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스크랩] 붓다의 마음 - 선 - 연기실상

수선님 2018. 11. 18. 11:50

붓다의 마음 - 선 - 연기실상

 

부처님의 가르침은 苦를 해결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 苦를 해결한 자를 깨달은 자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자를 인격의 완성자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교법은 心法입니다.
苦를 느끼는 상태에서부터 인격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苦를 느꼈고,
그 마음이 苦라고 여겼던 것에서 해결되어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이 때 마음 아닌 다른 요소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그 마음이
주체적으로 작용해서 있던 그 자리에서 자각하여 자타의 고를 부르는 습기가
바뀌어 한량없는 자비심 바탕에서 피염심 없는 상생의 지혜를 내는 성자 된 성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實修에서는 단편적인 알음알이만이 아닌 궁극의 이치를 心體得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계는 한송이 꽃입니다. 우주 만법은 일심이 지은 것으로 서로 상즉 상입하여

중중무진 연기하여 이루어진 인드라망으로 일체가 동체입니다.
우주 만물이 모두 여러 인연의 작용인 연기의 산물일 뿐 자체의 고정
불변한 실체가 없어서 緣起卽空 無我 無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대로의 우주만법의 실상, 존재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一切衆生實有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체중생의

차별적인 모습 그대로 평등하다는 존재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頓悟에서 頓의 의미도 본래 불성이 지금 바로 이 곳에 여여하고 확연히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이치를 바르게

알고 믿어 닦아 가는 선을 돈오선, 최상승선이라고 합니다.

중생즉불 번뇌즉보리 무명즉진여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관념으로 만법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업식과 환경 그리고 지금까지 익힌 지식에 기반하여 자기 나름대로 법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식 작용 자체가 일심진여의 작용들입니다.
별도로 진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고 자타의 고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연기법에서도 최상승선에서도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 선악, 시비 등을 본래 분별할 것이 없고, 일체 중생을
모두 긍정하고 포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중생이 업을 짓고 고를 짓는 것도 일심 진여의 작용입니다.
자타에게 이롭지 못한 연기작용을 하므로 중생이라고 이름할 뿐입니다.

중생즉불임을 깨쳐 고를 느끼지 않는 것도 일심 진여의 작용입니다.
자타에게 이로운 상생의 연기작용을 하므로 부처라 이름할 뿐입니다.

 

다른 중생이 낸 미망(파랑)에 자신의 분별심(파랑)으로 상대하여
이미 일어난 파랑을 더 큰 파도나 해일로 키우는 사람을 무명중생이라 이름합니다.

 

다른 중생이 낸 미망(파랑)에 자신의 분별심(파랑)을 내지 않고
이미 일어난 파랑을 잠재우는데 끝없이 지혜와 자비를 쓰는 사람을 부처라
이름합니다.

 

이러한 중생즉불의 이치를 이해하고 실천수행하는데에 사람마다 심천이 있습니다. 공부가 덜 된 사람은 미망중생의 식작용과 행도 진여의 작용이라는 이치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보고자 하나 我를 보존하고자 하는 뿌리 깊은
보호본능 때문에 두려움만 낼 뿐 마음이 사무치게 가닿지 못합니다.
(심경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실생활에 즉해서 알고 있는 이치를 시현하고자 하는 의지보다 세세생생
상에 끄달리면서 익혀온 의식 무의식에 깊이 박힌 습기의 힘이 더 강합니다.

 

구도역정에 오신 분들 가운데에 내 생각은 전적으로 옳고 다른 이의 생각은
틀리고, 내 이론이 절대 맞으니까 다른 사람들께 인지시켜주어야겠다, 나의
경지를 꼭 인정받아야겠다고 의도적으로 작정하고 글을 쓰시는 분들은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他가 모르니까 안타까워서 일깨워주고 싶다는 보살심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물론 가르치겠다는 상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글이 오가는

과정에서 我가 다치면 즉 감정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지면(감정이 다쳤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꺼려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相生의 이치인 불법을 논하면서도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동안 익혀왔던 相死의 습기가 같이 발동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분한 감정,

내 앎이나 깨침의 수승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에 대해 은근히 무시하는 말투를 사용하여 상대의 의견을 폄하하고 상대의 자존심을 눌러버리는 습기 등등이

쓰고 있는 글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고 상대방에게 느낌으로 확실히 전달됩니다.

바로 즉해 있는 실생활이 아닌 되돌아 점검해 볼 여유가 있는 글로써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에서마저 습기의 관성대로 진행되어 가고 맙니다.

 

상대방 또한 자신이 인식하는 한도 내에서 습기를 자제하면서 글을 쓰려 하나
자기의 안목 밖의 습기는 자제하지 못하여 드러나게 되고, 자신의 습기보다는
상대방의 습기가 더 잘 보이므로 상황이 가열되면 될수록 계속 확대 재생산되게
됩니다.  물론 이런 행동에 대한 명분은 자비심의 발로입니다. 처음 시작이
자비심의 발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작할 때부터 이치에 대해 자신의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나 자신이 모르고 있던 습기가 글에 묻어났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론 중간에 자극 받아 일어난 분심 등은 상대의 자극 때문이라고 상대 탓만 하고서 자기 합리화 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론체계를 어느 정도 법리에 맞게 세웠다고 할만한 사람이더라도
분별하는 습기와 강한 아상을 내려놓지 못하면 자신이 백 번 천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맞다는 그 한 생각에 걸려서 자기 나름의 잣대로 분별심을 내어
맞다 틀리다, 正과 邪를 규정하고, 정작 자신은 단지 습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갈등을 조장하게 되면서, 자신이 펼친 이론성과는 정반대의 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다른 누구 아닌 자기 자신의 아상과 습기가 자신이 많은 시간 공들여 세운 이론체계의 빛을 바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의견을 개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아상과 습기가
자신의 이론체계에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한 발 내딛어 수행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접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만 것이지요.

 

이러한 識의 흐름과 분별로써 치는 습기가 얼마나 自他를 번거롭게 하고
이롭지 못한 연기작용을 내는지 제대로 알면, 자신의 분별하는 습기와 아상을
내려놓는 수행에 결정적인 마음을 내서 사무치게 매진하게 됩니다.
 
중생즉불이라는 궁극의 이치를 체득했다함은 무명중생의 연기작용을 보면서
틀렸다 삿되다 등의 분별심을 내지 아니하고, 피염심(疲厭心)없는 상생의 지혜와
자비심으로써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떠한 관념에도 걸림이 없고, 어떤 상황 경계에서도 습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내는 禪者이며, 부처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심과 덕을 禪이라 합니다.

 

 

                                                             2004.      高松

출처 : 좋은 마음
글쓴이 : 상락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