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修行)이야기. 송경(誦經)과 간경(看經)
종범스님
송경(誦經)은 경을 외우는 겁니다.
간경(看經)은 경을 보는 겁니다. 경을 봅니다.
근데 경을 외우기 전에 경을 들어야 합니다. 그걸 청경(聽經)이라 합니다.
청경을 하면, 경을 읽고, 읽으면 외우지요.
그래서 청경 독경은 경을 외우는 과정이고요. 외운 다음에는 뭐하냐?
경을 봅니다. 마음으로 봅니다. 봐요. 그리고 경에서 눈을 얻습니다.
그걸 경안이라 그럽니다. 경안은 바로 혜안(慧眼)입니다.
그래서 축원할 때
간경자(경을 보는 이)는 혜안명철이라.(밝게 뚫리기를, 열리기를 원한다)
혜안이 통토라. 마찬가지에요. 확 트여지기를 원합니다. 이게 인제 간경이거든요.
그러면 혜안이 열리면 어덯게 되느냐?
혜안이 열리는 과정이 간경인데 그 다음에는 가질 ‘지’자 지경(持經)을 합니다.
경을 딱 간직해서 내가 경이되는 거에요. 이것이 경을 통한 수행과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송경을 보면요 우리나라에 기본경전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인데 이 아주 기본입니다.
그러고 그 외에 여러 경전이 또 첨부되어 있죠.
그런데 금강경은 짧으니까 경을 많이 읽습니다.
법화경은 많으니까 그 중에서 별품경이라 그래가지고, 관음경이라고도 하는데요 법화경 안에 있는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따로 읽습니다.
또 화엄경도 많으니까 별품이라 해서 보현행원품이라 해서 따로 읽어요.
아미타경을 읽고 다른 천수경, 반야심경 뭐 이런 경을 읽거든요. 이것이 일반적으로 하는 거고,
거기다가 법성게하고 약찬게를 읽어서 이런 내용들이 송경하는 주요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전 자체를 하나 선택해서 읽는 경우 말고 수시로 송경하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조상을 천도한다던지, 조상님께 제사를 올릴 때 그런 의식이 있는데요 그 영단의식, 하단의식이라 그래서 그런 의식이 있는데 이때에 주로 나오는 경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이 주로 나와요.
그래서 이것은 게송 송경입니다. 그러니까 전체가 다가 아니고 어떤 정해진 품수가 아니고 주요 경전에 주요 게송만을 외워요. 이게 굉장히 송경방법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불교 의식문을 쭉 보면 거기에 많은 경전이 나오는데 주로 금강경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기타 경전에서 전체가 아니고 주요 게송들을 거기
모아서 읽어요. 이런 방법이 도 송경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흔히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절에 가면 그
법당에 제일 위에는 가로로 대웅전 이라든지 극락전이라든지 현판이 있고 기둥에 붙이는 글이 있어요. 그걸 주련이라 합니다. 주련에 나오는 경전이 주로 게송들인데 주요 경전에서 나오는 게송들을 항상 거기다 붙여놓고 오면서 가면서 늘 읽게 하는 거에요. 그게 하나의 송경방법입니다.
또 서산스님께서 선가귀감을 저술하셨는데 선가귀감에서 어떤 경전들을 많이 거기에 수록을 했는가. 그런 방법도 경전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경전 안에 나오는 중요한 송구들을 모아서 기록해 가지고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 고려시대에 ‘선문염송집’을 편찬했는데, 이곳에도 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경전에 나오는 게송들을 모아서 수록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 방법으로 송경을 해왔습니다.
그래 송경하는 방법은 법당 기둥에 주련으로 써놓은 것을 오면서 가면서 보게도 하고, 경이 많으니까 한 품을 뽑아서 별품을 외우게도 하고, 또 경전 안에서 게송들을 모아서 게송별로 4구게면 4구게 고런 게송만이라도 외우게 하고,
또 큰 스님들이 글 쓰실 때 큰 스님들 저술 안에 어디에서 많은 경전이 인용되었는가? 경 본 사람은 딱 보면 알거든요. 이건 어디서 나온 게송이다라는 것을. 많이 인용되는 이것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삼부경전이 한국불교 구성체계의 기본을 이루고 있고요. 그 외에 많은 경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 송경 중에서 금강경에서 흔히 많이 읽는 게송이 뭐죠?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많이 읽습니다.
또 끝에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런 거 많이 읽고,
화엄경에 많이 나오는 게송이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作如是觀 一切唯心造’ 이런게 있고요.
주로 80권을 읽는데 이 게송 때문에 60권을 외우는 경우가 있어요. 그 앞에 ‘야마궁중게찬품’중에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 마음은 그림 그리는 화가와 같다.(그림 만드는 전문가와 같다.)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 능히 모든 세간을 다 그려낸다.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 우리 오온이(몸과 마음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왔다.
무법이부조(無法而不造) - 어느 법도 만들지 않은게 없다.
이제 앞에 이런 게송이 있고 그 다음 게송이
여심불역이(如心佛亦爾) - 마음과 같아서 부처님 또한 그렇다.
마음이 이렇게 모든 걸 만들어 내는데 부처님도 그렇고 모든 걸 만들어 낸다.
여불중생연(如佛衆生然) 또한 부처님과 같아서 종생 또한 그러하다.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 마음이 모든 걸 만들어 내는데 마음과 같아서 부처님 (심, 불, 급 중생 시삼무차별) 또한 그렇고 이런 송구들을 항상 외워요. 이게 한국불교 송경의 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송경을 할라면 경전을 다 안 외워도 그 몇 게송만이라도 항상 외우면 그거 참 대단합니다. 그거.
법화경은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제법이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상이다.
불자행도이하고(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이 게송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경구가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게송인데요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시법(이법)이라함. 생로병사법, 세간법, 출세간법, 중생법 제불법 등등 온갖 법이 이 법인데 이 법이 법 위에 머무른다는 겁니다. ‘법위’라는거는 뭐냐 진여법, 실상법, 해탈법 이게 대승불교에요. 온갖 일체 만법이 진여실상법에 머무른다. 이거에요. 그래서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 이 온갖 세간 모습들이 그대로 항상 머무르는 상주 진상법이다. 진상(眞常)이
상주이에요. 이걸 깨닫는게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이게(앞에 놓인 안경 들어보이심) 시법인데요.
이법이 어디에 머무냐? 진여법에 머문다.
이게 또 세간상인데, 이것이 실상법이다.
이걸 조금도 의심 없이 보면 깨달음임.
어도장지이(於道場知已)하고 - 이걸 누가 알았느냐?
서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도량에서 알아 마치고
도사방편설(導師方便說)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이걸 하나 알게 하기 위해서 온갖 법문을 다 하셨다.
이 법화경의 게송인데 아주 중요한 게송입니다.
이 게송을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배웁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보문품’편에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송구가
구족신통력(具足神通力) 관세음보살께서 신통력을 다 갖추시고
광수지방편(廣修智方便) 지혜방편을 널리 닦아서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 시방의 모든 국토에
무찰불현신(無刹不現身) 어느 세계이든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법화경 보문품 제25)말씀은 항상 기도할 때 외우지 않습니까? 이게 송경임.
고 앞에 아직도 중요한 게송이 있습니다.
중생피곤액(衆生被困厄) 중생이 곤궁하고 액난, 재앙을 입어서
무량고핍신(無量苦逼身) 한량없는 고가 몸에 다가온다 하더라도
관음묘지력(觀音妙智力) 관세음보살의 미묘한 지혜의 힘이
능구세간고(能救世間苦)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제하나니라.
우리는 보통 의식 때 뒤에 게송만 읽고 하는데, 이런게 바로 송경입니다.
자 그러면 도데체 송경(誦經)하는 의미가 무언가?
송경을요 수행으로 보면 송경이 아주 중요한데요. 송경은 어째서 중요한가?
경은 바로 부처님 말씀인데 부처님하고 말씀하고 다른게 아니에요.
조사하고 조사 뜻하고 다른게 아니라, 조사의 뜻은 화두고, 조사는 그냥 조사 아니에요?
조사는 제2의 부처님 출현이거든요. 그럼 화두는 다 조사의 말씀인데 화두하고 조사 뜻이 다른게 아니에요. 조사께서 한 말씀 뜩 했으면 그 말씀 속에 조사 뜻이 들어있지 그 말씀 떠나서 조사 뜻을 찾는게 아닌데 중생들이 모르니까 이렇게 조사가 말씀했는데 무엇이 조사의 뜻일꼬? 그러거든요. 근데 사실은
그 조사의 말씀 화두 속에 조사 뜻이 다 있어요. 그거 떠나서 따로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모를 뿐이다.
경전도 그대로 그 경전 자체가 부처님이에요.
그러면 뭘 하게 하는 거냐.
‘경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보게 하는 것이 경임’
송경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내가 내 집에 있지 않고 온갖 곳에 돌아다니는데
들어와라 그 안으로 불러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중생 놀음하는 것을 비유로 말하면 억만장자고 이 세상에 없는 것 없이 하나 밖에 없는 대 부자인데 그 대 부자의 주인이 자기가 부자인줄도 모르고 다른 곳에 맨 날 돌아다녀서 온갖 싸움만 하는거에요.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요.
부자인줄 모르고 맨 날 싸움만 한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아이 들어오라고.
싸움을 안 하는 방법은 집 안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애들이 밖에서 싸울 때 어떻하면 끝나나. 들어와라 한 아이가 들어오면 끝남.
그러니까 이 송경은 내가 나를 모르고 온갖 곳으로 육도윤회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그 중생심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해요.
그래 송경은 내가 나를 부르는 일이다. 이게 첫 번째 수행의 의미임.
불러요. 그럼 고다음에 간경(경을 본다)이라는게 있어요.
경을 보는 것은요, 그냥 송경으로 끝나는게 절대 아닙니다.
그 경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직접 보는 거에요. 그래서 ‘간경이라고 하는 것은
관조행(觀照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관조라는게 뭐냐?
금강경에 보면 제일 마지막에 ‘응작여시관(응당히 이와 같이 봐라)’ 이랬잖아요.
그러고 앞에서 죽 뭐라고 말했냐하면 제상이 비상이다(상은 무상이다) 이걸 말했어요.(正觀諸相非相)
허망이라는 말은 ‘자성이 없고 진실성이 없다.’라는 뜻임. 그래서 제상이 비상이다라고 말함.
‘제상이 비상임을 바르게 바르게 보는 행위가 그게 간경입니다.’
그러고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 오온이 다 공함을 밝게 밝게 비추어 보는거 그게 간경임. 오온은 나
자신이잖아요. 근데 다 공이라는 공은 거는 뭐냐. 공이라는 것은 불생불멸이라는 거그던요. 제법공상은.
공상은 불생불멸상인데, 이 몸이 생각이나 몸이나 그대로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것을
보는게 그게 간경입니다.
그러면 송경은 싸우는 아이를 불러드리는 것이고 간경은 아이를 불러드렸는데 또 나가고, 불러드렸는데 또 나가고 그럼 집안일은 안 하겠죠. 그런데 여러번 불러들이니까 인제 들어와서 뭐 할 일 없나 이렇게 나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자기집 일을 하는게 그게 간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게 간경을 못하고 송경으로 끝나는 것은
만날 밖에 돌아다니던 습관이 몸에 꽉 배어가지고 불러들이면 또 나가고 이러는 거와 같은 겁니다.
간경이 잘 안 되어도 송경을 자꾸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 찰라, 어느 순간에 경안(색즉시공이라는게 탁 알아질 때가 와요)이 열립니다(경의 뜻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선근이 아주 두터우면 문경오도(聞經悟道)합니다.
언하대오라 합니다. 육조스님의 예가 그러함. 송경할 때 깨침. 그리고 능엄경, 육조단경 보다가 깨친 분이
굉장히 많고요. 그게 바로 경안이 열리는 거에요. 그게 인제 경을 통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제가 기록을
못 찾고 있는데 우리나라 스님인데 어디 나오는 기록이에요.
아주 전생에서부터 공덕을 많이 지은분인 것 같아요.
게 인제 절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제일 먼저 외우는게 반야심경이었거든요.
반야심경을 딱 보는데 ‘무안이비설신의’ 라는데 탁 걸린거에요. 어! 이상하다. 다 없다 그랬는데 자기 얼굴 만져보니까 있단 말이에요. 나한테는 있는데 경엔 왜 없다하였는가? 이 경이 잘못됐든지 내가 뭐를 잘못
안건지 이게 뭐 이상하다 거기에 딱 걸렸어요.
공덕이 깊은 사람은 바로 이렇게 걸려버립니다. ‘오온이개공’이다 라고 했을 때 어! 공하다? 금 난 아닌데? 왜 그럴까? 그냥 걸려버려요!
거 불러들이면 자기 집 일하는 거에요. 이게.
근데 싸움에 익숙한 아이는 부르면 또 나가고 부르면 또 나가고 안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분은 탁 걸려서 아 이이 경에는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하였는데
내 얼굴에는 분명히 있다 이거에요. 또 만져보고 또 경보고, 또 만져보고 경보고
이게 딱 걸려서 왜? 없다고 했을까? 왜? 없다고 했을까? 게 깨달았어요.
이렇게 간경을 하면 못 깨달을 수가 없거든요. 간경을 안 해서 못 깨닫지.
이것이 바로 간경입니다. 그러고 서산스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길
단관오온개공 사대무아(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이 관하는 방법이에요. 오온이 다 공하고 지수화풍 사대에 내가 없다는 거만 오~직 봐라!
이게 간경하는 방법이에요. 그렇게 되면,
진심무상(眞心無常)하여
진심은 무상하야 참마음은 이런 몸뚱이처럼 형상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불거불래(不去不來)하나니라.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니라.
생시성역불생(生時性亦不生)이요
태어날 때에도 진심의 본성은 나는게 아니고
사시성역불거(死時性亦不去)니라.
죽을 때에도 진심의 본성은 가는 것이 아니니라.
약견제불 무심수거(若見諸佛 無心隨去)
모든 부처님을 본다 하더라도 따라갈 마음을 내지 마라. 이게 오온개공을 보는거에요.
부처님이 출현했더라도 부처님을 따라갈 마음을 내지 않고요. 그 다음
약견지옥 무심포외(若見地獄 無心怖畏)
지옥을 보더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지마라. 이게 간경입니다. 이게! 그렇게 하면, 바로 인제 경안이 열려서
자기면목을 보게되요. 자기면목을 보면 그 다음에는 관조행이 아니라 각조(覺照)라고 해요.
그래서 수행 과정은 관조고요, 인제 그 수행에서 경안이 열려가지고 자기면목을 본 깨달은 다음에는
각조에요. 그러면 인제 깨달음 이라는게 뭔데 그러냐!
깨달음이라는 거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육조스님 금강경 해(解)에 말씀을 하셨는데, 외각(外覺), 내각(內覺)이 있어요.
‘밖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일자외각 관제법공(一者外覺 觀諸法空)이요.
제법이 공한 걸 확실히 보는게 밖으로 깨닫는 거에요.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볼 때, 그게 밖으로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물 컵을 들어 보이심) 턱 보면요.
이게 물그릇인데, 물그릇 이대로가 불생불멸인거에요. 이걸 무상(無常)이라 그래요.
이게 분명히 상(相)인데 무상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상이 무상임을 확실히 보는게 그게 각조에요.
모든 부처님이 무상의 관문을 다 통과하신 분이에요. 삼라만상, 우주만물, 형형색색이 전부 상인데 ‘상이 곧 무상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는게 외각입니다.
밖으로 깨닫는 거에요. 근데 이런 형상만 공이냐? 그게 아니고요.
첫 번째 여기에 걸리기 쉬워요. 아, 밖으로 깨달은 것에 걸리기 쉬워요. 거기에 큰~게 또 하나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각이 또 있어요, 뭐겠어요?
전부 여기에 떨어져요. 그래서 마장이 이 때 생기기 쉬운데,
이자내각 지심공적(二者內覺 知心空寂)
마음이 공적함을 그때 알아요. 그러니까 밖으로 공한 것 만 알고 지 마음까지 공적한거를 모르는 상태에 이제 뭐 수행 마장이 가장 끼어들기 쉬운 때이거든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관제법공’하고 ‘지심공적’
이라.
우리가 온갖 생각을 다 일으키는데, 그것 ‘공적한 것’이에요. 공하고 고요한거다.
그걸 모르고 자기 생각에 다 눈이 멀어가지고 생각에 빠져서 헤메는 거에요.
자기 생각이 미혹하지요. 이래가지고 뭐냐
불피육진소염(不被六塵所染)하고
색성향미촉법 육진에 물드는 바를 입지 않아요.
마음도 공적하고 형상도 공적함을 환히 보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하하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꿈꾸는 소리인지 꿈 깨는 소리인지. 생전 안 가보던 애기하니, 밖으로 깨닫는
것은 모든 형상이 공한 것을 보는거고요, 안으로 깨닫는 다는 것은 뭐라 그랬죠? 마음이 공적한 것(텅텅비고 고요한걸)을 아는거에요.
그러니까 형상에 속고 그 다음에 어디에 속는다고요? 자기 생각에 속는거에요.
그래서 자기 형상에서 벋어나는게 해탈이고 자기 생각에서 벋어나는게 해탈임.
그걸 정관무념(正觀無念)이라 합니다. 자기 생각에서 벋어나는 게 무념이에요.
무념상태가 되면 자기 생각에 미혹하지 않아요. 게 전부 자기 생각에 속아서 정신없습니다.
그게 중생입니다. 그래가지고 뭐라 그랬느냐,
불피사미소혹(不被邪迷所惑)이라
삿되게 미혹한데 혹함을 입지 않는다. 전부 생각에 미혹한거죠.
그래서 바로 깨달음이라고 그러는데
각즉시불야(覺卽是佛也) 깨달으면 부처다! 이렇게 간경을 애기하고요,
또 육조스님 해에 중생과 부처의 차이점이 뭔가?
有四相 卽是衆生(유사상 즉시중생)
사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죠. 이게 탐, 진, 치, 애착 이런건데, 이것이 사상이에요.
이것이 있으면 중생이에요.
無四相 卽是佛(무사상 즉시불)이라. 멋진 가르침입니다.
迷卽佛時衆生(미즉 불시중생)
미즉 이렇게 사상에 속고 형상에 속아가지고 미하면 불시중생이라(부처가 중생이 되고) 미하면 부처님이
중생되는 거에요. 우리가(부처님이) 다 중생된거에요.
悟卽衆生是佛(오즉중생시불)이라.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다.
이렇게 하는게 전부 각조입니다. 이런 걸 환히 보는 게 각조인데 각조라는건요,
각혜(覺慧)가 상조(常照)하는 겁니다. 깨달은 지혜가 항상 비치고 있는거에요.
각혜상조를 각조라 해요. 그래 우리는 미혹해 가지고 중생 망식을 가지고 허망한 식심을 가지고 막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거든요.
근데 이렇게 경을 잘 봐서 경안을 얻으면 각해가 상조해요~.
그런 것을 지경이라 합니다. 경을 항상 간직한다고, 즉 지경(持經)은 각조행(覺照行)이다.
각해상조가 되야만 지경이 되는 겁니다. 경을 늘 간직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다 알아요. 뭘 아느냐 하면, 금강경에 보면,
일체 중생을 다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랬고, 그 다음에 어떤 중생도
열반으로 인도되어진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그랬거든요. 그랬는데
경을 다 보다보면 서산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뭔가 하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
只以念念者(지이염염자) 爲衆生也(위중생야)라
망념 하나 일으키면 고게 중생이고, 그 생각 생각이 중생이지, 생각을 떠나서 중생이 없다 이말이에요.
그런데 안으로 마음이 공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了念體空者 度衆生也(요염체공자 도중생야)
그 망념의 본체가 다 공적함을 안 것이 중생을 제도한 것이다.
이런 것이 깨친 분께서 가르쳐 주시는 도인법문이라는 겁니다.
이건 안 깨닫고 도저히 알 수 없는 거에요.
중생제도라는 거는 뭐냐?
망념이 공함을 나는거~ 그게 중생제도고요.
또 제도 받은 중생이 없다는 것은 뭐냐?
망념의 본체가 이미 공적하기 때문에 제도 받은 중생은 없다 이거에요.
이런 소식이 불교의 오묘한 소식입니다. 이런게요. 그래서
이 경을 잘 간직한다는 것은
證佛地者 名持此經(증불지자 명지차경)이라.
부처님의 지위, 세계를 다 증득해서 얻은 사람이 바로 이름을 지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요. 그래서 경을 잘 간직한다는 것은 성불해서 부처님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불해서 부처님 되는 의미가 뭐냐? 이거에요.
그러면 이제 금강경을 육조에서 해석하기를 금강경자는 이랬거든요.
금강경자는 부처님의 세계는 이런 뜻이에요.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하고, 무주(無住)로 위체(爲體)하고, 묘유(妙有)로 위용(爲用)이니라.
딱 그랬는데,
부처님의 세계가 무상, 무주, 묘용(유) 이건데요,
무상으로 위종이요 할 때 종(宗)은 사람으로 말하면 머리고 땅으로 말하면 바다에요.
바다에 안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사람 머리 없는 사람 없잖아요.
머리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걸 종이라고 그래요. 으뜸. 근원 이런 뜻이거든요.
부처님의 세계는 첫째가 무상이에요.
상에 상이 없는거에요.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거에요.
그래 우리가 맨날 상에 속는거에요. 상에. 상이 그렇게 허망하고 무상한건데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인줄을 내 준으로 못 보니까 만날 상에 걸려 있는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 세계에 딱 들어가면 무상이에요.
상에 상이 없어요.
그 다음에 무주에요. 무주라는 것은 밖으로 물드는 마음인데 물드는 마음은 구하는 마음이에요.
육진(六塵)에 물드는 바가 없다. 이게 구하는 마음이에요.
무상을 봤기 때문에 구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지요. 우리는 무상인줄만 아니까 야~ 좋다.
그냥 홀딱 반하는 거죠.
요새는 감성의 시대라 해가지고요. 예쁜거에 정신 못차려요. 예쁜 귀신에 홀려가지고,
예쁘다면 돈도 안 아끼고요, 이 칼라 디자인 여기에 다 속아버리는 거에요.
내용은 다 똑 같은데 어떤 색깔이냐 어떤 디자인이냐 그래가지고 돈이 아무리 비싸도 그 상관 안하고
막 삽니다. 그거 이상해요. 그래 이 사람들을 자꾸만 예쁘게 만들려고 이 안 예쁜 사람들은 값이 안 나가요. 그걸 감성시대라 합니다.
그래 노인들께서도 값 나갈려면 칼라 디자인을 잘 챙겨서 그래 밖에 나가시면
상관없어요, 칼라 좋고 디자인 좋으면은요 뭐 젊은 사람도 막 따라옵니다.
이게 이제 감성시대라는 거에요. 근데 거 허망하고 무상한 거에요. 그래서 이 덧 없다.
그거 아니라 형상이 없다. 형상에 형상이 없다.
그러니까 구하는 마음이 업죠. 무주죠.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묘용이 나와요.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방편과 무량공덕이 전부 반야 묘용입니다.
그러니까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이런게 전부 부처님의 묘용이거든요. 이렇게
되는 상태를 ‘각혜상조’라 합니다. 그게 성불이에요. 이게.
근데 누가 이렇게 되냐. 다 되죠. 안 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만 안 할 뿐이다!
그래요, 누구나 다 될 수 잇는데 아무나 되는게 아니에요.
하는 사람은 되는데 안 하는 사람은 안 되거든요.
그래 하고 안 하고 차이일 뿐이지 할 자격은 다 있는 거지요.
그래 지경, 간경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끝으로 正受法門(정수법문)이 있는데, 이걸 들려드리겠습니다.
받을 수자는 볼 관자와 같아서 ‘바르게 본다.’로 풀이됩니다.
정관을 정수라 하거든요.
통도사 경봉 큰 스님께서 정수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선방도 正受寶閣(정수보각)이라 이렇게 지셨어요.
이 정수법문은 다른데 있는데 아니고 종범 정수법문입니다.(하하하)
거 인제 뭐냐?
法法無性 法法淸淨(법법무성 법법청정)
법법이 본성이 없어요. 그래서 법법이 청정이라.
念念無念 念念解脫(염염무념 염염해탈)
생각 생각에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염염이 해탈입니다.
晝夜無別 夢覺一如(주야무별 몽교일여)
밤이나 낮이나 다른게 없고, 꿈을 꿀 때나 꿈을 깰 때나 한결 같다.
見聞覺知 正受自在(견문각지 정수자재)
그러니까 견문각지에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고 판단할 때에 정수자재하라.
바르게 딱 보고 메이지 말고 빠지지 말고 자유자재하라.
이게 이제 정수법문입니다.
甘露法門 歡喜奉行. 南無觀世音菩薩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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