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산 선회(夾山善會:805~881)스님이 처음 경구(京口) 죽림사(竹林寺)의 주지로 있을 무렵 법좌에 오르니, 한 스님이 물었다.
“법신(法身)이란 무엇입니까?”
“법신이란 모습[相]이 없는 것이다.
“법안(法眼)이란 무엇입니까?”
“법안이란 티(瑕)가 없는 것이다.”
당시 선회스님은 도오 원지(道吾圓智:769~835)스님이 대중 가운데서 웃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법좌에서 내려와 물었다.
“스님은 지금 무슨 일을 두고 웃으십니까?”
“그대가 행각길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찾지 못하기에 웃네.”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설법할 줄 모르네.
수주(秀州) 화정현(華停縣)에 뱃사공 스님이 계시니 그곳으로 찾아가 보는게 좋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선회스님은 대중을 해산시키고 뱃사공스님(船子德誠)을 찾아가니, 뱃사공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요사이 어느 절에 머물렀는가?”
“절이란 머물 수 없는 곳이고, 머문다면 그것은 절이 아닙니다.”
“절이 아닌 경계는 어떠하던가?”
“이는 눈 앞에 있는 법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어디서 배웠는가?”
“귀와 눈이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 말에 뱃사공스님은 웃으면서 다시 말하였다.
“한마디 맞는 말은 만겁의 쇠말뚝! [一句合頭語 萬劫繫驢橛]”
아! 오늘날 총림에서 스승이 제자를 받아들일 때,
으레껏 이해로 깨침[悟解]를 절대 금하며,
현묘한 도리를 부정하고 오로지 ‘곧장 묻고 바로 답하는 것[直問直答]’ 만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무(無)’라면 시종 ‘무’만을 말하고 ‘유(有)’라면 시종 ‘유’만을 말하여 터럭끝만큼만 틀려도 이를 ‘미치광이 같은 견해[狂解]’라고 하니,
가령 뱃사공스님이 이 말을 듣는다면 ‘나귀를 매는 만겁의 쇠말뚝...’이라는 말로 그치겠는가?
생각해 본다면 이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의문[善疑]마저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올바른 의문을 가지는 자라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33조사들이 법을 전수하고 도를 깨친 이야기들이 기록에 다 있으니,
이는 모두 이치로 탐구할 수 있고 지혜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독 강서(江西)와 석두(石頭) 이하 많은 대종사(大宗師)들은 근기와 상황에 따라 지도하였다.
그들의 문답을 살펴보면 깜깜하여 납자들을 앉아서 졸게 하니 그들의 도가 많은 조사들과 다르기 때문일까?
그런것이 아니고 똑같이 조사의 법을 계승했다면 그들의 말이 이렇게 다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임제(臨濟)스님께서는,
“불법을 거론할 때는 반드시 일구(一句)가운데 삼현(三玄)을 갖춰야 하고,
일현(一玄)가운데 삼요(三要)를 갖춰야 한다”고 하셨으니,
여기에서 현(玄)도 있고 요(要)도 있는 까닭은 이 점을 밝힌 것임을 알겠다.
그러나 모르는 자는 이것을 선문에서 세우는 임시방편의 말이라 하니,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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