도인이라 그래요.


  이게 無가碍(무가애) 무가애 無有恐怖(무유공포)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이게 인제 자재, 이러한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걸 도인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생로병사 하는 이 몸뚱이 가지고 상락아정의 이걸 턱 찾고 죽으면 그거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참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그런데 고려 말에 나옹스님이라 하시는 아주 큰 스님이 계셨어요.

근데 이 분이 스무살 때 출가를 했는데요. 출가한 동기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친구가 죽었어요. 큰 상심이 되었는데, 그 동네의 나이 많은 어른들한테 찾아다니면서 그 죽은 사람이 어디로 갔습니까? 하니까 다 몰라요. 나이 많다고 압니까? 죽으면 몰라요.

年至二十 見隣友亡 問諸父母曰 死何之 皆曰所不知也.

연지이십 견린우망 문제부모왈 사하지 개왈소부지야.


그래서 인생에 탁 의문이 생겨서 출가를 했어요. 그래서 도를 닦아서 대 도인이 되었는데, 이제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물었어요. 나옹스님한테 묻기를


問  四大各離(사대각리)       向什麽處去(향심마처거)

師交拳當心云(사교권당심운) 只在자裏(지재자리)


당신이 지금 지수화풍 사대가 흩어져서 돌아가는데. 죽는데 어디로 가십니까? 물으니까 나옹스님이 두 손으로 한 주먹을 딱 만드는 거에요.(교권) 그러고 가슴에 딱 대고 다만 이 속에 있느니라. 이랬어요.

- 도인 법문입니다. 이게. -


이런 분들은 다른게 아니라 당신이 출가한 동기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이게 의문이 생겨서 출가했거든요. 근데 도를 통해서 똑같은 질문을 받은 거에요.

스님 지금 죽으면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까 위와 같이 법문 하셨어요.


이 생로병사 이 몸 가지고 불생불멸, 상락아정(常樂我淨) 다 볼 수가 있어요.

이걸 보면, 죽는게 죽는게 아니고, 나는게 나는게 아닌 상태에서 죽고 사는 것을 아주~ 잘 알 수가 있는 거에요.

늘 즐겁게 할 수가 있는거에요.


아프다고 고함을 질러도 그 고함지르는 건 생로병사거든요,

그 고함지르는 그 속에 상락아정이 있어요. 게 상락아정을 알고 아프다고 고함지르는 사람하고, 모르고 고함지르는 사람하고 다른거에요.


나도 어릴 때 도인이 아프다고 했을 때 실망을 했거든.

근데 분명히 부처님한테도 생로병사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거에요. 그 속에 상락아정이 있는걸 보는게 중요해요.


그러면 생로병사에서 상락아정 보는 이치가 뭐냐?


夢踏靑山脚不勞(몽답청산각불로)요.      꿈에 청산을 다녀도 다리 안 아프고

影入水中衣不濕(영입수중의불습)이로다.  그림자 물 속 들어도 옷 안 젖는다.

나무아미타불.


비유인데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걸 비유로 말하자면

夢踏靑山脚不勞(몽답청산각불로) 꿈에 청산을 헤메고 돌아 다녀도 다리 안 아프고

影入水中衣不濕(영입수중의불습) 

나의 그림자 물 저 속에 있지만 내 옷은 젖지 않는다. ㅎ~


하였습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_()_


甘露法門 信受奉行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_()()()_

출처 : 유가사(불국선원) 히말라야 선요가 수련회
글쓴이 : 금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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